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12)
112화
* * *
조상룡의 표정은 회색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두 눈은 자신의 사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다른 감각은 이제 완전히 고요해진 주변을 그리고 있었다. 연이은 천둥소리 이후 멈춰버린 싸움. 그 승자가 누구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사부의 무공을 저런 부랑자한테 팔아넘긴 것이냐?”
조상룡은 등 뒤의 칼을 손이 하얘지도록 부여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단상운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장 형은 이미 여러 다른 무공을 만들고, 익히고, 고치는데 익숙한 사람이오. 혼원경을 보고 그 정수를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로 바꿔 익힌 것이지. 나나 사형은 꿈도 못 꿀 일이고, 스승님도 원하셨던 것이니 팔아넘겼다는 말은 옳지 않소.”
“···저 천둥이 혼원경의 정수라고?”
단상운의 말에 조상룡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좁혔다.
“네가 익힌 심재검과 좌망권에는 어디에도 저런 천둥을 부르는 무리武理가 없다. 내가 이십 년을 옆에서 지켜본 무공인데 그것도 모르리라 여기느냐?”
“이십 년을 익힌 건 나인데, 어째서 사형이 그를 더 잘 안다고 자부하는지 모르겠소. 사형은 심재검보다는 거기 섞인 스승님의 무공을 더 열심히 파고들지 않았소? 이젠 그마저도 다른 무언가와 섞인 듯 보이지만.”
조상룡은 입을 다물었다. 단상운의 말이 맞았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왕 도사에게 배운 무공 중 뜬금없고 두루뭉술한 부분은 모두 빼고, 더 빠르고 강한 내용만 집중적으로 익혔다. 파문 이후에는 혼원경의 내용을 완전히 털어버렸고, 그로 인해 부족한 부분은 맹주와 무림맹의 무공을 이용해 메꿨다.
그는 왕 도사의 무공에서 울려 나오는 뇌성을 황군의 무공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천둥을 부르지 못한 것은 그저 익힌 것이 반쪽짜리 무공이기 때문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단상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여태 엉뚱한 무공에 집착했다는 말이다.
단상운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조상룡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형의 혼란도 이해가 되었다. 무공 외에도 여러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단상운은 무공을 그저 건강을 위한 운동 정도로 여겼다. 그는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와 원리, 밝혀지지 않은 현상이 많은데 굳이 무공에만 삶을 바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도리어 그런 모습은 혼원경에서 말하는 삶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혼원경을 익혀 그리된 것인지, 아니면 그런 기질이 있어 혼원경을 쉬이 익힌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왕 도사의 말처럼 선골仙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의 사형도 처음부터 혼원경만을 익혔다면,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진 않았을지 몰랐다. 왕 도사와 조상룡, 단상운. 이 세 사람 모두 서로의 입장과 위치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조금 더 나은 사형제가 되는 미래가, 그렇게 이 땅에서 새로운 무맥을 탄생시키는 시조가 되는 이야기가 펼쳐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늙은 스승은 제자의 손에 죽었다. 그 둘째 제자에게는 이제 그 복수만이 남았을 뿐이다.
“준비하시오, 사형.”
혼란스러워 보이던 조상룡은 단상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과 달리 아무 흔들림 없는 단상운의 표정을 보고 도리어 화가 나는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늙은이의 내공을 받아먹고 성취를 이룬 주제에 참 건방지구나. 사부의 내공이 있으니 세상이 쉬워 보이느냐?”
단상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한 눈으로 온 정신을 검과 조상룡에게 집중했을 뿐이다. 그 기세가 범상치 않다는 걸 느낀 조상룡도 입술을 꾹 다물고 단상운에게 집중했다.
어디선가 마른 바람이 불었다. 그 흙먼지 섞인 바람은 술집의 간판을 기우뚱 흔들고 거리 안쪽으로 몰려와 조상룡과 단상운의 옷깃을 흔들었다.
그렇게 흙먼지가 불어오는 상황에도 두 사형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 어디에도 사형제의 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두 무인의 날카로움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뜨거운 정오의 햇빛 아래, 두 남자의 콧등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있었다. 극도로 긴장한 호흡이 아주 느릿하게 들숨과 날숨을 이어갔다.
고요히 사형을 노려보는 단상운과 다르게, 조상룡은 입매를 꿈틀거렸다. 그는 완전히 단상운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이 순간 자기 사제를 꺾는다고 해도 그 뒤에는 비천취응대를 모두 해치운 장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가 비천취응대 중 가장 강한 무사이긴 해도, 그 모두를 홀로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두 사형제가 서로를 노려보길 잠시. 불어오던 바람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공기가 가라앉은 그 일대에 무엇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조상룡의 칼이 칼집을 벗어났다.
