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적세인은 거침없이 일어나는 장건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따라오시오. 가면서 설명하겠소.”
앞장서 나가는 그녀의 뒤로 삿갓을 쓴 장건이 허리춤의 청룡을 한번 추스르고는 따라붙었다. 그리고 적세인이 꺼낸 말을 듣고서부터 두 눈을 번쩍이던 양굉도 슬쩍 같이 따라붙었다. 장건은 그를 보았으나 굳이 막진 않았다.
“늦어서 미안하오, 장건. 하지만 원로원의 이상한 기류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맹주도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소.”
“처형은 무슨 소리요?”
접객당을 나온 적세인은 성큼성큼 앞장서 걸으며 말을 이었다.
“남궁 노사는 나흘 전 맹 안으로 들어온 이후 곧바로 맹주부로 이송될 예정이었소. 전향자를 회유하는 동시에 어느 곳보다 철저한 보안과 호위를 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런데 남궁 노사를 데리고 들어온 배원찬이 그를 맹주부가 아닌 뇌옥으로 이끌고 가 그 안에 억류해버렸소.”
장건은 지난날 일행을 마중 나왔던 무림맹의 젊은 무인을 떠올렸다. 그는 백림방이라는 방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었다.
“그 자식의 헛짓거리도 문제였지만, 그 이후 남궁 노사에 대한 배경을 알게 된 원로원에서 그의 전향을 믿을 수 없으니 회유할 게 아니라 그냥 처형함으로써 무림맹의 건재한 힘을 신사천 사람들에게 선보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게 더 큰 문제였소. 맹주는 이미 그의 마공이 깨졌으니 처형할 게 아니라 회유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빠르게 걷는 적세인의 뒤를 따라 걸으니 창밖으로만 보았던 무림맹 전각들과 그 안의 맹원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다들 각자 자기 일이 바빠 무림맹 안을 가로지르는 적세인과 장건, 양굉을 보고도 그저 다른 맹원이라 여기는지 무관심해 보였다.
“내가 어처구니가 없는 건 원로원이 그딴 주장을 펼치며 맹주와 대립각을 세우는 바람에 정작 고원성의 부족 연합 문제가 묻히고 있다는 점이오.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맹원들은 원로원과 거대 방파들을 주로 하는 축과 맹주를 중심으로 하는 축으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소.”
그때 적세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눈살을 와락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조용히 따라오던 양굉의 눈이 그녀와 마주쳤다.
“누구시오?”
양굉은 약간 비굴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헤, 헤헤. 이거 명성이 자자한 적세인 순찰대원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
“···접객당의 손님인 모양인데, 우린 지금 장난하러 가는 게 아니오. 따라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소.”
굽실거리던 양굉의 몸이 딱 굳었다. 그는 적세인의 말이 진심인지 보겠다는 듯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진짜 위험하겠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굽실거리며 말했다.
“아, 예. 뭐 그럼 빠져야지요, 헤헤. 이거 적 대원은 물론이고 장 형에게도 죄송하외다. 그럼 난 이만 접객당으로···”
그때 굽실거리는 양굉의 뒷덜미를 장건의 손이 콱 붙잡았다. 양굉은 켁! 하는 소리 한번 내고 잔뜩 목과 어깨를 움츠렸다.
장건이 말했다.
“멋대로 따라 나와선 돌아가겠다고?”
눈알을 굴려 장건을 바라본 양굉은, 남의 목줄을 쥐고도 차분해 보이기만 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파르르 떨다가 결국 두 눈을 꾹 감으며 말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가, 가야지! 당연히 따라갈 것이오! 장 형이 위험 속으로 몸을 던지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있겠소? 당연히 갈 것이오!”
장건은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손아귀를 풀어주었다. 속박을 벗어난 양굉이 켁켁거리는 동안 적세인이 의아한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자는 누구요?”
“못 알아보겠소? 이미 만난 적 있을 텐데.”
적세인은 장건의 말을 듣고 다시 눈살을 좁히며 양굉을 바라보았다. 숨을 헥헥대던 양굉은 그 시선을 느끼고 얼른 다시 몸을 굽실거리며 비굴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적세인의 눈은 커진 이후였다.
“···암룡대! 신사천도 아니고 무림맹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니?”
적세인과 양굉은 이미 지난 신사천 황군 교위 사건에 만난 적 있었다. 당시 양굉은 장건에게 맹호교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고, 덕분에 마땅한 단서가 없던 그들은 끈을 따라가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양굉을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양굉의 얼굴을 오래 관찰할 시간이 없었다는 점과 그 사건 자체가 꽤 예전 일이라는 점이었다. 더불어 그때의 양굉은 입에 독약을 물고 고문할 테면 고문해보라는 허풍도 떨어대던 남자였다. 조금 전의 비굴한 웃음과 굽실거리는 태도는 그 기억을 흐려놓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양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양굉이오. 오랜만이구먼.”
