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이 무슨···”
남궁천은 이를 악물며 장건을 노려보았다. 그가 어찌나 힘을 주고 있는지 장건을 향한 눈가에서 울긋불긋 핏줄이 올라오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와는 반대로 칼을 늘어뜨리고 선 장건은 한밤의 호수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남궁천을 바라보는 눈동자 어디에도 과한 흥분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속임수를···”
장건의 조용한 모습을 보며 남궁천은 급히 전신의 내공을 휘돌렸다. 단순히 장건에게 압도되었다는 이유 말고 몸이 굳은 다른 이유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막강한 내력이 혈도를 찢어버릴 것처럼 난폭하게 내달리며 전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남궁천은 그제야 굳었던 몸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가 우악스레 뿜어내는 내력의 파도로 지하 공간의 기세 또한 훨씬 더 그에게 우세해졌다. 처음처럼 공간 전체를 장악한 것은 남궁천이고, 장건은 그를 방어하는 모양이 된 것이다. 남궁천은 다시 뛰어오를 자세를 잡으며 외쳤다.
“같잖은 속임수는 소용없다! 북천제왕검의 검세 앞에서 그런 장난질은-”
그때 장건은 살짝 자세를 바꿨다. 크게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깨를 까딱여 몸의 방향을 약간 바꾼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남궁천은 그 작은 동작 하나에 겨우 벗어나려던 압박감이 다시 전신을 덮치는 것을 느끼고 입을 악다물어야 했다. 분명 현실은 그에게 훨씬 유리하건만, 장건의 사소한 동작 하나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남궁천이 말했다. 신음에 가까울 정도로 억눌린 목소리였다.
“···이게, 무엇인가···? 검세劍勢는 분명, 내가 유리한데···?”
“세는 중요하지 않소. 지금 이 하늘의 주인은 나니까.”
장건이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남궁천은 그 발걸음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동시에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살핀 끝에 왜 장건 자체에게 압도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장건의 눈, 발끝, 손에 들린 칼, 서 있는 자세 등등, 모든 동작이 남궁천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움직일 모든 동작을 한순간 앞서 선점했다.
마치 바둑에서 앞으로의 모든 수를 꿰뚫고 놓인 돌 단 하나에 승패가 정해지듯, 장건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남궁천의 움직임을 꿰뚫고 그 맥을 끊어버린 것이다.
장건이 다시 한 발짝 다가왔다. 남궁천은 이대로 가면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장건의 칼에 목이 달아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육신은 이미 압도당했다. 지하 공간을 휘도는 검기는 장건에게 닿지 않았다. 이대로 서서 죽던가, 무릎을 꿇고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남궁천은 같은 바닥에 선 장건이 어째서인가 훨씬 드높은 권좌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분명 눈앞에 있건만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진정, 제왕검형帝王劍形··· 왕의 검이군. 이게 자네의 왕도인가?”
“누구나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의 주인, 제왕이 될 수 있소. 마주 선 상대를 억지로 억누르고 무릎 꿇리지 않아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지.”
장건은 담담히 말하며 앞으로 한 걸음 더 디뎠다. 남궁천은 그렇게 한 걸음 더 다가온 장건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무릎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졌군. 북천제왕검으로는 지금 자넬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훌륭한 검법이네.”
장건의 걸음이 멈췄다. 파르르 떨고 있는 남궁천의 눈은 정말 패배를 인정하는 듯 한풀 꺾인 기세였다. 검은 쥔 손도 축 늘어져 있었고, 칼날 위에서 시퍼렇게 불타오르던 검기도 가라앉았다. 남궁천은 패배를 인정한 순간 십 년은 늙어버린 듯 건장한 중년인에서 훌쩍 지친 노인처럼 보였다.
그때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네. 나는 일개 무인이기 이전에 남궁가의 장군. 한낱 무사의 패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궁의 행사는 계속되어야만 하네. 그리고 자네가 살아있으면 앞으로 그 행사에 큰 차질이 있으리라는 걸 짐작하게 되는군.”
남궁천의 눈이 다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장건은 그의 말과 눈빛을 보며 지금 이 지하 공간 위, 고원성에서 뭔가 다른 계책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원에서 해치운 이들과 남궁천이 마인의 전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패배를 깨끗이 승복하지 못하는 날 용서하시게···”
그가 그렇게 중얼거린 직후 지하 공간에 거센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처럼 그의 눈을 시작으로 울퉁불퉁 전신의 혈관이 일어서고, 검푸른 기운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의 얼굴은 곧 악귀처럼 일그러져갔다.
통제를 벗어난 마기가 그의 전신을 치달리며 난폭한 힘을 일깨웠다. 우두둑 뼈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키가 한 뼘은 더 커지고, 여유롭던 옷자락은 그 안에 들어찬 근육으로 팽팽해졌다. 그렇게 잠깐 사이 남궁천은 회색 머리칼의 장군에서 한 마리 짐승이 되었다.
“크-허헝!”
