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does the land document of the fantasy Demon Castle belong to? RAW novel - Chapter 4
제4화
카리안과 헤어지고 마르할은 흑마에게 각성제를 먹였다.
되도록 쓰고 싶진 않았지만, 놈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뛰지도 않겠다는 듯 느릿느릿, 사람이 걷는 것보다도 느리게 움직였다.
어쩔 수 없이 마르할은 각성제를 먹였고, 녀석은 달렸다.
혀를 빼물고, 늙은 몸을 끌고, 기수는 안중에도 없이 한 시간을 넘도록 전력으로 질주하다 끝내 쓰러졌다.
죽어가고 있음에도 흑마는 만족한 눈치였다. 흐릿한 동공에 후회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게 꿈을 이뤘다는 것에서 오는 만족인지, 단순히 마약성 각성제에 자극받은 몸의 반응에서 오는 만족인지까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놈의 마지막은 그래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편히 가라.”
프힝힝, 흑마가 다 죽어가는 울음으로 답했다.
마르할은 허리를 펴고 주변을 살폈다.
말 한 마리가 쓰러져 죽을 정도로 달렸는데도 벌써 사방에 붉은 깃발이 보였다.
깃발을 꽂는다고 끝나면 좋겠지만, 토지 경주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땅을 차지했으면, 그걸 지키고 키워야지.’
측량사는 깃발과 깃발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다. 그리고 그 중간값을 구해, 되도록 사각형이 되도록 토지를 가른다.
깃발도 마음대로 꽂는다고 끝이 아니다.
깃발이 인정되려면, 깃발과 같은 높이에서 봤을 때 동쪽에 다른 깃발이 보여야 한다.
한 번에 차지할 수 있는 토지를 제한하는 수단이었다. 그게 아니면, 깃발 하나를 들고 서쪽 끝까지 가는 사람도 나올 테니까.
높은 깃발일수록 멀리서도 보이고, 그건 많은 땅을 의미했다.
가벼운. 빠르게 운반할 수 있다.
접이식. 편하게 휴대할 수 있다.
긴. 멀리서도 보인다.
가볍고 긴 접이식 깃발이 비싼 이유다.
깃발을 꽂고, 그게 보이면 끝.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규칙이지만, 그것도 이유가 있다.
규칙은 허술할수록 좋다. 규칙의 빈자리에 들어가는 건 연합이 가진 무력과 권력이다. 그리고 귀족이 누대에 걸쳐 쌓은 규칙을 피하는 방법들이다.
어, 이거 깃발 사이 거리가 애매하네? 그럼 측량사 재량대로 처리해야지.
저 강은 깃발 사이에 걸쳐 있네? 둘 중에 제국 소속이나 성황국 소속 없냐? 있다고? 그럼 그 사람한테 줘.
실제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규칙을 어기는 것도 아니니 처벌도 없다.
그렇게 좋은 땅은 모두 귀족이나 그 관계자가 가져가고, 뒷배 없는 평민에게 주어지는 건 어떤 자원도 없는 맨땅이 대부분이다.
목초지, 광산, 대규모 농사가 가능한 평야 등을 두고 벌어지는 토지 경주는 이미 그들만의 무대가 된 지 오래다.
마르할은 하모니카를 꺼냈다.
몇 달 전 혼자 서부를 탐험하다 주운 물건으로, 그때부터 유용하게 쓰는 악기다.
전에 여기 왔을 때는 침묵을 버티지 못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어 몰랐지만, 끝없이 펼쳐진 길을 혼자 걷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하모니카와 함께 마르할은 사방에서 붉은 깃발이 올라오는 평야를 통과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게 아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고 있다.
기사나 초인은 아니고, 일반인이다. 얼굴이 다급하다.
‘쫓는 사람은 안 보이고, 쫓길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도 안 보이고, 그냥 도둑인가.’
귀족이나 상인에게 고용되어 토지 경주에 참가해서 물건을 훔쳐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잡도둑 때문에 꽂은 깃발을 다시 뽑을 수도 없으니, 눈 뜨고 당하는 사람이 꽤 된다.
두 마리 말은 마르할을 향해 똑바로 달려왔다. 말에 탄 남자들이 각자 무기를 뽑았다.
“돌아가는 김에 한 명 더 해 먹겠다?”