적세인은 그런 양굉을 보며 생각이 복잡해진 듯 입술을 열 듯 말 듯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냥 꾹 다물고는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따라오는 양굉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지금은 상황이 급박하니 넘어가지만, 일이 정리된 후에도 무림맹 안에 남아있다면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체포할 것이오. 그러니 당장은 내 시야에서 멀어지지 말고 일이 끝나면 얌전히 사라지시오.”
그녀 뒤를 따르던 양굉은 그 경고를 듣고도 뚱한 표정을 짓다가 옆에서 장건의 시선을 느끼고 나서야 움츠러들었다. 그제야 장건은 그에게 눈을 떼고 적세인에게 물었다.
“하던 상황 설명을 계속해 주시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어딜 가는데?”
“우린 지금 뇌옥으로 가고 있소. 남궁 노사를 지키러.”
“처형이 지금 당장 이뤄진다고?”
적세인은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당장은 그를 원로원으로 이송해 여러 원로가 참여한 상태로 심문하겠단 명목이오. 하지만 이미 그를 죽일 생각인 원로원이라면 그 과정에서 당연히 고문이 있을 것이고, 그럼 쇠약해진 남궁 노사는 버티지 못할 것이오. 그래서 반드시 오늘 이송을 저지해야만 하오.”
“맹주는 어쩌고 당신 혼자 나서고 있소?”
“맹주는 직접적으로 나설 수 없소. 다른 맹원들도 마찬가지. 남궁 노사가 처음부터 맹주부에 들었다면 손을 쓸 수 있었겠지만, 뇌옥에 들어간 순간부터는 원로원 산하에 속하기 때문이오.”
장건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적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쪽은 나서고 있군.”
“···오늘 일로 내 순찰대 지위가 박탈당하고 노역형을 살지도 모르지.”
그녀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장건은 마주 옅게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단 그는 무림맹원이 아니었고, 남궁 노사를 사로잡은 공로가 있었다. 또한 예전에도 맹호교위의 비리를 파헤쳐 맹주의 훈장을 받기도 한 인물이었다.
다른 맹원이었다면 원로원을 막아선 순간부터 무림맹 내부 율법에 따라 징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건은 기껏해야 훈장을 박탈당하고 앞으로 무림맹 출입을 금지당하는 정도로 그칠 터였다.
“오늘 하루만 이송을 저지할 수 있으면 충분하오. 맹주부는 나흘 전부터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당장 오늘 원로원의 기습적인 이송만 막아낸다면 충분히 남궁 노사를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이오.”
적세인은 계속해서 상황 설명을 하면서도 성큼성큼 걷는 걸음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은 곧 낮은 지붕에 옆으로만 넓은 일 층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지상에 드러난 것보다 지하가 더 깊고 넓은 곳으로, 바로 무림맹 뇌옥이었다.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무사가 다가오는 적세인을 보고는 손을 슬쩍 올리며 말했다.
“또 오셨군요, 적 대원. 하지만 오늘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잠시 후 원로원의 이송 인원이 올 텐데, 그전까지 다른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게···”
적세인은 뭐라 말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그 경비대원의 눈을 노려보며 오른손으로는 어깨 위에 비죽 튀어나온 검의 손잡이를 잡았을 뿐이다.
그를 본 경비대원의 입이 스윽 벌어졌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얌전히 물러나. 너한테 검을 뽑을 일은 아니야.”
“뭘 어쩌려고요?”
“이송을 막을 거야.”
잠시 적세인과 그 뒤에 장건, 양굉 등을 바라본 경비대원은 푹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최근 무림맹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얌전히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적세인은 그가 서 있던 뇌옥의 정문 앞으로 다가가 반대로 돌아서더니 이제 그 문을 지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척하니 섰다.
장건은 느긋하게 그 옆으로 걸어가 문에 등을 기대고 섰고, 양굉은 추욱 처진 얼굴로 눈치를 보다가 두 사람과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같은 일행으로 여기기엔 어정쩡한 자리를 찾아 잡았다. 도리어 옆으로 물러나 있던 경비대원과 더 가까울 지경이었다.
등을 기대로 선 장건은 두 손을 깍지 껴 청룡의 손잡이 위에 걸쳐놓고 입을 열었다.
“이제 기다리면 되는 것이오?”
“이송이 확정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움직였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오.”
그녀의 대답대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건장한 무인들이 저쪽 담벼락을 돌아 우르르 몰려왔다. 당당한 기세로 다가오던 그들은 뇌옥의 정문을 지키고 선 사람들이 경비대원이 아님을 깨닫고 우뚝 멈췄다. 그들 제일 앞에는 장건도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배원찬은 뇌옥 앞을 가로막은 적세인과 장건, 양굉을 보고는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섰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적 선배?”
