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3)
13화
장건은 피식 웃었다.
“그런 게 있으면 본인부터 배우지 그랬소?”
“아, 오해하지 말아요. 구해줄 수 있는 무공은 정丁급 무공이에요. 그 이상의 무공은 부모형제가 함께 처형당할 중죄니까요.”
“정급이라면···”
장건의 표정이 조금 굳어지자 주여랑의 미소는 더 진해졌다.
“네. 황군이 외부의 제자에게 전수하는 걸 허락받은 무공들이죠. 그리고 황군의 기본공이기도 하고, 황군을 꿈꾸는 이들에겐 다른 이들보다 한발 앞서나갈 수 있는 중요한 무공이기도 하고요. 그걸 제가 왜 익히지 않았냐 하면, 뭐, 알잖아요? 황군 출신들이 제자 한 명 들이는 데 얼마나 까다로운지.”
“···확실한 신분과 뛰어난 자질, 그리고 무엇보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가장 중요하게 보지.”
주여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그 적정선을 넘지 못하나 보더군요. 제자는 안 된다더라고요.”
“그럼 난 될 거라 보는 이유가 뭐요?”
“···그 사람들은 나한테 빚이 있어요. 명목상이나마 당신을 제자로 받아 무공을 가르쳐달라 할 정도로 큰 빚이죠.”
장건은 그녀와 반대로 고개를 살살 저었다.
“말이 자꾸 빙빙 도는군. 그런 거였으면 당신이 제자가 되었으면 될 일이잖소?”
“이봐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들었을 텐데요. 내가 그 무공을 익히려면 지금까지 수련해 온 무공을 모조리 포기해야 한다고요. 정급 무공이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칼 한 번 뽑지 않고 제씨 가문 무사를 내쫓을 정도니 굳이 그걸 익히지 않아도 배울 점이 있겠죠. 무려 역대 황제들이 손을 본 무공이니까.”
주여랑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할 무공 배우는데 빚을 쓰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처럼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게 현명한 방식이죠. 안 그래요?”
장건은 안장 머리에 팔꿈치를 받치고 뚱한 눈으로 주여랑을 바라보았다.
사실 정급이고 갑급이고 일단 황군의 무공 자체가 탐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장건은 중원에서 이런저런 무공 선생들에게 돈을 주고 무공을 배웠고,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로는 거기서 나름의 상상력과 노력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천 년 전부터 제국의 정점이었다.
역대 모든 황제의 무공이 천하제일이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황자, 황녀들이 태자의 자리를 얻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황군의 동의와 지지가 있어야만 한다. 정도 이상을 뛰어넘지 못한 자는 태자의 자리조차 올라설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태자가 된 후에도 황제의 기준을 넘지 못한다면 곧바로 폐위되었다.
천하의 온갖 영약,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 선생의 지도, 진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마왕 항우마저 이겨낸 한 고조로부터 내려오는 뛰어난 재질과 혈통, 그리고 황제가 되고자 하는 가장 강력한 의지가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지는 존재가 바로 황제였다.
그리고 그렇게 황위에 오른 황제가 제일 먼저 하는 사업이 황군 무공의 점검이었다. 가장 등급이 낮은 정丁급의 무공이라도 정도 이상의 고수가 보면 배울 점이 있을 것이란 말이 헛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명목상으로나마 제자로 받아준다니 나중에 무공의 출처를 취조당할 일도 없었다.
주여랑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래도 은퇴한 황군 출신이거나 혹은 그와 연관된 사람인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장건은 이왕 도운 거 조금 더 도와주고 황군 무공을 견식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도와준다는 사람들은 어디 있는데?”
주여랑은 장건의 말을 듣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장건의 마음이 돌아선 것을 눈치챈 것이다.
“이틀 정도 떨어진 곳이에요. 중간에 계곡과 강도 있으니 흔적을 지울 수 있어요.”
“그럼 빨리 갑시다. 이미 시간을 많이 끈 것 같군.”
“좋아요. 내가 길을 안내하죠.”
그녀는 냉큼 다가와 조조의 안장을 붙잡았다.
“···뭐 하시오?”
“내 말이 죽었어요. 방금 제운성 그 자식 짓이죠. 새 말을 구할 때까지 신세 좀 질게요.”
그리고는 폴짝 장건의 뒤에 올라탔다. 게다가 앞을 보고 탄 것도 아니고 반대로 뒤돌아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어이없는 눈으로 보는 장건에게 싱긋 웃기까지 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 가벼우니까. 그렇지?”
가볍게 조조의 엉덩이를 때리며 하는 말에도 녀석은 상관없다는 듯 푸르륵거렸다. 항상 뚱해 보이는 놈이 등 위에 미인이 타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 가죠.”
당당한 주여랑과 조조의 모습에 장건은 고개를 살살 내저으며 발로 옆구리를 차 신호를 주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앞을, 한 사람은 뒤를 보며 말 한 마리에서 서로 등을 기대어 탄 이상한 모양으로 그들은 출발했다.