토지 경주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니, 벌 수 있을 때 크게 벌어야지.
저들의 뜻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당해주겠다는 건 아니고.
마르할이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 두 개를 주웠다.
말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피하지 않는 마르할을 보고 남자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르할은 들고 있던 돌을, 밭에 씨 뿌리는 아낙네처럼 툭 던졌다.
날아간 돌이 말의 눈에 명중했고, 눈을 다친 말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달리던 말 위에 있던 남자들이 허공에 던져졌다.
말이 마르할 옆으로 미끄러졌고, 두 명의 남자는 마르할 앞에 목부터 떨어졌다.
“가져갈 것도 없나.”
마르할은 죽은 말과 사람을 한번 보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 * *
카리안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죽은 말의 옆구리에 마른 장작과 부싯돌을 챙겨왔지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불필요한 짐을 최대한 줄였다. 모닥불도 처음에는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르할과의 만남으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경고를 듣지 않는 사람이면 누구든 쏴라. 한 명이면 맞혀야 하고, 두 명 이상이면 한 명을 죽여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지주의 조언이다.
경주에 나가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방해를 뚫고 땅을 얻은 사람의 조언.
마르할이 가고 카리안은 고민했다.
탁 트인 길 위에서 모닥불 하나가 얼마나 눈에 잘 들어오는지 그는 안다. 모닥불을 피워두면 표적이 여기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불을 피우지 않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도록 했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밤에 쇠뇌 세 발을 쏘았고, 두 명을 죽였다.
방아쇠를 한 번 당길 때마다 심장도 함께 튀어 나가는 기분이었다.
첫 살인의 악몽은 꿈 앞에 흐릿했다. 그의 모든 정신은 깃발과 땅과 어둠에 쏠렸다.
자신의 것이 될 땅을 어루만졌다. 깃발은 공국에서 가장 커다란 산맥인 만년설 산맥처럼 웅장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다가오는 하이에나가 없음을 알린다.
내가 지주가 된다. 지주가 될 수 있다.
내 땅, 내 영혼.
소작 지을 땅도 얻지 못해 마을 처녀들에게 멸시당하던 카리안이 영주 부럽지 않은 땅을 가진 지주가 된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각성제 과다 복용으로 죽은 그의 말과도 비슷한 눈이었다.
새벽이 왔다. 지평선 끝에서부터 태양이 평등하게 세상을 비췄다.
카리안은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방향에 쓰러진 두 구의 시체 옆에는 단검이 떨어져 있었다.
카리안도 저것과 비슷한 단검을 가지고 있다. 잡화점 에나에게서 경주에 쓸 물건을 달라고 하면 다른 몇 가지 물품과 묶어서 주는 단검이다.
카리안은 애써 시신의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저 중에 그가 아는 얼굴이 있을 것만 같았다.
시신이 입은 옷이나 체구도 어쩐지 눈에 익었다.
그는 더욱 눈에 힘을 주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이에나는 줄어들지 않았다. 반대로 늘었다.
그들은 카리안의 깃발을 보고 탐욕에 눈을 빛내다가, 얼굴과 가슴에 화살을 맞은 시체를 보고는 아쉬운 듯 몸을 돌렸다.
“마르할이 맞았어.”
다가오는 사람은 먼저 죽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죽지 않는다.
카리안은 쇠뇌를 품고 기다렸다. 물도 입에 대지 않았지만, 배고픔은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긴장과 희열이 용솟음쳤고, 그의 눈빛은 태양 아래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해가 하늘의 중심을 지났다. 저 멀리서 십여 마리의 말을 탄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앞에는 하얀 깃발을 든 기수가 있었다.
기수에 밀려나듯 하이에나들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측량사.
거대한 토지에 세상에서 가장 비싼 한 줄의 선을 긋는 연합의 섬세한 손가락.
카리안은 쇠뇌를 손에서 놓았다.
그들의 눈이 닿는 곳에서 깃발을 빼앗는 건 연합이 깃발에 부여한 가치를, 토지 경주의 공정함을, 연합에 가입한 모든 국가와 조직의 권력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그들이 왔으니 이제 안전하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쏟아졌다. 꾸벅꾸벅 조는 카리안 앞에 어느새 측량사들이 도착했다.
깃발을 든 기수 뒤에 있던 측량사가 로브를 벗었다.
“저기 있는 시신은 당신 작품입니까?”
