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 * *
추양선은 젊은 시절 감산성의 혼혈아와 갈 곳 없는 외국인들을 자기 아래로 끌어모았다. 그리고 그들의 건장한 체격을 앞세워 범선들의 일감을 땄다. 소외되던 이들을 하나로 뭉치자 그렇게 끈끈할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일당은 부둣가 한쪽의 일을 전담할 수 있었다.
감산으로 들어오는 화물의 보관과 운반을 기본으로 부둣가 조직을 이뤄낸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의 조직은 큼직한 창고도 여럿이고 그곳의 직원도 서른은 되었다. 감산 외곽에는 큼직한 장원도 하나 마련할 정도로 추양선은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요 몇 주 동안 일어났던 암흑가 조직들의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 통일이 불가능하리라고, 설사 이뤄내더라도 얼마 못 가리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통찰이 맞아서 지난 며칠 사이 암흑가 조직원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잡혀가는 와중에도 그의 조직원들은 화물창고의 직원으로 무림맹의 시야에서 한 발 비켜날 수 있었다.
추양선은 이제 은퇴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여겼다. 아무리 무림맹의 눈을 피했다지만 그 영향력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적당히 머리가 굵은 부하 두셋 정도를 두고 다음 두목을 정해주거나, 아니면 감산의 부자 중 제일 적당한 값을 제시하는 자에게 사업체를 팔아치울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던 며칠 전 포가 대장간의 장물아비 자식이 물건 하나를 중계해 줬다. 먼 외국의 칼, 그것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아름다운 칼이었다. 은퇴 후 천후성으로 떠날 생각이었던 추양선은 이왕이면 재산을 가벼운 현물로 바꾸고 싶었다. 칼의 가치는 조금 더 감정해 보아야겠지만 그 칼이 장물이라는 점을 들어 생각하면 들어가는 금액에 비해 훨씬 이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장물을 사기로 했다.
“···그냥 황금으로 바꿨어야 했는데.”
추양선은 참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화끈한 열기가 그 얼굴을 비췄다. 그 뒤에 선 부하들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들 눈앞에서 펼쳐지는 참상에 끔찍함을 느끼고 있었다.
열기가 뿜어지는 곳은 창고 한가운데였다. 원래는 항구로 들어온 화물을 잠시 보관하는 창고였지만, 지금은 그 안이 깔끔히 치워지고 중앙에서는 이글이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거기서 뭉글뭉글 피어오른 연기는 천장 쪽 가까이 있는 환기용 창문으로 빠져나가 지금 감산에 가득한 안개에 섞여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 안에는 기둥에 묶인 사람 하나가 묶여 있었고, 그 앞에는 이 지랄을 벌인 원흉이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주문을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다.
“···장주님, 지금이라도···”
그의 등 뒤에 있던 부하가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저 원흉을 치던가, 아니면 무림맹에 신고하자는 이야기였다.
“으음···”
추양선은 신음을 흘렸다. 사흘 전 만난 장물 판매자는 그냥 무지렁이 도둑이 아니었다. 시커멓게 생긴 피부나 행동을 보아서는 그저 먼 나라 선원에 불과했는데, 놀랍게도 그 선원은 장물을 팔러 와서는 맨주먹으로 추양선의 조직원들을 때려눕히고 이 창고를 점거했다. 그리고 창고를 비워 공간을 만들어주길 요구했다.
그 무뢰배를 당장 무림맹에 신고하고 사건을 해결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저 무식한 곤륜노를 어떻게 이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람한 덩치 열 댓을 도저히 무공이라고 볼 수 없는 움직임으로 때려눕힌 곤륜노였다. 신분이야 원래 그의 밑에는 서역인과 혼혈이 잔뜩이었으니 어렵지 않게 위장할 수 있었다. 잘만 이용하면 은퇴가 아니라 뒷골목의 대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나무 제단도 만들어주고, 뜬금없이 장물의 주인이 찾아왔으니 입막음 비용을 요구하던 장물아비도 잡아 와 진짜 입막음을 시켜주려 했다.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 말을 듣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사흘이 지난 지금은 그 생각이 아주 많이 잘못되었다는 걸 추양선과 그의 부하들 모두 깨달을 수 있었다. 적당히 제단의 모양을 만든 곤륜노가 입막음을 위해 잡아 온 장물아비를 제단에 올려두고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성대에 구멍까지 뚫어서.
설마 오늘 아침 진짜 사람을 태울 줄은 몰랐던 추양선과 부하들은 모두 질린 표정으로 이글거리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양선은 불길에 이어 그 곤륜노의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칼집부터 화려한 칼을 보고 나서야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그래, 내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다. 누가 가서 무림맹에 신고해라. 미치광이 사교도邪敎徒 하나가 창고에 숨어들어 불을 지르고 있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가서···”
그때 불길을 향해 두 팔을 휘적거리며 못 알아들을 소리를 중얼거리던 곤륜노가 갑자기 번뜩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추! 침입자다! 누군가 의식을 방해하려 한다!”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외치자 괜히 찔렸던 추양선은 움찔 놀랐다.
