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0)
10화
* * *
자기를 감 의원이라고 부르라 말한 노인이 찻잔을 홀짝거렸다. 그러다가 창밖을 보며 물었다.
“누굴 기다린다고?”
배에 붕대를 감고 의자에 앉아있던 이윤은 노인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장 무사님입니다. 저와 제 아들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죠.”
그들이 바라보는 창밖에는 작은 남자아이가 작은 솔로 말의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아이의 신경은 말이 아니라 마을 앞 황야를 향하고 있었다.
이환을 바라보던 감 의원이 피식 웃었다.
“자네 말만 들어보면 협객인데··· 난 자기 입으로 협객이라 한 놈 중에 진짜 협객이라 불러줄 만한 놈을 본 적이 없네. 게다가 혼자서 마적 서른? 못 돌아올 것 같은데.”
“장 무사님은 자기를 협객이라 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도적 열댓을 상처 하나 없이 물리치기도 하셨고요. 왜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감 의원은 웃는 낯 그대로 이윤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야 난 그 무림인이라는 작자들을 아주 혐오하는 사람이니까. 그놈들이 결국 하는 게 뭔가? 좋은 밥 처먹고 사람이나 죽이는 살인마들이지. 돈을 줬으니 식사는 준비해 주겠네. 하지만 그 장 무인이라는 놈이 오면 이 마을에서 소란 피울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말라 전하게.”
“···의원님이 직접 말하면 되지 않습니까?”
감 의원은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가며 등을 보였다.
“난 무림인이랑 말 안 해.”
이윤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장건은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지만 감 의원에겐 그저 이 조용한 마을에 들이닥칠 문젯거리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평안히 살던 땅에 갑자기 끼어든 것은 그들이었으니 조심해야 하는 것도 그들이긴 했다.
그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말을 쓰다듬는 둥 마는 둥 하던 이환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이제 시늉하는 것도 지쳤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말 묶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서 뚱한 표정으로 마을 초입을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이윤은 걱정이 들었다. 장건이 돌아올 수 있을까? 칼에 찔려 누워있느라 그의 실력을 제대로 보진 못했다. 하지만 싸움이 끝나고 나서의 그 여유로움과 맨손으로 점혈을 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고수가 맞는 것 같긴 했다.
게다가 그가 보여준 마지막 뒷모습이 이환의 가슴속에 진하게 남은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한두 마디 겨우 나눠본 사람을 저렇게 기다릴 리 없을 터였다. 그는 장건이 무사히 돌아왔으면 했다. 그 자신보다는 이환을 위하여.
이윤은 짧은 상념을 한숨에 담아 내쉬며 감 의원의 식사 준비를 돕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준 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 절로 끙 소리가 나지만 간단하게 손이라도 도와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것 같았다.
그때 창밖에서 이환이 손을 빼며 몸을 바로 세우는 것이 보였다. 몸을 일으키던 이윤은 녀석의 밝아지는 표정을 보고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얼른 문을 열고 나갔다.
마을 초입에 느긋하게 말을 몰아오는 사람이 보였다. 장건이었다. 옷 여기저기 베이고 눈 위 이마에 상처 하나가 나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멀쩡해 보였다. 삿갓이 없어서인지 햇빛에 눈살이 찌푸린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밖으로 나온 이윤 부자를 보고 그쪽으로 조조를 몰아갔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부자를 보며 슬쩍 웃었다.
“배가 고픈데.”
감 의원은 건물 안으로 들어온 장건을 보고 조금 놀란 듯 보였으나, 그가 젓가락을 들어 식사하는 동안 정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마의 상처를 보고 치료해주는 동안에도 굳게 입을 다물어 장건이 이윤에게 그가 혹시 벙어리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차마 감 의원이 한 말을 전해줄 수 없었던 이윤은 그냥 애매하게 웃었다. 그런 감 의원이 입을 연 것은 장건의 말을 듣고 나서였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지.”
“내 집에서 자려면 돈 더 내게.”
이윤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장건은 선선히 웃으며 말했다.
“노인장 벙어린 줄 알았소.”
“내가 말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겠지. 됐고, 내 집에서 자려면 돈이나 더 내게.”
“그, 감 의원님! 제가 나중에 우편으로 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당장은···”
이윤이 얼른 나서서 그렇게 말했으나 감 의원은 장건만 바라보며 말했다.
“돈을 더 내던가, 아니면 나가든가.”
그 굳은 노인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장건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말없이 동전을 냈다. 감 의원은 돈을 받고 의원 안을 분주히 정리하더니 문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 내가 돌아오기 전에 떠나게.”
이윤은 꽝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장건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장 무사님. 소란을 싫어하시는 분 같습니다.”
“낯선 이를 경계하는 건 당연하지.”
그렇게 말한 장건은 한쪽에 있던 긴 의자에 몸을 누이며 눈을 감았다. 뭔가 말하고 싶어 눈이 반짝거리던 이환은 그가 그렇게 누워버리자 실망한 듯 입매를 길게 늘였다. 이윤은 작은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도적 서른을 물리치고 온 장건도 피곤하겠다 싶어 그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위로했다.