카리안은 황야에서 듣기 힘든 부드러운 목소리에 놀라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말의 뒤편에 매달린 지팡이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세상의 신비를 탐구하고 다루는 자들.
여자라도 마법사라면 이 황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제가 죽였습니다.”
“깃발은, 누구 돈으로 샀죠?”
“제 돈으로 산, 제 깃발입니다.”
여인은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깃발 위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것은 존재했다.
“임시 망루 확인. 주변 깃발 확인. 깔끔하군요. 말뚝조 출발.”
십여 명의 무리에서 두 명이 이탈해 남쪽과 북쪽으로 달려갔다.
저들이 말뚝을 꽂으면, 그게 카리안이 가진 땅의 경계가 된다.
“나이와 이름.”
“카리안. 스물세 살입니다.”
“스물세 살 카리안. 공국 출신. 이건 임시 토지 문서입니다. 가지고 연합 본부나 임시 본부로 가면 정식 문서로 교환될 겁니다.”
카리안은 마법사에게서 수첩에서 찢은 종이 한 장을 받았다.
토지 경주의 대가가 고작 종이 한 장? 불안한 심정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저기… 이걸 잃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제가 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경주 과정이 어떠했든 지금부터 당신은 연합이, 동부의 모든 나라와 세력이 인정하는 지주입니다. 종이 한 장 도둑맞은 정도로 땅을 빼앗기는 일은 없습니다.”
다그닥 다그닥. 토지 경주가 시작된 이후 처음 듣는 규칙적인 발소리와 함께 측량사들이 멀어졌다.
“으아아아! 끄흐흐으윽….”
한참이나 웅크려 울던 카리안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동쪽으로 걸었다.
* * *
마르할은 무너진 도시 잔해 앞에 도착했다.
도시 입구부터 피 냄새가 진동했다.
몸통이 반 토막 난 말과 어디 한 군데가 잘린 사람들이 제일 많았고, 급소만 딱 찔린 시신과 불타 죽은 시신도 보였다.
“기사급 전력이 붙었나.”
기사는 보통 검으로 자를 수 없는 걸 자르는 초인을 칭하는 말이지만, 병사 중에 창병도 있고 궁병도 있듯 기사도 수색 기사나 정찰 기사 등 다양한 이름과 능력을 가진다.
‘기사만이 아니라 돈으로 고용된 기사급 용병도 다수가 들어가 있겠지.’
평범한 사람이 저 안에 들어가면 창졸간에 몸이 토막 나거나 머리가 달아나는 수가 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건 상책이 아니다. 다른 땅을 얻어도 돈을 벌 방법은 많다. 가치 있는 땅이 아니라 더 많은 땅이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다시 하모니카를 입으로 가져가려던 마르할이 동작을 멈췄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국어와 공국어. 둘 다 한없이 표준에 가까운.’
언어의 표준이란, 해당 언어를 주도하는, 지배층이 쓰는 언어를 말한다.
다른 사람은 구분하지 못할 차이다. 하지만 유별난 지인들을 둔 탓에 마르할은 언어 구분에는 제법 자신이 있는 편이다.
하나도 듣기 힘든 표준어가 둘이나 들리고, 심지어 둘은 싸우고 있는 걸로 보였다.
멸망한 제국, 유물, 숨겨진 등의 단어가 포함된 말이 오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뭔가가 있나?’
예전에 도시를 탐색할 때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때는 동행이 있었고, 그 안에는 이 분야의 전문가도 있었다.
그래도 표준어를 쓰는 사람들이 근거도 없이 이 먼 서부까지 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들어갈 가치가 있다.
* * *
마왕 강림 이전 대륙에는 두 개의 제국이 있었다.
서쪽의 바체아 제국과 동쪽의 므에트 제국.
지금은 므에트 제국이 유일한 제국으로 불리지만, 마왕 강림 이전에 제국 하면 사람들은 바체아 제국을 먼저 떠올렸다.
므에트 제국은 200년가량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주변 국가로부터 제국이라 불리기 시작한 건 정복 황제였던 선황부터다.
바체아 제국은 역사가 500년이 넘으며 국가가 성립할 당시부터 제국에 어울리는 규모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왕 강림 이전까지 500년 넘게 서부 전역에 영향력을 미치던 게 바체아 제국이다.
