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14)
114화
조조는 느긋한 걸음으로 천천히 길을 따라 고개를 내려갔다.
장건은 연초 연기를 피우며 녀석의 걸음걸이에 따라 몸을 흔들거렸다. 저 멀리 보이는 게 그의 생각처럼 진짜 원주민 군영일지는 아직 몰랐다. 어쩌면 원래부터 이곳 고원성이 가지는 특색일 수도 있었고, 진짜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침착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 장건은 편안한 객잔에 푹신한 침대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능하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 걸어가길 한참. 고원성으로 들어가는 길목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모닥불까지 피워놓고 뭔가를 끓여 먹고 있었다.
장건이 손가락 마디만큼 남은 연초를 마저 빨며 그들을 바라보니, 생김새나 차림새나 신대륙 원주민인 것 같았다. 거기에 각자 활이나 창칼을 무장하고 심지어 어설프게나마 갑옷으로 보이는 것까지 차려입은 모양이 평범한 사냥꾼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때 끓이던 것을 그릇에 덜어 쩝쩝거리던 원주민 하나가 문득 장건과 눈이 마주쳤다. 괜히 시비를 걸고 싶지 않았던 장건은 삿갓을 잡으며 슬쩍 고개를 까딱였다.
그 원주민은 그 인사에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반사적으로 마주 고개를 까딱였고,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원주민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모두 장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가장 험상궂게 생긴 원주민이 벌떡 일어나며 장건을 손가락질했다.
그 원주민이 버럭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또 뭔데···”
서부 해안 부족들과는 말이 달랐다. 대강 발음은 비슷해 조금 더 들어보면 알 것도 같은데, 원주민들은 이후 뭐라 더 말할 생각 없는지 우르르 몰려와 장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장건은 연초는 옆으로 뱉어내고 두 손을 들어 보이며 그나마 서쪽 원주민 말로 말했다.
“싸울 생각 없소. 난 그냥 여행자요.”
그 말을 들은 원주민들이 자기들끼리 돌아보며 뭐라고 몇 마디 떠들더니 우하하 웃어젖혔다. 장건은 가만히 그 발음만 기억했다. 말이 통해야 나중에 객잔에서 바가지라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껄껄 웃던 원주민 중 처음의 험상궂은 자가 표정을 싹 굳히며 다시 소리 질렀다.
“너! 수상한 놈! 말 내리고 칼 내놔라!”
장건도 알아들을 서쪽 말이었다. 그를 들은 장건은 곤란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무인에게 그리 칼을 내놓으라니. 너무 강압적이지 않소?”
“뭐야? 중원인! 내 말 따르지 않으면 너 다친다!”
그의 협박에 장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놀랍게도 두 손을 들고 말 위에 얹혀있다시피 한 그의 자세는 그대로였으나, 그렇게 표정을 지우는 것만으로 그와 원주민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은 순간 당황한 듯 움찔거리다가도 곧 슬금슬금 각자의 무기를 잡아갔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은 그 대치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우르르 오던 길을 되돌아 도망치거나, 길 한쪽으로 물러나서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얼굴을 굳혔던 장건은 곧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무례하게 굴길래 살짝 화를 내긴 했으나 그렇다고 진짜 칼을 뽑아 이들을 다 죽여버릴 수는 없었다. 그런 살인마나 되려고 익힌 무공이 아니었다. 언덕 위에서 본 대로 저들이 군대 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면 그를 붙잡아 지휘관에게 데려갈 테니, 거기서 대충 오해를 해결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가 순순히 조조의 위에서 내려오려는 순간, 길 한쪽으로 물러났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슬쩍 다가왔다.
“어! 오라버니!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장건이 돌아보니 웬 중원인 여자였다. 정확히는 이제 스물이 되었을까 싶은 소녀였는데, 볼살이 동글동글한 것이 귀엽기는 했지만 장건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장건이 정말 반갑다는 듯 웃으며 다가오더니 그 웃는 낯 그대로 원주민들에게 뭐라뭐라 떠들어댔다. 금방이라도 무기를 뽑을 듯하던 그들은 그렇게 그녀가 쾌활하게 웃으며 몇 마디 하자 같이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험상궂은 얼굴은 헤헤 웃으며 사과까지 했다.
“산산 사촌인 줄은 몰랐다. 모르는 얼굴에다가 서쪽 말을 하길래 수상한 놈인 줄 알았다. 미안하다.”
“···괜찮소. 그럴 수도 있지.”