“뭐? 뭔 소리야, 시발··· 여기 오면 누가 온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추양선은 누군가 밖에서 창고에서 피어난 연기를 보고 화재로 착각한 사람이 왔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오늘 아침 유난히 감산의 안개가 짙은 것을 몰랐다.
어쨌든 작당하던 것이 찔렸던 추양선과 부하들은 모두 반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창고 정문 쪽에서 당당하게 걸어서 등장하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원인으로 보이는 키 큰 남자 하나와 또 다른 곤륜노였다.
그들은 당연히 장건과 아논이었다.
“이런 제기랄··· 락카, 이 미친놈···”
아논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제단과 그 안에 시커먼 덩어리, 그리고 그 앞에 핏물로 얼굴에 문양을 그리고 선 락카를 발견하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마주 보는 락카는 도리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락카가 말했다.
[아논! 딱 좋을 때 왔구나! 너무 늦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아. 이 역시 바알의 축복인 듯하군.] [미친놈, 음침한 새끼라는 것도 알고 바알 신도라는 것도 알았지만··· 진짜 사람을 태우다니··· 도대체 그게 언제 적 의식이냐?] [왜? 여긴 로마의 군단도, 만신전의 사제들도 없다! 그들은 범선을 타고 일 년은 더 가야 하는 세계 반대편에 있어! 있어 봐야 저 노란 원숭이들 뿐이지! 이 나약한 놈들은 권능을 보여주면 모두 무릎 꿇고 바알의 힘을 찬양할 것이다!]아논은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락카는 허리에 매어두었던 칼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흐린 회색빛이 반짝거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모양이군.”
고향의 말로 대화를 나누던 아논은 장건이 하는 말에 흘끗 그를 살폈다. 장건은 불타는 제단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거기 있는 시커먼 덩어리에게.
“···저놈이 왜 여기서 내리려 했는지 알았다. 자기가 믿는 신을 포교布敎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저건 그 신에게 제물을 바친 건가?”
“···그렇다.”
장건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그 눈은 스르륵 움직여 이쪽을 바라보는 락카와 마주쳤다. 번뜩이는 회색 눈알과 호수처럼 차분한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때 눈치를 보던 추양선이 끼어들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누군데 멋대로 들어온···”
“귀고리를 보니 장물아비 강식을 잡아 온 게 당신들이겠군.”
추양선은 이쪽을 보지도 않고 말하는 장건의 말에 움찔 놀라 자기도 모르게 귀에 걸린 귀고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물론이고 그의 부하들도 모두 크고 작은 귀고리를 하나씩 하고 있었다. 그건 남들과는 다른 그들 조직만의 차별점을 고민하다 결정한 표식이었다.
“결정해. 얌전히 있다가 무림맹에 잡혀가던가, 아니면 지금 내 손에 죽던가.”
열댓 명이 있는 장소에 단둘이 등장했기에 추양선의 조직원들은 슬금슬금 그 둘을 포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무림맹의 이름이 나오자 조직원들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 부르려 했던 이름이 아닌가. 게다가 무림맹 고수라면 결국 뒷골목 건달들인 그들 수준으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감산성 암흑가 정리의 시작은 회룡단 수십 명이 단 한 명의 무림맹 측 고수에게 모조리 죽거나 불구가 되어 잡힌 사건이었다.
조직원들은 흘끗 추양선을 바라보며 지시를 기다렸다. 추양선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생각을 정리하고 조직원들에게 손을 들어 휙휙 내저었다. 그 손짓에 따라 조직원들은 한쪽으로 우르르 물러났다.
“···얌전히 잡혀가겠소.”
그들이 물러서자 장건은 슬쩍 추양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락카에게 눈을 고정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아논이 그 옆을 따라붙어 말했다.
“조심해라, 장건. 나도 몰랐는데 제사를 치렀다는 건 저놈이 사제였다는 이야기다. 무슨 마술을 부릴지 모른다.”
장건은 대답 대신이라는 듯 왼손으로 허리춤의 칼집을 붙잡아 뽑기 쉽게 살짝 비틀며 내리눌렀다. 그런데 그렇게 칼집을 잡자 아직 칼날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칼에서 묘한 예기가 흘러나왔다.
락카를 주시하던 장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뽑히지도 않은 칼에서 마치 살아있는 맹수의 기세가 흐르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았다. 장건 본인이 품은 마음의 칼날이 원하지 않아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이 칼이 보통 날붙이가 아니라는 것과, 동시에 조금 더 손에 익어야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 물건이라는 말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장건은 도로 칼집을 놓고 자연스럽게 두 손을 늘어뜨렸다.
