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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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기로 무림맹주 혁련위진은 고대 세가나 거대 방파 출신이 아닌 가난한 중원 이주민 출신의 무인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무재를 타고나 아직 무림맹의 힘이 신대륙 곳곳에 뻗치지 못한 시절 황야와 험산을 떠돌며 협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고, 그 투쟁의 끝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대단한 고수가 되었다.
불혹을 넘긴 그는 무림맹에 들어 빠르게 그 중심이 되어갔다. 그는 항상 무림맹의 젊은 층에 인기가 많았다. 기득권 배경 없이 홀로 일어나 무림맹의 중심에 서서 언제나 협과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피 끓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무림맹 생활을 한 지 십 년째. 그의 명성이 바다 건너 중원 땅까지 퍼져 황제가 그에게 의룡검을 하사하는 일까지 일어나자, 항상 거대 방파 원로들이 의례적으로 돌아가던 맹주의 자리가 결국 그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맹주가 되고 다시 십 년. 지금 무림맹은 기득권을 지키고 되찾으려 드는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세력과, 거대 방파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무림맹 자체의 힘을 키우려는 맹주로 대표되는 세력이 충돌하고 있었다.
장건은 자기 앞에 놓은 찻잔을 들어 홀짝 마시며 그 이야기의 중심인물 혁련위진을 뚱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이 방까지 안내한 제운성과 맹주부 무사들은 모두 물러났다. 지금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무림맹주와 마주 앉은 이들은 장건과 남궁천, 적세인과 양굉이었다.
남궁천은 맹주와 비슷한 태도였다. 급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당장은 손에 들린 차 맛이 좋기만 하다는 식이었다. 장건은 약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늘어져 좀 불성실한 모습이었고, 적세인은 맹주가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 듯 경직된 표정이었다.
놀라운 것은 자기가 왜 맹주를 만나야 하냐 징징거리던 양굉이 정작 그 앞에 앉아 아주 침착한 태도로 천천히 차를 맛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장건에게 구박받던 도둑놈은 사라지고 여유로운 상인 하나가 앉아있는 듯했다.
물론 흘끗 장건과 마주친 그의 눈동자 안에서는 격렬한 불안감의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연기가 대단하다면 대단한 놈이었다.
“차향이 좋구려.”
그때 갑자기 튀어나온 남궁천의 말이었다. 그에 맹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원성 부근 산맥에서 재배하는 찻잎이외다. 그 향과 맛이 뛰어나 바다까지 건너 중원으로도 고가로 수출되는 일이 있지요.”
“그렇소? 정작 그 부근에서 일하면서 이런 차를 맛볼 생각은 못 했군. 맹주 덕에 좋은 차를 알게 되었소.”
맹주는 찻잔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혁련위진이오. 이런저런 허명이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허명일 뿐이지.”
“남궁천.”
“몸은 좀 어떻소?”
남궁천은 허전한 왼팔과 상체를 가로지르는 상처에서 큰 고통을 느낄 것이 분명함에도, 장난치듯 양어깨를 살살 돌려보더니 허허 웃었다.
“요 며칠 편히 지냈더니 몸이 좀 찌뿌둥하긴 하외다. 이거 손님으로 온 것만 아니면 무공 수련이라도 할 텐데. 허허.”
맹주는 그 비어버린 팔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지난 며칠간 잠자리가 소홀했던 것은 사과드리겠소. 원로원과의 알력이 점점 더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소. 이건 사실 내가 십 년 전 맹주 자리를 꿰찬 순간부터 예고되던 균열이지.”
“음. 그건 본 궁에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사실이요. 내 알기로는 그를 바탕으로 한 작전이 펼쳐지고 있을 터인데···”
남궁천이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맹주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옅게 웃었다.
“가지신 패가 많아 보이시는군. 마궁의 장군이였다 하셨소?”
마궁이라는 말에 남궁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한풀 꺾인 기색으로 대답했다.
“···장군. 그렇지, 장군이었지. 궁의 가문들은 가주를 제외하고도 각 가문의 외부 활동, 그러니까 신대륙 평정의 뜻을 품은 장군들이 있소. 뱀들의 주인인 사공蛇公과 더불어 이 땅에서 활동하는 끈의 끝에는 대부분 그 장군들이 있지.”
“그럼 귀공이 남궁마가의 가주를 제외한 최고수였단 말이오?”
“적어도 밖에서 활동하는 남궁 씨 중에서는 내 검이 제일 뛰어났지··· 하지만 무공이라는 게 그렇지 않소? 결국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워 결론을 내는 것 말고는 정확한 우위를 내릴 수 없지. 그러니 나를 본 궁의 최고수로 여기는 실수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맹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몸을 조금 뒤로 뺐다.