장건은 떨떠름하게 대꾸해주고는 슬쩍 산산이라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웃으며 원주민들에게 너스레를 떨던 그녀는 장건이 자신을 바라보자 아무도 모르게 슬쩍 한쪽 눈을 깜빡여 주었다. 장건은 뭐라 대꾸해줄 말도 없어서 그냥 떨떠름한 표정 그대로였다.
이후 장건은 소녀의 중재로 조조 위에서 내려 원주민 전사들과 인사까지 나눴고, 그 다음에는 함께 고원성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장건이 고삐를 잡지 않아도 조조는 슬렁슬렁 잘 따라붙었다.
그렇게 원주민 전사들은 모닥불 앞으로 돌아가 먹던 그릇을 다시 집었으며 겁먹었던 사람들은 각자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되었다.
장건과 소녀는 잠시 아무런 말 없이 길을 걸었다. 그 조용한 걸음은 계속 이어져 어느새 고원성 거리를 앞에 둘 때까지 이어졌다.
거기까지 와서야 소녀는 약간 어리둥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안 물어봐요?”
“뭘.”
“···뭘 이라뇨. 당신 내 사촌오빠 아니잖아요?”
“너도 내 사촌 동생 아닌데.”
소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어? 어어? 이렇게 뻔뻔한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는데?”
그를 본 장건은 피식 웃었다. 그는 멈춰서서 소녀에게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도움 고맙소. 덕분에 곤란한 처지를 넘겼소.”
“으엥? 갑자기 태도 반전?”
소녀는 한 번 더 당혹감에 빠져 허둥거리다가 마주 포권을 했다.
“그, 저기, 뭐라 하려 했었지··· 아, 같은 중원인끼리 돕고 살아야죠! 난 산산이라고 해요!”
“장건이오.”
자신을 산산이라고 밝힌 소녀는 이후 차분한 장건의 모습을 보고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그냥 히죽 웃었다.
“···이거 참. 그렇게 능글능글한 사람이 아까 전사들하고는 왜 그렇게 날을 세웠어요?”
“대뜸 실실 쪼개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아, ‘타는 산기슭’이 좀 그런 면이 있죠. 모르는 중원인이나 서쪽 원주민들을 좀 무시하는···”
장건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방금 그들을 잘 아는 모양이오?”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고요. 그 전사들은 고원성 입구를 지키고 서서 수상한 자들을 걸러내는 일을 하고 있어요. ‘미쳐 날뛰는 말’의 명령으로요.”
범상치 않은 이름에 장건의 눈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미쳐 날뛰는 말?”
“고원성 원주민들의 대장이에요. 뛰어난 전사이기도 하죠. 아무래도 고원성은 중원인보다 원주민들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라, 무림맹 지부도 따로 없고 그래서 그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어요. 타는 산기슭 같은 전사들이 그의 밑에 있죠.”
“그냥 치안 담당만 하는 것치고는 규모가 좀 크던데.”
산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쪽에 건물이 높은 거리는 주로 중원인들이 만든 곳이고, 그쪽은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거리에요. 사실 그곳이 진짜 고원성이죠. 중원인 거리는 원주민들이 마음대로 들어오지만 원주민 거리는 중원인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특이한 도시군.”
장건은 더 길게 묻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본래 중원인처럼 높은 건물을 짓지 않으니 멀리서 보면 그 움막의 집합을 군영으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고원성이라는 도시로 묶여 있으면서 그렇게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정확히는 움막 생활을 고집한다는 게 이상한 일이긴 했다. 당장 장건이 잘 아는 계곡 부족도 움막과 나무 오두막을 함께 지어 잘만 살았으니까.
그렇다고 이 산산이라는 소녀를 붙잡고 도시의 숨겨진 상관관계를 다 털어놓으라고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적당히 넘어갔다. 사실 그런 거 알아봐야 떠돌이 장건에겐 별 의미 없기도 했다.
그때 산산이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아하니 여기 고원성에 진짜 친척이 있어 놀러 온 사람 같지는 않군요. 혹시 일자리 찾아왔나요?”
“일단 객잔부터. 수중에 돈이 모자라진 않아서.”
“오, 마침 잘 만났네요. 머물 곳을 소개해 줄까요?”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장건을 자신이 아는 객잔으로 이끌었다. 장건은 그것을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그녀 덕분에 조금 전 곤란함을 넘긴 것은 사실이라 그냥 순순히 끌려갔다.
조조만 뚱한 표정으로 앞서가는 둘을 따랐다.