“남궁 노사는 원로원으로 이송할 수 없다. 그는 이미 전향 의사를 밝혔으므로 곧 맹주부에서 정식 손님으로 받아들일 터. 돌아가라.”
적세인의 대답을 들은 배원찬은 정말 놀랐다는 듯 두 눈을 끔뻑거리다가 옆에 있는 장건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장 무인? 당신은 무림맹 소속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긴 무슨 일입니까?”
장건은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 무례하다면 무례한 태도에 배원찬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곧 버럭 외쳤다.
“아니, 이게 그렇게 문을 막고 선다고 해결될 문젭니까? 원로원의 명령이라고요! 설마 맹주가 그걸 막으라 명령한 겁니까?”
“맹주는 그런 적 없어. 이건 내 판단으로 움직이는 행동이야. 정말 맹원들끼리 피라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돌아가.”
배원찬의 외침과 비교해 적세인의 대꾸는 덤덤하기 그지없었고, 덕분인지 이송을 위해 몰려왔던 무사들도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배원찬은 등 뒤의 그 소리를 듣고는 앞으로 한 발 더 나서며 말했다.
“저희가 지금 물러나면요? 원로원에 보고가 올라가면 적 선배의 징계는 확정입니다. 직급이 날아갈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어디 이상한 촌구석으로 좌천될 수도 있다고요.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럼 넌 지금 무림맹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당장 고원성에는 원주민 전사 수천 명이 무림맹에게 동부에서 일어난 부족 학살에 대한 입장을 내놓으라 모여있는 상황이야. 어서 남궁 노사의 정보를 바탕으로 조사대를 꾸리고 원주민들의 억울함을 풀어줘도 모자랄 시간에, 단순히 맹주를 견제하겠단 이유로 이렇게 발목을 붙잡는 상황이 옳다고 생각해?”
적세인의 나직한 이야기에 웅성대던 인원들이 조용해졌다. 뒤에서 듣던 장건은 부족 연합의 전사가 수천이 되기에는 좀 모자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배원찬이 대표인 만큼 이송 인원들은 모두 젊은 무인들이었고, 그들은 적세인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배원찬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용해진 뇌옥 앞마당이 자신을 위한 무대라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원로님들은 오랫동안 무림에서 활동하며 나름의 통찰과 확신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결정은 결국 무림맹을 위한 것이고요. 애초에 그 남궁 씨는 마궁의 주요 인물이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 높은 지위에 비해 그를 사로잡은 건 거기 계신 장 무인이시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는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따져 묻듯 말을 이었다.
“마공은 그 괴이함과 사악함은 제쳐두고 위력만큼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옛 초패마왕 항우가 중원을 거의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이죠. 당연히 마궁의 지위 높은 마인이라면 그만큼 더 강한 마공을 지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를 사로잡은 장 무인은 너무 젊군요. 물론 젊은이도 뛰어난 무공을 가질 수 있지만··· 글쎄요. 제가 알기로 장 무인은 상가의 아들인데···”
배원찬은 그렇게 말끝을 흐리며 그저 의혹을 던진다는 듯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건 장건의 무공이 의심스럽다는 것이기도 했고, 혹 남궁천이 그에게 사로잡힌 것도 마궁의 작전 일부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깔려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무림맹원들의 눈은 장건을 향했다. 그건 적의와 호기심이 조금씩 섞인 시선이었다.
이미 그의 무공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적세인은 그런 배원찬의 말과 맹원들의 시선에 팔짱을 풀고 서서 해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이 열리는 것보다 문에서 등을 뗀 장건이 뚜벅뚜벅 앞으로 나서는 것이 더 빨랐다.
“장건···!”
장건은 자신을 부르는 적세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짝 눈길을 주고는 배원찬과 맹원들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허리띠를 잡고 약간 삐딱하니 서서는 배원찬을 보며 뚱하게 말했다.
“다 집어치우고, 내 실력이 궁금하다 이것이지 않소.”
“···직설적인 걸 좋아하시는군. 그렇다면 맞소. 난 당신이 마인을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무인인지 궁금하다는 것이오.”
배원찬의 대답을 들은 장건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삿갓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보고 싶다면 보여줘야지.”
다음 순간, 배원찬은 뭔가 눈앞에서 반짝거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눈살을 찌푸리고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그렇게 배원찬의 손이 눈가에 닿은 순간, 그의 허리띠와 옷끈이 투툭 끊어지며 바지와 외투가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배원찬은 물론이고 그곳의 모든 무인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뜰 때, 장건은 뽑았던 청룡을 휘리릭 멋들어지게 돌리며 칼집에 집어넣었다.
“잘 보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