“어쨌든 남궁마가의 대표적인 무인이었다는 것만은 맞다는 말이시군··· 그리고, 그 무인을 꺾은 이가 여기 이 젊은이이고.”
잔뜩 긴장한 양굉, 적세인과 다르게 두 노인의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차를 홀짝이던 장건은 맹주의 시선에도 별다른 흔들림 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남궁천의 외팔을 보며 반짝이던 맹주의 이채가 더 진해졌다.
“자네 이름이 장건이었지?”
“그렇소.”
“지난번에는 왜 그냥 떠났나?”
신사천 황군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 장건은 훈장과 포상금만 받고 무림맹은 문턱도 넘지 않았다.
장건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번거로워서.”
그 짤막하고 무례한 대꾸에 적세인과 양굉의 표정이 하얗게 변해갔다. 남궁천은 혼자 끌끌 웃으며 찻잔을 들 뿐이었다. 맹주도 그 대꾸가 인상적이었는지 잠시 아무 말도 없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털털 웃었다.
“직접 만나보니 이거 재밌는 친구군. 자네 가문이 호남 장씨 가문이라 들었는데. 최근 신사천에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지? 본 맹과의 사업 계획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난 잘 모르겠소. 사업은 형님이 하는데, 요 며칠 누구 덕에 어디 묶여 있느라 들러볼 시간이 없었소.”
적세인은 이제 눈을 꾹 감았고, 양굉은 이제 자긴 모르겠다는 듯 아예 차려진 다과 쪽으로 신경을 돌리고 장건을 모른 척했다.
“···음. 마음 같아선 나도 자네를 바로 맹주부로 부르고 싶었네. 하지만 이미 남궁 노사의 경우를 보듯 지금 맹 안에선 작은 빈틈만으로도 예상치 못했던 수많은 장애가 생기는 상황이네. 우리의 만남으로 벌어질 또 다른 상황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응책이 세워진 후에야 이렇게 만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네.”
“그렇소?”
장건은 마치 그게 당신이 할 말 전부냐는 듯한 태도로 그리 뚱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맹주는 도리어 빙그레 웃었다.
“뭔가 불만이 많은 듯하군. 지난번에는 번거로워 그냥 떠났다면서, 이번엔 왜 그러는 건가?”
“글쎄, 이번엔 아직 일이 마무리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그런 듯하오만.”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장건은 오른손으로 턱을 슬슬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난 나흘간 지켜봤는데, 고원성 부족들의 학살 사건을 조사할 조사단은 이야기도 나오질 않는 듯 보였소. 거기에 무림맹으로 전향을 위해 온 남궁 노사는 처형하자는 엉뚱한 소리나 나오고 있지. 뭐 하자는 것이오?”
대놓고 따지는 말투에 적세인이 하얗다 못해 퍼렇게 변한 얼굴로 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맹주가 자신을 향해 들어 올린 왼손가락에 덜컥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장건은 그를 보고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고원성의 원주민들은 서쪽에서 온 중원인들이 부족을 학살하고, 다시 서쪽으로 돌아갔다 했소. 그건 마인들로 이루어진 전투부대가 지금 이 무림맹의 땅 어딘가에서 숨죽이고 누워 힘을 기르고 있다는 뜻이지. 황군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찌 될지 궁금하지 않소?”
장건의 이야기에 맹주의 표정은 굳었고, 남궁천은 어찌 그걸 알았는지 놀랍다는 얼굴이 되었다. 적세인과 양굉 또한 경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잠시 맹주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장건은 맹주의 표정을 읽어내고 눈살을 찡그렸다.
“···알고 있었군.”
그 짤막한 중얼거림에 탁자 사람들의 눈이 이번엔 맹주에게로 집중되었다. 맹주는 확실히 조금 굳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얼굴 위에 어떤 동요가 보이진 않았다. 맹주는 그대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신대륙의 땅은 아주 광활하고 풍요롭네. 하지만 땅 넓이와 비교해 사람은 적지. 또 한 제국처럼 어마어마한 무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체계를 갖추지도 못했네. 이삼십 정도 되는 무리가 마음먹고 숨어들고자 하면 알아챌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네. 어떤 정보가 있더라도 그게 사실일지는 쉽게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야.”
그는 두 손을 깍지 끼며 말을 이었다.
