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2)
12화
장건은 조조의 등에서 내려 절벽 끝에 엎드렸다. 저 밑에 절벽을 등진 주여랑과 그녀 앞을 막아선 남자 하나가 보였다. 그들이 뭐라 뭐라 떠드는 모습이 보여 장건은 얼른 내력을 집중해 청력을 키웠다.
“···그래서 협조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아니, 도대체 거기 내가 무슨 책임이 있다는 거냐고!”
키가 멀대처럼 큰 남자는 뒷짐을 지고 꼿꼿이 서서 주여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가 제대로 된 유서도 남기지 않고 목을 맸다. 고작 가객 여자 하나 때문에. 다행히 그 숨을 붙잡았다고는 해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질 못했으니 가문의 어른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은 게 당연하지.”
“그 애송이가 지 혼자 목을 맨 걸 왜 내가 책임져!”
주여랑의 외침에도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섬지영 소저의 증언이 있다. 너와 공자가 너무 친하게 지냈다고. 설사 그분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더라도 네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지. 그리고 네가 정말 당당하다면 그저 가문으로 와 당당함을 증명하면 될 뿐이다.”
“미쳤어? 소가주 자살미수 사건에 연루돼서 그쪽 가문 안에 들어가라고? 그거 살아서 나올 수는 있는 거야?”
남자가 주여랑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네가 당당하다면 상관없을 이야기다.”
주여랑은 이를 악물며 자세를 낮추고 등허리에 맨 칼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렇게 말하는 양반이 내 말부터 죽였나?”
남자는 뒷짐을 풀며 대답했다.
“그것 또한 네가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지.”
남자가 그렇게 뒷짐을 푼 순간부터 그의 오른쪽 어깨에 비죽 솟은 칼 손잡이가 보였다. 놀랍게도 계속 거기 매달려 있었지만 그가 손을 보이기 전까지는 전혀 인지할 수 없었던 칼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장건은 그 모습에서 남자가 제대로 된 고수라는 것, 그것도 고대 가문의 정통 무공 전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궁 고수를 수없이 배출하는 것을 넘어 황군 무공에 자신들의 자취를 남긴 고대 세가.
신대륙으로 넘어온 가문들이 중원에서 밀려난 자들이라고 하지만 황야에서 떠도는 낭인들이 그 무공을 뛰어넘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객잔에서 보여준 주여랑의 무공이 괜찮긴 했으나 저 남자와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둘의 대치를 내려다보던 장건은 뒹굴 몸을 굴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른 하늘에 뭉글거리는 하얀 구름이 햇빛을 받아 멀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거참. 누군 죽네 사네 하는데 참 태평하군. 이거 사람이 아니라 구름으로 환생했어야 했는데.”
그가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자 그 옆으로 조조가 다가왔다. 녀석은 멀뚱한 눈으로 장건과 절벽 아래를 바라보다가, 계속 그러고 있을 것이냐고 따지듯 그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장건은 귀찮다는 듯 그 머리를 밀어버렸다.
“알았다, 인마.”
장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는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훌쩍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고 있던 주여랑과 남자 사이로 툭 떨어졌다. 사 장은 되어 보이는 높이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아주 가벼운 소리였다.
덕분에 주여랑과 남자는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황해 두 눈만 부릅뜨고 웅크려 앉은 장건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장건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누구냐?”
“장건.”
남자는 잠시 장건이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하다가 그게 눈앞에 떨어진 이 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정체를 묻는 말에 대뜸 이름을 말할 줄 몰랐던 남자는 당혹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당신, 어제 객잔에서 봤던 사람이군요?”
주여랑이 장건을 알아봤다. 객잔에 끝까지 남아있던 손님이라 그녀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남자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장건이 떨어진 절벽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 장건. 저 높이에서 뛰어내리다니 놀라운 몸놀림이군. 그런데 왜 하필 나와 저 여자 사이로 떨어졌지?”
“여기가 평평해서.”
남자가 살펴보니 그 말도 맞긴 했다. 하지만 그는 인상을 더 진하게 찌푸리며 말했다.
“말장난이나 할 상황이 아니다. 넌 지금 제가齊家의 행사를 방해하고 있다. 어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널 치우는 수밖에 없어.”
장건은 삐뚤어진 삿갓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행사라. 무슨 행사?”
“그게 왜 궁금한 거지?”
남자의 반문에 장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려주면 비켜주지.”
남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장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를 마주한 삿갓 아래 장건의 눈동자는 조용한 호수처럼 차분할 뿐이었다.
“···죄인의 압송이다.”
주여랑은 죄인이란 말에 대뜸 소리쳤다.
