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아논의 너스레를 뒤로한 장건은 화끈한 오른손을 툭툭 털면서 창고 문을 나섰다. 락카는 부둣가 가장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다가 힘이 풀려 다시 꿇어앉았다. 창고에서 나오는 장건의 모습을 노려보던 락카는 덜덜 떨다가 쿨럭쿨럭 기침했다. 검게 탄 내장 조각들이 그 기침에 섞여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이게, 뭐지? 중원인들의··· 마술인가···?”
장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서 빌빌대는 락카에게 성큼성큼 다가갈 뿐이었다. 락카는 꿇어앉은 채 다가오는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몸에서 피어난 연기는 이제 자연스럽게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고, 이글거리던 두 눈은 본래의 검은색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조금 전의 그 격렬한 움직임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장건의 눈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바알이시여···”
“그 신이 네 영혼을 구원해 줄지 보자고.”
락카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내가 그분을 얼마나 충실히 모셨는가에 따라 결정될 문제다··· 너 노란 원숭이가 신경 쓸 문제 아니다!”
그는 그렇게 외치며 왼손으로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칼을 역수로 붙잡아 뽑았다. 하얀 빛살이 번쩍 장건의 허리를 쪼개버리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꾸물거리던 락카의 손과 자세를 인지하고 있었던 장건은 뒤로 한 발짝 슬쩍 물러나는 것으로 그 칼날을 피했다. 락카는 온몸을 날린 동작 때문에 다시 바닥을 나뒹굴었고, 장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가가 마무리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순간 느껴진 어떤 예감에 다시 뒤로 물러났다. 이번엔 조금 더 멀리 훌쩍 뛰어 물러섰다.
그가 물러남과 동시에 락카의 몸에서 흩어지고 있는 듯했던 연기가 휘리릭 칼날 모양으로 뭉쳐 허공을 찢었다.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팡-하고 울렸다.
그렇게 기습을 가했던 락카는 왼손에 쥔 칼을 지팡이 삼아 천천히 일어섰다. 뭉쳤던 연기는 다시 흩어져 부둣가 허공에 날렸다. 힘겹게 일어난 그는 장건 뒤에서 창고를 걸어 나오는 아논을 발견했다.
“흐, 흐흐··· 전사가 되어서 남 뒤에 숨는 건가? 용기가 있다면 앞으로 나서라···”
“나한테 한 말인가? 싫다. 시간 좀만 끌면 알아서 죽어줄 것 같은데 내가 왜?”
아논은 락카의 도발에 뚱하니 대답해주고 부둣가 한쪽 길을 막아 도망칠 길을 차단했다. 락카는 그 대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허탈함과 분노가 섞인 웃음이었다.
[그래, 아논. 넌 배에서도 항상 그런 식이었지··· 명예를 생각하는 척하면서도 필요하다면 아무 망설임 없이 그걸 내던졌어.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걸어 놓고 다음 날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그걸 포기했지. 하지만 그래도 이 칼을 포기할 순 없었나 보지?]락카는 고향의 언어로 말하며 지팡이 삼았던 칼을 들어 아논을 겨눴다. 보석이 박히고 은으로 씌워진 화려한 손잡이 위로 완만하게 굽은 곡선의 칼날이 쭉 뻗어 있었다. 칼날 위에는 마치 복잡한 잔물결이 치듯 화려한 문양이 드러나고 있었고, 그 예리함은 굳이 시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비한 문양의 곡도曲刀가 안개 낀 날씨 아래에서도 화려하게 반짝였다. 그를 본 아논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작게 뭐라 중얼거렸는데, 장건은 그게 욕지거리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때 반짝이던 칼날의 빛이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락카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연기가 다시 진해지며 그의 하체를 덮었고, 두 눈의 이글거림도 되돌아왔다.
[선장 그년이 무슨 생각으로 네 손에 이 무기를 쥐여줬는지 모르겠군. 마술의 힘은 자격이 있는 자만이 다룰 수 있다. 너 같은 칼잡이들은 죽을 때까지 들고 휘둘러도 절대 사용할 수 없었으리라는 거지. 덕분에 위기를 벗어났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크흐흣··· 이제 이 무기의 진짜 힘을 보여주지···]장건은 락카가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처음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것을 보고 아논에게 질문했다.
“뭐라 떠드는 거지?”
“굳이 알 필요 없다. 개소리였다.”
이안은 장건에겐 그렇게 대답해주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두 손바닥 한가운데에 어떤 문장 하나씩이 떠올라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락카가 들고 있던 곡도의 칼몸에서도 그 손바닥의 것과 같은 문양이 나타나 빛나며 부르르 떨렸다. 락카는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돌아오라.]락카는 곡도를 놓지 않으려 버둥거렸지만, 마치 거인이 끌어당기는 듯한 힘의 차이에 결국 손아귀를 풀어야 했다. 곡도는 그대로 휘리릭 날아가 아논의 손에 안착했다. 그리고 칼을 잃은 락카는 금세 다시 힘을 잃고 쿨럭 기침을 하며 등이 굽었다.
