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does the land document of the fantasy Demon Castle belong to? RAW novel - Chapter 327
제327화
마리나 실라나티엘은 베이올라와 마르할보다 하루 일찍 제도에 도착했다.
우연이 아니라 의도였다.
실라나티엘의 찌꺼기들이 건 세뇌를 푸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황제가 움직인다.
이미 한 번 마르 실라나티엘에게 호되게 당한 황제다.
두 번이나 물렸던 개에게 물리면 오만한 황제가 황궁을 부수며 화풀이를 할 게 뻔했다.
황제가 무서운 건 아니지만, 베이올라와 마르할을 위해서라도 되도록 소란은 일으키지 않으려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였다.
마리나는 제도에 있는 빈집으로 들어갔다.
촛대를 옆으로 돌리고 책장을 밀어내니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황궁으로 연결된 실라나티엘 전용 비밀 통로였다.
역대 실라나티엘은 모두 이 통로를 통해 황궁으로 들어갔고, 이제 마리나 차례였다.
마리나는 이 통로를 이용하는 게 처음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입구를 여는 장치부터 통로까지 모든 게 익숙했다.
그녀가 품은 실라나티엘이라는 이름이 가진 역사의 영향이리라.
통로 끝에는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실라나티엘이 몸단장하는 작은 방이 있었다.
그녀의 몸에 맞춘 궁중 예복이 벽에 걸려 있었고, 옆에는 화장대도 있었다.
화장대에는 별, 아니스 실라가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탁자에서는 끓는 차가 든 주전자가 김을 폴폴 냈다. 탁자에는 그녀가 아는 사람 한 명과 얼굴만 아는 사람 한 명이 있었다.
달, 휴멜 나티. 그리고.
“불사의 기사, 실라 엘. 당신이 해였군요.”
“그다지 놀란 얼굴은 아니군.”
“당신의 소문을 들으니 답이 나오던데요. 성기사보다 질긴 기사. 죽여도 죽지 않는 기사. 제국 안에서 그딴 역사를 가질 수 있는 건 실라나티엘의 실험체 정도죠. 불로불사 실험의 실패작.”
“입 다물어라.”
“싫습니다만?”
실라 엘의 말에는 분명 신비가 담겨 있었고, 마리나는 그의 명령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여유롭던 분위기가 변했다.
아니스 실라와 휴멜 나티가 각기 자신의 상징이 새겨진 유물을 꺼냈다.
별이 새겨진 거울, 달 모양 휘장, 해가 새겨진 목걸이.
마리나가 가짜 실라나티엘로 교육받으며 매일, 매시간, 매 순간 보아왔던 문양들이었다.
“몸만 있으면 된다.”
실라 엘의 말에 아니스 실라와 휴멜 나티도 유물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세뇌가 아니라 마리나의 정신을 부숴버릴 작정이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이미 세뇌 일부가 파훼되었다.
마리나 실라나티엘은 과거 마르 실라나티엘처럼 마왕을 죽였다.
서부를 멸망시키진 않았지만, 동부에서 제일 오래된 국가를 멸망시켰다는 역사를 쌓았다.
마법사인 그들은 그 역사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마리나의 반항을 예상했고, 그래서 셋이 모였다.
마리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게 다였다.
그녀는 왼쪽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풀었다.
눈동자 속의 루비가 역사를 읽었다.
“아니스 실라, 휴멜 나티, 실라 엘. 실라나티엘의 이름을 버리지 못해 그 파편을 이름 삼아 역사를 행사하는 반푼이들.”
“시끄러워!”
아니스 실라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아무리 뛰어난 신비를 부리고, 대단한 역사를 쌓아도, 그들의 기원은 실라나티엘이다.
평생 반푼이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건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모욕이었다.
현역 기사의 판단이 가장 빠르고 정확했다.
마리나가 세뇌가 통하지 않는 것 같자 실라 엘은 검을 뽑아 마리나를 향해 휘둘렀다.
검격이었다.
서부에서도 검격을 쓰는 초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제국 최고의 기사라 불리는 기사의 검격은 놀랍지도 않았다.
실라 엘, 성으로 모자라 이름에도 실라나티엘의 흔적을 담은 기사의 검은 마리나의 몸에 맞고 옆으로 튕겨 벽을 잘랐다.
“……?!”
“우선 사과부터 하겠습니다. 인간 상대로 쓰는 건 처음이라. 잘 될지 확신이 안 서거든요.”
마리나가 왼팔을 걷어 올렸다. 왼팔이 검게 물들었고, 그 안에 담긴 역사를 알아본 휴멜 나티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다른 둘을 버리고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의 도주보다 마리나의 마법이 더 빨랐다.
“금주. 역사 삼키기.”
* * *
실라나티엘의 찌꺼기를 모두 정리한 마리나는 황궁으로 들어왔다.
