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does the land document of the fantasy Demon Castle belong to? RAW novel - Chapter 24
제24화
성인과 마법사는 일행 중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역사를 두고 가장 첨예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용사와 쓸 수만 있으면 뭐든 괜찮다는 도둑과 달리 두 사람은 역사를, 신비를, 힘을 학문으로 대했다.
둘은 서부 깊은 곳에서도 언쟁을 벌이곤 했고, 여유가 되면 마르할을 옆에 앉혀두곤 했다.
생각해 보면 그건 모두 마르할을 향한 배려였다.
“역사는 생물이야. 움직이지 않는 생물은 시체고. 왜 이 단순한 이치를 이해 못 해?”
“제가 할 말입니다. 역사는 고정된 돌과 같아 한 번 쌓은 역사는 굳이 비틀 필요가 없어요. 당신의 그 기행들도요.”
“여러 마법을 쓰려면 그에 맞는 역사를 깎아내야 해. 교회도 그러잖아.”
“기적은 한 번 익히면 죽을 때까지 몸에 남습니다.”
“그건 성황국이라는 거대한 토대가 있기 때문이지.”
“성황국을 벗어나도 상처를 치유하는 신비를 가진 사람은 있습니다.”
“하지만 재능을 꽃피우기도 전에 전부 성기사랑 이단심문관에게 죽지. 그들의 신비가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한 번이라도 관찰한 적 있어?”
성인이 침묵했다. 성황국과 교황청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 논쟁은 대개 그의 패배였다.
“기적이 아닌 신비에 대해 성황국과 교황청 인간은 논할 자격이 없어. 인정하지?”
“…인정하겠습니다.”
논쟁에서 이긴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정말로 만족했을 때만 나오는 반응이었다.
“역사는 움직이는 거야. 쌓인 업이 가지는 힘을 분출할 방식과 방향을 찾는 게 마법이고. 또 그게 업을 가진 사람의 역할이지.”
* * *
두 사람이 탄 말이 목소리가 안 들릴 거리까지 멀어졌다. 레벨라가 베이올라의 팔을 잡았다.
“안 됩니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스트레킬의 말대로, 저희가 가봤자 방해만 됩니다. 경험 많고 움직임이 뛰어난 두 사람이라면, 정말 시간을 끌고 탈출까지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가 붙잡히면 모든 게 끝이죠.”
“난 갈래.”
“마린, 당신은 병신입니까? 그러니 마르할의 도움 없이는 땅도 못 얻은 거겠죠.”
“다시 말해봐.”
마린이 레벨라의 멱살을 잡았다.
스트레킬과 마르할 앞에서는 얌전히 있지만, 마린은 빈말로도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다.
레벨라는 마린의 손목 안쪽을 엄지로 눌렀다. 손에 힘이 빠진 순간 손목을 낚아채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마린의 몸이 땅에 메다꽂혔다.
“큭…!”
“일반 남성은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겠죠. 하지만 당신의 힘은 기사 평균에도 못 미칩니다. 그리고 저는 기사죠.”
마린의 눈에 붉은 기운이 서렸다. 레벨라는 물처럼 부드럽게 붙잡고 있던 팔을 꺾어 그녀를 재빨리 제압했다.
마린도 자기가 무얼 당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기사라면 누구나 배우는 가장 기초적인 호신술입니다. 같은 기술을 익힌 사람이라면 이리 쉽게 당해주지도 않습니다. 신체 능력과 검의 힘에만 의존하며 살았던 당신은 어떻죠?”
“놔.”
마린이 이를 갈았다. 그녀의 눈이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린이 몸부림쳤다. 팔에서 위험한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레벨라는 온 힘을 다해 마린을 억눌렀다.
“무기가 없는 저는 다른 황족의 호위 기사 평균도 못 됩니다. 그런 사람조차 이기지 못하면서, 더한 괴물이 있는 저곳으로 가서 무얼 하려고요?”
“놓으라고! 놔! 이거 풀어! 풀어어어!”