아논은 손안에 돌아온 칼을 휘휘 휘둘러보며 말했다.
[이 칼에 선장의 마술이 뭐 얼마나 깃들어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내 눈에 보인다면 하루에 한 번 내 손안으로 되돌아오는 마술을 새겨놓았다는 건 아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지. 선장이 설명해 줬으니까.] [너, 너··· 아논···]아논은 장건을 돌아보고 끝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건도 작게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고 뚜벅뚜벅 락카에게 다가갔다. 락카는 잠깐 사이에 수십 년이 늙어버린 얼굴로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바알이시여··· 구원을···]락카 앞에 선 장건은 오른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직도 신을 찾나?”
거의 일자로 쭉 다리를 뻗어 올린 그는 그 발을 그대로 락카의 머리 위로 내려찍었다. 꽝-소리와 함께 락카의 머리가 부두 돌바닥에 처박혔다. 작게 만들어진 구덩이 안에서 걸쭉한 피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엎드린 몸은 잠시 바들바들 떨다가 곧 움직임을 멈췄다.
그 시체를 내려다보던 장건은 탁탁 손을 털며 물러났고, 아논은 그 앞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잘 가라, 락카. 배에 탄 동안에 넌 분명 내 형제와 같았다. 신들에게 네 명복 정도는 빌어주마··· 그러게 적당히 선을 지켰어야지.]이어서 짧게 기도해준 그는 시체의 허리춤에서 칼집을 들고 일어섰다. 칼만큼이나 화려한 칼집이었다. 아논은 그 칼집 안에 천천히 칼날을 밀어 넣었다.
조금 뒤로 물러나 품에서 연초를 꺼내 말아 문 장건은 검지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인 후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칼은 멀쩡한가?”
칼을 허리에 맨 아논이 장건을 돌아보았다.
“멀쩡하다. 고맙다, 장건. 덕분에 칼도 되찾고 락카의 헛짓거리도 막을 수 있었다. 내가 그 대장간에서 널 만났던 것은 신들의 인도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장건은 고개를 돌려 창고 문 앞에 주저앉아 있는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이름도 모르는 자인데, 저 안에서 살아남은 건달은 그뿐이었다.
“글쎄. 그 인도가 조금 더 빨랐으면 여럿 살았을 텐데.”
“···신들의 뜻이 꼭 삶이 아닌 경우도 있다. 그들의 영혼은 스틱스를 넘어 평온의 땅으로 향했을 것이다.”
후-연기를 뿜은 장건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벽과 아침 내내 짙은 안개로 뿌옇던 하늘에 슬그머니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직 짙게 남아있는 안개 위로 그렇게 햇살이 파고들자 희뿌옇던 안개는 자신의 몸을 주황빛으로 가득 채워 현란하게 반짝였다. 장건은 그 빛살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눈을 떼지는 않았다. 그는 그렇게 안개가 걷히는 것을 보며 연초를 피웠다.
잠시 후 은전 하나를 주고 보냈던 점원 만덕과 무림맹 무사들이 도착했다. 무사들을 이끄는 것은 익숙한 얼굴, 조원식이었다. 그는 장건을 보고는 허헛 웃으며 말했다.
“장 무사, 왜 지부를 들르지 않소? 훈장이랑 포상금 받으러 오라니까.”
“조금 바빠서. 나중에 가겠소.”
“꼭 들러주시오. 지부장님이 한 번 다시 봤으면 하고 있소.”
대충 고개를 끄덕인 장건은 상황을 설명했다. 증인으로는 추양선과 창고 안에 불탄 시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장건이 오해받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범인은 머리통이 깨져 죽었으니 결국 잡혀가는 것은 멍한 표정의 추양선뿐이었다. 욕심을 부린 대가를 치른 그는 착잡한 눈으로 장건과 아논을 바라보다가 얌전히 무림맹 무사들의 손에 끌려갔다.
조원식은 기왕 만난 거 같이 갔으면 했으나 장건은 거절했다. 차마 강요까지는 하지 못한 조원식은 창고를 봉쇄하고 시체만 챙겨서 부두를 떠났다. 볼일을 모두 보았기 때문에 대장간 점원 만덕도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장건은 팔짱을 끼고 서서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 옆에 있던 아논이 말했다.
“장건,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아까 했잖아?”
아논은 칼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건 말뿐인 감사였다. 나는 조금 더 제대로 된 감사를 하고 싶다.”
“···뭘 어쩌겠다고?”
히죽 웃은 아논은 남쪽 부두를 가리켰다.
“배로 가자. 내 부탁이라면 선장이 선물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냥 선장과 만나는 것 자체도 괜찮은 경험이 될 것이다.”
본래 대장간으로 돌아가 보상금을 챙기라 일러주고 기루로 돌아가 새 칼을 살펴보려던 장건은 잠시 턱을 긁적거리며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파사 쪽 사람이랬나? 만나보는 것도 재밌겠군.”