그를 바라보던 락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눌한 중원 말로 말했다.
“왜 칼 놓나?”
“두 손이면 충분하니까.”
“충분? 뭐가?”
“네 턱을 부숴버리기에.”
락카는 아논과 장건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이 도시의 치안관인가? 좋다. 바알의 권능을 이 새로운 땅에 선보이기에 충분한 관객이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번쩍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암기를 생각한 장건이 손을 주시한 순간, 락카의 뒤에서 뭉글뭉글 연기를 피우며 타던 불길이 와락 그 덩치를 키웠다.
그리고 천장으로 올라가던 연기는 갑자기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여 한쪽 구석으로 몰려있던 추양선의 조직원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끄아악-!”
“이, 이게 무슨, 아아악!”
“뭐야 시발! 살려줘!”
연기가 건장한 덩치들을 집어삼켰다. 연기에 휩싸인 조직원들은 곧 비명을 질렀고, 불길에 휩싸였다. 기존의 연기와 그들에게서 피어난 연기가 뒤섞여 순식간에 그 덩치를 키웠다.
“아, 아니··· 이게···”
제일 앞으로 나와 있던 덕분에 가까스로 연기를 피할 수 있었던 추양선은 장건과 아논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며 혼이 나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창고 안은 이제 거뭇한 연기로 가득했다. 장작처럼 불타는 시체들을 중심으로 창고의 불길도 커졌다. 아논이 그걸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시발, 일 년을 같은 배에 탔는데 이런 능력이 있는 건 몰랐다··· 제사를 시작하기 전에 왔어야 했는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금슬금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연기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안에서 어떤 문양이 빛나더니 연기를 밀어냈다. 장건으로서는 스스로 움직이는 연기도, 아논의 빛도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는 힘이었다. 이 땅의 정령과 주술을 보고 겪으며 느꼈던 불가해가 다시 떠올랐다.
장건과 아논, 추양선을 제외하고 창고 안의 모든 사람을 불태운 연기와 불길은 곧 락카가 있던 지점을 향해 슈루룩 빨려갔다. 뭉글거리던 연기와 불길이 갑작스레 깔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눈을 감고는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락카의 모습이었다. 그의 검은 피부가 매끄럽게 번들거렸다. 그를 본 아논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다, 장건. 일이 이렇게 급작스레 벌어질 줄 몰랐다. 나 때문에 괜한 일에 엮였다.”
“저놈 뭔데?”
“방금 그 사람들이 모두 제물로 바쳐진 것이고, 그를 통해 바알의 힘을 불러들인 것이다. 우리도 사제가 있었다면 어찌어찌 상대할 수 있었을 테지만··· 나 같은 칼잡이만으로는 이기기 힘들다. 그러니 장건.”
동상처럼 서 있는 락카에게 시선을 주던 장건은 아논의 말에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시간을 끌어볼 테니 도망쳐라. 남쪽 부두에 선장의 배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선장을 불러와라. 선장이라면 저놈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배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초록색 돛-”
그때 감겨 있던 락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눈동자 안에서는 흰자위와 검은자위의 경계 대신에 불길과 연기가 뒤섞여 이글거리고 있었다.
“도망칠 수 있겠나?”
락카는 번쩍 왼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손에서 불덩이 하나가 피어나 장건과 아논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논은 급히 몸을 날렸고, 장건은 얼이 빠진 듯 보이는 건달, 추양선을 툭 걷어차 창고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가볍게 불덩이를 피했다.
불덩이는 펑-소리를 내며 터져나갔다. 장건은 그 불길과 열기가 닿는 범위를 예민한 감각으로 어림짐작해 보았다. 열기는 굉장했지만 날아드는 속도나 불길이 퍼지는 범위는 재빠른 장건에게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락카 너 이 새끼!”
가볍게 움직여 불덩이를 피한 장건과 다르게 아논은 데굴데굴 굴러 불덩이를 피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바깥에서 가져왔던 토막 칼을 휙휙 휘둘렀다. 그 칼을 쥔 손바닥 안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불덩이를 던진 락카는 불길과 연기가 이글거리는 두 눈동자를 중심으로 쩌적쩌적 피부가 갈라져 그 아래로 번졌다. 그 갈라진 틈에서 연기가 날름날름 흘러나왔다. 그 모양이 마치 피부가 심하게 터서 갈라진 것 같았다. 연기는 곧 그의 발밑으로 철철 흘러내렸고, 잠시 후에는 락카의 몸을 위로 들어 올렸다.
[위대한 바알의 힘을 두려워하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라. 살고 싶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장건은 그가 거의 이 장 반 높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자기 말로 뭐라 지껄이는 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바라보았다.
“근두운이냐?”
