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does the land document of the fantasy Demon Castle belong to? RAW novel - Chapter 329
제329화
마르할과 소일라는 떠났다.
여긴 두 사람이 있을 장소가 아니었다.
홀로 남은 베이올라는 옥좌에 앉았다.
황궁에는 여전히 검은 안개가 가득했고, 옥좌는 반쯤 부서졌다. 천장과 벽도 무너져 황궁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고개를 드니 무너진 천장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베이올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르 실라나티엘의 결계는 여전했고, 결계 안에는 마왕의 역사와 서부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눈을 뜬 그녀는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마르할에게 받은 왕관이 그녀 머리 위에 있었다.
그녀는 마왕이 되었다. 결계 안에 있는 검은 안개는 모두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다.
시험 삼아 왕관을 벗자 다시 저주가 몸 안에서부터 심장을 울리기 시작했다.
베이올라는 얼른 왕관을 다시 썼다.
왕관 없이도 이 목소리를 버텨내야 한다. 그때 그녀는 당당하게 스스로를 마왕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올라가 바라자 검은 안개가 움직여 부서진 벽과 천장을 고쳤다.
수백 년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마법사들에게 거대한 유물로 개조된 황궁은 마족들의 좋은 먹이였다.
황궁 대부분의 지역은 이미 마족이 되어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다.
벽이 꾸물거리며 움직여 황궁을 고쳐 나갔다.
실시간으로 수리되는 황궁 복도에서 두 개의 발소리가 들렸다.
베이올라는 이미 그들 안에 있는 역사를 느끼고 있었다. 마족은 그녀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옥좌 앞에 도착했다.
“이런 형태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제 도박은 성공한 모양이군요.”
“응, 그래. 이제 내가 이 땅의 주인이야. 원하는 거 없어?”
“이런 몸이 되기 전에는 많았지만, 이젠 없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 대부분이 필요 없어졌으니까요. 그냥, 제 친구가 행복했으면 합니다.”
“난 지금이 행복해.”
“그럼 저도 만족합니다.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시기 전에, 이 불경한 놈을 먼저 처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레벨라가 밤이슬을 가리켰다.
“폐하가 마왕이 되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니, 폐하를 암살하자는 제안을 제게 하였습니다.”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밤이슬이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베이올라는 밤이슬의 감정도 읽었다. 그는 정말로 진지했다.
“마족으로 뒤덮인 서부의 역사를 개인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는 불가능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군요.”
“미래를 보는 마법은 어쨌어?”
밤이슬이 어깨를 으쓱였다.
“성황국에선 신이 운명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기에는 신이 된 인간이 있군요.”
“이제 어쩔 거야?”
“마족이 마왕 아래 있어야지 별수 있습니까. 죽이고 싶으면 죽이셔도 좋습니다. 저는 이미 인생의 목적을 이룬지라.”
밤이슬은 엘리제의 복수를 가장 화끈한 형태로 성공했다.
황제가 죽고 황궁이 무너졌으며, 제국의 영토는 장차 마족의 땅이 될 예정이다.
밤이슬이 바라던 것 이상의 복수였다.
“그럼 일해. 마왕의 명령이야.”
“알겠습니다. 무얼 할까요?”
“서부에 가서 유렐의 부하였던 신비 추적자와 마법사들을 설득해 데려와.”
여유롭던 밤이슬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몸으로 서부까지 가라고요? 중간에 사냥당해 죽을 겁니다.”
“그러니까 요령껏 잘 다녀오라고. 미래를 보면 되잖아?”
“안 가면 어떻게 됩니까?”
“영원히 지하에 유폐. 마족의 수명은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폭거입니다.”
“아니면 내 땅에서 나가든가. 어느 쪽이든 결과가 좋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마왕이 있으니 므에트 제국은 제국 사람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족들의 땅이 된다.
마족이 살 수 있는 대륙 유일한 국가가 만들어지겠지.
반대로 제국에서 한 발만 밖으로 나가도 마족을 원망하는 사람이 사방에 가득한 세상이 기다린다.
뛰어난 마법사인 밤이슬도 영원히 도망자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밤이슬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어전에서 사라졌다.
“레벨라는 살아남은 대신들을 모아줘.”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나라를 바꿔야지.”
“그들이 협력하겠습니까?”
“마족이 되면 긴 수명과 젊음을 얻을 수 있어. 자아를 잃는 부작용은 내가 해결할 수 있어. 그러면 오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늙은 대신들이라면 권력과 재산을 모두 포기해서라도 오려고 하겠군요.”
