Who does the land document of the fantasy Demon Castle belong to? RAW novel - Chapter 145
제145화
레벨라는 마족이 아니라 인간으로 죽었다.
베이올라는 한참이나 레벨라의 시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스트레킬은 베이올라의 옆에서 둘의 이별을 지켜보았다.
“다 울었냐?”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스트레킬이 검을 휘둘렀다.
스트레킬의 검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혔다.
처음 보는 남자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스트레킬의 검을 엄지와 검지로 붙잡고 있었다.
“이건 내가 가져간다. 마족의 힘이 깃든 시신을 그냥 두면 성가신 일이 생길 수도 있거든.”
스트레킬은 이상성을 알아차렸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발 속에서 남자는 전혀 젖지 않았다.
투명한 막이 있는 것처럼 빗방울이 남자를 피해가고 있었다.
“이거? 옷이 젖으면 찝찝하잖아?”
“당신은 누구십니까?”
“도둑.”
스트레킬이 눈을 크게 떴고, 베이올라가 상체를 들었다.
“장례 따로 치를 거야?”
도둑이 베이올라를 보았다. 베이올라는 몸이 굳었다.
도둑은 극악무도한 범죄자다. 어설픈 소문 같은 게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도둑이 직접 쌓은 범죄의 역사가 세계에 남아 있다.
도둑은 전혀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맑은 눈에서는 현자와 같은 지혜마저 느껴졌다.
상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도둑의 눈길 그 자체에 베이올라는 움직이지 못했다.
“왜 대답을 안 해. 장례식 하냐?”
베이올라는 고개를 저어 대답을 대신했다.
레벨라는 이미 수배서까지 도는 범죄자다. 장례식을 했다간 또 성가신 일이 생긴다.
시체를 훔쳐 용병 길드에 넘긴다거나 하는 일들.
금화 50개가 넘는 금액이라면 무덤에 묻힌 뼛가루라도 가져갈 인간이 세상에 잔뜩 있다.
시신을 처리할 방법은 생각해둔 게 없다. 레벨라가 죽는다는 상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후의 일은 지금부터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정식으로 장례식 같은 건 하면 안 된다.
“그럼 내가 가져가도 되지?”
“아니….”
“네가 안 된다고 하면, 뭐가 달라지고?”
베이올라가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도둑, 스트레킬의 검을 손가락으로 잡는 인간이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도둑의 뜻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하다.
무력감과 비참함에 베이올라는 몸을 떨었다.
베이올라는 무력함에 익숙하다. 황궁에서 그녀는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고, 서부에서는 반쯤 짐짝이었다.
하지만 선택을 내릴 수 없는 비참함은 처음이었다.
베이올라는 무력했지만, 그래도 선택은 내릴 수 있었다. 아침을 먹을지 말지, 서부에 갈지 가지 않을지, 마르할과 동행할지 동행하지 않을지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도둑 앞에선 선택조차 무의미하다. 베이올라가 무슨 선택을 하든 도둑은 선택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다.
도둑이 하고자 하면, 베이올라는 숨 쉬는 것조차 그에게 허락받아야 한다.
이미 허락받고 있다고 해도 좋다.
도둑이 레벨라의 시신을 들어 어깨에 멨다.
“그 분위기는 뭐냐. 이러면 내가 쓰레기 같잖아. 나는 좋은 일 하는 거다? 서부에 마족이 재림하는 걸 막고 있다고.”
그런 말을 듣는다 한들, 베이올라의 기분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제자한테 잔소리 듣기 싫어서 뭐 하는 짓인지. 눈 크게 뜨고 봐라. 두 번은 못 보는 거니까.”
도둑이 취객처럼 우왕좌왕 걸었다. 발자국이 흙에 선명하게 남았다. 도둑의 발자국이 남은 자리로는 빗물도 침범하지 못했다.
도둑의 몸이 점차 투명해졌다.
“귀신 걸음이란 거다.”
열 걸음을 걷고, 열한 번째 걸음이 땅에 닿기 직전 도둑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름처럼 귀신 같은 걸음이었다.