아니스 실라와 휴멜 나티가 마리나의 앞을 걸었다.
둘이 마리나를 감시하며 앞장서는 모양새였지만, 마리나는 둘에게 감시당하지도 않았고, 세뇌당하지도 않았다.
그 반대, 역사를 잡아먹히고 텅 빈 인형이나 다름없어진 그들을 마리나가 세뇌했다.
이제 그녀를 얽매는 운명과 업은 없다.
마리나 실라나티엘은 비로소 자유를 되찾았다.
“축하해.”
마리나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마리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보다 더 어린 외모의 여인이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마르 실라나티엘. 만나는 건 처음이군요. 당신은 절 봤겠지만요.”
“맞아.”
“저는 인정받았습니까?”
“그래. 하지만 마지막 과정이 남았어.”
“당신과 싸워 이기라는 거라면 차라리 실라나티엘의 모든 역사를 포기하겠습니다.”
마왕을 죽이고, 바체아 제국의 역사를 품은 눈으로 보기에 알 수 있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저 몸 안에는 므에트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의, 모든 므에트의 역사를 합한 것보다 더 거대한 역사를 품었다.
마왕이 된 교황이 귀여워지는 수준의 역사였다.
교황을 죽인 넷이 모두 모여도 마르 실라나티엘 한 사람 상대로 버틸 수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하리라.
“그런 건 안 시켜. 실라나티엘답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으니까.”
마르 실라나티엘은 두 손을 하늘로 들었다.
“나는 혈연이라는 의미에서 세상에 남은 유일한 실라나티엘이야.”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르 실라나티엘 말고 다른 실라나티엘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마르 실라나티엘의 역사를 훔친다면, 그녀처럼 마르 실라나티엘과 무관한 타인이 아니라 마르 실라나티엘의 혈연을 쓰는 편이 효과가 좋은 게 당연했다.
마르의 대답은 마리나의 예상을 한참이나 웃돌았다.
“내가 먹었어.”
“먹어? 설마, 식인? 아무리 금기라지만….”
“한 달에 한 번. 생리를 하는 날, 실라나티엘 가문에 있던 실라나티엘의 심장과 피와 살로 조리한 음식을 먹었어. 가문에 있던 친족을 모두 먹고, 집 안 지하실에 보관 중이던 역대 실라나티엘의 시신을 먹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심장을 먹고, 세상이 마르 실라나티엘이라고 부르는 마법사의 근간이 만들어졌지.”
기행, 금기가 역사를 쌓는 데 효율적이라 하지만, 그래도 식인을, 그것도 친족을….
마리나는 친족으로 만들어진 요리를 먹는 마르의 기분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진짜 실라나티엘이 되었어. 너도 같아.”
무언가를 바라듯 하늘로 향했던 마르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뿌드득. 부서진 갈비뼈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르 실라나티엘은 두 손으로 든 심장을 마리나에게 건넸다.
“먹어.”
“…괜찮습니까?”
“반쯤 인간을 벗어난 몸이라 이 정도로는 안 죽어.”
마리나는 팔딱이며 피를 뿜어내는 심장을 손으로 받았다.
많은 고민이 오갔다.
실라나티엘의 이름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실라나티엘의 역사를 포기한다고 그녀의 모든 마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마리나라는 인간이 쌓은 역사도 실라나티엘의 역사에 뒤지지 않았다.
실라나티엘의 이름을 포기해도 그녀는 여전히 세계에서 손꼽히는 마법사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힘은 약해지겠지. 서부에 있는 다른 둘과 같은 위치에 서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왼눈에 박힌 루비가 심장을 안에 담았다.
마리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뛰고 있는 심장을 씹었다.
근육 덩어리인 심장은 질겼다. 그녀는 턱에 힘을 주고, 옷을 피로 더럽히며 심장을 잘근잘근 씹었다.
심장을 먹어치운 마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르 실라나티엘은 처음 나타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구멍 뚫린 가슴도, 피로 젖은 옷도 모두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게 실라나티엘이군요.”
“이제 네 거야. 네 마음대로 해.”
“이름을 바꿔버려도 말입니까?”
“할 수 있다면.”
“마리나 무느두스가 좋겠습니다. 바체아 제국 황실의 역사에 실라나티엘의 금기가 합쳐지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요.”
뒷머리를 강하게 때리는 충격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졌다.
잠시 눈앞이 하얗게 변한 사이 마르 실라나티엘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정신을 잃으며 마리나는 한 가지 사실을 머리에 새겼다.
‘마르 실라나티엘은 도발에 약하다.’
실라나티엘의 찌꺼기들 따위를 정리한 것보다 훨씬 중요한 정보였다.
* * *
베이올라와 마르할은 아침 일찍 황궁에 입궁했다.
차기 황좌의 주인이 정해지는 날이다.