남궁천은 외형처럼 진짜 짐승이 되었다는 듯 포효했다. 북천제왕검의 기세는 이제 그 오묘한 기공의 모습을 잃고 혼란스러운 마기의 폭풍이 되었다.
사람의 모습을 잃고 마기를 줄줄 흘리며 날뛰는 괴물에게 선수先手는 의미가 없었다. 장건은 검푸르게 번들거리는 남궁천의 눈을 마주 보고 쓰게 웃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남궁천은 기합인지 울부짖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번쩍 장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보다 한순간 늦게 그와 장건 사이의 바닥 판석이 와자작 깨져나갔다. 남궁천은 넘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인지 장건을 스쳐 지나서 그 너머 벽에 부딪히고서야 멈췄다.
“제, 제기랄··· 그냥 위에 있을걸···”
한편 슬금슬금 기어서 내려온 계단 쪽으로 다가가던 손강은 쩌렁쩌렁 울리는 남궁천의 고함과 살벌하게 휘몰아치는 마기에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역용공 외에 무공은 크게 뛰어나지 못했던 그였기 때문에 지금 이 지하 공간은 숨쉬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꽝-소리를 내며 벽에 들이박은 남궁천의 모습을 보고 얼른 장건을 찾았다. 그는 처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옆으로 한 발짝 움직인 것 같긴 했다.
“···오.”
장건은 멀쩡한데 그의 칼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과연 그게 괜히 묻은 것은 아닌지 부순 벽돌을 털어내며 몸을 돌린 남궁천의 가슴팍에 옆구리 쪽으로 이어지는 칼자국 하나가 보였다.
하지만 그 안의 근육과 뼈를 완전히 갈라내진 못한 것인지 남궁천의 움직임에는 별다른 불편함이 보이지 않았다.
“크-허-헝!”
남궁천은 다시 고함을 토하며 장건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푸르다기보단 확실히 검게 보이는 기운이 그의 검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그 시커먼 칼날이 장건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장건은 다시 한번 옆으로 한 발짝 움직이는 것으로 검을 피하고 남궁천의 반대쪽 옆구리에 칼자국 하나를 더 남겨주었다. 붉은 피가 튀었다.
조금 전까지의 남궁천이었다면 그 상처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근육의 고통과 제한된 움직임 때문에 이어지는 장건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더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 흘러넘치는 마기로 이성을 잃은 남궁천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근육이 갈라지고 힘줄이 끊어지면 그 무지막지한 마기로 억지로 이어붙였다. 시간이 지나 힘을 다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행동이지만, 결국 지금의 그는 깊은 상처에도 아무런 걸림 없이 움직였다.
난폭하게 움직이는 그의 검이 횡으로 공간을 가르며 장건을 노렸다. 장건은 청룡을 들어 그를 막아냄과 동시에 남궁천 쪽으로 바짝 붙으며 칼날을 몸 바깥으로 밀어냈다. 덕분에 장건과 남궁천은 서로의 팔꿈치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노옴-!”
장건보다 반 뼘 정도 커진 남궁천은 버럭 소리 지르며 그대로 장건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들이박으려 했다. 그에 장건은 허리를 뒤로 꺾어 피하고 자연스럽게 오른 무릎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남궁천의 이마와 장건의 무릎이 쿵-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순간이지만 남궁천의 눈이 스르르 풀렸다. 장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높이 들었던 무릎을 곧게 펴며 남궁천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컥!”
띵한 머리에 이어 순간 호흡까지 막힌 남궁천이 훌쩍 뒤로 나뒹굴었다. 장건은 바로 따라붙으려다 멈칫했다. 아직도 거둬지지 않은 남궁천의 북천제왕검은 이젠 그저 마기의 소용돌이가 되어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곳 지하 공간 안에서 휘돌며 장건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거기에 남궁천과 근접전을 벌이며 장건이 펼친 기의 그물이 마기와 뒤섞여 불편함을 주고 있었다.
그동안 나가떨어졌던 남궁천이 주먹으로 바닥을 찍으며 일어섰다. 이제 그의 눈에서 흰자는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
몸을 일으킨 그는 고함을 지르며 두 손으로 검을 쥐고는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며 장건에게 달려왔다. 자신의 몸을 난도질하는 장건의 환영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직 적을 반으로 쪼개버리겠다는 듯 검을 내려쳤다.
그를 상대로 장건 또한 일격을 준비했다. 지금 이 순간 장건에게서 뻗어나가는 무수한 검로 중 가장 빠르고 치명적인 일격, 드넓은 창궁에서 가장 강렬한 것.
다음 순간 청룡을 들고 자세를 낮추던 장건과 검을 내려치던 남궁천 사이에서 번쩍 빛이 터졌다. 그리고 그 빛보다 조금 느리게 꽈르릉-하는 천둥이 울려 퍼졌다.
“···워메.”
손강은 자기도 모르게 뜻 없는 감탄사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번쩍인 빛이 사라진 곳에는 청룡을 올려 벤 자세 그대로인 장건과 왼팔이 잘려 나가고 왼 옆구리부터 오른 어깨까지 쩍 갈라진 남궁천이 있었다.