“이 개자식아! 죄인? 나만 당당하면 된다며! 대뜸 그렇게 낙인부터 찍고 갈 거면서 도망가지 말라고 했냐!”
“정말 죄가 없다면 그저 가문의 어른들 앞에서 그렇게 밝히면 될 일이다.”
남자의 대답에 주여랑은 바닥으로 침을 뱉었다.
“손톱 발톱 다 뽑아버린 후에? 지랄하지 마.”
주여랑의 욕지거리에도 남자는 장건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이제 비켜라. 만약 방해한다면 네 이름이 제가의 살생부에 올라갈 수 있음을 명심해라.”
그러나 장건은 비켜서지 않았다. 오른발을 한 발짝 앞으로 내밀고 서서 차분한 기색 그대로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그의 눈을 노려보던 남자는 무엇이 웃긴 지 피식 웃었다.
“숲길 인적 드문 곳에서 핍박받는 약자를 보고 분연히 나선 무인이라··· 여기서 협객 놀이하는 놈을 만날 줄이야. 어리석군.”
그렇게 말한 남자는 대뜸 장건과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그는 오른발을 뒤로 한 발짝 빼 왼발이 앞으로 오게 한 것과 오른쪽 어깨로 올린 손을 빼고는 장건처럼 차분하고 고요해졌다.
주여랑은 그런 둘의 갑작스러운 대치를 보곤 당혹스러운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뭐라 나서고 싶어도 이미 서로를 노려보는 두 무인의 대치에는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기세가 흐르고 있었다.
장건을 마주 본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느릿하게 어깨에 멘 칼 손잡이를 잡아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난 내력의 순환으로 감각이 확대됨을 느꼈다. 폭발적으로 휘몰아친 내력과 감각의 폭풍에 상대방, 장건의 모습만이 남았다. 그리고 극에 달한 오감과 기감이 아주 짧은 미래의 모습을 그렸다.
뽑혀 나오는 두 칼날. 서로의 목덜미를 향하는 두 빛줄기. 그리고 어느 순간 흐릿한 잔영 둘로 나뉘어 마치 가위처럼 치달아 오는 상대방의 칼날. 하나는 막았지만 다른 하나는 막을 수 없다.
“헛!”
남자는 숨을 들이켜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식은땀 한 방울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그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방금 보았던 장면과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구분했다. 장건은 여전히 차분한 모습 그대로였다.
도리어 물러나는 남자를 보며 뚱하니 묻기까지 했다.
“뭐해?”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뛰어난 실력이군. 어느 가문 사람이냐?”
장건은 그의 엉뚱한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장씨 가문 사람이지. 방금 내 이름 못 들었냐?”
“장 씨? 세가 사람이 아니면 설마 황군인가? 아니, 그건 아니군. 황군치고는 너무 거칠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래, 장건. 실력 없이 나선다면 어리석은 이의 무모함이지만,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진정 협객이라 할 수 있겠지. 내 이름은 제운성이다. 오늘은 여기서 물러나지. 하지만 그게 제가의 포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제가의 힘을 다 감당할 수 있는지 보겠다.”
자신을 제운성이라 밝힌 남자는 그렇게 뒷걸음으로 물러나 숲의 나무들 틈으로 사라졌다. 그가 그렇게 사라지자 장건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고대 세가 무공이 좋긴 좋군.”
장건은 제운성이 무슨 장면을 보고 얼른 도망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운성의 의식은 위기를 느끼지 못했으나 그가 수십 년 단련한 무공과 그로 인해 예리해진 무의식이 흩어진 정보들을 취합해 한 수 앞을 내다본 것이다.
일 대 일 상황에서 칼을 뽑으면 일단 하나가 죽는 무림에서 그런 위기 감지 능력과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물러날 수 있는 가풍은 고대 세가들이 다른 무림인들보다 남다를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었다.
그리고 장건은 저번 마인 삼 형제를 싸워 이기며 경지가 한 수 올랐음을 느꼈다. 그게 아니라면 고대 세가 무사를 수 싸움만으로 물러나게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는 그래도 세가의 무공을 견식 할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람을 붙잡고 억지로 싸움을 걸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을 때, 주여랑은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대뜸 말했다.
“죽였어야 했어요.”
“···뭐요?”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선 그를 죽였어야 했다고요. 그는 이제 가문의 힘을 이용해서 당신과 나, 둘 모두를 붙잡으려 할 테니까요.”
장건은 피식 웃었다.
“가서 죽이면? 그럼 안 쫓기나?”
