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암룡오호는 장건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부족 연합의 숙영지를 지키는 전사들이 처음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러니까 시커먼 그림자 기둥처럼 보이는 모습들 그대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어둡고 또 멀어서 그들의 눈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암룡오호는 그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장건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살벌해서 또 오겠나··· 덕분에 배반자도 걸러냈으면서···”
그 의도대로 앞장서던 장건은 그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뭉툭한 뿔에게 점혈을 펼치던 장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뭉툭한 뿔이 일반적인 무공을 익힌 자였다면 장건이 펼친 점혈법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장건의 타혈은 그저 몇몇 기혈을 자극하고 내공을 살짝 흔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무림인이었다면 그처럼 극단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저 살짝 당황하는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이는 마공의 아주 빠르고 강렬한 이면에 대단한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장건은 이미 여러 마인들을 만났고, 그들과 싸우며 그들의 마공을 경험해 보았다. 사람 심장이나 빼먹는 무공이 안정적이길 바라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또 당연한 짐작이지만 뛰어난 수준의 마공일수록 그런 불안정성이 줄어들 터였다.
하지만 장건을 사로잡은 생각은 그런 마공의 성질보다는 본인의 상태였다. 정확히는 뭉툭한 뿔이 마공을 익히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자신의 감각.
상대방의 정확한 무위나 익힌 무공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보통 직접 싸워보거나, 그가 무공을 펼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아야만 한다. 겉으로 보이는 자세나 기세에서 느껴지는 모습도 분명 있긴 했으나 정확하진 않았다. 그건 그저 어림짐작일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장건은 그저 멀찍이서 보는 것만으로, 뭉툭한 뿔의 표정, 디딘 발, 서 있는 자세, 손의 위치, 전체적인 태도와 기세만 보고서 그가 무공을 익히고 있음을, 더 나아가서 마공을 감추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건 짐작이라기보단 확신이었다.
문제는 왜 그런 확신이 들었는지 장건도 정확히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그냥 감이 좋았구나 할 수도 있고, 같은 무인으로서 반쯤 본능적으로 느꼈다 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건은 무인, 그것도 스스로 무공을 만들고 재현하는 무림인武林人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무공과 감각을 본인 스스로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틀린 것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입장에선 이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나아갈 수 없을 문제였고, 장건 개인적으로는 본인이 가진 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니 자존심 상하는 문제였다.
게다가 마궁의 산산을 만났을 때는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 이는 단순히 그녀와 뭉툭한 뿔의 수준이 차이 나서 일수도 있지만, 그의 감각이 들쭉날쭉하게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오감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장건 입장에선 그를 벗어나는 감각이 그리 달갑지만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혼자 중얼거려봐야 장건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 암룡오호가 결국 직접적으로 질문을 건넸다. 장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고원성 남쪽에 청림이라는 다원이 있다는군. 찻집인지 진짜 차밭인지는 모르겠는데.”
“찻집입니다. 고원성에 차밭은 없어요. 중원인들이 많이 찾는 가게인데··· 뭉툭한 뿔이 진실을 말했다고 봅니까?”
“그런 훈련을 받은 자는 아니었다. 아니라면 돌아와 다시 시간을 가지면 될 일이고.”
암룡오호는 그 말에 뭉툭한 뿔의 몸에서 나던 으드득 소리가 떠올랐는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무공입니까?”
“분근착골.”
살벌한 이름에 암룡오호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그렇게 혼자 떨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당장 청림 다원으로 갈 생각입니까? 밤이 늦어 다원도 문을 닫았을 텐데요.”
“거긴 내일 간다. 그 임 학사라는 자가 머물고 있을 때를 노려야 하니까.”
“···그럼 지금은 어디 가는 건데요?”
장건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뒤돌아 암룡오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밤이 깊으니 쉬어야지.”
“···쉬어요? 어디서요?”
장건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턱짓했다. 그 턱짓은 암룡오호를 가리키고 있었다. 암룡오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본인을 손가락질했다.
“···내 집에서요?”
* * *
암룡오호가 내키지 않은 티를 팍팍 내며 안내한 곳은 고원성 안에 어둑한 골목 구석을 차지한 낡은 이층집이었다. 땅이 좁으니 자연스레 위로 올라간 모양의 집이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서며 장건에게 말했다.
“그, 다 제 나름대로 정리한 거니까 괜히 어지르지 않아 주셨으면 하는데요···”
그의 말을 들으며 안으로 들어선 장건은 살짝 놀랐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암룡오호의 안가에는 온통 책과 종이 뭉치들로 한가득하였다. 그리 넓지 못한 집에 꽉 들어찬 그것들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책이 많군.”
장건의 짤막한 감상에 암룡오호는 멋쩍게 웃었다.
“책보다는 그냥 기록들이죠. 제대로 된 책은 아닙니다.”
