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
* * *
제운성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경비대원은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지 그가 내민 화려한 모양의 명패만을 확인하고 길을 비켜주었다. 덕분에 장건은 그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적세인과 함께 무림맹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조조와 적세인의 말은 문 바로 안쪽에 있던 마구간에 남았다. 시큰둥하던 녀석은 마구간 안에 가득한 암말들을 보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장건은 고개를 살살 저으며 짐을 챙겨 들었다.
“음. 외부인으로 온 것이니 일단 접객당으로 가야겠지? 내 길 안내를 해주지. 가면서 이야기도 좀 나누고.”
그는 자연스럽게 앞장서 걸으며 장건을 안내했다. 장건은 자신이 기억하던 그의 신분이 무림맹이 아니라 고대 세가였음을 떠올리며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모르겠군. 아까 여전히 뻣뻣하게 사냐는 말은 그냥 농담이었네. 자네가 좀 그런 면이 있지 않았나? 난 지난번 사건 이후 정말 바쁘게 지내고 있네. 세가에 큰일도 있었고···”
앞장서 걸으며 말을 꺼내던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고 적세인이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보고는 슬쩍 웃었다.
“이거 순찰대의 유명한 적세인 대원을 만났는데 인사도 하지 않았구려. 제운성이라고 하오.”
“···적세인이오. 이런 식으로 제가의 수사관을 만날 줄은 몰랐소.”
“음. 일단 그 사건 이후 신사천의 암상 조직은 아주 박살이 났네. 음지에서 빌어먹던 자들이 날벼락을 맞은 건 덤이었지. 먼젓번에 상행 조합도 사건이 터져 여기저기 구멍이 뚫렸는데, 암상마저 그렇게 되자 여기저기서 빈구석을 차지하고 꿀을 핥으려 머리를 들이밀었지. 하지만 최종적인 승리자는 무림맹과 장가 상회로 좁혀지고 있네.”
갑자기 나온 가문의 이야기에 장건의 눈썹이 슬그머니 좁혀졌다.
“암상을 박살 낸 건 제가일 텐데 왜 엉뚱한 무림맹과 장가 상회가 이득을 보았느냐? 그건 제가의 머리가 제대로 움직이질 못했기 때문이었네. 정확히는 제궁월 가주가 움직이질 못해서였지. 왜 그런 줄 아나?”
“글쎄.”
장건의 퉁명스러움에도 제운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수사관이니 혈리응이니 머리 쓰는 쪽으로 유명하다더니, 머리 굵은 사람들 대개 그러하듯 말도 많은 모양이었다.
“가주가 주화입마에 들었거든. 가문의 무공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참사였지.”
그는 아예 남 이야기를 하듯,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냐는 것처럼 장건을 슬쩍 한번 돌아봐 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주화입마 끝에 가주의 명이 다한 것이 두 달 전이네. 그래서 지금 가문은 전 가주의 장례식과 소가주 제상천 공자의 가주 즉위식 때문에 정신이 없지. 여기저기서 선물도 오고 위문도 오고, 축하단도 오고··· 하지만 그 와중에 신사천의 실속은 무림맹과 장가 상회가 다 집어삼키고 있네. 특히 장가 상회는 이번에 누군가 새로운 기술자를 영입한 모양이던데, 그가 재밌는 물건들을 많이 개발하고 있다더군. 아마 제궁월 가주가 멀쩡했다면 신사천을 정리하며 그 개발자도 빼 오려 수작을 부렸을 것이야···”
장건은 계속 이어지는 제운성의 신사천 속사정 이야기에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장가 상회가 단상운과 잘 협력해 사업을 키워간다는 이야기는 들어줄 만했다. 하지만 그 외에 무림맹과 제가 사이의 묘한 신경전, 천후성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연씨 세가와 제가의 오랜 다툼, 무림맹 내부 여러 세력의 줄다리기 등등은 장건의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쪽 귀로 흘러나갔다.
슬슬 그를 닥치게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때, 그들은 접객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운성은 마지막으로 관리실에서 담당자까지 불러와 주고는 장건에게 가벼운 포권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자네가 무슨 일로 맹에 온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나중에 시간 나면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떠나가는 그의 어깨 위로 날아갔던 혈리응이 다시 내려앉았다. 그와 그의 부하로 보이는 이들은 무림맹 전각과 탑들 사이로 멀어져갔다.