“말을 가져오지. 저걸 곱씹고 있어라. 도둑의 말대로 저걸 봤다는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으니까.”
스트레킬은 성인에게 상처를 치료받은 역사가 있다. 스트레킬이 가진 회복 능력 일부는 성인에게 치료받았다는 역사에서 나온다.
그와 비슷하게 도둑의, 가늠하기 힘든 수준의 기술을 보았다는 역사는 수련과 성장에, 나아가 후일 얻을 신비에도 영향을 준다.
허나 스트레킬이 말을 꺼낸 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잠시 시간이 필요하겠지.’
레벨라를 제 손으로 죽였고, 시신을 빼앗기기까지 한 베이올라가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전신 갑옷이 찰칵이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베이올라는 무릎 꿇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질척한 흙이 얼굴과 머리카락을 더럽힌다.
스트레킬이 돌아오기까지 한참이나 베이올라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꽉 쥔 손에서 흐른 피가 빗물과 섞여 땅으로 스며들었다.
* * *
귀신 걸음으로 이동한 도둑은 마르할 앞에 나타났다.
마르할은 말에서 내려 땅에 앉아 있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무릎 위에 팔을 올려둔 마르할의 손에는 희미한 바람이 잡혀 있다.
도둑이 레벨라의 시신을 땅에 놓았다.
“진짜 할 거냐?”
“해야죠. 마족이 다시 나타난 이상 확인해둬야 하는 일이에요.”
“확인해서 뭘 하게?”
“다양하게 쓸 수 있죠. 예를 들어, 황족을 견제한다거나. 아르고도 알잖아요?”
도둑이 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르고는 아무것도 몰라염. 에베베.”
“그걸로 여자나 꼬셔보지 그래요?”
아르고가 몸서리쳤다. 회춘하기 전에는 이러면 마르할이 흉터 잔뜩 난 아저씨가 뭐 하는 짓이냐고 진심으로 정색했다.
하지만 얼굴이 젊어지니 자신이 정색하게 되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징그럽다고 해라. 그런데 그 힘을 쓰면 마르랑 율란이 해둔 봉인도 흔들리지 않냐?”
“아르고가 있잖아요? 자물쇠를 만드는 방법도 아르고한테서 배웠는데요?”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나는 구경이나 하련다.”
도둑이 마르할의 정면에 앉았다.
마르할은 눈을 감았다.
마르할 무느두스의 역사는 세 개의 큰 갈래로 구성되어 있다.
스스로 쌓은 마르할 무느두스라는 인간의 역사.
마왕 소일라 므에실리고에게 받은 마족과 마왕의 역사.
마르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바체아 제국과 서부의 역사.
마르할은 자신의 역사와 바체아 제국의 역사로 마족의 역사를 틀어막고 있다.
마르할은 마족의 역사를 막고 있는 봉인을 살짝 풀었다.
마르할의 원래 역량으로는 봉인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토지의 역사를 빌렸다.
바체아 제국의 영향력이 닿았던 땅이며, 마족이 득실거리던 땅이며, 현재는 마르할이 주인인 토지.
토지가 가진 역사가 마르할에게 힘을 빌려주었다.
레벨라의 시신은 인간의 시신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마족의 힘이 남아 있다.
도둑이 레벨라의 시신이 위험하다고 한 건 빈말이 아니다.
마르할의 손에 희미하게 머물던 바람이 형태를 이뤘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오동나무 관이 마르할의 손에 잡혔다.
“그게 오동나무 관이냐? 마왕이 쓸 때도 형태는 남아 있더니.”
“오염된 외형까지 물려받기는 싫어서요. 그리고 이게 더 휴대하기도 편해요.”
바람으로 이루어진 오동나무 관에는 색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대기 중에 떠도는 먼지들의 색?
마족의 검은 안개가 오동나무 관에 깃들었다. 오동나무 관의 색이 변했다.
무에서 칠흑으로.