누구나 원하지만, 정작 얻을 방법은 없는 금단의 보물이 젊음이다.
바체아 제국의 역사도 이어받은 베이올라의 머리에는 바체아 제국 황가가 노회한 대신들을 구슬리고 충성을 받아낸 지식도 있었다.
잡음은 많겠지만, 제국을 마족을 위한 나라로 바꾸는 작업이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새로운 마왕의 새로운 제국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 * *
마르할은 황궁을 나와 황궁 북쪽에 있는 빵집으로 향했다.
제법 큰 빵집 바깥에는 빵을 사서 먹을 수 있는 식탁도 마련되어 있었고, 빵과 어울리는 차도 팔았다.
마르할은 여섯 개의 의자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딱 좋게 식은 차 위로 김이 올라왔다.
차 한 잔을 후룩 비운 아르고가 찻잔을 딱 내려놓으며 불평했다.
“15년 전쟁의 마무리가 빵집에서 다과회라니, 이건 아니지 않아?”
“하하, 당신도 한 번쯤 먹어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녀가 그렇게 칭찬한 빵집의 빵을요.”
율란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제도 전체를 희생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 고작 백여 명의 피해자로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나타날 마족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해결책이 생겼다.
부패한 성황국을 없애겠다는 각오 하나로 신이 되어버린 남자에게는 흡족한 결과였다.
“그래. 그래서 먹어봤지. 10년 동안 제도에 틀어박혀서 이 집에서 나온 빵하고 과자는 전부 질리도록 먹었다고!”
“그러면서 잘도 주워 먹네.”
“맛은 있으니까.”
마르가 한입 크기의 빵을 입에 털어 넣는 아르고를 지적했고, 아르고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뻔뻔스레 말했다.
“그러면 어디 가자고? 술집? 샤리 데리고?”
“술집! 가보고 싶어!”
소일라의 무릎에 앉아 있던 샤리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식탁이 기울었다.
소일라가 식탁 표면을 부드럽게 쓸자 기울었던 식탁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쏟아지던 차와 과자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는 괜찮아요. 대신, 샤리의 교육에 악영향을 주면 그건 아르고가 감당해 주겠죠?”
“그냥 빵이나 배 터지게 먹자.”
아르고는 빵을 한 줌 손에 쥐고 우적우적 씹었다.
마르는 거리를 둘러보았다.
제도는 평소보다 약간 어수선하긴 해도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검은 안개가 제도에 퍼지기 전에 결계로 틀어막았고, 율란이 제도 전체에 기적을 뿌려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결국, 원인은 처리하지 못했어. 이제 어쩔 거야?”
“저는 괜찮다고 봅니다.”
“베이가 알아서 잘하겠지. 본인이 선택한 길이니까.”
그들의 계획은 마왕을 만들어내는 원념의 소멸이었다.
마르할의 몸에 봉인되어 있던 서부와 마왕의 역사는 교황이 성황국을 제물로 얻은 역사와는 달랐다.
서부를 삼킨 마족의 역사는 너무 거대했고, 그 과정 또한 처절했다.
또 몇 년이나 방치되며 거대 역사 자체가 의지를 가졌다.
마르할이 정당한 방법으로 황제에게 원념을 떠넘기고, 어떤 식으로든 풀려난 역사를 힘으로 제압해 없애는 게 용사 일행의 계획이었다.
역사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역사에 뒤섞인 원념은 죽일 수 있다. 다시 마왕이 나타나는 일도 없어진다.
그게 용사 일행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므에트 제국이 마족의 국가로 변한다고 하면, 누구도 찬성하지 않을 거야.”
“제가 조금 도와주긴 할 겁니다.”
“율란 네가? 권력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며.”
“평화를 위한 길이니까요. 인간으로 사는 동안은 제가 제국에 있도록 하죠.”
“그렇게까지 하겠다면야.”
신이 된 율란에게 수명은 의미가 없고, 인간인 율란도 원래 수백 년은 살 예정이었다.
율란의 성격상 신의 힘은 사용하지 않겠지. 그래도 성인이 마족들의 국가를 수호한다면 사람들의 반항도 줄어들 것이다.
일곱 명이 주워 먹으니 식탁 위에 가득하던 빵과 과자가 금방 바닥났다.
빵집 주인이 막 구운 빵과 과자를 가져오며 소일라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였다.