“말했잖아요.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다고요. 최소한 제씨 가문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하루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장건은 그녀의 살벌한 말에 고개를 살살 저었다. 도적놈도 아니고 함부로 사람 죽이자는 말이 불쑥 나오는 게 참 무림인답다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절벽 쪽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조조가 절벽을 돌아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주여랑은 그런 장건의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가 양 허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이봐요. 왜 날 도와줬어요?”
“잡혀갈 상황 아니었소?”
“···당신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랬겠죠. 아마 어디 칼침 한 방 맞고 질질 끌려가고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럼 먼저 나와야 할 소리가 있을 텐데.”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하는 장건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옷매무시를 가다듬더니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감산성의 주여랑,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억울하게 끌려가는 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가 되었든, 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이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걸 멀뚱히 바라보던 장건은 코끝을 살짝 긁으며 물었다.
“감산성이 고향이오?”
주여랑은 슬그머니 허리를 펴며 싱긋 웃었다.
“왜요? 제가 황제 찬양자일까 싶어서? 감산이 다른 신대륙 지역과 다르게 황군 덕분에 일찍 번성했지만, 그렇다고 거기 출신 사람이 모두 황실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애초에 거기서 잘 먹고 잘살았으면 지금 여기서 빌빌거릴 이유가 없죠.”
“그것도 그렇군.”
대충 맞장구를 친 장건은 금세 다가온 조조의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훌쩍 올라타려 하자 주여랑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자, 잠깐. 설마 그냥 그렇게 가려고요?”
“그럼? 제운성이라는 자는 도망갔으니 그쪽도 어서 떠나는 게 좋을 텐데.”
주여랑은 장건에게 조금 다가서며 급히 말했다.
“방금 그가 말한 거 못 들었어요? 나랑 당신이랑 같이 쫓겠다잖아요?”
“글쎄. 당신이랑 갈라지면 나보단 당신을 쫓을 것 같은데.”
“···그건 맞는 말이군요. 아니, 이럴 거면 왜 도와줬는데요?”
“그럼 당장 눈앞에서 사람이 납치되는 걸 보고만 있을까?”
주여랑은 장건의 대답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런 말 하는 사람을 오랜만에 봤다는 표정이었다.
장건은 신경 쓰지 않고 조조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대로 고삐를 끌어 자리를 떠나려 했다.
“잠깐! 나 좀 도와줘요!”
장건은 고개를 돌려 주여랑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지금 나 혼자 고대 세가 중 하나와 싸워달라는 것이오?”
“아뇨, 아니에요. 그 정도까지 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도움을 요청할 사람들이 있어요. 감산에서부터 알던 인연들이라 지금 내 처지를 알면 도와줄 거예요. 제씨 가문이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 도움을 받으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어요.”
그녀는 한숨을 푹 한번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되어가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라고요. 난 그냥 돈 받고 비파 연주를 했을 뿐인데, 그 제씨 공자가 자기 혼자 내가 좋으니 어쩌니 하다가 받아주질 않아서 혼자 목을 맨 거라고요. 시발, 그렇다고 날 쫓아오는 게 말이 돼?”
장건은 혼자 화내는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 증인이라는 사람은 뭐요?”
“증인? 섬지영? 하. 걘 더 어이가 없어요. 걔가 원래 제씨 공자 약혼자였는데, 공자가 날 좋아한다니 대뜸 나보고 꺼지라던 사람이었다고요. 내가 신사천에서 노래로 잘 벌어먹다가 이렇게 떠도는 게 그 여자 때문이에요. 분명 온갖 중상모략으로 날 쌍년으로 만들었을 거예요. 안 그럼 이럴 리가 없지, 엿 같은 년놈들!”
그녀는 정말 화가 나는지 허공에 휙휙 주먹질까지 했다. 그들이 앞에 있었으면 당장에 얼굴을 뭉개주겠다는 태도였다. 신기한 것은 미인이라 그런지 그런 모습도 우스꽝스러워 보이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주먹질하던 그녀는 장건과 조조의 뚱한 눈빛에 겸연쩍은지 큼큼 헛기침하며 말했다.
“어쨌든, 그 사람들하고 합류할 때까지만 좀 도와줘요. 난 당장 그 제운성이라는 놈 하나도 감당 못 한다고요.”
장건은 안장 머리에 몸을 기대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맨입으로?”
주여랑은 그 질문에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금전적인 보상을 준비할 테지만··· 장건이라고 했나요? 무공 꽤 익힌 것 같던데. 세가나 문파가 없었다면 그동안 고생 좀 했겠군요.”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는데. 그건 왜?”
주여랑의 눈이 반짝거렸다.
“날 도와주는 사람들은 당신이 원한다면 황군의 무공을 구해줄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