황제가 직접 공표하진 않았지만, 베이올라가 제도에 들어섰다는 정보는 빠르게 제도에 머무는 고위 귀족들의 귀에 전해졌다.
황제가 몰래, 베이올라만 제도에 부른 이유를 추측하지 못하는 인간은 없었다.
황궁은 아침부터 사람으로 붐볐다.
황궁에 들어올 권한을 가진 사람은 모두 새벽부터 입궁해 황궁의 정문만 바라보았다.
황궁을 지키는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족히 천 쌍이 넘는 시선이 세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 열 명이 세 사람을 안내했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고, 마르할과 베이올라와 마린도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황궁의 문이 열렸다. 서부가 멸망하고 성황국이 사라지며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장소가 된 므에트 제국 황궁이 속살을 드러냈다.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정문 옆에서 멈췄다.
대신 다른 기사들이 두 사람을 기다렸다.
황제 직속 기사단 단장.
태산과 불사보다는 뒤떨어지지만, 황제에게 인정받은 기사로 최강의 기사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자들이었다.
“베이올라 므에실리고와 그 손님만 모시라는 명입니다. 호위 기사 레벨라, 당신을 위한 방은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레벨라는 베이올라를 보았다. 베이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면 되죠?”
“저 기사를 따라가시죠. 두 분은 이쪽으로.”
마르할과 베이올라는 기사를 따라 황궁 안을 한참이나 걸었다. 옥좌가 있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기도 했다.
마르할과 베이올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둘은 기사가 걷는 길에서 역사를 발견했다.
황궁을 걷는 행위 자체가 므에트 제국에 이어진 하나의 역사이자 예법이었다.
어전으로 가는 길에는 긴 복도가 있었다.
둘을 안내하던 기사는 모퉁이 앞에서 멈췄다.
“여기서부턴 두 분이 가셔야 합니다. 폐하가 기다리시는 방 앞은 다른 기사가 지키고 있을 겁니다.”
베이올라와 마르할은 복도를 걸었다.
조용했다. 복도에는 부드러운 천이 깔려 있었고, 곳곳에 박힌 유물 덕분에 창문이 없어도 대낮처럼 밝았다.
베이올라가 황궁에 들어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결국, 고대 제국어 수업은 필요 없었다는 거네.”
“그렇죠.”
“그러면 왜 배우려고 한 거야?”
“명분이죠. 고대 제국어를 누구에게 배웠냐고 질문받았을 때를 위한.”
“그러면, 그날 나랑 마리나가 책 읽는 것도 전부 알아들었고?”
“용사가 너무 쪼잔한 거 아니에요?”
베이올라가 마르할을 째려보았고, 마르할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베이올라의 시선이 닿은 벽에 작은 실금이 생겼다.
“긴장은 풀렸어요?”
“약간은.”
“황제 앞에 가본 적 있어요?”
“아니. 이마릴과 유렐만 한 번씩 가봤다고 알아. 거긴 정무를 보는 장소니까, 정치와 무관한 황족은 발을 들이지도 못해.”
“소일라 므에실리고도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어.”
황제가 기다리는 문 앞에는 태산의 기사와 불사의 기사가 각각 문의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태산과 불사가 문고리를 잡았다. 안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대지주 마르할을 먼저 들여라.”
태산과 불사의 시선이 마르할을 향했다.
베이올라도 걱정이 담긴 눈으로 마르할을 보았다. 황제가 마르할에게 손댈 거라는 생각은 안 들고, 마르할이 당해주지도 않을 것 같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마족이라는 괴물이 탄생하고 1년도 안 되어 서부가 멸망한다고 20년 전 사람들에게 말해주면 누가 믿겠는가.
마르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황제 폐하는 저한테 흥미가 많은 모양이네요. 먼저 가볼게요.”
태산과 불사가 문을 열었다.
탁 트인 방은 벽과 바닥이 모두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황제의 힘을 한껏 받아들인 돌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뒤에서 문이 닫혔다.
마르할은 황제에게 다가갔다.
옥좌는 방의 끝에 있었다. 따로 층을 하나 만들고 그 위에 옥좌를 얹었다.
황제의 눈높이는 높았다.
마르할은 황제를 올려다봐야 했고, 반대로 황제는 앉아서 마르할을 내려다보았다.
“호위도 없네요?”
“하찮은 기사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말하기 전에 하나만 괜찮을까요?”
황제에게 허락도 얻지 않고 마르할은 품에서 시계 하나를 꺼내 땅에 던졌다. 그리고 시계를 발로 밟아 부쉈다.
“이제 됐어요. 궁금한 게 많지 않아요?”
“그래. 하지만 그 전에 나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황제가 옥좌에서 일어났다.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섰다.
