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
1화
[중원이 하나로 통일된 지 어느덧 천년이 훌쩍 지났다.그것은 역대 황제들의 초월적인 무공과 막강한 황군을 통한 철권통치가 이 땅에 자리를 잡은 지도 천년이 훌쩍 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과 세상을 위해 떨치고 일어섰던 영웅의 후예가 권력과 힘에 취해 타락하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던 시간이기도 했다.
시황제의 폭정을 막기 위해 새로운 제국을 새웠던 고조의 뜻은 이미 백성의 피, 그리고 가진 자들의 역겨운 땀과 탐욕에 절어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더럽혀졌다.
반대를 허락하지 않는 절대자 황제와 그 뜻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황군의 제국은 기나긴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피를 빨아먹고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막힘없이 뚫린 도로와 비대해진 도시들은 밤만 되면 저 하늘의 별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린 듯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렸으나 그 드높은 건물들의 진창에는 굶주린 백성들의 끈적한 피와 눈물, 벗겨진 살갗에서 흐른 진물로 지저분하게 질척거렸다.
그것을 보다 못한 수많은 기인이사와 무인들, 협객, 뜻있는 자들이 칼을 들고 일어선 것은 이 제국을 세웠던 고조의 신화를 듣고 자란 제국인들에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무수히 많았던 협객 중 황제와 황군을 깨부순 자는 없었다.
그것 또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몰랐다. 한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절세의 무공을 익힌 황군과 그 중의 가장 강한 자로 키워질 수밖에 없는 황제가, 어느 산골에 틀어박혀 오래된 옛 무공을 홀로, 혹은 서넛이서 익힌 자들에게 진다는 것은 쉬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일 터였다.
힘없는 백성들을 모아 백만의 군세를 일으켜도 일만의 황군이 몰려와 열 번씩만 칼을 휘두르면 모조리 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원에 있는 문파들이 무공을 익히는 목적은 황군이 되기 위한,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한 무공이 되어가게 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끝내 제국의 수많은 백성은 많은 자본을 가진 상인들과 권력을 탐하는 탐관오리들에게 착취당해, 이 땅에 태어나 옅은 무덤에 몸을 누이는 순간까지 자신의 땅을 한 마지기, 혹은 자신의 공방 한 칸을 가져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저 제국의 자그마한 부품이 되어 머리 위에 앉은 자들의 배를 불리는 일에 평생을 바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것이 지옥의 또 다른 모습인가 싶던 절망의 나날. 그 어느 날.
새로운 땅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범선을 타고 동쪽 망망대해를 수십 일을 항해하면 나타나는 땅이었다. 드넓은 초원과 숲, 높은 산과 깊은 계곡, 무심한 황야와 도도한 강이 흐르는 거대한 대지였다. 더불어 중원의 것과 대동소이한 식물과 동물들, 그리고 역시 크게 다를 것 없는 요괴들과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막 제위에 올랐던 지금의 황제는 선대 황제가 심심풀이로 지원했던 사업이 정말 성공하자 놀라워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자의 기록에 따르면 탐험대가 가져온 신대륙의 동식물과 제국인과는 조금 달랐던 사람들, 황금과 은 등등을 본 황제는 정말 무덤덤해 보였더랬다.
그것은 천년이 넘게 건재한, 오히려 나날이 흐를수록 강대해져 가는 제국의 철혈 황제에게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심함이 그의 완전한 본심은 아니었는지 곧 신대륙을 탐험한 자들에게 많은 보물과 새로운 범선이 하사되었다. 신대륙과 제국 사이에 안정적인 항로를 구축하라는 명령과 함께.
황제의 전폭적인-비록 그것이 황제 입장에선 심심풀이 정도에 불과하더라도-지원을 받은 탐사대와 조선업계는 빠르게 항로와 지도를 완성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항로와 거대한 선박을 타고 수많은 제국인이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신대륙에 있는 원주민들은 기껏해야 백이 좀 넘는 부족 단위의 집단밖에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특별히 넓은 농사를 짓지도 않았다. 자연히 주인 없는 땅이 넘쳤고 제국의 신민들이 보기에 그것은 잔인한 탐관오리와 냉혹한 거부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자기 땅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보였다.
몇십 년에 걸쳐 수십, 수백만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가는 상황에 황제는 그것을 말리기는커녕 도리어 황실 산하에 함대를 만들어 다른 상인들의 배와 경쟁하며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게다가 그곳에서 자기 손으로 일군 땅은 그 백성의 것이란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필자의 생각으로 황제는 이미 수억을 넘어가는 제국의 백성들이 한 줌 바다를 건너더라도 별문제가 없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도리어 황실의 힘을 낭비해 새로운 땅을 개간할 필요도 없이 백성들이 알아서 밭을 갈아준다니 속으론 기뻐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는 수십 년 후, 자신의 치하 말기에, 혹은 제 아들 대에 이르러 그 땅이 무르익으면, 그 잔악무도한 황군을 보내 그것을 모조리 집어삼키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철혈 황제와 황군도 짐작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이 힘없는 백성들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황군의 눈을 피해 음지에서나마 힘겹게 끈을 이어가던 협객들, 깊은 산과 계곡에 숨어 기회를 보던 기인이사들, 죽어 사라진 줄만 알았던 옛 왕조들의 가문들과 황제의 권력에 몸을 숨기고 힘을 기르던 이들이 새로운 왕조와 새 세상을 꿈꾸며 바다를 건넌 것이다.
