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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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서산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도 지평선 부근에는 아직 불그스름한 석양빛이 남아 두루뭉술한 분광을 선보인다. 서쪽 하늘은 이제 빛난다기보다는 묘한 질감의 주황빛 물감으로 칠해진 도화지 같았고, 그 안에 거뭇한 구름이 지저분한 얼룩처럼 보였다.
일행과 조금 떨어져 모닥불을 등지고 앉은 장건은 그 낮과 밤의 불분명한 경계를 바라보며 후-하고 연기를 뱉었다. 절반쯤 탄 연초가 빨갛게 반짝였다.
장건과 적세인, 산호, 그리고 그들의 포로 남궁천이 고원성을 떠나 신사천으로 이동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손강은 부족 연합과 고원성의 상황을 계속 지켜보기 위해서 그곳에 남았다. 아무래도 자신을 무림맹 비선이라 생각하는 적세인과 산호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감산성에서도 들었지만 두 조직은 은밀히 협력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분명 다른 집단이었다.
어쨌든 그 며칠간 남궁천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적세인은 무림맹에 도착하기 전에 마궁의 정보 몇 가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그의 입이 열리는 것은 식사할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적세인과 산호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일 터였다. 장건의 지속적인 관리로 단전의 마공은 세를 회복하기는커녕 점점 더 흩어져가는 느낌이었고, 잘려 나간 왼팔과 상체의 큰 상처는 분명한 후유증을 예고하고 있었다. 무림맹이 정말 그를 살려줄지 어떨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정보가 그의 목숨을 보장할지 가늠할 수 없기에 그냥 입을 다무는 걸 선택한 것이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장건은 다 피운 꽁초를 툭 튕겨버리고 일어섰다. 그 후 한쪽에 다른 말들과 투닥거리는 조조를 확인하고 모닥불로 돌아갔다.
그들은 조금 전 식사를 마쳤다. 마른 곡물과 콩, 육포를 대충 물에 넣고 끓여 때운 저녁이었다. 하지만 육포가 고급품이었는지, 아니면 중간에 산호가 집어넣은 양념 덕분인지 그럭저럭 맛은 괜찮았다.
남궁천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모닥불 가까이 붙어 앉아있었다. 추위를 느끼는 것으로 보였다. 산호는 남은 저녁거리를 싹싹 긁어먹고 있었고, 적세인은 어떤 종이 뭉치를 꺼내 살펴보고 있었다.
그를 본 장건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고원성에서 손강 그 친구와 보던 것이군. 뭐요?”
종이를 살피던 적세인은 고개를 들어 싱긋 가볍게 웃어주고는 다시 종이에게 눈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가 지금까지 무림맹으로 보냈던 보고서와 이번에 보내는 보고서요. 그리고 그가 개인적으로 연구하던 것도 함께 있고.”
“연구?”
적세인은 종이 뭉치 중 하나를 따로 꺼내 들며 말했다.
“손 무사는 고원성을 넘어 동쪽으로 떠나간 중원인이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고 여기고 있소. 지금 서부 해안선 도시들과 땅은 이 신대륙 전체에 비하면 정말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백 년 전 처음 이 땅에 내려선 중원인들은 그런 드넓은 땅에 멀리까지 흩어졌다는 거지.”
그녀는 흘낏 남궁천의 반응을 살피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먼 동부에도 중원인들이 모여 사는 땅이 있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소. 흔히 마궁이라 불리는 마가魔家외의 사람들이 일궈낸 땅이 있으리라는··· 이 자료들은 동부 원주민들의 이야기와 옛날 고원성을 넘어간 중원인들의 숫자를 추정한 것이오.”
장건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책과 종이로 가득하던 그의 집이 떠올랐다. 동부 원주민 동태 파악 외에 그가 하던 작업이 이것이었나보다.
지난번 손강과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마궁은 고원성에서도 동북부로 한참을 떨어진 오대호쯤 본거지를 차린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주변에 다른 중원인 정착지가 있다면 마궁에서 그들을 그냥 두고 보았을까? 잠깐 생각해봐도 백 년 동안 마궁의 세력에게 흡수당하거나 파괴되었으리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이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는 남궁천을 향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종이를 살피던 적세인과 솥을 달그락거리던 산호가 멈칫 굳었다. 지난 며칠간 장건은 남궁천에게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두 순찰대원은 어쩌면 장건이 말을 걸면 남궁천도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미 고원성에서 무림맹이 할 일을 대신해 준 장건에게 포로의 심문까지 부탁할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당장 남궁천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는 걸 반쯤 포기하던 상황이었다.