빵집 안으로 들어가는 주인장을 보며 마르가 말했다.
“눈치 빠른 사람이네.”
“귀족과 황족도 자주 이용하는 집이니까요. 저 때문에 괜한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닐까 했지만, 잘살고 있으니 좋은 일이죠.”
소일라는 따끈따끈한 빵을 후후 부는 샤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빵과 과자를 심각하게 노려보던 바스타는 빵을 한 입 먹은 다음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마르할이 바스타를 타박했다.
“뭘 기분 나쁘게 그러고 있어.”
“내가 만든 게 더 나은 거 같아서.”
“망할 인간이 누구랑 누구를 비교하는 거야.”
검을 잡고 하루 만에 철을 벤 인간이다.
넘치는 재능으로 무엇을 해도 며칠이면 그 분야의 장인을 뛰어넘는 인간이 바스타였다.
그랬던 인간이 인외라 불리는 역사까지 쌓았다.
평범한 빵을 만들어도 거기 깃든 역사가 빵을 천하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서 망할 동생아, 너는 이제 뭐 하게?”
티격태격하던 다른 사람들도 대화를 멈췄다.
다른 사람들은 지난 11년 동안 각자의 길을 찾았다.
마르할은 아니었다.
마왕을 죽인 후로도 오늘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렸다.
황제와 만나는 게 마르할의 전부였고, 마르할은 오늘 목적을 이루었다.
처음 바체아 황궁에서 마족이 탄생하고 오늘까지 마르할은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마르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도는 멀쩡하니 제국을 다시 만들어야지. 마침 난민도 많잖아?”
마르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이올라가 마족을 위한 국가를 만든다고 하면 여기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제도에 남을까.
므에트 제국만이 아니라 동부 전역에 난민이 넘쳐났다.
성황국의 침공으로 국가가 멸망하고 집도 재산도 잃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천하를 담은 땅에서 식량 생산이 시작되며 서부에서는 식량이 넘쳐나고 있다. 더욱이 천하를 담은 땅은 아직 반도 개발되지 않았다.
서부에 가면 땅도 얻을 수 있고 굶지도 않는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이 서부행을 택할 것이다.
연합이 사라졌으니 서부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서부 전역에 사람이 퍼져 각자의 땅을 만들고 세력을 형성할 것이다. 바체아 제국의 역사도 그 사이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아르고가 툭 던졌다.
“밀주는 만들 수 있냐?”
“10년쯤 지나면 가능할지도?”
“오. 만들면 첫 잔은 내 거.”
“누가 준대?”
“누가 허락 맡고 먹는데?”
“형수님, 아르고가 괴롭혀요.”
“야! 니가 그런 거 일러바칠 나이냐!”
아르고가 바락 소리 질렀고, 조용히 듣고 있던 소일라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르고, 적당히 해요. 첫 잔은 선대 황제가 맛을 봐야죠. 그렇지 않아요?”
“어, 그렇죠?”
“어머. 형식상으로 오동나무 관을 썼던 사람은 황제 취급 안 해준다는 건가요?”
“아, 아뇨. 원하시면 드려야죠.”
“원하시면?”
“…그냥 가져가세요.”
“큭큭. 제국의 법도 앞에서는 그 혓바닥도 안 굴러가나 봐?”
소일라에게 쩔쩔매는 마르할을 보며 아르고가 낄낄댔다.
마르할과 소일라의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마왕이 사라지고 5년, 마르할과 용사 일행 모두가 각자 수련에 바쁠 때 모두의 뒷바라지를 해준 사람이 소일라였다.
마르할은 소일라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그녀 말대로 형식상이지만 소일라는 마르할의 선대이기도 했다.
선대 황제이자 선대 마왕. 그리고 망할 형 바스타의 아내.
평범한 가족 관계와 비슷했다. 형에게는 잔소리도 거침없이 할 수 있지만, 형을 대하는 것처럼 형수를 대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제도 한쪽에 있는 빵집에서 이루어진 소소한 만찬과 함께, 그리고 서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체아 제국 건국제와 함께.
용사 일행의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 * *
연합이 사라지며 각국에서 소집된 연합군은 일자리를 잃었다.
동부가 멀쩡했다면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겠지만, 그 동부가 엉망이었다.
성황국은 성인을 질투한 교황이 국가를 악마에게 바쳐 국가 자체가 사라졌다.
마족의 소굴이 된 성황국에게 침략당해 멸망한 국가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국가에 소속되어 있던 병사들은 동부로 돌아가지 않고 서부에 남길 택했다.