이후 쨍-하는 쇳소리와 쫘자작 하는, 벼락이 하늘을 찢을 때 나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난 후 사형제는 서로를 등지고 서 있었다.
단상운은 처음 자리에 그대로, 조상룡은 칼을 앞으로 쭉 뻗은 자세로 단상운 뒤쪽에 서 있었다. 그는 곧 자세를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벽력이 혼원경의 오의奧義였단 말이냐? 황군의 무공이 아니라?”
“황제의 무공 외에도 뛰어난 무공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소. 단지 옛 선인들은 그걸 그저 사람 죽이는 살인 도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 여겼고, 그래서 구결과 구결 사이에 조금씩 숨겨놓았을 뿐이오. 중원을 통일한 고조의 무공 또한 결국 그 선인들의 무공이었소.”
조상룡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 갈 길 잃은 울분과 후회, 집착이 섞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그 사라지는 감정을 단어로 바꾸고 싶다는 듯 잠시 입술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다시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혼원경은··· 너무··· 느려···”
그는 그 읊조림 이후 풀썩 쓰러졌다.
여전히 그를 등진 단상운은 여러 조각으로 부러져 바닥을 굴러다니는 자신의 검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십 년을 혼원경만 익혔음에도 그는 벽력을 부르지 못했다. 거기에 삼십 년 넘게 익힌 왕 도사의 내공을 이어받아서야 겨우 쓰게 된 것이다. 단순 계산으로만 오십 년이고,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던 왕 도사의 무공을 생각한다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옛 무공이란 그런 것이었다. 단순히 오래 익힌다고 배울 수 없는, 자격이 없는 자는 발조차 디딜 수 없는 비인부전非人不傳의 정수.
그렇게 손잡이만 남은 검을 내려다보며, 그들 사형제의 비극에 홀로 탄식하던 단상운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온 장건이 보였다.
장건은 마른 흙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와 슬픔에 찬 단상운의 눈,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검 손잡이를 돌아보고는 짧게 말했다.
“검이 견디지 못했군.”
“···익숙하지 않아 한 번에 너무 많은 내공을 담았소. 난 애초에 무공을 열심히 익히지 않았으니까.”
그의 대답에 장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해질 것이오.”
단상운은 장건의 말에 애써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저 멀리 나타난 아이들과 채윤의 모습에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다시 만난 가족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살짝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장건은 곧 아무도 없는 듯 보였던 마을 이곳저곳에서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는 마을 사람들을 발견했다.
노인과 청년, 중년 여인과 아이 등등, 마을에 머물던 사람들이 싸움이 끝난 듯 보이자 거리로 몰려나온 것이다. 그들은 시체가 된 조상룡과 지붕에서 굴러떨어진 비천취응대의 시체들을 보고는 곧 기쁜 표정을 지었다.
시체를 보고 좋아하는 모습이 약간 섬뜩하기도 했지만, 사흘 동안 그들의 난폭함을 감당하던 주민들의 처지가 이해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그 마을 사람 중 한 노인이 장건과 단상운 가족에게 다가왔다.
“···결국 자네가 마무리하게 되었군.”
“촌장 어른.”
촌장이라 불린 노인은 나이 든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오래된 씁쓸함을 담아 시체가 된 조상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단상운 가족에게 눈을 돌려서는 말했다.
“···저들이 무림맹 소속이라는 건 알고 있나?”
“예, 촌장 어른.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들을 찾고자 오는 자들에게 우리가 사실을 숨길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는가?”
단상운은 채윤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촌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마을을 떠나 이름을 바꾸고 살게. 숨길 수 있는 건 우리가 최대한 숨겨 볼 터이니. 금전도 좀 모아 주겠네.”
단상운은 약간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촌장 어른.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만약 거짓을 말하는 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거짓이라니? 우린 사실만 말할 것이네. 어느 날 갑자기 무림맹 무사들이 몰려와 마을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그를 보다 못한 자네와 저기 저 협객께서 그들을 물리쳤다고. 하지만 맹의 무사들을 죽였기에 그들은 결국 마을을 떠났다고 말이네. 우리가 말해줄 건 그것뿐이지.”
그 이야기에 단상운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촌장은 곧 장건에게도 몸을 돌려서는 허리를 숙였다.