다음날 일찍 눈을 뜬 장건과 이윤 부자는 어제 먹고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때우고 곧장 떠날 준비를 했다. 풀어두었던 말안장을 다시 묶고 차가운 새벽공기에 옷깃을 여몄다.
그때 어젯밤 사라졌던 감 의원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을 멀뚱한 눈으로 보는 장건에게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뭐요?”
“그 꼴을 하고 다닐 건가? 싸움질 좋아하는 무림인이라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보따리 안에는 검은색에 넓은 겉옷 하나가 있었다. 여전히 여기저기 칼집이 난 옷을 입고 있던 장건은 얼른 그 옷을 입고 고맙다고 말하려 감 의원에게 눈을 돌렸다. 하지만 감 의원은 이윤 부자와 인사하고는 장건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의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피식 웃은 장건은 깔끔한 옷을 매만져보았다. 새 옷은 아닌 것 같았지만 깨끗한 것이 잘 세탁된 옷이었다. 그는 이윤 부자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오늘 중엔 도착한다고?”
“예, 그럴 겁니다. 늦어도 저녁 전엔 도착할 겁니다.”
그들은 그렇게 그 남작호라는 마을을 떠났다.
아침 해가 떠오를 적 출발한 여정은 중간중간 이윤과 이환이 쉬어주기 위한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달리기만 했다. 그 여정이 오전을 지나 오후에 접어들면서 마른 풀만 가득하던 땅은 점점 축축하고 푸른 풀 가득한 땅으로 변해갔다. 넓고 평탄하던 지형은 전에 비해 좀 더 역동적으로 꿈틀거렸고, 깊게 파인 곳에는 졸졸 개울이 흘렀다.
키가 훌쩍하니 크고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예민한 장건의 눈에 그 나무들 너머 도망가는 사슴들이 보이기도 했다.
“괜찮은 곳에 사는군.”
“처제가 편지에 보내길 땅에 자갈이 많아서 농사가 쉽지는 않다는군요. 그래서 농사보다는 이런저런 점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역마차가 많이 지나서 외지인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말 역마차를 볼 수 있었다. 역마차뿐만이 아니었다. 말을 타고 지나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걷는 사람, 말 하나로 끄는 작은 마차, 소가 끄는 우마차도 있었다.
개중에는 검과 칼을 찬 무림인도 많이 보였다.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사람은 없는지 대부분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쳤다.
태양이 정점을 지나 확연히 서쪽으로 치우쳐졌을 무렵 그들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쪽에 흐르는 강물에 작은 배들이 세워져 있고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청산곡은 마을이라기보다 작은 소도시 같았다. 적어도 그 소도시가 되어가는 중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런 곳에서 점포 여럿을 가지고 있다니. 그 처제라는 사람 수완이 보통이 아닌걸.”
“···두 자매가 원래부터 보통은 넘는 사람들이었죠···”
이윤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처제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죽은 부인이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얼른 그 표정을 지웠다. 아들에게 보일까 무서운 듯했다. 다행히 이환은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자기 아비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오가는 마차를 피해 가며 마을로 들어선 그들은 잠깐 헤매게 되었다. 처음 오는 곳에서 제대로 된 주소도 없이 누군가를 찾는 게 확실히 어려운 일이긴 했다. 하지만 이윤이 나서 지나는 사람들을 붙잡아가며 길을 묻더니 오래지 않아 외곽에 가게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아름답고 귀티 나는 옷감을 파는 청산곡 최고의 선씨 포목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신대륙에선 최대한 말을 길게 늘여 쓴 간판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 유행을 그대로 따른 포목점은 마을 외곽에 있었지만 손님이 없지는 않은지 지금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말을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니 한 여인이 옷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환이 그녀를 보고 소리쳤다.
“이모!”
여인은 누가 자길 이모라 부르나 고개를 돌렸다가 이환의 얼굴을 보곤 깜짝 놀랐다.
“환아! 형부!”
두 부자를 본 그녀, 자신을 선연오라고 소개한 여인은 곧장 가게 문을 닫고는 그들을 2층으로 안내했다. 이환은 자기 이모가 반가운지 연신 헤실거렸고, 이윤은 이제 정말 안심이 되는지 기운이 빠진 표정이었다.
선연오는 두 부자의 역경을 듣더니 곧바로 주머니 하나를 꺼내와 장건에게 내밀었다.
“정말 감사해요. 형부 목숨을 구해주시다니··· 정말 큰 복을 받으실 거예요.”
장건은 주머니를 건네주는 선연오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묵직한 무게에 자기도 모르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머니 안에는 무려 은전이 두 개에 동전도 한 무더기로 들어있었다.
“복은 이미 받은 것 같군.”
히죽 웃은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여기 대장간이랑 상행조합 위치 좀 가르쳐 주겠소?”