“…광전사와 대화를 하려고 했던 게 잘못이지.”
레벨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날뛰는 마린의 뒤통수를 향해 머리를 내리찍었다.
쿵! 레벨라 머리와 부딪히며 한 번, 땅에 부딪히며 두 번 충격을 받은 마린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레벨라는 끈을 이용해 기절한 마린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잠깐 사이 땀범벅이 된 레벨라가 일어났다. 그녀는 땀을 훔치며 베이올라에게 다가갔다.
베이올라가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레벨라가 진짜 싸우는 모습을 본 적 없다.
“황녀님도 같은 의견입니까?”
“…나 때문에 죽으러 가는 사람을 무시해도 될까?”
“하아….”
레벨라가 한숨을 쉬었다.
베이올라에게는 재능이 있다. 피 공포증 탓에 활용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순수한 육체 능력만 따지면 베이올라의 몸은 10년을 넘게 단련한 자신보다 튼튼하고, 유연하고, 강하다.
검의 천재라 불리는 이마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고대 제국어를 배울 정도라면 머리도 나쁘지 않다. 그녀의 글 선생은 서부가 사라진 지금 세계 최고의 고대 제국어 전문가이며, 베이올라는 그런 사람에게서 학문으로 인정받았다.
그 모든 재능이 단 하나의 병 때문에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레벨라가 베이올라를 고른 건 그 때문이었다.
병만, 피 공포증만 극복하면 그녀는 단번에 황위 바로 아래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온실 속에서 큰 약한 화초일 뿐이다.
“황녀님, 잘 보십시오.”
레벨라는 베이올라를 향해 팔을 들었다. 그리고 검으로 자신의 팔을 그어 피를 냈다.
촤악! 피가 그녀의 얼굴까지 튀었고, 베이올라는 그 자리에서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레벨라는 베이올라도 마린처럼 손발을 묶은 뒤 두 사람을 말에 태웠다. 그리고 끈으로 두 사람을 고정해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성인보다 튼튼한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 이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도 말에 올라타기 위해 고삐를 잡은 그녀의 손이 움찔 떨렸다.
‘움직이다가 신경을 다쳤나.’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혼자 말 두 마리를 끌어야 하는데, 이러면 조금 힘들어진다.
레벨라는 한 팔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린과 베이올라를 묶어둔 말의 고삐를 피가 흐르는 팔에 묶었다.
“가자!”
두 마리 말이 동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마르할과 스트레킬은 성벽이 무너진 자리까지 온 뒤 말에서 내렸다.
벌써 이쪽을 보는 시선이 있다. 아주 날카롭고, 또 은밀한 살의를 숨기고 있다. 오랜만에 맛보는 전장의 공기에 스트레킬의 몸이 흥분으로 반응했다.
스트레킬은 뒤를 확인했다. 두 마리 말이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달려가고 있었다.
말은 둘이지만, 말을 이끄는 사람은 하나였고, 말에 탄 사람은 셋이었다.
“조금 불안했지만, 호위는 호위군.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말했던 대로, 시간을 끌어야죠.”
“정말로? 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고?”
“그건 클리프가 어떻게 나올지에 달렸어요.”
“역시, 시간을 끈다는 건 다 헛소리였군.”
그럼 그렇지. 마르할이라는 남자가 그냥 죽을 자리를 찾아갈 리가 없었다.
“아주 헛소리는 아니죠.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따라올래요?”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도 없다. 그리고, 여기가 내 죽을 자리라는 생각은 안 드는군. 영웅의 직감이다.”
“전쟁 영웅의 직감이라. 그거 믿을 만하네요.”
마르할과 스트레킬은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부서진 잔해들은 허리 높이에서 모두 깨끗이 잘려 있다.
“돌을 베는 기사의 작품인가. 성벽을 베어버리면, 공성전에서는 성가시겠어.”
밤에 성벽 일부를 잘라내고 기사단이 침입하면, 어떤 요새도 하룻밤 사이 함락당할 것이다.
