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구멍 아래를 바라보며 싱긋 웃는 적세인 옆으로 남자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그는 장건의 얼굴을 보고는 반갑다는 듯 손을 들었다.
“오, 드디어 만나네. 반갑소! 우리 기억하시오?”
장건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알기로 적세인과 저 남자는 무림맹 순찰대였다. 그러니 동부 변방인 고원성에서 만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수 있었다. 문제는 지난날 고원성으로 여정을 잡기 전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는 그때 무림맹의 비천취응대라 주장하는 자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제삿날을 잡아주었다.
“이야, 이놈 이거 영특한 놈일세? 여기 바닥이 꺼질 건 어떻게 알았냐?”
남자, 산호는 조조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녀석은 콧김을 푹- 내뱉으며 알아서 모시라는 듯 거만하게 턱을 까딱거렸다. 산호는 그런 녀석이 우스워서 털털 헛웃음을 흘렸다.
둘 사이에 있던 적세인은 고개를 살살 내저으며 아래쪽 장건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오, 장 무인. 이거 참 별난 재회인 것 같군.”
“···동감이오.”
잠시 그들을 올려다보며 턱을 긁적이던 장건은, 곧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시선이 적세인과 저쪽 구석에서 눈이 돌아간 채 기절한 남궁천을 번갈아 보았다.
“잘됐군.”
“금방 여기 밧줄이나 막대를 내려··· 뭐라고 하셨소?”
구멍 아래로 내려줄 만한 것을 찾던 적세인이 장건의 중얼거림을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하지만 장건은 대답이 아니라 몸을 돌려 남궁천에게 다가갔다.
팔까지 잃고 상체에 큼직한 상처를 입은 채 뒹굴고 있는 남궁천은 반쯤 시체처럼 보였다. 하지만 장건은 그를 끌어당겨 바로 눕히고, 그의 상처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푹푹 찌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손가락 두어 마디 정도로 깊이 손가락이 파고 들어감에도 남궁천은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잠시 타혈을 한 장건은 조치가 끝나자 탈탈 손을 털며 일어섰다.
남궁천의 몸엔 모용산산처럼 금제가 있지 않았다. 그건 아마 그가 가진 강력한 마공 때문인 듯 보였다. 그의 힘은 평범한 사람의 기혈이라면 간단히 찢어버릴 정도로 난폭했고, 그 난폭함은 평소 자신이 지나는 길에 아무런 장애물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멀쩡하면 점혈도 잘 안 먹히겠군.”
물론 지금의 남궁천은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장건은 그의 단전을 봉쇄하고 엉망이 된 내부에 간단한 응급조치를 취해 주었다. 팔 하나가 날아가고 뼈와 내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음에도 그렇게 기혈을 자극해주자 남궁천의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어린아이가 다가와 코와 입만 막아도 저항할 수 없을 상태이긴 해도, 이 상처를 입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마공의 마력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장건은 그를 들쳐메고 구멍으로 다가갔다. 그새 적세인이 조조의 안장에서 밧줄을 찾아 밑으로 내려준 상태였다. 그러나 흘끗 위를 올려다본 장건은 밧줄을 잡지 않고 가볍게 뛰어 구멍 위로 올라섰다.
적세인과 산호는 일 장은 확실히 넘는 듯 보이는 지하와 지상의 높낮이를 확인하고 놀랍다는 눈빛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뛰어난 무인이라면 충분히 뛸 수 있는 높이였지만, 거기에 사람 하나 무게를 더하고 이리 가볍게 뛰는 건 보통 수준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위로 올라온 장건은 주변을 쭉 한 번 둘러보았다. 그곳은 어느 골목길 한 가운데였다. 늦은 오후의 노란 햇빛이 집과 상가의 윗부분만 비춰 약간 어둑하면서도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대충 둘러보니 두어 집 건너가면 그들이 들어갔던 서점이 나올 듯했다.
“장 무인?”
적세인이 주변을 둘러보는 장건을 불렀다. 그 모습이 그리 여유로워 보이진 않아서였다. 그 부름에 그녀를 돌아본 장건은 들쳐멨던 남궁천을 슬쩍 떠넘겼다.
“잠시 맡아주시오. 내외상이 심각하니 안정을 취해야 하오.”
“아니, 이 자가 누구길래?”
“남궁 씨를 가진 마인.”
적세인과 산호는 잠시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다가, 곧 입을 떡 벌렸다. 남궁 씨면 마가魔家의 혈통이었다. 그리고 그건 마궁의 중요 요인임을 뜻했다.
