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does the land document of the fantasy Demon Castle belong to? RAW novel - Chapter 279
제279화
마르할은 마왕을 용서했다.
용서로만 무한히 이어질 죄업의 굴레를 끊을 수 있으니.
진정한 해방의 굴레가 구르기 시작했다.
* * *
하늘과 땅이 만난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알라실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성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좋다.
성인에게 인정받고, 성인의 역사를 잇는 것. 그건 알라실의 존재 의의가 된 인생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알라실에게는 저것을 처리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할 수 있으니까.’
가까이 오니 더욱 실감 났다.
평범한 인간은 저것에 접근조차 못 한다. 수준급의 기사나 마법사라면 몇 분은 버틸 것이고, 저걸 죽이려면 인류 전체를 통틀어 최상위에 위치한 실력자들이 와야 할 터였다.
그러니 이건 그녀의 의무다.
서부 사람인 동시에 저것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의무.
알라실은 의무로써 이 자리에 섰다.
마르할이 그러했던 것처럼.
뒤쪽에서 강풍이 불었다. 용오름이 다시 솟구치며 마르할의 모습을 감췄고, 하늘을 나는 말에 올라탄 마리나가 다가왔다.
저건 날아온다고 해야 할까, 달려온다고 해야 할까.
엘리제는 알라실 머리 옆의 하늘에 멈췄다.
썩 마음에 드는 위치는 아니었다. 저 말 대가리. 이번 일이 끝나면 하루는 굶게 해야지.
마리나를 올려다보기 싫었던 알라실은 시선을 정면에 둔 채 입을 열었다.
“멍청한 세뇌에선 풀려나셨어?”
“실라나티엘의 세뇌는 세계 최고입니다. 당신이 수준을 논할 마법이 아닙니다.”
“그래, 황제가 병신이 아니라면 마르 실라나티엘 같은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나게 두진 않겠지.”
“에고만. 지금 저희끼리 싸울 때입니까?”
“말은 똑바로 해. 나는 알라실이야. 누구처럼 실라나티엘이 아니라. 그리고 서부에 재앙을 몰고 온 사람이 할 말이 아니지 않아?”
마리나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휴멜이 세운 계획의 핵심은 그녀가 가진 대마족용 마법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마족을 이용해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을 정리한다는 계획은 시작도 못 했다.
세뇌당해 명령을 따르기만 했던 인형에게는 내뱉을 변명조차 마땅찮았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융합에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마리나는 화제를 돌렸다.
“당신은 자신을 서부인이라 생각합니까?”
“그래.”
“성황국의 성녀가요?”
“비슷한 처지끼리 떠보지 말자고. 우리가 있을 곳을 정할 수 있는 처지야?”
알라실은 마법에 묶여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던 마리나를 보고 확신했다.
자신과 마리나는 같다고.
똑같이 역사를 위해 만들어진 가짜라고.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설령 교황이 지랄해도 나는 서부 사람 하려고. 몸의 고향은 못 정해도, 마음의 고향은 정할 수 있잖아?”
“마음의 고향….”
알라실이 마리나를 한껏 비웃으며 말했다.
“왜? 위대한 실라나티엘은 자기 정신도 마음대로 못 해?”
“그렇습니다. 이 세뇌는 정신마저 물들이는 거니까요. 제국이 나섰으니, 얼마 안 가 인격이 사라질지도 모르죠.”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뭐가 되냐고.”
알라실이 어색하게 말했다.
교황청도 그녀의 자아만은 남겨뒀다. 자아가 없는 인형은 성인의 역사를 이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가짜 실라나티엘을 만든 놈들은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상관없습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저도 언제까지 놀아날 생각은 없습니다.”
신랄한 알라실의 말을 듣고 마리나는 깨달았다.
더 이상 실라나티엘은 그녀의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에 불과했다.
“몸도 마음도 제 것이 아닌 제게 고향을 정할 권리는 없습니다.”
마리나는 왼쪽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을 치웠다. 유리구슬로 된 눈알 대용품이 나타났고, 그걸 본 알라실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어진 행동에 알라실은 입까지 벌렸다.
마리나는 제 왼쪽 눈에 박힌 유리구슬을 손으로 뽑았다.
약간의 살점이 딸려 나오며 뚫린 눈구멍에서 피가 눈물처럼 흘렀다.
마리나는 품에서 루비 하나를 꺼냈다. 베이올라 므에실리고에게 받은 바체아 제국의 유물이었다.
