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 * *
맹주의 집무실을 빠져나온 장건은 그대로 뚜벅뚜벅 맹주부 밖까지 걸어 나갔다. 나가는 동안 맹주부 안에서 일하는 하인이나 무인들이 더러 보였다. 그들 모두 낯선 장건의 모습에 그가 맹주부를 나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맹주의 세력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는 둘째 쳐도, 당장 이곳 맹주부 안에 있는 맹원끼리는 아주 끈끈해 보였다.
적세인과 양굉은 뭐라 말도 못 하고 성큼성큼 걷는 장건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 모두 맹주와 대놓고 날을 세우는 장건의 모습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들이 맹주부 정문을 나서기 전, 누군가 장건을 부르며 따라 나왔다.
“이보게! 이봐, 장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그들을 맹주부까지 안내했던 제운성이었다.
“아니, 무슨 상황인가? 왜 그냥 가? 맹주와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장건은 별말 없이 맹주가 내어준 의룡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제운성은 그걸 보고는 당혹스럽다는 듯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또 보자고.”
“···그, 그러세.”
제운성은 정말 당황했는지 어떻게 의룡패를 받았느냐 어쩌냐 묻는 것도 없이 떠나는 장건을 보내주었다. 그는 장건과 나머지 두 사람이 맹주부를 나서는 걸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장건은 맹주부 정문을 나와서도 한참을 성큼성큼 걸었다. 적세인과 양굉은 그렇게 말없이 걷기만 하는 장건의 모습에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슬쩍 말을 걸었다.
“그, 장 형? 이제 어디로 가는 거요? 접객당으로 되돌아가나?”
“의룡패가 있으니 어디로 가든 출입에는 문제가 없을 테지만··· 그래도 맹원이 아니라는 걸 사유로 길을 막는 자들이 있을 수 있소. 뭘 어디서부터 조사를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장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걸음이 멈추자 그를 따라 걷던 두 사람도 덜컥 발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걸음을 멈춘 장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다에서 흘러오는 구름에 환한 오후의 태양이 비춰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쾌청한 하늘이라 눈이 부셨다.
장건은 분명 부족 연합 대전사와 흐르는 뼈에게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무림맹이 부족 연합의 문제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를 말한 것이었다. 무림맹에 깊이 파고든 마궁의 암수를 끄집어낸다거나, 무림맹 내부의 정치 상황을 타파해 상황을 해결하겠다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칼잡이였고, 희미한 그림자의 재현을 위해 황야를 떠도는 방랑자였다. 때때로 앞으로 나서 억울한 자를 돕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그냥 드넓은 벌판을 떠돌 뿐이었다. 수백 명의 죽음과 그 복수는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장건은 눈을 찌르는 햇볕에 눈을 찡그렸다. 오늘따라 햇살이 강했다. 마치 구름과 그늘마저 꿰뚫어 세상 모든 곳을 비추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건은 그 빛이 자신의 가슴 속도 비춰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장건은 찡그리던 눈을 감고 얼굴 한가득 햇살을 맞으며 중얼거렸다.
“···하는 만큼 하는 거지.”
“엉? 뭐라고 했소? 뭘 해?”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양굉이 무슨 말이냐며 되물었다. 하지만 장건은 고개를 내려 적세인 쪽을 바라보며 다른 이야기를 했다.
“지난번 내가 준 독모래. 어떻게 되었소?”
“···이젠 내가 하는 말은 그냥 무시하는 거요? 거참 너무하네.”
양굉의 말을 씹어버리는 모습을 보며 살짝 머뭇거리던 적세인은 대답을 종용하는 장건의 눈길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의약당에 맡겨두긴 했소. 하지만 지난 나흘간 나름 많이 바빴던지라···”
“그럼 의약당으로 갑시다. 그리고 너.”
자기 말을 무시한다고 툴툴거리던 양굉은 정작 장건이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키자 화들짝 놀라서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아, 뭐냐, 그. 무시할 수도 있지. 쓸데없는 말에 전부 대답해주면 시간만 잡아먹고···”
“지금 무림맹에 암룡대가 많이 잠복해 있다 했지. 그럼 그걸 총괄하는 건 누구냐? 암룡삼호?”
“어, 그 양반이 반쯤은 암룡대주라서 이런 큰 작전에는 당연히···”
“연락할 수 있나?”
양굉은 입술을 벙긋거리며 슬쩍 적세인의 눈치를 보았다. 암룡대의 실태에 심각한 표정을 짓던 적세인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한 번만 넘어가겠소. 이 일이 지나가면 샅샅이 뒤져 찾아낼 것이니 그 전에 모두 무림맹을 빠져나가길 빌겠소.”