“···그렇게 떠들어대면서 정작 본인이 어떻게 맹주부에 들어갔는지는 전혀 설명해주지 않았소. 뭐 하는 작자인지 모르겠군···”
적세인은 멀어지는 제운성의 뒷모습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접객당 담당자에게 방을 준비해달라 말하고는 장건을 마주 보았다.
“짐을 풀고 편히 쉬고 계시오. 나는 고원성에서 가져온 자료를 가지고 윗선에 보고해야 하니까. 일이 잘 풀리면 오늘 저녁에라도 맹주나 원로원에서 당신을 보려 할 것이오. 아무리 늦어도 내일쯤엔 일이 진행될 테니 차분히 기다려주셔야 하오.”
“그 주머니나 잊지 마시오.”
그녀는 장건의 가벼운 말투에 피식 웃으며 품에 넣어두었던 독모래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걸로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낼 테니까.”
그렇게 너스레를 떤 그녀는 제운성이 멀어진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장건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제야 조용해진 상태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맹 안에 있는 무수한 전각과 높은 탑들에 비해 길을 오가는 사람은 적었다. 그 적은 사람들마저도 급히 어딘가로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으로 보아 남궁천의 등장이 무림맹을 크게 흔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때 접객당의 담당자가 장건을 불렀다. 담당자는 여인이었는데, 잔머리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모아 묶은 머리카락과 구김을 찾아볼 수 없는 옷자락, 걷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는 꼿꼿한 허리 등등, 굉장히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장건은 안장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슬렁슬렁 그녀의 뒤를 따라 접객당接客堂이라는 간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피식 실소를 흘렸다. 밖에서 볼 땐 큼지막한 전각이었던 접객당은 안으로 들어와 보니 밖에 있을 객잔과 그 구조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일 층과 네모나게 뚫려 햇살이 들어오는 전각 한가운데 지붕, 그리고 이 층부터 다닥다닥 붙어있는 방들. 접객당이라기보단 무림맹 객잔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 듯한 모습이었다.
일 층 여기저기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쭉 한 번 둘러본 장건은 담당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차를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접객당 손님들은 새롭게 등장한 인물에 주의를 집중했다.
“헉!”
“왜 그러는··· 허억!”
그때 호로록 차를 마시던 누군가가 장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서 찻잔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사람도 몸을 돌려 장건을 보고는 똑같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잔을 떨어뜨렸다.
찻잔이 탁자를 구르고 바닥에 떨어져 깨져나가자 주변의 이목이 두 사람을 향해 집중되었다. 장건의 눈도 그들을 향했다.
“힉!”
몸을 돌려 장건을 확인했던 자는 얼른 다시 몸을 돌려 그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처음 장건을 발견했던 남자는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왜, 왜 일어나시오?”
“저분을, 은인을 여기서···”
“뭐? 아니 당신이 저 양반을 어찌 알고··· 아니지, 시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 앉으쇼! 앉어!”
장건은 헛웃음을 흘렸다. 등을 보이고 앉아서 상대방을 향해 억눌린 목소리로 다그치는 자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장건과 소란스러운 두 사람을 본 담당자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시는 분들인지요.”
“한 사람은. 잠깐 인사 좀 하고 오겠소.”
“그러시지요.”
장건은 설렁설렁 걷던 걸음 그대로 두 사람의 탁자로 다가갔다. 주변의 다른 손님들은 모두 흥미롭다는 눈으로 그 둘과 장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어섰던 남자는 장건이 다가오는 걸 보고는 쭈뼛쭈뼛 옷을 정리하고 대뜸 포권을 하며 외쳤다.
“검룡문의 가용산이라고 합니다! 은인을 뵙습니다!”
“···누구?”
장건의 걸음이 멈췄다. 검룡문이라는 이름도 오랜만이었지만, 가용산이라는 이름은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가용산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 모르시겠습니까? 지난날, 은인께 목숨을 빚진 가용산입니다! 그때 은인께서 마인의 손길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지금 여기 서 있지 못했을 겁니다···”
장건은 그제야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염호성의 새하얀 평원, 그곳에서 미쳐버린 소림승에게 학살당하던 검룡문 무사 중 하나였다. 이름을 모르니 그의 자기소개를 못 알아듣는 것도 당연했다.