‘돌을 베는 기사. 일대일에서는 철을 베는 기사에게 못 미치지만, 전쟁터에서는 철을 베는 기사보다 성가신 능력일지도.’
둘은 도시 중앙으로 향했다. 도시 중앙에 꽂힌 깃발이 있기에 길을 헤맬 걱정은 없다.
도시 중앙에는 윗부분을 베어낸 돌덩이가 있었고, 한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게 철을 베는 기사.’
체격은 스트레킬과 비슷했고, 갑옷은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안에 두꺼운 가죽을 껴입은 정도.
그리고 허리춤에 있는 세 개의 검.
카반은 한쪽 구석에 부하들과 함께 있다. 오만하던 돌을 베는 기사도 철을 베는 기사 앞에서는 당당하지 못했다.
그 기사가 황제 직속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이유도 약간은 있을 것이다.
스트레킬은 클리프와 눈이 마주쳤다. 절대적인 자신감이 담긴 눈이다. 그의 몸에 휘도는 힘은 자신보다 몇 수는 위다.
철을 베는 기사는 몇 번 만나봤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투구를 가져올 걸 그랬군.’
표정 관리가 쉽지 않다. 부하에게 목을 베였을 때도 그립지 않았던 투구가 이제 와서야 그립기 시작했다.
“속았군. 상당한 강자는 맞지만, 저자는 철을 베는 기사가 아니다.”
클리프가 몸을 일으켰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태산이 움직이는 듯했다.
역사는 힘이다. 스트레킬은 클리프가 쌓은 역사의 편린을 보았다. 산처럼 거대하고 바다처럼 드넓은 전사의 업을 보았다.
“황녀는 어디 있지? 난 분명 황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베이올라는 도망쳤어요. 그녀는 아직 알아서는 안 되거든요.”
“무슨 헛소리냐?”
마르할이 클리프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산책을 나온 것처럼 가벼웠다.
‘여유? 아니, 뭔가 다르다. 기사가 검을 휘두르는 것 같은 자연스러움… 그래.’
당연함.
마르할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것처럼 클리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르할을 보며 클리프도 움직이지 못했다. 저자는 마법사다.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그러니 검을 뽑아야 한다.
진짜 신비 앞에서 기사의 검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법사는 죽여야 한다.
되뇌고 또 되뇌었지만, 몸은 돌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것처럼 그는 꼿꼿이 서서 다가오는 마르할을 응시했다.
카반이 침을 삼켰다. 그는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법사의 수작인가? 하지만 철을 베는 기사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 있다면, 그냥 싸웠으면 되는 일 아닌가.
그랬다면 그와 부하들은 손도 쓰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졌을 것이다.
마르할이 클리프를 지나쳤다. 그는 클리프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클리프가 몸을 돌렸다.
[황궁 근위 기사 클리프. 나를 내려다보느냐?]클리프는 심장이 떨어질 듯 놀랐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저 언어를 여기서 들어선 안 된다.
완벽한 발음의 고대 제국어는 이제 세상에 없다.
클리프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때, 그의 몸은 그에게 새겨진 역사에 따라 움직였다.
그는 황제를 배알한 가신처럼 마르할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카반도, 들개 기사단도, 스트레킬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했다.
“너… 너는 누구냐?”
“므에트 제국어가 완전히 몸에 익었나보구나. 네 뜻이 그러하다면, 나도 따라주마.”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어째서 완벽한 고대 제국어를 구사하는 거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클리프는 무릎을 꿇은 채 외쳤다.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체아 제국의 역사는 지엄하다. 황족 앞의 기사는 그들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죽었다니 섭섭하군. 여기 내가 있는데. 고개를 드는 것을 허락하마. 잘 봐라. 내 얼굴을.”
클리프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르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15년의 세월이 지났다. 시간 앞에 많은 부분이 변했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얼굴, 저 얼굴. 그가 제국에, 므에트 제국이 아닌 바체아 제국 황궁에서 근무할 때 본 얼굴이다.
“…황자?”
“그래, 나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았더냐.”