“자, 잠깐! 장 무인! 지금 무슨···”
남궁천을 떠안은 적세인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장건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보다 장건이 조조의 위에 올라타는 게 더 빨랐다. 장건은 조조 위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적세인에게 말했다.
“조조가 있던 객잔에서 기다리시오, 볼일을 마치면 그리 갈 테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밑에 있는 친구에게 듣고.”
그리고는 툭툭 조조의 고삐를 당겨 골목길 저쪽으로 달려 나갔다. 남궁천을 끌어안은 적세인이나 그 옆에 서 있던 산호나 모두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장건과 조조의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곧 둘은 멍한 눈 그대로 고개를 돌려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눈을 끔뻑거리는 동안 뒤쪽 구멍 아래서 손강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기요··· 나 좀 올려주세요··· 난 장 무사처럼 못 뛴다고요···”
* * *
조조를 탄 장건은 골목을 빠져나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하를 빠져나오며 느꼈는데, 남궁천과의 대결에서 내공 소모가 너무 많았다. 부족 연합까지 빠르게 달려간다고 경공을 쓰면 정작 도착해서는 탈진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공을 아낄 겸 조조에 올라탄 것이다.
“이런.”
그런데 골목을 빠져나오니 대로에 가득한 사람들이 보였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술집이나 객잔을 찾거나,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나와 있는 것이다. 그중 마차나 말을 탄 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 모두 사람들 사이에서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건도 순간 당혹감을 느낄 상황이었다. 당장 부족 연합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와중에 길가에서 시간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때 조조가 고개를 들며 푸히힝 투레질을 했다.
그리고는 와락 달려 골목길 구석에 있던 상자들을 우당탕 밟고 옆에 있던 상가의 지붕으로 올라섰다.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모습에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우르르 물러났다.
“뭐, 뭐여?”
“···말이, 말이 지붕에 올라갔다!”
조조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든 말든 지붕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서는 장건에게 방향을 지시해 달라는 듯 푸르륵 거친 투레질을 했다.
멋대로 움직이는 녀석의 모습에 당황하던 장건은 그런 녀석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부족 연합이 있는 방향으로 툭툭 고삐를 당겼다. 그에 기합이라도 넣듯 한 번 더 투레질한 조조는 고원성 건물들의 지붕 위를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말이야?”
“세상에, 저길 어떻게···”
대로를 걷던 사람들 모두 장건과 조조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지붕과 지붕 위를 훌쩍훌쩍 뛰어넘는 인마人馬의 모습은 너무 눈에 띄었고, 또 쉽게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조조가 지붕을 밟아서 터터덩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집 안에 있다가 깜짝 놀라서 밖으로 나와보는 사람도 있었다.
건물들의 지붕은 평평한 옥상도 있었고, 멋들어지게 기와를 올린 곳도 있었다. 조조는 그런 기와를 밟고도 한 번 미끄러지는 것 없이 멋들어지게 지붕 사이를 뛰어넘었다. 물론 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으직거리며 깨지는 기와도 있긴 했다.
그렇게 고원성에서 가장 높은 하늘길을 내달리길 잠시. 장건은 훤해진 길가를 보고 다시 조조의 고삐를 당겼다. 녀석은 그것만으로 장건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한 객잔의 옆에 세워진 마차 위를 가볍게 디디며 길가로 내려섰다. 다시 평평한 땅에 내려선 조조는 콧김을 한 번 뿜어주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객잔에서 나오던 손님 중 하나가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온 조조를 보고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가, 멀어지는 그들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이후 고원성을 빠져나와 부족 연합의 주둔지로 향하던 장건은 곧 멀찍이 보이는 그 천막들에서 소란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번과 달리 그를 막는 전사들이 없다는 것부터가 벌써 무슨 문제가 생겼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장건은 망설이지 않고 조조를 천막들 사이로 이끌었다. 그러자 그 안쪽에 둥글게 모여있는 원주민들이 보였다. 그들 중 제일 바깥에 서 있던 이들이 조조의 말발굽 소리를 듣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장건의 모습을 본 이들이 외쳤다.
“또! 중원인이 또 왔다!”
“잡아라!”
조조의 고삐를 잡아 멈춘 장건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원주민들의 모습에 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조조도 도끼눈을 뜨고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잠깐! 그는 아니다! 그는 적이 아니야!”
그때 누군가 그렇게 외치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그는 오늘 오전에 다원의 뒷정리를 맡겼던 강물 바위였다.
장건은 그의 얼굴에 핏방울이 튄 것을 보고는 안장 위에서 내려섰다.