선연오는 자기가 안내해주겠다며 나섰다. 따라오겠다던 이윤은 그녀의 손에 억지로 눕혀져 나오지 못했고, 이환은 말없이 따라붙었다. 선연오와 이윤은 이환까지 막지는 않았다. 녀석은 어제부터 계속 장건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은 문을 나서기 전에 이윤을 보며 말했다.
“잘 쉬라고. 나중에 의원 꼭 찾아가보고.”
이윤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밖으로 나온 장건은 무슨 생각에선지 이환을 조조의 등에 태우고 자기가 고삐를 잡았다. 이환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가 조조를 타고 싶어 하던 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그럴 것 같더라.”
그들이 선연오의 안내를 따라 걷는 동안 입술을 오물거리던 이환이 장건에게 물었다.
“장 무사님은 어디서 무공을 배웠어요?”
장건은 그런 이환의 똘망한 얼굴을 보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저런 사람들한테.”
“···이런저런 사람들이요?”
“중원에는 돈 받고 무공을 가르쳐주는 무공 선생이 꽤 많다. 본인들 실력은 별로여도 가르치기는 잘하지.”
이환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무공은 문파에 들어가야만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돌아가는 문파도 있지. 신대륙 문파들도 그런 식이고. 옛날 정통 문파들. 하지만 중원의 문파는 대부분 그냥 입시학원이야.”
이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시학원이 뭔데요?”
“황군 입군 시험을 위한 학원들이라고. 황군에 들어가야 진짜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우고 봉급도 버니까. 황군 고수가 진짜 고수라고 불리는 이유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지.”
이환은 그 말을 듣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잠시 깊게 생각하던 녀석은 뭐라 다시 질문하려 했지만, 그보다 대장간에 도착하는 것이 더 빨랐다.
선연오가 말했다.
“청산곡에 셋 있는 대장간 중에 여기가 제일 실력이 좋아요.”
“고맙소.”
장건은 대장간에서 별다른 흥정도 없이 칼 한 자루를 샀다. 이전에 쓰던 칼은 그냥 고철값만 받고 넘겼다. 날이 너무 빠져서 그것밖에 받을 수 없었다.
“이제 상행조합으로 데려다주면 되나요?”
신대륙 상인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결성된 상행조합은 지점마다 다르지만 은행과 비슷한 업무를 하기도 했다. 장건은 안내해준 3층짜리 상행조합에서 가지고 있던 소액채권을 교환했다. 은전이 스무 닢이나 되었다. 칼을 사느라 쓴 돈이 순식간에 몇 배로 불어났다.
그는 거기에 상행조합 1층에서 파는 잡동사니 중 삿갓도 하나 샀다. 이전 것보다 빳빳한 것이 새것 티가 났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상행조합을 나섰다.
장건이 밖으로 나오자 이환을 돌보고 있던 선연오가 말했다.
“식사할 시간이 다 되었군요. 술은 좋아하시나요? 집에 꽤 좋은 술이 있답니다.”
“말씀은 고맙소.”
사양의 말에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동안 장건은 아직 조조 위에 타고 있던 이환을 가볍게 들어 땅에 내려놓았다. 멀뚱한 표정이었던 이환은 말을 올라타는 장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무사 아저씨! 설마 그냥 가려고요?”
안장에 올라탄 장건은 아저씨라는 말에 피식 웃었다.
“아저씨라니 인마. 내가 어딜 봐서 아저씨야.”
이환은 그런 장건의 다리를 잡았다.
“그, 좀 더 있다 가요. 우리 이모가 요리 엄청나게 잘한단 말이에요. 자고 갈 곳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또, 그, 그···”
“무공도 가르쳐 달라고?”
“···이왕이면요. 그리고 어떻게 아저씨 같은 무림인이 되는지도요.”
장건은 허리를 굽혀 반쯤 울먹이는 이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무공은 이것저것 잡다하게 익힌 사이비라 네가 배우긴 힘들 거다. 차라리 네 이모한테 가르쳐 달라고 해. 네 이모도 고수니까.”
이환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선연오가 깜짝 놀라서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좋으시군요.”
“아까 손을 좀 자세히 봤지. 길 안내 고맙소. 덕분에 해지기 전에 떠나겠군.”
선연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장건은 허리를 펴고 새로 산 삿갓을 썼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환을 향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착하게 살아라.”
그리고는 조조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조조는 장건이 한 것처럼 마치 인사라도 하듯 이환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터덜터덜 가볍게 뛰었다. 늦은 오후라 마을 대로에 사람이 적어 그들은 빠르게 멀어져갔다.
이환은 그렇게 멀어지는 장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옆에서 그런 소년을 바라보던 선연오는 이 아이가 지금 이 장면을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소년이 꿈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신대륙에서 묻히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권법 후계자를 찾았음도.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환이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았다.
저무는 붉은 석양 속으로 무사와 말 한 마리가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