그렇게 하나의 관이 만들어졌다.
오동나무 관이 마족의 안개에 침식당해 만들어진 관.
마족들의 제왕이 쓰는 관.
마왕의 관.
마족은 대륙을, 세상을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은 마족이 가진 진정한 힘을 모른다. 무수한 사람이 죽은 동부의 전쟁도 마족이 가진 힘의 일부다.
서부에는 더욱 무시무시한 마족들이 잔뜩 있었다.
하늘을 가르는 용사가 베지 못하고, 땅을 가르는 마법사의 마법이 통하지 않고, 세상에 훔치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는 도둑의 손기술이 통하지 않는, 그런 마족들이 있었다.
마족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았던 건 한 사람의 의지다.
그저 싸움이 싫었던 한 인간의 고귀하고 숭고한 의지.
마왕이 전쟁을 바라지 않았기에 홀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힘을 가진 마족들은 조용히 서부 구석에 머물렀다.
마왕의 의지는 모든 마족에게… 모든 마족의 역사에 영향을 준다.
바람이 불었다. 마르할과 레벨라를, 그리고 아르고를 감싸는 바람의 막이 만들어졌다.
쏴아아. 비가 바람의 막을 때리지만, 소리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비바람 몰아치는 하늘 아래 마르할과 그 주변만이 고요했다.
마왕의 관을 든 마르할은 레벨라 안에 있는 마족의 역사에 명했다.
-깨어나라.
레벨라의 왼쪽 가슴에는 구멍이 있었다. 베이올라의 검이 관통하며 생긴 흔적이다.
상처에서 새살이 돋고, 창백해진 피부색이 돌아온다.
그리고 심장이 뛰었다.
마르할과 아르고는 멈췄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율란이 알면 한 소리 하겠어.”
세상 사람들은 성인은 죽은 자도 되살린다 말한다.
그리고 진짜 율란은 죽은 생명을 되살릴 수 있다.
마왕이 죽고, 인외의 초인 네 사람이 마르할에게 기술과 역사를 전수하던 나날이었다.
수련하던 건 마르할만이 아니었다.
마르도, 아르고도, 율란도, 바스타조차 진짜 인간을 벗어난 힘을 제어하는 법을 익혔다.
거처와 가까운 장소에서 율란은 죽은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당시의 율란은 자기 힘의 한계를 몰랐다.
율란은 죽은 고양이에게 기적을 사용했고, 고양이는 되살아났다.
죽음이라는 비가역 현상은 율란 앞에서 가역 현상이 되었다.
노화를 되돌리는 게 가능함은 율란과 아르고가 몸으로 확인했다.
늙으면 젊어진다.
죽으면 되살아난다.
불로불사.
영원의 가능성을 본 율란은 그 이후로 한 번도 부활의 기적을 사용하지 않았다.
바스타도 마르도 마르할도, 아르고조차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가사 상태였으니 봐줄걸요?”
“…죽은 게 아니었다고?”
“레벨라는 마족이에요.”
“아, 그랬지.”
마족은 곰팡이와 같다. 눈에 보이는 부분에 곰팡이가 피었다면, 속은 이미 몽땅 썩었다. 외형이 인간과 같다고 속까지 인간은 아니다.
그리고 아르고 앞에 있는 사람은 마왕의 의지를 이어받은 남자다.
마족 하나의 생사를 주무르는 건 간단하다.
“…제가 마족이면, 마족을 되살리는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눈을 뜬 레벨라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추적 기사 교육으로 배운 건 당황하지 않는 방법과 작은 단서를 조합해 정답을 찾는 방법이다.
모든 정황을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저 남자에게는 들어야 할 게 많다.
마르할은 레벨라의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마르할이 질문에 답했을 때, 레벨라는 모든 걸 납득했다.
“마르할 무느두스.”
무느두스. 바체아 제국 황족의 성.
레벨라의 기억에 바체아 제국 황족 중 마르할이라는 이름의 인간은 없었다.