황제의 무릎이 서서히 구부러졌다. 무릎이 땅에 닿고, 양손으로 땅을 짚었다. 마지막으로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황제가 땅에 머리를 박았다. 이마와 바닥이 맞닿았다.
“용서해다오. 내가 범한. 그리고 내가 앞으로 범할 모든 일을 용서해다오.”
황제는 마르할에게 용서를 빌었다.
용서를 구하는 자를 용서해야만 하는 저주를 짊어진 자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무릎이 구부러졌다.
* * *
연합 이사들은 짜증을 숨기며 상석에 있는 아젠만의 눈치를 살폈다.
전야제가 끝나고 바체아 제국 건국제 본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바깥에선 축제가 한창인데 그들은 회의실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중이었다면 피곤하기는 해도 짜증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의는 그들이 소집되고 한 시간도 안 되어 끝났다.
연합 해산과 차후 계획.
해산을 반대하는 이사는 없었다. 반대파는 모두 이사 자리에서 물러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해산 찬성파다.
연합이 사라졌을 때의 대비도 마쳤다. 연합이 사라지면 재산이 족히 두 배는 늘어나니 연합이 사라지는 걸 꿈에서도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연합 해산 절차는 모두 끝났다. 아젠만이 앞에 있는 종이에 이름만 적으면 된다.
아젠만은 종이 옆에 시계를 놔두더니 그대로 몇 시간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묘한 웃음을 짓고 가끔 혼자 웃기까지 하는 아젠만에게 말을 걸 간 큰 사람은 없었다.
연합 이사들이 할 수 있는 건 아젠만의 눈치를 보며 치미는 짜증을 속으로 삭이는 게 전부였다.
팅. 맑은 쇳소리와 함께 종이 옆에 있던 시계가 부서졌다. 유리가 깨지고 시침과 초침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연합 이사들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젠만이 시계와 나란히 놓여 있던 펜을 들었다.
“마르할 무느두스의 대리인, 아젠만 리안틀의 이름으로 서명하겠소. 연합은 사라지고, 남은 서부의 땅은 오동나무 막대에 붉은 천으로 만든 깃발을 꽂은 사람이 주인이 되오. 이는 동부 모든 권력자의 동의로 이루어지는 계약이오.”
“잠깐! 방금 뭐라고?!”
“무느두스! 대지주 마르할이 무느두스란 말인가!”
“막아! 누구든 서명을 막으시오!”
종이의 말미, 동부 권력자들을 대신하는 연합 이사들의 이름 아래에 아젠만의 이름이 적혔다.
아젠만은 종이를 휘감는 역사를 느꼈다.
아젠만의 손이 떨렸다.
이 순간, 그는 세계를 바꿨다.
도둑이 훔치고 마법사가 숨겼던 역사가 돌아온다.
세상은 자신이 잊었던 하나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빼앗겼던 지식이 아젠만의 머리에 휘몰아쳤다.
바체아 제국 황제의 두 번째 아들, 황제의 성기능에 의문을 가지는 수많은 풍문을 헛소리로 만들며 바체아 황가에 태어난 두 번째 천재.
마르할 무느두스.
* * *
마족과의 전쟁이 끝나고 서부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던 드래그마 막시온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리 잡은 창공의 주인의 영토에서는 거대한 검은 장막이 보였다.
서부 곳곳에 보이는 장막이었다. 창공의 주인과 성스러운 혈통도 장막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장막에 관심을 보이던 마을 사람들도 점차 무던해졌다.
검은 장막은 변하지 않았고, 막 만들어진 마을에는 언제나 일이 많았다.
“대장, 저거….”
한때 그의 부하였던 성기사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장막이 사라지고 있었다.
검은 장막이 사라지며 드러나는 건 하나의 도시였다.
드래그마 막시온이 살면서 본 어떤 도시보다 커다란 성벽을 가진 도시가 장벽 안에서 나타났다.
성벽 위로 우뚝 선 거대한 원형 지붕은 그가 책으로 봤던 어떤 도시와 똑같았다.
“제도…?”
붉은 천을 가진 깃발이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바체아 제국 황궁의 가장 높은 지붕에서 흔들렸다.
* * *
마르할 앞에 무릎 꿇은 황제의 몸이 떨렸다.
그의 머리에 하나의 이름이 벼락처럼 내리쳤다.
마르할 무느두스.
바체아 제국의 두 번째 황자.
바람이 불었다.
바람과 함께 마르할의 목소리가 퍼졌다.
“고개 들어요. 우리 대화할 게 많잖아요?”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가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마르할의 몸을 감싸 관과 망토가 되었다. 500년 제국의 역사가, 서부 전역의 토지가 이 순간만큼은 한 사람을 자신들의 대표로 인정했다.
토지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
땅 위에 발 디딘 모든 생명의 대변자.
역사는 그들을 황제라 불렀다.
관과 망토로 치장한 서부의 황제가 동부의 황제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