“···궁의 사람이 전부 가문을 가지지는 못했지. 한미한 핏줄을 가진 이도 있고, 몰락한 가문의 먼 방계인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래··· 그저 새로운 땅을 찾아 그 먼 곳까지 온 농부들도 분명 있었네. 누군가는 밭을 개간해야 먹을 것을 얻을 것 아닌가.”
과연 순찰대원들의 생각이 맞았는지, 모닥불을 바라보는 남궁천의 입이 열렸다. 그는 조금이라도 온기를 보존하고 싶다는 듯 남은 손 하나로 모포를 부여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신대륙은 아주 넓고 풍요로운 땅이야. 어딘가에 우리 말고도 자기들끼리 자급자족하는 개척지가 있을 법도 하지. 하지만 궁보다 더 크고 융성한 자들은 보지 못했네. 애초에 궁 주변에 그런 이들이 있었다면 우리가 서부를 넘볼 생각을 했겠나? 당연히 그들을 먼저 통일하지 않았겠나?”
“당신은 지난번 대계라는 것이 너무 빨랐을지도 모른다고 했소. 그건 무슨 말이오?”
모닥불을 바라보던 남궁천의 눈이 천천히 장건을 향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여기서 떠들 사항이 아닌 것 같군. 내 목숨줄이 달린 이야기인데 함부로 떠들 순 없지. 그래도 짧게나마 말해주자면··· 우리들 또한 여러 의견이 있었다 정도만 알고 있게.”
그의 눈을 잠시 마주 보던 장건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무림맹이 고대 세가들과 신대륙의 여러 방파가 하나로 모여 이루어진 연합체인 것처럼, 마궁도 남궁 씨니 모용 씨니 하는 마가들이 소속된, 핍박받던 옛 가문들과 마인들이 하나로 뭉친 연합체다.
물론 그게 무림맹만큼이나 느슨한 연합은 아닐지라도 분명 그 안에서 다양한 의견이 충돌할 터였다. 남궁천은 그걸 이야기해 준 것이다.
그때 이번엔 남궁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질문해도 되겠나?”
장건은 듣고 있으니 질문하라는 듯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의 그··· 검법. 제왕검형··· 난 그 어떤 가문이나 무림맹 방파가 그런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네. 비슷한 무공도 들어본 적 없고. 혹, 황군의 무공인가?”
질문하는 남궁천의 눈에는 희미한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마치 자신이 패배한 것이 황군의 무공이라면 남궁 씨의 지난 세월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하는 표정이었다.
장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남궁세가의 검법이오.”
“뭐라고?”
남궁천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얼굴을 굳혔다.
“···날 놀리는 건가? 패자를 놀리는 취향인 줄은 몰랐군.”
하지만 그 얼굴은 이어진 장건의 말에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당신들 말고. 내가 아는 다른 남궁세가가 있소. 적어도 마공을 익히고 옛 암군을 섬기는 가문은 아니지. 그들과 당신 가문을 같은 가문이라 치는 건 그 남궁세가에게 모욕인 것 같군.”
“···다른 가문이라고? 세상에 우리 말고 다른 남궁 씨가 있었나?”
장건이 피식 웃었다.
“세상은 넓소. 당신이 넓다고 말한 이 신대륙도 그 세상 일부에 지나지 않지. 마궁이 그토록 증오하는 한 제국도 겨우 중원과 남쪽의 몇몇 섬, 그리고 신대륙의 해안선 일부를 포함할 뿐이오. 그러니 그 넓은 세상 어딘가에 또 다른 남궁세가 있지 말란 법도 없지 않겠소?”
남궁천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장건도 그가 이해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방금 그의 말처럼 정말 세상 어딘가에 또 다른 남궁세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장건의 남궁세가는 그의 마음속에만 있는 이름이었다.
사실 그 정도면 제왕검형의 창시자가 자신이라도 말해도 좋았다. 실제로 영감을 받았을 뿐 직접 실현한 것은 장건이니 제왕검형의 주인은 그였다.
하지만 장건 스스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묻혀있던 무공을 몸으로 발굴하고 재현할 뿐, 그게 자신만의 비법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비밀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남궁천에게 지나가듯 가볍게 말할 수 있었다.
“원한다면 가르쳐 주겠소, 제왕검형.”