“···내가 늦은 모양이군.”
“늦어? 무엇이?”
다른 전사들을 진정시키던 강물 바위는 장건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장건은 그의 얼굴에 피곤함은 있을지언정 분노나 절망은 없다는 걸 느꼈다.
“중원인들이 습격해오지 않았나?”
강물 바위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가 뭐라 말하기 전, 원주민들 뒤쪽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뭘 그리 급하게 오나 했는데, 우릴 도우려 한 모양이군.”
그 목소리에 사람들은 우르르 물러서 길을 텄다. 사람들이 물러서 생긴 길 너머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큰 키의 중년인이었는데, 아래쪽 바지만 입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신발도 없어 맨발이었다. 하지만 그 그렇게 드러난 맨살과 얼굴 위에 그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붉은 피가 흥건하게 적셔져 있었다.
무기는커녕 아무런 치장도 없이 피범벅이 되어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어떤 적나라한 야생의 본능과 섬뜩함이 있었다. 그 분위기 때문에 장건조차도 단번에 그가 누구였는지 떠올리지 못했다. 지난밤 흐르는 뼈라는 주술사와 함께 나타났던 남자. 그는 부족 연합의 대전사였다.
장건의 눈이 그를 넘어 그의 뒤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어느 짐승의 이빨과 손톱에 걸레짝이 된 듯한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 * *
장건은 대전사의 천막으로 초대받았다.
큼직한 천막 안 가운데에는 모닥불이 타고 있었고, 바닥에는 가죽이 깔려 푹신했다.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에 들어와 앉아있으니, 곧 누군가 천막 입구를 걷어내며 들어왔다. 전날 만났던 흐르는 뼈라는 노인이었다.
“오, 금방 왔군. 하려던 일은 잘 마무리되었나?”
“···예. 몸통을 잡았습니다.”
천막의 높이가 낮아 일어나서 그를 맞이할 수가 없었다. 흐르는 뼈는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허리를 굽히고 들어와 모닥불 한쪽에 앉았다. 짚고 있던 지팡이를 무릎 위에 올려둔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 몸통을 잡고 보니 우리 대전사를 습격한다는 말을 들은 모양이구먼?”
“···굳이 제가 도우러 올 필요는 없었던 듯하군요.”
흐르는 뼈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자네의 선의가 빛바래지는 것은 아니지. 친척이나 친구, 같은 부족 사람도 아닌데 우리를 도우려 급히 달려온 것 아닌가? 그러니 그 마음에 감사하겠네.”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그를 본 장건이 마주 머리를 숙이고 있으니, 곧 새로운 사람이 천막을 걷어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피를 닦아내느라 머리칼이 푹 젖은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이었다.
그는 먼저 들어와 있던 장건과 흐르는 뼈를 보며 씨익 웃더니 모닥불 옆으로 다가와 주저앉았다. 그는 그렇게 앉아서 머리칼을 탈탈 털다가 고개를 들어 장건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입가를 당겨 웃더니 자기 코를 킁 하고 훔쳤다.
“중원인 중에도 전사가 있었군. 난 미쳐 날뛰는 말이라 하네. 어쩌다 보니 대전사니, 연합의 수장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
“장건. 떠돌이요.”
“음. 이거 말 한번 깔끔한 친구군.”
미쳐 날뛰는 말은 그렇게 말하고는 하하 웃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진지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흐르는 뼈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잡았다는 그 몸통. 조금 전 이곳을 습격한 이들의 수괴가 맞나?”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궁魔宮이라 불리는 이들로, 오래전 중원에서 도망쳐 온 자들의 후손입니다.”
“허허, 마귀의 궁전이라···”
“그들이 동부의 부족들을 학살하고 그 죄를 서부 중원인들에게 뒤집어씌운 겁니다. 지금 무림맹은 고원성에 동부의 부족들이 모여있다는 것도 모를 수 있다더군요.”
흐르는 뼈는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하고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 옆에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 또한 팔짱을 끼고 앉아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은 그들을 가만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건 이미 다 알던 사실이겠군요. 뭔가 더 궁금하신 게 있습니까?”
그의 말에 대전사와 주술사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눈빛이 교환된 후 흐르는 뼈의 입이 열렸다.
“자네는 그 무림맹이라는 곳에 소속된 게 아니지?”
“예. 전 그냥 떠돌입니다.”
흐르는 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부족 연합 사람들이 서부 사람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네. 수많은 전사가 흔적을 확인한바, 부족을 학살한 중원인들은 모두 서쪽에서 와서 서쪽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