마족 발호와 함께 제국은 망했고, 제국이 가지고 있던 막대한 자산과 신비한 힘이 깃든 유물은 각지로 흩어졌다.
서부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바체아 제국을 있게 해준 보물들이다.
서부 개척에 나선 사람 사이에는 땅보다 제국의 유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건 므에트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바체아 제국이 500년 동안 유지된 저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관심이 얼마나 큰지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이십여 명의 자식을 모두 모아두고 나이, 성별과 무관하게 바체아 제국 500년의 비밀을 가장 많이 밝혀낸 사람이 차기 황제가 될 거라고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베이올라 므에실리고도 황위 계승권자로서 바체아 제국의 비밀을 찾았다.
바체아 제국의 정보를 수소문하고, 마족의 침략에 쫓겨 공국으로 망명한 행정관을 찾아가기도 했다.
평생 제도를 벗어난 적 없던 그녀가 직접 발로 뛰어 세상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서부까지 왔다.
토지 경주에 참가하는 시늉까지 하며 행정관이 말한 지점까지 오자,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국의 기사였다. 영지 문양까지는 모르지만, 영지 문양 위에 공국 국기를 달아둔 것을 보면 보통 위치는 아니었다.
앞에서는 그녀의 호위 기사가 그녀를 대신해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서로 제국어와 공국어를 사용해 제멋대로 떠들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부 자존심 싸움이다.
귀족이면 간단한 외국어조차 못 할 리가 없으니, 네가 이쪽의 말에 맞추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베이올라는 뚱한 얼굴로, 끝나지 않는 말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행정관이 입을 놀린 것 같습니다.”
“그놈이? 내가 누군지 밝혔는데도?”
“예. 망명한, 망국의 행정관입니다. 도망가 버리면 찾을 방법이 없죠. 그놈에게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정보를 팔고 도망가는 게 이득이었을 겁니다. 그때 죽였어야 했습니다.”
그녀의 전속 기사이자 두뇌 역할을 하는 레벨라의 말이었다.
“천한 놈이 자비를 베풀어주었거늘….”
사실은 피를 보기 싫었다.
그녀는 황위 계승권자 사이에서는 어린 축에 속했다. 나이 찬 그녀의 형제들은 경쟁자를 늘리고 싶지 않아 했고, 음습하게 형제들을 괴롭히는 일도 잦았다.
그녀는 키우던 고양이 세 마리가 사지가 분해되고 자기 내장에 목이 졸린 상태로 정원 나무에 걸려 있는 걸 봤다.
그녀의 침실 바로 옆에 있는 나무라, 잠에서 깬 베이올라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 처참한 광경을 눈으로 보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피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베이올라가 손짓하자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물러났다. 그녀는 레벨라만을 불러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떡하지? 피가 날 거라고! 피! 기절하면 어떻게 해!”
그녀라고 피 공포증을 고쳐보지 않으려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공포증을 고친다는 의사들의 처방은 그녀 앞에서 황소 한 마리를 단칼에 토막 내는 것이었고, 피와 내장을 폭발하듯 쏟아내며 쓰러지는 황소의 기억은 그녀에게 더한 악몽을 심어주었다.
“황녀님,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긴 무법지대라 불리는 서부입니다.”
“내가 있잖아! 제국의 황족인 내가!”
“서부 사람들은 제국 황족보다 개척촌 지주를 더 무서워할 겁니다.”
베이올라는 발을 동동 굴렀다. 속으로만.
이 자리에, 그녀의 본래 성격을 아는 건 레벨라밖에 없다.
다른 기사들에게 그녀는 냉혹한 제국의 황녀였고, 앞으로도 쭉 그렇게 보여야 했다.
기사들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금방 칼이 뽑혀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기사들도 은근히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베이올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화를 참는 사람처럼 진심과 거짓이 반씩 섞인 한숨을 내뱉고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악기 소리가 들렸다. 토지 경주, 그것도 가장 경쟁이 치열한 도시에서 악기?
베이올라는 물론이고 언쟁을 벌이던 기사들도 잠시 행동을 멈췄다.
악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부서진 건물 조각을 넘어 한 사내가 하모니카를 불며 등장했다.
하모니카를 입에서 뗀 사내는 처음은 제국어로, 다음은 공국어로 유창하게 말했다.
“혹시 통역사 필요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