“음···”
당시 많은 검룡문 무사가 죽었으나 장건 덕분에 목숨을 건진 무사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장건과 소림승 진견 덕분에 무사히 염호성의 검룡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장건은 그때 일이 떠오르며 절로 입가가 씁쓸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감사하다 인사하는 사람 붙잡고 다그칠 수도 없는 일이라, 장건은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가용산이라는 무사는 그 작은 끄덕거림만으로도 기쁜지 연신 허리를 숙으며 감사를 말했다. 그를 적당히 상대해준 장건은 시선을 돌려 아직도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자를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듯했다.
“야.”
그 목소리가 천둥이라도 되는 듯 가늘게 떨던 자가 크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끝끝내 앉은 자리에서 몸을 돌리진 않았다.
“아니, 뭐 하고 계시오? 어서 인사드리시오. 이분이 염호성에서의 환란을 잠재우신 장 대협이시오! 내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하고!”
“···대협은 무슨···”
보다 못한 가용산이 그를 불렀으나, 그는 도리어 고개를 숙이고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가용산은 그를 듣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장건은 도리어 털털 웃었다. 그리고 등을 보이는 그의 어깨에 턱, 손을 올리고 말했다.
“야. 내가 이걸 억지로 돌려야겠냐?”
“···흐윽. 시발.”
짧게 중얼거린 그는 곧 억지웃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장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역시 억지로 헤헤거리며 말했다.
“자, 잘 지냈소, 장 형···?”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오··· 여기서 또 보는구려···”
고개를 돌려 드러난 그의 이름은 양굉이었다. 암룡대이자 무림맹 비선, 동시에 도둑이자 장물아비였다.
장건은 그의 목깃을 흘낏 보고는 말했다.
“목은 괜찮냐?”
“···괜찮고말고. 뭐 내가 교수형을 당한 것도 아니지 않소? 그냥··· 줄에 잠깐 묶여 있었던 것뿐이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소.”
“그래? 그럼 한 번 더 할까?”
양굉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결국 완전 항복을 선언했다.
“그건··· 그··· 살려주시오··· 내가, 뭔진 몰라도 내가 다 잘못했소···”
제운성은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적 대원께서는 내가 맹주부 명패를 가지고 있는 게 당혹스러우신 모양인데.”
하지만 그의 웃음과는 다르게 적세인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소. 내가 알기로 그 맹주부 직속 무사패를 가진 이는 맹 내에 열이 넘지 않소. 제가의 혈리응이 그걸 어떻게 가졌는지 모르겠소.”
“하하!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구려. 하지만 적 대원이 동쪽 황야로 떠나고, 저 멀리 고원성까지 닿는 동안에 맹에선 많은 일이 있었소. 아니, 맹 뿐만 아니라 신사천에 많은 일이 있었지. 어쨌든 이 명패는 맹주가 직접 나에게 선사한 물건이라오.”
적세인은 뭐라 따져 물으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결국 그냥 꾹 다물어버렸다. 장건이 보기에 그건 제운성의 직함에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그 직함의 힘 때문에 쉬이 질문할 수 없어 입을 다문 것처럼 보였다.
제운성도 그걸 느꼈는지 다시 접객당으로 길을 안내하면서도 그녀에겐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그 모래 먼지 풀풀 날리던 황야에서의 사건 이후로 꽤 오랜만이군. 그동안은 또 어딜 떠돌아다녔나?”
“···여기저기 다녔지.”
“오? 그럼 신사천에 돌아온 건 그날 이후 처음인 건가?”
장건은 괜히 친한척하는 그가 약간 부담스러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애초에 첫 만남은 칼부림이었고, 그다음은 서로 장보도와 보물을 먼저 쟁탈하기 위해 투덕거렸으면서 왜 이렇게 살갑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보물의 주인은 정해졌으니 원한은 잊는다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보물이 별것 아니었다는 걸 알아냈는지도 몰랐다.
“처음이지.”
“이런, 그럼 신사천의 최신 소식도 잘 모르겠군.”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앞장서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