제국에서 차출된 군인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마족을 만들고, 마족을 이용해 서부를 멸망시킨 최악의 황제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를 죽이고 새롭게 황위에 오른 마족이자 황제, 마황 베이올라 므에실리고의 뜻에 따라 므에트 제국은 마족을 위한 나라가 되었다.
다수의 귀족이 마황에게 저항했으나, 그녀는 마황 이전에 마왕을 죽인 용사였다.
구름을 가르는 그녀의 무력에 저항은 무의미했다.
공국은 베이올라 므에실리고를 일개 마족이라고 격렬히 비난했으나, 보편 기적의 주인이자 성인, 그리고 신이 된 인간인 율란 에고만이 마황의 조언자를 자처하고, 도둑 아르고가 여전히 제도에 살고 있다는 게 알려지자 공국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동부가 어지러우니 연합군 소속 병사 다수가 서부에 남기를 택했다.
서부의 단점은 만성적인 물자 부족이었다. 동부의 상황이 서부와 크게 다를 게 없어지자 차라리 밥이라도 잘 나오는 서부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다수였다.
연합군 소속 지휘관과 병사들은 지주들에게 고용되어 군사력으로 작용했다.
전 연합군 소속 지휘관이자 현재는 서부 지주 연합 대표인 하일리에게 고용되어 동부와 서부의 경계를 감시하는 업무를 맡은 기사가 있었다.
망루 위에서 졸고 있던 기사는 부관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기사님, 저기 난민이 옵니다.”
“오늘 난민 신고가 있던가?”
“없습니다.”
서부가 동부와의 경계에 군대를 배치한 이유는 마족 때문도 아니고, 동부의 침략 때문도 아니었다.
난민. 무차별적으로 서부로 유입되는 난민과 난민들 사이에 섞인 범죄자를 솎아내기 위해서였다.
서부가 어려울 적에는 난민이라면 구분 없이 받아들였지만, 서부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가진 거 없고 돈 벌 방법도 없는 난민들이 강도와 마적으로 돌변할 수 있음을 서부 지주들은 몸으로 겪었다.
“숫자는?”
“5천 명가량으로 보입니다.”
“폭죽 준비하고, 우선 대표부터 만나자.”
지시를 끝낸 기사는 다시 망루 난간에 기대 길게 하품했다.
“참 공교로운 우연이지 않나? 수만 연합군 사이에서 고용된 사람들이 구면이라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야 마족이 싫어서 여기 남았지만, 기사님은 공국 출신 아니십니까?”
“소문이 안 좋아. 백귀가 서부에 한 일이 한둘이야? 공국 국경에는 용사가 마족의 나라를 만든다고 칼춤 추고 있고. 돌아가도 싸움밖에 더 하겠어?”
“그럼, 여기 있어도 달라질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긴 성녀님이 계시지.”
“그건 그렇습니다.”
사지가 잘려도 살아만 있으면 성녀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
서부에 남은 초인 상당수는 아마 성녀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서부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서부의 성녀, 마황의 스승 성인. 공국만 똥줄 타게 됐군요.”
“다 백귀가 자처한 일이지. 전쟁 영웅과 불세출의 행정관도 쫓아낸 인간에게 어떤 인재가 남아 있겠어. 야, 저거 누가 시켰어!”
하급 지휘관 한 명이 말을 타고 달려가 난민 무리에 접촉하는 걸 본 기사가 난간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부관도 놀라 아래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저놈 어디 출신이야! 당장 알아오고 이전 부대 상급자한테 항의 서신 작성해! 어디서 공에 미친 놈을!”
난민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저 안에 초인이 섞여 있을 수도 있고, 말만 난민이지 멸망한 국가의 고위 귀족이 가문과 영지민을 통째로 데려온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사람을 잘못 건드리면 전쟁에 준하는 전투가 벌어진다.
“안 되겠다. 나 먼저 간다.”
망루 아래로 뛰어내린 기사가 난민 무리를 향해 달렸다.
난민 무리 사이에서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의 얼굴과 그 손에 들린 하모니카를 확인한 지휘관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사전에 신고되지 않은 난민은 서부에 들어올 수 없다. 당장 망루가 보이지 않을 거리까지 물러나라. 1분 안에 행동하지 않으면 병사를 부르겠다.”
“여기 난민 수용 허가증도 있는데, 그래도 안 될까요?”