* * *
제운성은 높은 나무 위에 서서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왼쪽 팔뚝에는 커다란 수리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검은 몸체에 흰 머리를 가진 녀석이었는데, 부리부리한 눈매를 타고 붉은 무늬가 길게 내려가는 아름다운 수리였다. 녀석은 혈리응이라는 신대륙에서만 구할 수 있는 영물로 제씨 가문의 중요한 긴급 연락책이었다. 그가 물러선 데에는 장건을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과 연락이 왔다는 신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운성은 방금 그 연락책으로 가문에서 중요한 소식 하나를 전달받은 후였다.
“각주님?”
그가 소식을 받아보고 나서 한참이나 말이 없자, 그 옆 가지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검은 옷의 복면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제운성은 그제야 짧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추적하다가 오늘 밤 습격한다. 무리하지 않고 일단 둘의 실력을 알아보는 방향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복면인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고 나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나무 아래서 부복하고 있던 복면인들이 스스슥 흩어져 사라졌다. 제운성은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뭔가 깊게 생각하며 천천히 혈리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흠. 지나가던 협객인가, 의도된 접선인가···”
그의 중얼거림에도 혈리응 녀석은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좋은지 꾸벅거리고 있었다.
* * *
장건은 삭정이 하나를 바라보다가 모닥불에 던지고 앉았다. 그리고 주여랑을 시선을 주고 말했다.
“생각보다 태평하군. 모닥불도 피우고.”
앉은 자세로 비파를 튕기던 그녀는 장건의 말에도 손을 멈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아까 낮에 강 하나를 건너며 흔적을 지웠잖아요? 뭐 그래도 결국 쫓아오긴 할 테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만 할 필요는 없어요. 머릿속에서 걱정만 하는 건 쓸데없는 편이죠. 게다가 난 죄가 없다고요. 내가 작정하고 무림맹 본단이나 제국에 신고하면 그들도 곤란할걸요? 나 감산에 아는 사람 많다고요.”
“그럼?”
“아마 가까운 무림맹 지부장을 찾아 뇌물을 먹이지 않을까 싶네요. 그냥 잠깐 붙잡고 조사하는 척만 하라고 해도 당장 나는 어쩔 수 없을 테니까. 진짜 위험한 건 내일 마을을 지날 때인 거죠.”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갑자기 손을 멈추고 장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보다, 낮에는 정말 왜 날 도와준 거예요?”
“···그건 이미 말하지 않았소?”
주여랑이 웃었다.
“정말 길 가다 넘어진 사람 일으켜주듯 날 도와준 거라고요? 제씨 가문의 무사와 싸울 위험을 감수하고?”
“비유가 재밌군.”
그녀는 장건의 짤막한 대답에 천천히 미소를 지웠다.
“···특이한 사람이군요, 당신. 보통 그런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죽던데요. 무림인이라고 창칼 차고 다니는 사람 중에서는 특히 더 확실히요.”
그녀와 반대로 장건은 피식 웃었다.
“오래 산다는 게 정확히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이오? 오 년? 십 년? 칼 차고 나쁜 짓 하는 놈도 그렇게 오래 살진 못하지. 본인이 벌인 악행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을 테니까. 결국 좋은 놈이니 나쁜 놈이니 가릴 게 아니라, 무림인이라는 족속 자체의 명이 짧은 것이겠지.”
“나쁜 놈이나 착한 놈이나 결국은 칼 맞고 죽는 게 무림인이다?”
“굳이 선악을 뚜렷이 나눌 수 없다는 말이오.”
주여랑은 다시 슬그머니 웃었다.
“글쎄요. 그래도 당신 정도면 착한 것 같은데요?”
장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삭정이 하나를 더 모닥불에 집어 던졌다. 주여랑은 묘한 눈으로 그런 장건을 바라보다가 다시 비파를 튕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직 산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약간 쌀쌀한 공기와 우중충하게 서 있는 나무들이 작은 모닥불과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거기에 주여랑의 비파 연주가 함께하자 쫓기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여행하다 야영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장건의 귓가에 비파 소리 말고 다른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제운성이라는 친구는 그쪽 생각보다 빠르고 과격한 모양인데.”
주여랑은 그 말에 비파를 멈추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렇게 비파를 멈추고 나서야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그녀는 벌떡 일어나며 대뜸 등허리의 직도를 뽑았다.
“아이, 시발! 내가 진짜 감산에 가면 무림맹이 아니라 제국에 신고한다! 감산성 태수한테 내 전 재산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신고할 거야! 고대 세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는지 보자고!”
그녀가 칼을 뽑음과 동시에 들켰다는 걸 느꼈는지 나무 사이사이에서 복면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미 장건과 주여랑을 둥글게 포위하고 좁혀오고 있었다.