세상에 다른 남궁 씨가 있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남궁천은 그 말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장건을 바라보았다.
“···가르쳐 주겠다고?”
“물론 당신이 익힌 마공은 포기해야 할 것이오. 이미 북천제왕검에 익숙해져 있는 몸으로 새롭게 제왕검형을 익힐 수는 없을 테니까.”
“···”
남궁천 정도 되는 나이에 지금까지 익히던 무공을 포기하라는 건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장건이 워낙 가볍게 이야기해서인지, 아니면 가볍기에 더 무겁게 느껴지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인지 남궁천은 화가 나지 않았다.
그가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장건은 어느새 모닥불로 시선을 돌리고는 삭정이를 꺾어 던지고 있었다.
남궁천은 한참 후에야 쓰게 웃으며 모포를 추슬렀다.
“···이 나이에 새 무공을 익히기엔 너무 늦었지. 제자를 찾는다면 젊은 친구를 찾아보게.”
그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자리에 누웠다. 그가 자리에 눕자 여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순찰대원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의 대화에서 쓸만한 것이 있었는지 되새기는 것이다.
그동안 지평선을 물들이던 노을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검푸스레한 밤하늘과 일찍 반짝이기 시작한 밝은 별들 뿐이었다.
“어우, 잘 먹었다.”
더는 대화가 없을 듯 보이자 여태 솥을 들고 있던 산호도 그것을 내려놓으며 배를 두드렸다. 적세인도 다시 손강의 보고서에 눈을 돌렸고, 장건은 삭정이를 하나 더 꺾어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그날 저녁의 대화는 그렇게 지나갔다.
이후 네 사람은 계속해서 서쪽 신사천을 향해 달려 나갔다. 풀 덮인 언덕과 메마른 계곡을,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은 폐허와 상인과 무림인이 잔뜩 오가는 마을도 지났다.
낮 동안에 최대한 많이 움직이고자 하는 적세인 때문에 마을에 머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여정 대부분을 야영했고, 마을에서는 식료품을 보충하고 의원을 들러 남궁천의 상태를 확인하기만 했다.
적세인이 여정을 재촉한 것은 남궁천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점과 동시에 그들의 위치 노출을 최소화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녀는 남궁천이 마궁에게 신호나 흔적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남궁천은 그날 대화 이후 가끔 입을 열었는데, 대부분은 그저 배가 고프다거나 불이 약해 춥다는 정도의 이야기였다.
적세인이 그런 남궁천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과는 다르게 산호는 전날 그에게 귀를 물렸던 것을 잊었는지 가끔 농담까지 걸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말 달리길 한참. 장건의 눈에 익숙한 언덕이 들어왔다.
지난번에도 다른 이들과 함께 올랐던 언덕이었다. 그때는 마차를 타고 있었고, 조조는 한 소녀를 태우고 있었다. 소림승 진견과 진서하, 공주 유설, 그녀의 호위무사 진하. 모두 바다 건너 중원으로 떠나간 이름들이었다.
조조도 장건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갑작스레 푸르륵 투레질을 했다. 장건은 녀석의 목덜미를 툭툭 쳐주며 옆을 돌아보았다.
이번엔 그때처럼 편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적세인은 아무래도 장건이 비천취응대 실종의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고, 그들의 비밀을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남궁천은 지난 며칠 야위어 병자의 행색을 한 채 두 눈만 시퍼렇게 빛내고 있었다. 맹과의 거래를 통해 살아남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듯 보였다.
언덕 위에서 보이는 신사천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산호뿐이었다. 지난 며칠간 식사 대부분을 책임지던 그는 이제 야영이 끝났다는 것에 순수히 기뻐하고 있었다.
일행을 쭉 둘러본 장건도 고개를 돌려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무수한 전각들과 잔뜩 오가는 사람들. 수많은 마차와 우마차들. 저 멀리 해안가에 정박한 배들과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무역선도 보였다.
그것들을 바라본 장건은 다시 번잡한 도시의 회오리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 그의 눈에 저 아래에서 이쪽을 향해 우르르 달려오는 기마들이 보였다. 같은 옷을 차려입은 건장한 체격의 무인들로, 큼지막한 깃발도 하나 들고 있었다. 그들을 본 남궁천이 중얼거렸다.
“손님맞이가 요란하시군···”
그 무인들의 깃발에는 무림맹武林盟이라 쓰여 있었다. 이전 마을에서 보낸 적세인의 연락으로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