“헤, 헤헤. 고맙소이다, 적 대원. 어차피 뭐 대단한 작전을 벌이던 게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정보 수집 정도라···”
양굉의 말에 적세인이 고개를 가로젓고 장건이 앞으로 한 발짝 더 그에게 다가갔다. 깜짝 놀란 양굉은 얼른 말을 이었다.
“연락 자체는 어렵지 않소! 그 연락을 받고 그 양반이 작전 후퇴를 명령할지, 직접 나타날지 그걸 알 수가 없을 뿐이외다!”
“지난번 빚을 받겠다 해. 그리고 마궁의 끈을 찾아내는 건 원래 암룡대 일 아닌가?”
“···그렇긴 하지. 그럼 연락 보내오?”
“의약당 위치. 알지?”
양굉은 다시 한번 적세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락 보내고 곧장 거기로 와.”
“···그냥 이렇게 가면 안 되겠소? 내 보잘것없는 무공이 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의약당으로 오라는 말에 슬쩍 빼던 양굉이지만, 곧 장건이 지긋이 그를 바라보자 히죽 웃으며 허리를 살짝 굽실거렸다.
“아, 가야지. 내 당연히 장 형에게 도움을 줘야지. 내가 장 형 덕을 얼마나 봤는데? 걱정하지 마시오. 내 쏜살같이 뛰어갔다 오겠소이다.”
그는 그렇게 혼자 떠들고는 몸을 돌려서 후다닥 달려 무림맹 전각과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그를 보며 적세인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야 체포해야 할 암룡대원이 가까이 있으면 좋지만, 그래도 굳이 그를 계속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있소?”
“처음 저놈이 끼어든 이유는 뭔가 얻어낼 정보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소. 조금 지나서 위험할 것 같으니 빠지려던 것이지. 약삭빠른 게 너무 얄밉지 않소?”
“···그냥 아니꼬워서 끌고 다닌다는 말이오?”
장건의 시선이 적세인을 향했다. 그는 짓궂게 웃고 있었다.
“물론 그래도 저놈이 명색은 정보원이긴 하니 어쩌다 쓸모가 있긴 할 것이오. 당장 암룡대에 연락한 것도 저놈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고. 어쨌든 없는 것보단 낫지. 이제 움직입시다.”
그렇게 말하는 장건에게 적세인은 어깨 한번 으쓱여주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후 맹주부를 빠져나온 두 사람은 다시 무림맹의 전각과 탑, 높고 낮은 담벼락과 바쁘게 오가는 맹원들을 지나 의약당醫藥堂이란 간판을 단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건은 의룡패를 꺼낼 것도 없이 적세인 얼굴을 앞세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픈 환자나 의원이 오가는 곳이라 특별히 사람을 가리는 것 같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오니 널찍한 공간에 침대가 양옆 두 줄로 주르르 늘어져 있고, 그 위에 서너 명의 사람이 누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심각한 환자는 없어 보였다.
“여긴 환자들 공간이오. 의원들의 공간은 저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지. 갑시다.”
짧게 설명한 적세인은 병동이라 불릴 만한 공간을 가로질러 건너편 문을 열었다. 그 문 너머에는 큼직한 약서랍과 책상들, 그리고 그 책상에 앉아 의서를 보며 약을 만들거나 약재를 정리하던 의원들이 보였다.
벌컥 문 열리는 소리에 그 의원 중 하나가 일어났다.
“오, 적 대원. 바빠서 오려면 더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옆엔 누구시오?”
조그만 돋보기로 의서를 읽던 그 남자는 삼사십대 정도로 보였다. 입가에 느긋한 미소가 매달린 것이 꽤 여유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빨리 시간이 생겼소. 이쪽은 장건. 어, 지금 같이 조사하는 일이 있어 동행하고 있소.”
“그러신가? 반갑소, 장 무인. 난 그냥 염 의원이라 부르시오.”
장건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적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보다, 내가 맡겼던 독모래는 어떻게 되었소? 뭐라도 좀 나왔소?”
“오, 그거? 그거 참 정교한 독이더군. 독성 자체는 그렇게 심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공을 돌릴 수 없는 양민이 들이켠다면 노약자의 경우 치명적일 수 있었을 독이오. 무엇보다 제조에 들어가는 원료가 아주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약초들이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소. 배합 비율은 알아낼 수가 없었지만 만약 이걸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팔짱을 끼고 입맛을 다시는 염 의원의 모습에 적세인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끔찍한 소리 말고. 뭔가 특이한 점은 없었소?”
“허허. 끔찍한 소리라. 사실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 다른 약초는 구하기 쉬워도 제일 중요한 용해제가 너무 비싼 물건이거든.”
“비싼 물건?”