왼손으로 칼집을 잡으며 일어난 장건은 빠르게 그 수를 확인했다. 흑의인은 모두 열 정도였다. 그중 제운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흑의인들은 눈 주변과 칼에 검게 칠을 해서 반짝이는 부분은 눈에 흰자위가 전부였다.
장건과 주여랑은 빠르게 서로를 등지고 섰다. 주여랑은 자신을 포위한 흑의인들과 그들의 칼을 노려보며 말했다.
“진짜 나쁜 새끼들··· 정말 해보자는 거야? 이젠 날 멀쩡히 데려갈 생각이 없다는 거지···”
그녀의 욕지거리에도 흑의인들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천천히 몸을 낮추며 조금씩 포위망을 줄여왔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타닥이는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늘어선 흑의인들, 칼을 뽑은 주여랑, 아직 칼집만 잡고 있는 장건은 한순간에 착 가라앉았다. 그 순간 거기 있는 존재 중 움직이는 것은 모닥불 불빛에 생긴 그림자의 흔들림 뿐이었다. 약간 서늘하던 공기는 순식간에 그들의 긴장감으로 뻣뻣해지는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흑의인 중 하나의 자세가 살짝 흐트러지며 움직였다. 단련된 근육과 내력이 폭발하기 직전, 호흡과 호흡 사이에 일어난 아주 짧은 틈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주여랑의 손에서 비도가 날았다. 짧게 번쩍인 비도가 흑의인의 가슴팍에 틀어박히고, 다른 흑의인들은 그것이 신호가 된 듯 일제히 검은 선을 그리며 달려들었다.
동시에 장건은 모닥불을 걷어찼다.
그 발길질 한 번에 노랗고 빨간 불티와 재가 요란하게 흩뿌려졌다. 장건에게 달려들던 흑의인 다섯은 그 불티에 순간적으로 멈칫했고, 그중 셋은 곧장 몸으로 불티를 뚫고 들어가며 칼을 휘둘렀다.
그들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장건은 높이 뛰어올라 제비를 돌며 흑의인들의 뒤쪽으로 내려선 후였다. 불티에 멈칫했던 흑의인 둘이 놀라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장건의 칼이 뽑혔다.
시퍼렇게 반짝이는 칼날이 두 흑의인의 상체를 훑었다. 한 박자 늦게 팍하고 피가 튀었다. 그렇게 두 놈을 쓰러뜨린 장건의 눈에 몸을 돌리는 세 흑의인 너머 주여랑의 모습이 보였다. 본인을 노린 흑의인 하나에게 칼침을 놔주던 와중이었는데, 다른 한 놈의 칼날이 그녀를 노리고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장건은 자세를 낮추고 발끝에 내공을 실어 박차며 빠르게 튀어 나갔다.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 미꾸라지가 된 듯 주여랑과의 사이를 막던 놈들을 스쳐 지난 그는 날아간 힘을 그대로 칼날에 실었다.
흑의인 하나가 가슴에서 피가 팍 튀며 쓰러졌다. 주여랑은 갑자기 옆으로 나타난 장건을 보며 깜짝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다가 곧장 칼을 휘둘러 그의 등을 노리는 칼날을 막았다.
동시에 몸을 돌린 장건이 그 흑의인의 배에 칼을 찔러 주었다. 그는 읍 하고 숨 참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며 나머지 흑의인들도 우르르 물러섰다.
장건과 주여랑은 칼을 든 자세 그대로 주변을 살폈다. 아주 잠깐 칼 몇 번 번쩍인 것이 전부인데 흑의인 다섯이 쓰러지고 질질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빠르게 치료하지 않으면 진짜 죽을 터였다.
장건은 칼을 털며 바로 섰다.
“더 할 건가?”
복부를 부여잡은 흑의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고개를 가로젓자 나머지 흑의인들도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장건이 말했다.
“친구들 데려가.”
물러나던 흑의인들이 우뚝 멈췄다. 호흡을 가다듬던 주여랑도 깜짝 놀라서 외쳤다.
“미쳤어요? 나하고 당신을 죽이려던 놈들이잖아요!”
장건은 들고 있던 칼마저 집어넣었다. 그리고 쓰러진 흑의인의 칼을 집어 날을 살폈다. 시커멓게 칠해진 칼의 날은 꽤 무뎠다. 칼이라기보단 쇠몽둥이에 가까웠다. 무공을 익힌 이가 하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이 칼은 사람 죽이려 드는 날붙이라기엔 부족한 편이었다.
잠시 날을 살피던 장건은 그걸 툭 내던지며 다시 말했다.
“데려가.”
배를 부여잡고 그런 장건을 묵묵한 눈으로 바라보던 흑의인은 다른 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쓰러진 흑의인들을 빠르게 챙겨 어두운 숲 너머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린 장건은 자신을 아주 요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주여랑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서 야영하긴 글렀군. 그냥 치우고 갑시다.”
주여랑은 장건이 흩뿌려진 불티를 끄고 다시 조조의 안장을 채워 고삐를 끌어당기는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장건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 진짜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휙 돌아 앞장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