둥실둥실 떠오르던 락카는 곧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방금 장건과 아논에게 쏘아졌던 불덩이가 그 손 사이에서 이글거리며 모였다. 그는 그렇게 모은 힘을 번쩍 머리 위로 쏘아 올렸다.
위로 날아간 불덩이는 많은 힘이 압축되어 있었는지 쾅-소리를 내며 창고의 천장을 날려버렸다. 넓은 창고의 천장이 완전히 날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 락카는 그 구멍으로 양손을 뻗었다.
무슨 헛짓거리인가 했더니 곧 그 구멍으로 왈칵왈칵 뿌연 안개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안개는 락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연기와 뒤섞여 그의 몸을 희뿌옇게 둘러쌌다.
“연기에 이어 안개의 마술을 부리려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도망쳐라, 장건! 저 마술을 완성하면 저놈은 당장 안개가 닿는 곳은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다! 그럼 이 도시 안에서는 저놈 손을 벗어날 수 없어!”
아논은 장건을 향해 그렇게 외치며 들고 있던 토막 칼을 어깨 너머로 있는 대로 젖혔다가 공중의 락카를 향해 번쩍 내던졌다. 날아가는 토막 칼은 휘리릭 돌아 마치 원반처럼 보였다.
하지만 락카의 몸으로 뭉치던 안개와 연기가 날아오는 토막 칼을 향해 한순간 거대한 강줄기처럼 쏘아지자 칼날은 곧 회전을 멈추고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락카는 이어서 번뜩 아논을 노려보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락카의 팔 부분 안개만 걷히더니 검은 손안에 시뻘건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올라 뭉쳤다. 그 불덩이의 열기와 진하게 뭉친 안개가 서로를 날름거리며 핥아대 기이한 대류의 움직임을 보였다. 아논은 그 불덩이를 보며 한쪽으로 몸을 날리기 위해 긴장하며 자세를 낮췄다.
그 순간 락카 아래턱을 향해 불쑥 파고드는 주먹이 있었다.
락카는 깜짝 놀라서 만들던 불덩이도 흩어버리며 급히 몸을 피했다. 주먹은 그의 턱을 스쳤고, 주먹의 주인 장건은 그대로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락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자기 턱을 만졌다. 살짝 스쳤음에도 찢어진 피부에서 주르륵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장건은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아 떨어지는 힘을 해소하고 착 가볍게 땅을 짚으며 내려앉았다. 그걸 본 아논이 놀란 얼굴로 외쳤다.
“장건! 역시 마술사였나? 어떻게 그 높이를···”
그 질문에 장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땅에 내려섬과 동시에 조금 전 도약의 감각을 취합했다. 그리고 놀란 락카가 더 높이 날아가 버리기 전에 다시 한번 도약했다.
락카는 바닥에서부터 훌쩍 가까워지는 장건의 모습에 급히 안개와 연기를 모아 조금 전 날아오는 칼을 막을 때처럼 쭉 뿜어냈다.
그 순간 장건은 공중에서 몸을 틀었다. 발디딤 하나 없건만 그는 몸의 탄력만으로 경로를 바꿔 뿜어 나오는 안개를 거슬러 오르듯 스쳐지나 락카에게 도달했다. 굳게 쥔 왼주먹이 락카의 턱을 노렸다.
하지만 그 주먹 앞을 연기 섞여 거뭇한 안개가 작은 방패처럼 모여 가로막았다. 아무 물리력 없는 안개이기에 주먹 앞에서는 가볍게 흩어져야 하건만 놀랍게도 장건의 주먹은 가로막혔다. 솜이불 위에 주먹질하듯 푹 하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일격을 막은 락카는 이제 장건이 다시 땅으로 떨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곧바로 왼손에 불덩이를 모았다.
그러나 장건은 떨어지지 않았다. 락카 주변 뿌옇게 모인 안개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전신의 탄력을 이용해 몸을 틀었다. 조금 전 일격의 반발력과 그 몸의 탄성은 잠시지만 허공에서 장건이 떨어지지 않을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창고 구석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추양선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는 용의 모습처럼 보였다.
직후 장건의 어깨를 시작으로 보이지 않는 힘의 소용돌이가 팔뚝을 타고 지나 손바닥으로 모였다. 장건은 쭉 몸을 뻗어 그 벌겋게 빛나는 오른 손바닥을 락카에게 질러 넣었다. 항룡장은 앞을 가로막는 마력의 안개를 부숴버리고 들어가 락카의 가슴 한가운데 닿았다.
락카는 퉁-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공처럼 날아가 창고 벽을 부수고 부둣가로 나가떨어졌다. 그를 날려버린 장건은 다시 한번 공중제비를 돌아 낙하하는 힘을 해소하고 착 바닥을 짚으며 내려앉았다.
아논은 두 눈을 끔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장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까 내가 도망치라 했던 말을 잊어라. 네 감산성 매운 주먹이면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