염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옆에 있던 약제 서랍으로 다가가 뒤적거리다가 조그만 목곽 하나를 꺼내 가져왔다. 목곽을 열고 그 안에 싸인 천을 걷으니 조그만 삼처럼 보이는 뿌리가 들어 있었다.
“제열삼齊熱蔘이라는 건데, 이곳 신대륙에서만 구할 수 있는 삼의 일종이오. 잘 다려서 약으로 만들면 어른이고 아이고 가릴 것 없이 좋은 강장제가 되지. 그리고 그 달이는 방식에 따라 특히 무림인에게 더 좋은 약재이기도 하고. 왜 비싸단 건지 알겠지? 원래 드문 삼인데다가 시장에 물건이 나오면 무림인들이 얼른 사재껴서 물량을 구하기 힘들다오.”
염 의원의 설명을 들으며 장건과 적세인 모두 팔짱을 끼고 그 제열삼을 노려보았다. 독 성분을 분석해 단서를 찾는 건 너무 막연한 생각이었을까? 당시 남궁천 암살을 노리던 그 암살자를 잡으면 나머지도 줄줄이 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던 장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어 고맙소, 염 의원. 바쁜데 엉뚱한 부탁이나 한 게 아닐까 했는데.”
“바쁘기는 무슨. 심법 돌리다가 입 돌아간 녀석들이나 돌보다가 오랜만에 이런 물건을 만지니 덕분에 재밌었소.”
그렇게 일단 염 의원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던 그때, 의약당 입구 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들려왔다.
“아, 글쎄 이리로 오라 했다니까.”
“뭔 헛소리요? 증명패도 없고, 그렇다고 서류도 없고. 당신이 누군지 알고 여길 들여보내겠소?”
“아, 시발 누군 오고 싶어 오냐고.”
“뭐, 뭐? 지금 욕했소? 욕했냐고!”
적세인이 얼른 눈을 돌려 장건을 바라보았다. 마침 장건도 그녀를 바라보아 두 사람의 눈은 마주칠 수 있었다.
“빨리 왔군.”
“···그렇다는 건 그 연락책도 무림맹 안에 있었다는 말. 정말 이 일만 지나면 맹 내부를 다 들어내고 청소해야겠소.”
장건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약간 성이 난 적세인은 입을 꾹 다물고 염 의원에게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지나갔던 침상들을 다시 지나 의약당 입구로 걸어가니 그 앞에 경비대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양굉이 있었다.
“야이 시발! 너 지금 나 밀었냐!”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이야?”
강압적인 경비대원의 모습에 발끈하려던 양굉은 그 뒤에서 등장한 적세인과 장건의 모습을 보고는 단숨에 푹 가라앉았다.
“어어, 오셨소? 나 진짜 연락 보내고 바로 왔소이다···”
적세인과 장건은 흥분한 경비대원을 진정시키고 의약당을 나왔다. 그렇게 의약당 담장을 벗어나면서도 양굉과 그 경비대원은 서로를 쏘아보았다. 장건이 그런 양굉 뒤통수를 가볍게 후리며 물었다.
“그래서, 암룡대에서 오려면 얼마나 걸리는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 양반이 무슨 판단을 내릴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래도 빨리 연락이 오면 오늘 중으로 될 것이오.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잠시 기다리면 될 거요. 그보다, 그 의약당에서 뭐 알아낸 거 있으쇼?”
“제열삼인가 뭔가 하는 것만 알아냈다.”
장건은 별생각 없이 알려주었지만, 엉뚱하게 양굉은 반색했다.
“오, 제열삼! 그거 좋지. 잘 달여 먹으면 몸이 후끈후끈하지 않소? 원로원 노인네 중에도 그걸 아는지 매달 선물을 받아먹는 양반이 있다지 않소···”
혼자 떠벌리는 양굉의 말에 적세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장건과 눈이 마주치고는 떠듬거리며 말했다.
“그, 아마 우연이지··· 않겠소?”
장건은 입가를 당겨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아무 단서나 붙잡고 당겨야 하는 상황이오. 그리고 방금 염 의원 말로는 제열삼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독이라 했지. 조사할 이유로는 충분해 보이는군.”
잠시 그를 바라보던 적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이미 호랑이 등에 탄 상황. 뭐라도 헤집어야 다른 길을 찾을 수 있겠지.”
아마 곧 원로원에서 맹주부 밖으로 나온 그녀를 잡으려 들 것을 염두에 둔 말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에 이제 막 도착해 설명을 듣지 못한 양굉만 불안하게 눈알을 굴렸다.
장건이 그런 양굉에게 물었다.
“그 제열삼 선물을 요구하는 원로가 누구냐?”
“어, 배양오 원로라고··· 백림방 소속인데···”
“가자.”
“···어딜?”
장건이 허리에 매인 청룡을 추스르며 말했다.
“그 양반한테.”
양굉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