“그쪽 사람 같다는 거지 그쪽 사람이라고는 안 했다. 둘은 분명히 다른 거다.”
“어느 쪽이든.”
장건의 대답에 아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자, 다른 배 식구들도 마음에 들 것이다.”
아논의 안내에 따라 장건은 부둣가를 걸었다. 안개가 걷히며 부두는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조금 전 무림맹 무사들이 찾아와 일으킨 소란 때문에 약간 움츠러들었던 부두 사람들은 무사들이 떠나자 곧장 고함을 지르고 소란을 피우며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건은 범선에서 내리는 짐들과 사람들, 올라가는 짐들과 사람들 사이를 지나 한참 동안 만의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감산성 부두 거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아논이 탔을 만한 범선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범선은 꽤 컸다. 장건이 이 신대륙에 타고 넘어온 배보다도 컸고, 웬만한 한 제국 군선과 비견될 만큼 상당한 덩치였다. 그 외 특이한 점으로는 접힌 돛 중 초록색 천으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 있었다.
“다른 배들과 쉽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며 선장 돈으로 염색한 것이다. 굳이 그럴 것까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 배를 설명하자니 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아논은 가벼운 잡담을 늘어놓으며 배로 다가갔다. 그리고 범선 위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이봐-! [나 왔다! 발판 내려!]”
그가 중원 말과 고향 말을 섞어 외치자 곧 범선 난간으로 빼꼼 머리를 내미는 자들이 있었다.
“뭔 헛짓거리 하다가 이제 오셨소? 형님이 없어서 출발을 못 하니 항해사님이 얼마나 짜증을 부렸는지 아시오?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으면 형님을 찾으려 우리 배 선원이 모두 움직였을 것이오!”
“미안하게 되었다! 작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다 해결하고 왔으니 이제 아무 문제 없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얼굴들은 곧 장건을 발견했다.
“옆에는 누구요? 새 선원?”
“아니! 내 친구다! 선장한테 소개해 줄 거다!”
대답을 듣자 배 위에서 뭔 우당탕하는 소리를 내더니 곧 널찍한 발판 하나가 아래로 내려왔다. 아논은 아래에서 그걸 받쳐 발 디디기 좋은 각도와 위치를 잡더니 장건을 돌아보았다.
“올라가자.”
발판은 불안하게 삐걱댔지만 올라가는 데 그리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범선 위로 올라온 장건은 배 간판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들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금발 머리, 검은 머리, 빨간 머리, 파란 눈, 검은 눈, 초록 눈, 하얀 피부, 검은 피부, 갈색 피부, 등등. 간판 여기저기 늘어져 있던 온갖 인종의 선원들이 모두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이 그 눈들을 찬찬히 돌아보는 동안 옆에서 올라온 아논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돌아왔다!”
“···대체 뭘 하다 온 건지 모르겠네. 락카 그 자식 정착 도와주는 데 그렇게 문제가 많았소?”
방금 배 위에서 외친 사람으로 추정되는, 그리고 중원인으로 짐작되는 남자가 아논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논은 그런 남자를 보고 대답했다.
“나중에 말해주겠다. 선장은?”
“선장이야 선장실에 있지.”
“선장실, 알았다. 가자, 장건.”
아논은 그렇게 장건을 이끌고 범선 안으로 들어갔다. 간판 아래 선실로 내려온 그는 배 여기저기서 쉬고 있는 선원들과 두루 인사를 하며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끝에 있던 문 앞에 멈췄다.
그는 그 문을 텅텅 두들기며 말했다.
“선장! 갑판장 아논 복귀했다! 들어가도 되나?”
“들어와.”
아논은 씩 웃으며 장건을 돌아보았다가 벌컥 문을 열었다. 범선 안을 이리저리 구경하던 장건은 그 뒤를 따라 선장실로 들어섰다.
들어서며 대충 둘러보아도 선장실 안에는 여기저기 온갖 무기가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칼과 검만 해도 길고 짧은 길이는 물론이고 곧은 것과 휜 것, 외날인 것과 양날인 것 등등으로 나뉘어 수십 자루가 벽에 걸리거나 세워져 있었다.
검 말고도 도끼나 철퇴도 볼 수 있었다. 개중에 눈에 띄는 것은 한쪽에 세워진 나무 표적과 거기 박혀 있는 투척 도끼들이었다. 그것들은 자루까지 모두 쇠로 만들어진 묵직한 물건들이었다. 아논의 칼처럼 그 도끼들에도 아름다운 파형 문양이 보였다.
방 안에는 무기만 있지 않았다. 사슬갑옷이나 여러 금속판을 끈으로 연결한 판갑, 두꺼운 솜과 천 갑옷, 등등도 보였다. 그중에 장건을 놀라게 한 것은 구석에 세워진 거의 완전해 보이는 검은색 판금 갑옷이었다. 저걸 입으면 전신을 판금으로 거의 다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제일 안쪽에 창문을 등지고 책상을 두고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검은 색 피부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두건을 쓴 선원 복장의 여인은 내부를 둘러보는 장건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