“며칠 전 마을에 들렀던 분이시지요? 협객께서 해주신 일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놈들은 자기들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이유로 마을 청년 셋을 장사지낸 무뢰배들이었지요.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 아직 그 청년들 묘지를 파지도 못하고 관에만 담아둔 참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촌장은 감사를 표하면서도 이름을 묻지는 않았다. 마치 굳이 그걸 알면 결국 무림맹 조사자들에게 그걸 말해야 할 테니, 애초에 묻지도 않겠다는 것 같았다. 장건은 그럼 자신이 이름도 없는 협객, 무명협無名俠이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나와 이들 사이에 생긴 은원 때문이었으니 너무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하지만 그 대답에 촌장은 물론 다른 마을 사람들 또한 고맙다는 듯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장건은 그 인사들이 부담스러워 단상운을 돌아보았고, 아이를 끌어안고 있던 단상운은 그 모습에 털털 웃었다.
기뻐 보이는 사람들 뒤에서, 어디서 풀을 뜯다가 이제야 슬렁슬렁 다가온 조조만 뚱한 표정으로 주둥이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 * *
느지막한 오후의 석양이 내리쬐는 벌판 위에 마차 하나와 말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을을 떠난 단상운 가족과 장건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아낌없이 도와준 덕분에 단상운 가족의 마차는 앞에서 끄는 말만 두 마리에 덩치도 상당했다. 그 안에는 그들 가족의 집안 살림은 물론이고 화장한 왕 도사의 유골과 단상운의 연구물도 실려 있었다. 아이들은 덜컹거리는 마차 안이 불편하기는커녕 재밌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그런 아이들을 돌아보던 단상운은 갑자기 옆으로 다가오는 장건의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쏟아지는 석양 때문에 장건의 모습이 불그스름해 보였다.
그 붉은 장건이 말했다.
“내가 해준 말 기억하고 있소?”
단상운은 얼른 마차를 멈추고 장건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 그러니까. 신사천에 가서 호남 장가 상회를 찾으란 말씀이지요? 거기서 장운이라는 분을 찾아 동생분 소개로 왔다고.”
“내가 적어준 것도 잘 가지고 있소?”
단상운은 품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장건이 적어준 소개서였다.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상룡과 그자 부하들이 진짜 무림맹 소속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들이 무공만을 노리고 왕 도사와 그쪽을 노린 것은 사실이오. 아마 그들이 진짜 맹의 무사였다면 무림맹의 조사는 치부를 가리고자 어영부영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지. 그리고 이후 계속 왕 도사의 무공을 노리고자 하더라도, 설마 그 후인이 무림맹 앞마당에서 상회 아래 들어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할 것이오.”
단상운은 진지한 얼굴로 장건의 말을 들었다.
“내 형이 제대로 일을 굴렸다면 지금쯤 신사천에서 꽤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 것이오. 이후 맹의 눈을 가려줄 수 있을 정도로.”
“···내 걱정은 장 형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일이 없는 경우요. 밥만 축낼 수는 없지 않소?”
장건은 슬쩍 웃었다.
“그 화섭통을 비롯해 발명품 몇 개만 보여줘도 내 형이 알아서 금은을 벌어다 줄 거요. 밥값 걱정은 할 필요 없을 것 같군.”
그의 미소를 본 단상운은 걱정을 지우고 마주 웃었다. 그리고 고삐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포권을 했다.
“고맙소, 장 형. 이를 어찌 갚을지 모르겠소.”
옆에 앉아있던 채윤이 남편을 따라 포권을 보였다. 그러자 마차 안에서 장건을 바라보던 아이들도 그를 따라 어설프게 포권을 했다.
일가족의 인사를 받은 장건은 웃은 얼굴로 마주 포권을 해 보였다.
“나중에 또 봅시다.”
그렇게 짤막하게 인사한 장건은 이후 툭툭 조조의 고삐를 당겨 말머리를 돌렸다. 단상운은 잠시 포권을 한 그대로 멀리 떠나는 장건을 바라보았다. 멀어지는 장건의 뒤로 옅은 흙먼지가 피어나 그의 모습을 흐리게 지우고 있었다.
그가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자 채윤이 살그머니 그의 손을 감쌌다. 그 손길에 고개를 돌린 단상운은 채윤과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다시 마차의 고삐를 잡았다.
같은 방향을 향하던 마차와 말은 그렇게 두 갈래로 나뉘어 헤어졌다. 붉은 석양만이 벌판 너머 멀어지는 그들을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