* * *
객잔 주인과 숙수는 중원인이고, 점소이는 원주민이었다. 요리는 밀가루를 반죽해 기름에 튀긴 것과 잘 구운 소고기가 나왔다. 잘라먹으라고 작은 칼까지 함께였다. 밀가루 튀김은 서쪽에서도 많이 먹던 요리였고, 소고기는 고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장건 마음에 드는 요리였다. 거기에 그릇 한쪽에 여러 열매를 다져 만든 양념이 있어서 그걸 발라 먹으니 질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장건이 탁자 앞에 앉아 우물거리고 있으려니 그 앞에 앉아서 턱을 괴고 있던 산산이 불쑥 물었다.
“맛있어요?”
“음.”
장건이 좋아하는 듯하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중원에서는 굽는 요리는 별로 없다죠? 굽기보다 튀기고 찌고 삶는 걸 더 좋아한다던데.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고기는 불에 직접 굽는 걸 좋아해요. 서쪽에서 온 중원 사람들은 가끔 그런 걸 보고 여기 요리는 너무 무식하다고도 하다가, 정작 제대로 구운 소고기를 먹고 나서는 매일 그것만 찾죠.”
장건은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눈을 들었다. 맞은편 산산은 눈을 내리깔고 고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이쪽 출신이에요. 중원은 가본 적도 없죠. 해안 도시는 가본 적 있는데, 고원성보다 훨씬 번잡하고 사람이 많아서 힘들었어요. 결국 오래 있지 못했죠. 그래도 가끔은 배를 타고 중원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요. 황성이라는 장안도 가보고 싶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문득 입을 우물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장건의 시선을 깨닫고 다시 눈웃음을 지었다.
“말이 너무 많죠? 그러니 먹지만 말고 그쪽 이야기도 좀 해봐요. 장건이라고 했죠? 중원 출신 맞죠?”
장건은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키고 말했다.
“어떻게 알았소?”
“그야 같은 중원인도 이 땅에서 태어나 살던 사람과 중원에서 넘어온 사람은 약간이지만 다르니까요. 특히 말투가요.”
“그건 몰랐군.”
장건의 출신을 맞춘 산산은 장난스럽게 탁자 위로 몸을 반쯤 엎드리면서 손가락으로 토도독 소리를 냈다. 뭔가 당장 가진 생각과 감정이 몸짓으로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다른 것도 좀 말해봐요. 사실 고원성에는 오는 중원인은 거의 오던 사람만 오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은 쉽게 만나지 못한단 말이에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장건은 옆에 따라둔 찻물을 홀짝 마시며 말했다.
“그럼 그쪽에 대한 것부터 좀 말해 보시오. 산산이라고 했지? 고원성에서 뭘 하며 벌어 먹고사시오?”
몸을 낮춰 장건을 올려보던 산산은 그 질문에 눈을 깜빡거리다가, 스르륵 의자 쪽으로 몸을 빼며 새초롬히 장건을 흘겨보며 대답했다.
“···나 먼저 털어놓으라 이건가요?”
하지만 그녀는 금세 태도를 바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묻는 쪽이 먼저 털어놓는 게 맞긴 하죠. 난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중개업자예요. 누군가의 소유권이 사라진 물건을 적당한 대가를 받고 마땅한 주인을 찾아주는 거죠. 사실 소유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누군가의 손에 쥐여 있다고 무조건 그 사람에게 소유권이 있는 게 아니니까···”
“도둑이라고?”
그녀가 정색했다.
“도둑이라뇨. 난 훔치진 않아요.”
“그럼 장물아비군.”
그녀는 이번에도 정색하고 부정하려 했지만, 입술을 뻐금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고개를 덜컥 떨구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이 젊은 나이에 그런 일을 하고 있네요··· 하지만 그 일 말고도 이것저것 하는 게 많거든요? 토지 중개나 상품 거래, 때때로 대금 문제로 인한 계약 분쟁 협상과 중원인, 원주민 사이의 법적, 도의적 분쟁 변호 등등. 이 고원성이라는 도시에 제 발이 안 끼는 곳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럼 그걸 장물아비라고 할까요, 해결사라고 할까요?”
떨궈졌던 고개가 살살 올라오며 이어진 그녀의 항변에 장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물아비 겸 해결사라고 하겠지.”
“···그것도 맞네요.”
장건은 찻물로 홀짝 입술을 적시며 시무룩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객잔을 소개해 준 후 떠나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말해 보시오.”
“뭘요?”
“뭔가 손 필요한 일이 있는 거 아니오? 고원성의 해결사가 길에서 본 칼잡이를 괜히 도와준 게 아닌 모양인데.”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이어서 씨익 입가를 당겨 웃기까지 했다.
“···티 많이 났어요?”
장건은 다시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관광은 또 물 건너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