그럴 수 있다. 귀족이 사생아를 숨기는 게 어제오늘 일인가.
“아, 착각하는 것 같으니 알려줄게요. 전 딱히 사생아 같은 게 아니에요. 바체아 제국의 둘째 황자. 그게 제 직위였죠.”
“저는 그런 이름을 모릅니다.”
“없앴으니까요. 전 세계의 기록에서.”
“그런 일이….”
“저기 세상을 훔치는 도둑이 있네요.”
레벨라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흥미롭게 마르할과 레벨라를 관찰하고 있던 도둑을 발견했다.
도둑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둑. 다른 인사는 필요 없지?”
“정말로… 기록을 훔쳤다고요?”
“안 그러면 활동을 못 하니까요. 사정상 가명은 쓰면 안 돼요. 잠깐 거짓말하는 거라면 몰라도.”
바체아 제국의 역사와 마족의 역사는 마르할 무느두스라는 이름과도 깊이 엮여 있다.
마르할의 이름을 바꿔선 안 된다. 하지만 마르할이라는 이름으로 서부에서 활동하면 금방 권력자들의 감시망에 들킨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마르할은 마르할 무느두스라는 이름을 세상에서 없앴다.
“마족은 바체아 제국 제도 근처에서 처음 나타났다고 전해집니다.”
마족은 어디에서 나타났는가?
마족의 세력 확장 속도가 너무 빨라 그 질문의 정확한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바체아 제국을 포함한 인근 국가가 이미 검은 안개로 뒤덮인 뒤였다.
하지만 마족 침공이 시작된 지역을 유추하는 일은 가능하다.
“므에트 제국 황제는 마족을 다룹니다. 정확히는 유렐이 다루는 거지만, 황제가 그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신비와 역사로는 세계 최고로 꼽히는 바체아 제국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마족 같은 위험한 물건을 만들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흥미롭네요. 계속해봐요.”
“서부에 마족을 풀어 세계의 반을 멸망시킨 건 므에트 제국 사람입니다. 맞습니까?”
“맞다고 하면요?”
바람처럼 나아간 레벨라가 마르할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르할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오동나무 관이 빛나자 레벨라의 몸이 돌처럼 굳었고, 강렬한 바람이 마르할을 감쌌다.
“그게 당신의 진짜 힘이군요…!”
“그렇게 오해하면 곤란해요. 이건 정말 한정적인 상황에서나 쓸 수 있거든요.”
“당신은… 당신은….”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묻고 싶은 말도 많다. 머리에 말이 너무 많아 말들이 입으로 나오지 않고 머리를 헤맨다.
레벨라는 신중히 단어를 골랐다. 그리고 마르할에게 물었다.
“제가 죽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군요. 맞습니까?”
“시간상 10분 정도요?”
“모든 걸 보고 있었습니까? 제가 베이올라와 싸우는 것, 그리고 베이올라가 저를 죽이는 것. 그것들 전부?”
마르할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벨라는 여전히 마르할의 목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 안에 있는 마족의 역사는 레벨라가 움직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왜 도와주지 않은 겁니까! 당신이라면! 당신이라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불가. 마족을 통제하려면 이걸 꺼내야 하는데, 므에트 제국 황족 앞에서 이걸 꺼내라고요? 고대 제국어랑 바체아 제국 문화에 능통한 베이 앞에서요?”
마르할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린다. 아주 약간의 변화지만, 마족이 된 레벨라는 마왕의 기분에 민감했다.
레벨라의 눈가가 떨린다.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마르할은 바체아 제국 황족이고, 바체아 제국은 므에트 제국에게 멸망했다.
레벨라는 유렐이 마족을 이용한 실험을 하는 장면을 봤다. 그녀가 실험의 피해자다.
태자도 못 된 황자가 500년 역사를 가진 제국을 멸망시키는 계책을 짜낼 수 있나? 15년 전이면 유렐은 성인도 아니었다.