“기록?”
그는 길을 막는 종이 뭉치를 집어 옆으로 조심스레 치우며 말을 이었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이곳 고원성이 만들어진 건 생각보다 굉장히 오래전입니다. 다른 거대 삼 도시가 구성되던 시기와 비슷한 때에 만들어졌죠. 제대로 성장했으면 고원성은 신대륙 교통의 심장부가 되었을 겁니다.”
암룡오호는 책과 종이가 그득한 복도를 열심히 치워 길을 내었다. 장건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신대륙 초창기에 넘어온 이들 중에는 쇠락한 고대 세가는 물론이고 단순히 한 제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하던 자들이 많았죠. 그들은 황군의 눈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고원성마저 넘어서 동으로, 동으로 계속 멀어졌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새로운 땅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정말 멀디먼 동부로 떠났다며 전설처럼 남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동부 원주민 부족들에 파편화되어 남아있고, 난 그걸 꾸역꾸역 모으는 중이죠.”
“왜? 암룡대 임무인가?”
그는 장건의 질문에 치우던 책과 종이 뭉치를 한 아름 끌어안고 돌아보았다.
“···아뇨. 이건 암룡대 임무가 아닙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궁과 동부 원주민들에 대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는 부수적인 소득이 있긴 하죠. 실제로 마궁의 본거지가 동부 어딘가 있으리라는 정보도 있고요. 하지만 나는··· 아니, 이건 그냥 취미입니다.”
취미치고는 잔뜩 쌓인 종이 더미로 보아 온 열정을 다하고 있는 듯싶었지만, 장건은 더 묻지 않았다. 둘은 만난 지 이제 반나절쯤 지났다. 속에 껴안은 이야기를 굳이 끄집어내 대화를 나누기엔 아직 서로를 몰랐다.
“이쪽에서 쉬면 됩니다. 이불을 가져다드리죠.”
일 층 방 한쪽을 정리해 자리를 마련해준 암룡오호는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끌어안고 그렇게 말하며 이 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 장건이 말했다.
“아직 이름을 모르는군. 난 장건이다.”
“···손강입니다.”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칼을 풀어 바닥에 앉았다. 칼집이 그의 양 무릎 위에 올라왔다.
잠시 후 이 층에 올라가서 이불을 가져온 손강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두 눈을 감고 있는 장건을 보고는 약간 당혹감을 느꼈다. 운기조식은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있을 때 하는 게 맞다. 아무리 그가 황군 암룡대고, 그 암룡대가 장건과 자주 협업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믿을 일인가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장건은 운기조식을 하는 게 아니라 명상에 들어간 것이었다. 부족 연합의 숙영지를 떠나며 생각했던 점을 잠시 정리하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이다.
잠시 이상하다는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던 손강은 들고 온 이불을 그 옆에 내려놓고 다시 책과 종이 뭉치를 피해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도 좀 쉬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궁이 고원성 부자 양개용을 죽일 때 그 중개역으로 암룡대가 끼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인지, 혹 그가 서쪽으로 보내는 연락책들 역시 마궁이 중간에 차단한 것은 아닌지, 설마 마궁의 눈이 그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을지 등등. 암룡대 최동부 요원 손강에게는 머리만 복잡해지는 밤이었다.
* * *
손강은 오래 지나지 않아 금방 잠에서 깼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번뜩 깨버린 것이다.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후다닥 일어나 밑으로 내려갔다. 청림 다원은 일찍 문을 연다. 혹여나 마궁의 접선책이 새로운 정보를 입수해 사라지기 전에 찾아가 잡아야 했다.
그렇게 일 층으로 내려왔던 그는 잠시 놀랍다는 표정으로 눈을 비볐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장건이 어젯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자세로 여전히 앉아있었다.
잠시 그걸 바라보던 손강은 그를 깨워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저···”
그때 장건이 자연스럽게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그는 어젯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풀었던 칼을 허리에 차고 손강을 바라보았다.
“왜?”
“···아닙니다. 불편한 건 없으셨습니까?”
“없었다. 가자.”
거침없는 걸음으로 안가를 나서는 장건의 모습에 손강은 눈곱 떼던 것도 잊고 얼른 외투를 집어 들었다.
“바로 청림 다원으로 가실 겁니까?”
“다른 단서가 있나?”
“···그건 아닌데요.”
장건은 그럼 왜 묻냐는 듯 멈춰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손강은 그 눈빛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앞장서라.”
“예? 아, 예.”