“있지. 있어. 있고말고….”
클리프는 이를 악물었다. 세 개의 검 중 하나를 잡고 뽑으며, 그대로 마르할을 향해 휘둘렀다.
검에 맞은 마르할은 옆으로 날아가 나무 잔해 사이에 처박혔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와 마르할의 모습을 숨겼다.
클리프가 일어섰다. 그는 무릎에 묻은 흙을 털며 마르할이 날아간 자리를 노려봤다.
철을 베는 일검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잘리지 않았다. 철보다 더한 무언가에 막혔다.
“황족은 황족이라 이건가.”
“그 태도, 사죄할 생각은 없다고 봐도 되는 걸까요?”
자욱한 먼지 사이로 마르할이 걸어 나왔다.
찢어진 이마에서 흐른 피가 눈가를 타고 흘렀고, 입에서도 피를 뱉었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다.
클리프의 마음 깊은 곳에서 불안이 피어났다. 저 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던 바체아 제국 황제가 떠오른다.
“사죄? 무슨 사죄를 말하는 거지?”
“그 많은 죄를 전부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 모를 수도 있으니 알려드릴게요. 하나, 지켜야 할 황족을 버리고 혼자 도망간 것. 둘, 황가를 배신했음에도 아직 그 검을 사용하는 것. 셋, 주인의 원수에게 충성하는 것.”
‘저에게 행한 무례는 빼드릴게요’라고 마르할은 말했다.
“바체아 제국은 약해서 멸망했다. 힘없는 자들에게 차릴 예의 따위 없다. 그게 설령 황족이라도.”
“약해서라뇨. 당신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요. 므에트 제국의 황녀가 가져온 예물에서 마족이 생겨나는 자리에.”
클리프가 사라졌다. 그런 착각이 드는 속도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다가갈 때와 비슷한 속도로 튕겨 나왔다.
바람이 마르할을 지켰다. 바람이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치며 하늘로 올라갔다.
마르할이 옆으로 손을 뻗자 그 손 위에서 바람이 형태를 이뤘다.
그것은 왕관이었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왕관.
왕관을 본 클리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체아 제국 황궁 근위 기사 클리프는 세간에 떠도는 바체아 제국에 대한 소문들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안다.
제국 황제는 비를 부르고 폭풍을 부린다. 황족이 품은 신비 하나하나는 그의 수십 년 노력을 비웃는 것이었고, 평생을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는 좌절했고, 그래서 그는 유렐을 따랐다.
인간은 원숭이다. 무기를 든 원숭이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역사에서 나오는 신비는 인간의 인지로는 한계를 가늠할 수 없다.
그의 눈앞에 있는 건 한 번 사라졌던 제국의 유물이었다. 비바람과 폭풍을 부르던 황제의 상징.
“황제의 오동나무 관! 그건 사라졌다! 바체아가 쌓은 역사는 무너졌단 말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데요?”
“그깟 속임수에 속을 줄 아느냐.”
“그러면 당신은 왜 움직이지 않죠? 본능은 이미 아는 것 같은데요.”
클리프가 검을 버렸다. 그는 세 자루의 검을 가지고 있다.
므에트 제국 황제에게 기사 서임을 받으며 얻은 므에트 제국의 검, 서부를 탈출하며 천이 넘는 마족을 베어낸 마족을 베는 검, 그리고 그가 바체아 제국 황궁 근위 기사가 되었을 때 바체아 제국 황제에게서 받은 바체아 제국의 검.
바체아 제국 근위 기사가 가진 검은 모두 유물이고, 검의 주인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한다.
그는 바체아 제국이 망하고 딱 두 번 이 검을 꺼냈다.
검은 안개에 뒤덮인 바체아 제국을 탈출하며 한 번, 그리고 므에트 제국 황제 앞에서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한 번.
그가 이 검을 뽑는 건, 바체아 제국이 망한 이후 세 번째였다.
바람을 쥔 마르할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클리프가 뽑은 검은 마린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이 바체아 제국 황실의 물건이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던 자리는 희미한 흔적만이 남았다.