경계에 돌아와 조사한 끝에 그녀는 이 물건의 기원을 알았다.
200년 전 바체아 제국 황제가 직접 만든 왕의 증표.
베이올라가 직접 찾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고대 제국어 지식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그 넓은 곡창지대에서 보석 하나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르할이 주었겠지.
그리고 지금 루비는 그녀에게 있었다.
이건 이정표다. 그녀가 목적지를 잃지 않도록 끝없이 그녀에게 목적지를 상기해줄 희망이다.
“제가 자처한 이 악몽을 모두 끝내면, 저도 마음의 고향을 정할 겁니다.”
진액이라 불렀던 물건과 하늘에서 내려온 먹구름이 뒤섞이며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지독한 안개에 가려져 있던 중심이 서서히 드러났다.
마리나의 의식은 계속되었다.
기행은 마법사의 업, 마법사의 역사.
마리나는 마법사이며, 기행을 행하는 자였다.
마리나가 루비를 머리 위로 들었다.
“희망은 손에 닿아야 하며, 이정표는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 루비는 무엇보다 이성과 가까워야 한다.
마침 마리나의 몸에는 남는 장소가 하나 있었다.
마법사를 상징하는 이성, 이성의 근원인 뇌와 가장 가까운 터.
마르할이 직접 만든 흉터.
마리나는 루비를 빈 눈구멍에 박았다.
루비를 중심으로 그녀의 눈이 재생되었다.
한 번 실명했던 눈은 실라나티엘의 마법으로 다시 만들어졌고, 한 남자의 손에 빛을 잃었으며, 이제 바체아의 역사로 빛을 받아들였다.
마리나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루비로 된 눈동자도 함께 움직였다.
“제 마음의 고향은 저기 있습니다.”
마리나의 시선이 한 차례 뒤를 향했다.
지금도 주위 모든 걸 집어삼키고 있는 용오름. 바체아의 역사를 보는 그녀의 눈은 용오름을 뚫고 안에 있는 남자의 흔적을 보았다.
“뻔뻔하기는.”
“그것도 마법사의 미덕이죠.”
“저거. 그 여자랑 닮지 않았어?”
“그렇군요.”
진액과 먹구름이 합쳐지며 나타난 건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세계가 일변했다. 세계를 멸망시킬 것처럼 사납게 굴던 먹구름이 조용히 하늘로 올라갔고, 땅 위에 있는 모든 걸 잡아먹던 진액이 조용해졌다.
검은 안개를 몸에 두르고 머리에 왕관을 쓴 여인의 외형은 마리나와 알라실이 아는 누군가와 지나치게 비슷했다.
“그는 마왕을 죽이지 않고 봉인했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저 먹구름이 봉인의 일부라면, 저건 봉인 안에 있던 존재의 흉내일 겁니다. 왕관을 봐선 아마 마왕이겠죠.”
“왜 서부를 멸망시킨 마왕이 므에트 제국의 핏줄인 건데?”
“마족이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추정되는 장소를 아십니까?”
“아니.”
“바체아 제국 수도입니다. 므에트가 바체아를 멸망시킨 방법은 아마… 옵니다!”
마리나가 외쳤고, 엘리제가 말 같지 않은 움직임으로 뒷걸음질 쳤다.
작은 손짓이었다.
마왕의 모습을 본뜬 그것이 손을 휘둘렀고, 검은 안개가 손길을 따라 길게 뽑혀 나왔다.
마족이 몸에 두른 건 단순한 검은 안개가 아니었다.
콰드드득!
안개가 땅을 긁었다. 검은 안개가 채 삼키지 못한 부서진 건물 잔해가 거대한 발톱에 긁힌 듯한 모습으로 부서지고 갈라졌다.
저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갈기갈기 찢어져 흔적도 남지 않았을 위력이었다.
알라실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는 백이 넘는 마족을 손으로 때려죽였다. 그 안에는 마을 하나를 삼키고 하나가 된 거대한 마족도 있었다.
그런 놈과 싸우면서도 알라실은 겁먹지 않았다. 하지만 저것 앞에선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일반 마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다.
신비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저 안에 깃든 무한한 악의를 그녀는 느꼈다.
그건 역사에 민감한 다른 한 사람도 다르지 않았다.
“저거 진짜 마왕은 아니지?”
“…아닐 겁니다. 봉인이 완전히 깨졌다면 그가 따로 언질을 주었겠죠.”
“성인도 저건 한 번 포기했다던데… 이유를 알겠어.”