“왜 원로원이 기를 쓰고 남궁 노사를 막으려 했겠나? 뭔가 남궁 노사에게서 감추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의혹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네. 원로원은 원로 십 수명으로 이루어진 곳이고, 그들 모두가 그 의혹에 연관된 것은 아닐 것이네. 의심스럽다고 그들 모두를 맹에서 뽑아내 버리면 맹의 중추 방파 거의 대부분을 포기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야. 혼란스럽던 이 신대륙에 그나마 정의를 세우던 단체가 와해한다는 말이지.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네.”
맹주는 쭉 말을 털어놓은 후 깊은숨을 한 번 내쉬고는 빙긋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이제 남궁 노사가 전향해 왔으니, 그 정보를 바탕으로 천천히 맹을 바꿔나가면 그만이야. 모든 걸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순 없어도 기와를 올리듯 하나하나 새로 얹어갈 수 있을 것이네.”
장건은 그렇게 빙긋 웃는 맹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림맹이라는 거대 세력의 대표가 어디 저잣거리 건달처럼 괄괄하지 않으리라는 건 짐작했다. 그러나 그걸 고려하고 생각해봐도 지금 그 앞에 앉아있는 노인은 대단히 정치적이었다.
오감과 기감을 깨친 장건은 맹주의 태도와 몸짓, 그리고 시선만을 보고도 그의 육신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얼마나 건장함을 유지하고 있는지, 또 가벼운 동작에서 묻어나오는 무공이 얼마나 수준 높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림맹주 혁련위진이 그 지위에 걸맞은 무인임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장건의 의도적인 무례와 말을 듣고도 끝끝내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모습,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원로원의 사람이 아님은 분명함에도 함부로 원로원을 단정 짓지 않는 말투 등등 사회적인 행동에선 여타 다른 무림인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또 생각해야 하는 건 전날 그가 싸웠던 비천취응대와 조상룡, 그리고 더 전으로 가면 태평대라고 불리던 이들도 이 맹주의 촉수가 닿은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맹주가 대협객인지 위선자인지는 몰라도 그 혓바닥에 놀아난 자들이 한가득함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장건은 다 집어치우고 싶어지는 걸 느꼈다. 차라리 황야에서 도적놈 서른과 칼부림을 벌이는 게 낫지, 무공 익혀놓고 이렇게 말로 싸우는 건 그의 특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장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잘 모르겠군. 어쩔 수 없이 그냥 무림의 방식대로 움직여야겠소.”
“···무슨 말인가?”
일어선 장건은 몸과 반대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난 부족 연합의 원한을 대행하고, 개인적으론 나흘 전 남궁 노사를 암살하려던 자에게 은원이 있소. 이제 무림의 방식대로, 내 칼이 그들을 찾아갈 것이오.”
“···지금 무림맹 안을 자네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겠다는 건가?”
“필요하다면.”
그의 단호한 태도에 앉아있던 적세인과 양굉은 이제 해탈한 표정이 되어 옅은 미소를 띤 채 밀랍 인형처럼 굳어있었다. 남궁천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연신 차를 홀짝이며 장건과 맹주를 번갈아 보았고, 그 맹주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꼿꼿히 허리를 펴고 앉은 자세 그대로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밤의 호수처럼 깊고 차분한 장건의 눈과 맹주의 뜻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이 마주하길 한참. 맹주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장건에게 휙 던졌다. 장건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그건 은백색에 붉은 수실이 달린 팔각형 패였다. 뒤에는 양각된 용이 새겨져 있었고, 뒤집어보니 의룡義龍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의룡패. 의룡검과 함께 황제 폐하가 내려주신 내 협의의 증명이지. 의룡검은 이미 내 손을 깊이 타 내어줄 수 없네만, 그건 지금 자네 손에 들리는 게 더 나을 듯하군. 그게 있으면 맹 내에서 통행에 불편함은 없을 것이네. 당장은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 그것뿐이군.”
이것 또한 그 나름의 정치적 행동일까? 장건은 거기까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의룡패를 품안에 집어넣었다. 맹주의 생각은 알 수 없었으나, 이제 그의 칼이 접객당에서 더 숨죽이고 있을 순 없었다. 그의 혓바닥이 발목을 잡는다면 그마저 끊어내면 그만이었다.
이후 장건이 몸을 돌리고 나서자 적세인과 양굉도 급히 일어나 맹주에게 포권하며 인사를 하고는 그 뒤를 따랐다. 이제 맹주부의 손님인 남궁천만 여유로운 태도로 차를 홀짝거렸다.
맹주는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로 그의 잔을 채워주며 닫히는 문 사이로 멀어지는 장건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 눈 안에 무슨 생각이 담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