“···천뢰天雷, 방금 그것, 천뢰가 아닌가?”
“하늘을 그리고 벽력을 펼쳤으니, 그렇게 불러도 좋을 것이오.”
남궁천은 큰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천뢰검법은 우리 남궁의 전설인 줄 알았는데··· 아니, 아니군. 벼락이 어찌 한 가문의 소유겠는가··· 제왕에게 어울리는 징벌이군···”
장건은 천천히 자세를 바로 세우며 휙 청룡을 털었다. 벽력의 힘으로 베어낸 살을 곧장 태워버렸기에 피는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횃불의 불씨에 청룡의 칼날이 시퍼렇게 반짝였다.
그를 바라보던 남궁천은 문득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가루에 고개를 들었다. 장건의 올려 베기 끝에 닿은 지하 공간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마치 땅에서 솟은 벼락이 그 천장을 때리기라고 한 듯 위로 우묵하게 들어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어지럽게 퍼진 시커먼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남궁천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자넨 원주민들과 무림맹의 싸움을 멈출 수 없을 것이네. 부족 연합은 고원성을 불태우고 서쪽으로 진군할 게야.”
“대전사를 노리는 것이오?”
장건의 말에 남궁천의 입이 다물어졌다. 장건은 청룡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대전사와 연합의 주술사는 부족들의 복수는 해야 옳지만 그게 전쟁까지 이어지면 끔찍해질 것을 아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저 친구를 활용해 당신들을 찾아내고 고원성 안에서의 음모를 막으려 한 것이고. 그러니 그가 대낮에 중원인들에게, 그것도 부족을 학살한 자들로 보이는 이들에게 암살당한다면, 이미 억눌리고 있던 전사들은 날뛰게 되겠지.”
입을 다물었던 남궁천은 부스스 떨어지는 돌 부스러기를 그대로 맞으며 말했다.
“···대단한 통찰력이군, 장건. 아니, 우리 행동 양식이 너무 단순한 탓인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지난 수백 년은 도망만 쳤고, 그 후 수십 년 동안은 복수보다도 먹고 살 걱정을 하던 게 우리들이니까. 어쩌면 대계가 너무 빨랐던 것일지도 몰라···”
그가 고개를 내리고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대전사는 이미 죽었을 것이네. 자넨 늦었어.”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미 북천제왕검과 제왕검형의 충돌, 그 후 이어진 대결로 잔뜩 박살 난 기둥 때문에 지지대를 잃고 굉장히 약해져 있던 지하 공간의 천장이 장건의 일격을 마지막으로 더는 견디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그 무너지는 돌무더기에 제일 가까이 있던 남궁천은 피하지 않고 두 눈을 감았다. 마치 이 자리가 자신의 무덤이라는 것처럼.
“끄억!”
하지만 그는 그 순간 자신을 뻥 걷어차는 장건의 발길질에 뒤로 훌쩍 날아갔다. 데굴데굴 굴러 한쪽 벽에 처박힌 그는 상체의 상처를 비롯해 쩌릿쩌릿 느껴지는 전신의 고통에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꺽꺽거렸다. 그동안 무너진 천장 일부를 피한 장건은 손을 휘휘 내저어 먼지를 가라앉히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이 모조리 다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장건의 일격에 제일 큰 타격을 입은 부위가 둥그렇게 꺼진 것이다.
뻥 뚫린 하늘을 본 장건은 이 지하 공간이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이곳은 비밀 공간이라기보단 서점을 비롯한 고원성의 여러 장소를 이어주는 중간 교통로에 가까운 곳이었다. 거기서 두 고수가 난장을 피우며 싸웠으니 천장이 꺼질 법도 했다.
그 구멍 너머의 하늘은 벌써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장건이 거기서 스며드는 빛을 쬐고 있으니 옆으로 손강이 다가와 옷을 털었다.
“안 죽이셨군요?”
“장군이라니 아는 게 많을 거다. 상처가 커서 제대로 저항도 못 할 것이고.”
“다원에서의 여인은 고문을 대비하고 있었잖아요?”
장건의 시선이 고통에 덜덜 떨고 있는 남궁천을 향했다.
“글쎄. 그녀는 실패를 대비하고 있었지만, 저 장군이라는 자도 그럴까?”
손상은 그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애초에 조금 전 남궁천과 그의 대결을 본 후 그의 가슴속에는 장건의 무공을 향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단 그도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었으니까.
그때 부스스 돌가루가 떨어지던 천장의 구멍에서 푸힝힝 말 투레질 소리가 들렸다. 장건에게 너무 익숙한 목소리였다. 스윽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의 구멍을 바라보니, 그 구멍 한쪽에서 말 머리 하나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조?”
지하 공간 위가 전날 그가 머물렀던 객잔 마구간인가 했던 장건은 조조의 얼굴 옆에 빼꼼 고개를 내미는 새로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 인상적인 흉터를 가진 얼굴, 그러나 그 흉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미인임이 확실한 여인.
씩 웃고 있는 그 여인의 이름은 적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