손강을 앞세운 장건은 서늘한 고원성 거리의 공기에 고개를 들었다. 흰 구름 뜬 청명한 하늘과 저 멀리 시야 한 편을 주르륵 채운 산맥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떠오른 태양의 환한 햇살에 높은 산맥의 만년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거리를 걷다 보니 이제 하루를 시작하는 고원성의 사람들이 뜨문뜨문 보이기 시작했다. 장건과 손강은 바빠 보이는 그들을 지나 곧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널찍한 이 층 건물의 간판에는 청림淸林이라는 글자가 크고 웅장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장건과 손강이 문 앞에 서자 그 앞에서 빗자루로 길가를 쓸고 있던 청년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 안내해 드릴까요?”
점원으로 보이는 청년의 말에 손강이 나섰다.
“음, 그렇게 해주게. 역시 아침에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하루를 시작해야지. 그렇게 생각지 않소?”
손강은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러 왔다는 듯 말을 꺼내며 장건에게 말까지 걸었다. 장건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원은 허리를 숙이며 한쪽에 빗자루를 세워놓고 앞장섰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니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다원 안에 앉아 홀로, 혹은 두셋이 함께 차를 마시는 이들이 적잖게 보였다. 다원운 가운데가 네모나게 뚫린 사합원 모양이었는데, 그 가운데 마당 덕분에 햇빛이 들어와 내부가 훤했다. 그들을 쭉 둘러본 장건은 입가의 미소를 더 진하게 키웠다.
점원은 두 사람을 이 층의 훤한 자리에 앉혔다.
“차는 뭐로 준비해드릴까요?”
“음. 녹차 있나?”
점원은 곤란하다는 듯 헤헤 웃었다.
“홍차나 흑차는 있습니다. 녹차는 다음 달은 되어야 들어오고요.”
“그럼 홍차로.”
점원은 예이-하는 대답 후 총총 멀어졌다. 그렇게 주문을 하고 점원을 보낸 손강은 장건이 그랬던 것처럼 안으로 쭉 한번 둘러보고는 허허 웃으며 장건에게 말했다.
“그래, 고원성에는 어제 오셨다고 하셨지요? 뭐 구경 좀 하셨습니까?”
-그 임 학사는 자는 이제 어떻게 찾을 겁니까? 그냥 아무나 붙잡고 물어볼 겁니까?
“굳이 그럴 건 없을 듯하군.”
목소리 밑에 깔리는 목소리를 쓰던 손강은 장건의 대답에 살짝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하긴 뭐··· 고원성이 구경할 거리가 많진 않지요. 그래도 신대륙 원주민들 풍습이 많아서 이국적인 걸 찾자면 아주 볼 게 없진 않습니다.”
-장 무사, 굳이 우리 대화를 남에게 들려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저번에 보니까 이중음 비슷한 기술을 쓰던데 그걸로 대화하지요.
장건은 대답은 안 하고 묘하게 웃으며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손강은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잠시 당황하면서도 대화를 이어가려 입을 열려 했다.
그때 점원이 찻잔과 주전자를 가져와 둘이 앉은 탁자에 늘어놓았다. 이 층 한쪽에 준비된 주방이 있어 준비가 오래 걸리지 않은 것이다. 그 때문에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던 손강은 점원이 멀어지고 나서야 다시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장건이 찻잔을 집어 들며 입을 여는 것이 빨랐다.
“굳이 임 학사라는 자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예?”
손강은 장건이 호로록 찻물을 마시는 것을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뭉툭한 뿔의 접선책을 찾아 이 다원에 온 것인데, 장건이 엉뚱한 소리를 조심성 없이 크게 말한다 싶어 당황한 것이다.
찻잔을 내려놓은 장건은 의자에서 일어나 이 층 난간에서 다원 안을 내려다보았다. 일고여덟 명 정도 되는 손님들이 조용히 차를 마시다가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장건의 모습에 고개를 들었다.
그들을 본 장건이 말했다.
“뱀 소굴이 따로 없군.”
“예? 예? 뭐, 뭔 소굴이요?”
손강이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지만 장건은 대답은커녕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손강이 깜짝 놀라 난간으로 달라붙었다.
다원 한가운데 있던 탁자 위로 가볍게 내려선 장건은 자신을 바라보는 손님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가 말했다.
“난 장건이다. 감산성 일대에서 최근 너희 계획을 다 때려 부쉈지. 그리고 여기 고원성에서도 똑같은 일을 할 것 같군.”
뛰어내린 장건을 보며 어리둥절해서 자기들끼리 돌아보던 손님들이 거짓말처럼 딱 멈췄다. 직후 그들의 눈이 동시에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한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홀로 나타나 적진 한가운데서 도발이라. 대단한 자신감이군. 정말 우릴 안다면 그럴 수 없을 텐데.”
그의 입이 열리자 다른 손님들 모두 밀랍 인형처럼 차가워진 표정으로 스르륵 일어나 사합원 한가운데 장건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섬뜩함을 느낄 법도 한데, 장건은 오히려 옅게 웃으며 천천히 청룡을 뽑아 들었다.
“이제부터 알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