“용병 길드 길드장 직인? 일개 용병이 이런 걸 가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하급 지휘관인 기사는 들고 있던 종이를 땅에 던지고 발로 밟았다.
난감한 얼굴로 땅에 떨어진 종이를 보고 있던 남자는 달려오는 기사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난민들 앞에 도착한 기사는 말에 탄 하급 지휘관부터 말에서 끌어 내려 땅에 내던졌다.
“이 미친 새끼가. 너 공국 첩자지? 어느 부대 소속이야?”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첩자 맞네! 첩자가 아니면 바체아 제국 황제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지.”
“화, 황제…?”
“그쯤 해둬요. 이렇게 멍청한 첩자가 어디 있겠어요.”
마르할이 칼까지 뽑으려는 기사를 말렸고, 하급 지휘관은 얼이 빠진 얼굴로 마르할과 땅에 떨어진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럼 저것도?”
“당연히 진짜지, 멍청한 새끼가. 죄송합니다, 폐하. 제발 너그러운 처사를 부탁드립니다.”
“그럴 수도 있죠. 거의 2년 만이던가요?”
“기억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억력은 좋은 편이라서요.”
기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마르할 무느두스의 역사가 돌아오며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도 서서히 알려졌다.
용사 일행 사이에 있던 한 명의 소년, 용사 일행을 이끈 길잡이의 이름이 그것이었다.
용사 일행의 길잡이이자 바체아 제국의 황제, 그리고 서부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의 주인.
그게 눈앞에 있는 사람의 정체였다.
“들어가도 되죠? 환자가 많아서요.”
“가셔도 됩니다. 병사들을 붙여 드릴까요?”
“순한 사람들로 부탁해요. 저는 길드에 한번 들러야 해서요.”
“폐하께서 말입니까?”
“지금은 용병 마르할이에요. 형식은 지켜야죠.”
“알겠습니다.”
용병을 자처하는 특이한 황제가 사라지고,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난민들은 서부로 들어섰다.
* * *
파푸란은 인생을 건 도박에서 이겼다.
마르할 무느두스의 이름이 알려지고 마르할과 인연이 있는 파푸란은 용병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새로운 용병 길드의 주인이 되었다.
마르할이 그 마르할 무느두스라는 걸 알았을 때는 파푸란도 깜짝 놀랐지만, 이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용병 길드의 주인이 됐다고 그의 고생이 끝난 건 아니라는 것을.
마르할이 태연하게 인사하며 길드장 집무실로 들어오자 파푸란은 우선 목청껏 소리부터 질렀다.
“파푸란, 잘 지냈어요?”
“미친놈이 1년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워워. 황제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예요.”
“여기 있을 땐 그냥 용병으로 취급해 달라며! 또 난민이냐! 또 난민이겠지! 황제나 지주 이름을 쓰면 될 걸 왜 일일이 위조문서를 써서 보내냐고!”
지주들은 보유한 땅의 크기에 따라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마르할이 보유한 땅과 세력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난민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다.
지주가 아니더라도 감히 누가 바체아 제국 황제의 일에 항의할까.
제도만 남은, 이름뿐인 바체아 제국이지만, 제국은 제국이었다.
제국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바체아 제국에 자리 잡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결정적으로 황제 본인이 일인 국가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는 괴물이었다.
그런데 저놈은 꼭 자신의 이름으로 된 위조문서로 난민을 보냈다.
용병 길드가 받아들인 난민은 모두 용병 길드가 관리해야 했다.
용병들 사고 치는 거 관리하기도 바쁜데 수천에서 때로는 만 명에 달하는 난민까지 관리하느라 파푸란은 요새 머리가 빠질 지경이었다. 아니, 진짜 머리가 빠졌다.
“이거 안 보여? 다 너 때문이라고. 내 머리 어쩔 거야!”
“권력에는 책임이 따라야죠. 길드장이 싫으면, 다시 지부장이나 할래요?”
“…그건 아니고.”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어디 가게?”
“1년 만에 돌아왔으니, 이것저것 처리해야죠.”
마르할이 길드장 집무실을 나갔다.
“비슷한 일이 전에도 있었던 거 같은데.”
1년 동안 자리를 비운 저놈이 돌아오고, 그리고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곡창지대가 열리고 두 번째 마왕이 강림했으며 므에트 제국이 사실상 멸망했다.
“아니지. 아닐 거야. 용사 일행도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파푸란은 닭살이 돋은 팔을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