마린은 이해할 수 있다. 아이가 바체아 제국 황실의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그녀는 죽었을 테니까.
아이의 몸으로 어른도 이길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은 그녀에게 목숨과 같았을 테니 버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클리프는 아니다. 그는 바체아 제국의 검 없이도 이미 철을 베는 기사다.
몸만 멀쩡하다면 검 없이도 얼마든지 살길을 찾을 수 있다.
황실을 배신한 자가 황실의 원수를 위해 황실의 검을 뽑았다.
바체아 제국 황실의 핏줄을 잇는 유일한 인간으로서, 마르할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
명예를 모를 수는 있다. 하지만 신의가 있다면, 받은 것이 있다면, 최소한 일을 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마르할은 아직도 그날의 일을 기억한다.
“스트레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요. 16년? 어쩌면 17년 전의 일이에요. 바체아 제국과 므에트 제국은 적극적으로 친교를 다지려고 했죠. 황녀와 황자 사이에 혼약이 오갔고, 므에트 제국 황녀가 바체아 제국으로 찾아왔어요. 첫째 황자와 둘째 황녀의 약혼이었어요. 성립하기만 하면 일대 파란이 불 약혼이었죠. 바체아 제국의 둘째 황자는, 형의 약혼을 축하하며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마르할은 어려서부터 황위는 포기하고 있었다. 남자 형제는 둘뿐이었고, 그의 형은 마치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는 천재였다. 인망도 가지고 있었다.
마르할은 그저 형이 좋았다. 황제가 된다면 형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므에트 제국에서 형과 약혼할 황녀가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다. 마르할은 다른 가족들과 함께 역사적인 예물 교환 장면을 눈에 담았다.
형은 바체아 제국의 보물인 반지를 황녀의 손에 끼워주었고, 그 대가로 황녀는 므에트 제국에서 가져온 작은 상자를 꺼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재앙은 시작되었죠.”
상자가 열리고, 검은 안개가 뿜어졌다.
그다음 일어난 일은 기억이 희미하다.
부서지는 소리, 비명, 절규, 그리고 도망치라는 형의 외침.
정신을 차리니 마르할은 제도의 바깥에서 검은 안개를 피해 달리고 있었다.
도망친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기억한다.
근위 기사 클리프. 그는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므에트 제국 황녀가 마족을 세상에 꺼내놓는 장면을 보았다.
10년 전, 용사가 마왕을 죽인 뒤 마르할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참극의 생존자를 찾았다.
용사가, 도둑이, 성인이, 마법사가 도와주었다.
인외의 괴물들이 나서서 단 한 명의 생존자를 찾았다. 클리프였다.
원수의 발을 핥고 있던, 개만도 못한 금수 한 마리.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원수를 갚으려고 고개 숙이고 므에트 제국 황제 아래로 들어갔다. 혹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둘 다 아닌 것 같네요?”
“그렇다면?”
클리프의 검에서 불이 솟구쳤다. 불은 검의 세 배가 넘는 크기까지 자라더니, 단단하게 뭉쳐 검의 형상이 되었다.
저것은 불이며 검이고, 검이며 불이다.
검이기에 철을 베고, 불이기에 모든 걸 태운다.
클리프는 이 검으로 지옥이 된 황궁에서 탈출했다. 검은 안개는 불의 검을 가진 그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클리프는 다가오는 마족을 모조리 베었다. 그가 아는 얼굴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황족도.
바람의 관이 완성되었다.
황제의 진짜 상징인 오동나무 관은 사라졌다. 마르할의 손에 들린 이것은 가짜다.
하지만, 진짜 역사를 짊어진 자의 손에 들리면 형체 없는 바람조차 진짜가 된다.
마르할이 바람을 머리에 썼다.
서부의 바람이 울었다. 오랜 세월 서부 전역에 영향력을 떨쳤던 군주의 권위에 복종했다.
“태만한 기사에게 군림의 역사를.”
미친 바람이 폐허가 된 도시에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