유렐이 천재라지만, 바체아 제국에는 그보다 더한 천재가 즐비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5년 전에 제국 하나를 무너뜨릴 재능과 재치를 가지고 있었다면, 황제가 황태자 선정에 고민할 이유가 없다.
돌출되는 결론은 하나다.
바체아 제국을 멸망시킨 건 일반적인 ‘므에트 제국 사람’이 아니다. 황제다. 적어도 황제에게 직접 명령을 듣는 최측근이다.
마르할이 그걸 모를까?
말 한 마디로 사람의 출생과 인생을 알아맞히는 사람이?
레벨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저희를 거둔 겁니까? 어째서… 어떻게 저희를 보며 웃는 거죠?”
“스트레킬도 그렇고, 왜 다들 저를 성인 취급하는지 모르겠어요.”
“네가 성인? 그 성질머리로?”
“아르고, 닥쳐요.”
“네네, 우리 길잡이가 닥치라면 닥쳐야죠.”
마르할이 목을 긁적였다.
저 인간의 사람 성질 긁는 솜씨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 같다. 숨만 쉬어도 역사가 더해지는 게 원인인가.
“몇 번이나 말했듯이, 저 제국 싫어해요. 제국 황족도 싫어하고요.”
“그러면, 왜?”
“사람은 비슷한 처지인 사람을 보면서 위안을 느끼곤 하잖아요? 저열한 희열에 가깝지만요. 저도 그래요.”
마르할은 능청스러운 사람이다. 모든 행동이 계산적이긴 하지만, 그건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계산이다.
마르할과 지낸 시간은 짧지만, 레벨라는 한 번도 마르할이 짜증 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마르할은 한결같이 친절했고, 능청맞았고, 천연덕스러웠다.
그 마르할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기 힘든 말에 레벨라는 잠깐 사고가 멈췄다.
“그러니까… 베이올라가 그 대상이라는…?”
“고통받는 베이올라를 보면, 과거의 저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지긴 해요. 마침 원수의 자식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베이올라를 돕겠다는 건 진심이에요. 그래야 정당한 방법으로 목표를 이룰 가능성이 커지거든요.”
레벨라가 광분했다.
속박에 저항하려고 레벨라는 온몸을 비틀었다. 뼈와 관절이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졌다. 그러나 상처들은 금세 아물었다.
그녀의 몸은 마르할에게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레벨라가 지쳐 쓰러졌다. 그러나 광기 서린 시선은 한층 빛을 더해 마르할을 향했다.
“레벨라, 서부로 돌아갔을 때, 성목을 본 적 있나요? 말하지 않아도 돼요. 표정으로 알겠어요.”
앉아 있던 마르할이 일어났다. 마르할의 손에 있던 흑색의 관도 사라졌다.
날씨를 다룬다는 바체아 제국 황제의 힘인지, 아니면 그냥 자연현상인지 비가 멈췄다.
작아진 먹구름 사이로 해가 나타났다.
“외형은 인간이지만, 레벨라의 본질은 여전히 마족이에요. 보통 생물들 사이에 살지는 못해요. 서부로 가봐요. 영물, 수행자, 특별한 피를 이은 일족. 마족의 공세에도 버텨낸 그들과 함께라면 생활할 수 있어요. 살아남은 마족이 서부에 더 있을지도 모르고요. 아르고, 레벨라를 서부로 데려다줘요.”
“내가 왜?”
“제 부탁이라는 명분이 있으면, 서부를 구경할 수 있는데요? 5년 사이 서부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해줘야 진짜 변명거리가 생기지.”
애매한 말에 혹했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듣는다.
아르고가 마르할을 놀리듯, 아르고도 마르할에게 당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르고가 레벨라의 목덜미를 잡고 그녀를 한 손으로 들었다.
“명분도 챙겼겠다. 오랜만에 나들이나 가볼까.”
“잠깐… 아직 할 말이…!”
레벨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르고가 사라졌다.
“나도 가야지.”
마르할은 품에서 하모니카를 꺼냈다. 마르할이 하모니카를 불자 저 멀리서 혼자 놀고 있던 엘리제가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