물론 뜻있는 자들만 바다를 건넌 것은 아니었다.
도시의 어두운 곳에서 죄를 지은 범죄자들, 신대륙에서 한몫 잡으리라 바라는 시답잖은 한탕주의자들, 사악한 마공을 익힌 미치광이 마인들 등등, 온갖 사악하고 이기적인 자들도 바다를 건넜다.
당시 식자들은 그 모든 사람이 한곳에 모여 마치 끓는 기름에 들이부은 물처럼 폭발하리라 염려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질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필자의 생각에 그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신대륙은 아주 넓었고, 그 넓이에 비하자면 사람은 아주 적었던 탓이리라 생각한다.
···작금의 현황을 보고 많은 식자들이 그 식자들의 수만큼 많은 서적과 글줄을 쏟아내는 것을 필자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변변치 못한 필자의 생각 한 줄기를 엮어 올리고 싶다.
그것은 이 땅을 집어삼키려는 황제의 의도가 실패하리라는 것이다.
천년도 더 전에는 비인부전이라 하여 마땅히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연이 닿지 않는다면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와 진시황의 폭정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선 이들은 대부분 협객이었다.
하지만 고조가 그 진시황과 패왕을 물리치고 난 이후 세워진 제국의 모습은 협객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고, 거기에 강대한 제국의 권력과 감시 아래선 힘을 키울 수 없어 하염없이 지하를 떠돌아야 했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이 제국, 황제, 황군과 멀디먼 새로운 땅은 달랐다.
이곳, 협객과 악인, 선인과 마인이 넘쳐날 이 땅은, 필자가 감히 말하건대 일천 년 전 옛 무림으로의 회귀라 할 수 있었다.
각자의 무수히 많은 신념과 뜻, 이기심, 욕심, 천하의 온갖 무공이 서로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거기서 튀는 불티와 땀은 새로운 무림의 생명력이 되어 꿈틀거릴 것이고, 황제의 생각과는 다르게 질기고 단단한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제국의 억압 없이 오직 무림인 각각의 믿음을 위한 투쟁은 옛 낭만의 실체가 되어 그들 마음속의 불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렇게 천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피어난 무림의 불씨는 바다 건너에 있을 황제와 황군의 힘으로는 쉽게 꺼뜨릴 수 없는···]
서책의 뒤 내용은 피에 축축이 젖어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게 언제적 이야기야?”
쭈그리고 앉아 책을 뒤적거리던 남자는 손에 들린 그것을 의미 없이 두어 번 펄럭이고는 그대로 바닥에 툭 던졌다. 하늘을 보고 누운 시체의 가슴팍 위로 그 서책이 떨어졌다. 거기 크게 벌어져 있는 상처 덕분에 그나마 멀쩡하던 서책의 나머지 부분도 천천히 피에 젖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낭만은 이 양반아, 편안한 집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군것질거리 씹으며 무협지 보는 게 낭만이고. 원래 오백 년쯤 가는 유방 그 인간 나라가 천년을 넘긴 이유가 바로 그 무림, 무공 때문인데 왜 거기서 낭만을 찾아.”
죽은 자를 향해 텁텁한 핀잔을 날린 남자는 이내 입매를 찡그리듯 길게 늘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찌르는 불그스름한 석양빛에 눈마저 찡그렸다.
길쭉한 지평선을 그리는 드넓은 평야 위로 기울어진 태양이 오늘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흘리고 있었다. 연한 구름은 그 평야 위에 넓게 늘어져 석양을 받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뚜렷하게 나뉘며 자신의 다채로움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건 남자 주변의 시체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와 여자, 노인 등 일고여덟 정도 되는 시체들이 몸 어딘가에 큼직한 상처 하나씩을 달고 자유분방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한쪽 바퀴가 부러진 마차가 기우뚱히 자빠져 있었는데, 그 안의 짐이 어지럽게 끄집어져 있는 것과 말의 사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도적질을 당한 듯 보였다.
쭈그려 앉아 있는 남자는 기우뚱한 마차만큼이나 삐뚜름한 눈으로 식어가는 시체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눈이 마차 주변에 너저분하게 풀어진 옷가지로 향했다. 남자는 뭔가 쓸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 뒤적거렸으나 결국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엔 아직 작은 아이가 입을만한 옷가지가 몇몇 보였다.
지금 누워있는 시체 중 아이는 없으니 아마 도적들이 잡아갔을 것이다. 자신들과 같은 도적으로 키우던가, 아니면 싼값에 팔아치울 터였다.
“···거참 안타깝군.”
혼자 중얼거린 남자는 왼손에 들고 있던 삿갓을 머리에 쓰며 가볍게 침을 뱉고는 휫 하고 짧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조금 떨어져 있던 그의 말 조조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허리에 찬 칼을 한번 추스른 남자는 거침없는 동작으로 말안장에 올라타고는 등자에 끼운 발로 말의 허리를 툭툭 쳤다.
말 조조는 그 동작에서 주인의 뜻을 알아듣고는 푸르륵 투레질 한번을 하며 곧바로 달려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붉은 평야 위를 말과 그가 달렸다. 남자의 옷과 삿갓 아래로 모래 섞인 건조한 바람이 불었고, 안장과 몸은 말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렸다. 죽은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을 시체들을 뒤로한 그는 그렇게 석양을 향해 달려 나갔다.
느지막한 신대륙의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