“그래서, 당신도 포기할 겁니까? 알라실.”
“내가 여기 있는 건 내 의무야, 마리나.”
에고만이 아니라 알라실.
실라나티엘이 아니라 마리나.
가짜 성인의 후계자와 가짜 마법사의 후계자는 서로를 인정했다.
가짜들의 인정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가짜끼리의 인정이기에 의미가 있는 일도 있다.
가짜는 가짜이기에 무엇보다 동족을 혐오하고, 질시한다. 가짜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진짜에 가까운 가짜다. 그런 자들이 인정한 가짜를 단순한 가짜로 볼 수 있는가?
정답을 정할 존재는 진짜밖에 없으니, 진짜가 나타나 그녀들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그녀들의 역사는 진짜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음이라.
알라실과 마리나는 몸속 깊은 곳에서 역사가 삐걱이는 환청을 들었다.
“접근은 내가.”
“저는 공격을 막겠습니다.”
“죽일 방법 있어? 딱 봐도 때려죽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아?”
나는 주먹밖에 모르고, 그게 안 통할 것 같으니 네가 해라. 수단은 이미 가지고 있는 거 안다.
그런 뜻이 담긴 말이었다.
“그냥 말로 하시죠? 어차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죽지만 않으면 고쳐줄게.”
“당신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요. 마침 그 사람 근처에 있는 여자입니다.”
“알 것 같으니까,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말죠?”
알라실이 정색했다. 다른 욕은 참을 수 있어도, 그 여자와 비슷하다는 말은 참기 힘들었다.
동족 혐오다. 같은 존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무의식에서부터의 거부였다.
잡담은 그걸로 끝이었다.
가짜 마왕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퍼졌다.
물리력을 가진 안개에 닿는 물체는 다양한 방법으로 부서졌다.
찌그러지고, 찢기고, 잘리고, 최악의 경우 가루가 되었다.
죽음의 안개 안을 알라실이 달렸다.
역사를 삼키는 검은 안개는 성녀와 성인의 역사를 뚫지 못했다.
악의를 가진 안개가 알라실의 몸을 범했다. 어깨의 살덩이가 한 움큼 떨어지고, 다리가 난도질당했다.
한 번의 빛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알라실의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알라실은 묵묵히 가짜 마왕에게 다가갔다.
가짜 마왕의 앞에 도착한 알라실이 손을 뻗었다. 가짜 마왕도 그녀에게 마주 손을 뻗었다.
손과 손이 충돌했다.
콰직. 지반이 부서졌다. 알라실과 가짜 마왕을 중심으로 사람 수십 명은 가뿐히 생매장할 구멍이 생겼다.
가짜 마왕이 눈썹을 찌푸렸다. 알라실은 주먹을 뒤로 당겼다.
대포에서 쏘아지는 포탄처럼, 기적으로 강화한 전신의 근육을 쥐어짜 한 방에 쑤셔 박는다!
콰앙! 그녀의 손은 가짜 마왕에게 닿지 못했다.
검은 안개가 알라실의 손을 막았다. 알라실은 뼈가 살을 뚫고 나온 주먹을 기적 한 번으로 치료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마리나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가짜 마왕을 중심으로 나타난 백 개가 넘는 불덩이가 검은 안개를 증발시켰다.
마르 실라나티엘은 세상 누구보다 많은 마족을 불태우고 얼렸다.
훔친 역사라고는 하나, 마리나는 마르의 역사를 이었다. 그녀의 마법은 마족과 상성이 좋았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바체아의 역사가 함께했다.
바체아의 역사로 세상을 보는 그녀의 눈에 가짜 마왕은 단순한 망령으로 보이지 않았다.
‘왜 마왕에게서 루비에 깃든 것과 같은 바체아의 역사가? 저건 진짜도 아닌 가짜인데?’
가짜 마왕에게는 강렬한 바체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루비에 깃든 역사와 같은 종류라면 그건 바체아 제국 황제의 역사다.
마왕이 바체아 제국 황제?
므에트의 핏줄은 바체아의 황제가 될 수 없다. 애초에 므에트의 핏줄이 바체아 제국에 가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정치적 위험을 동반한다.
바체아 제국은 아쉬운 게 없는 제국이었다.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며 바체아 제국이 받아들일 일은 많지 않았다.
바체아 제국이 거절할 수 없는, 제국 황녀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 일.
가설이 확신에 가까워졌다.
‘결혼 동맹.’
바체아의 역사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마법사는 바체아 제국 최후의 역사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