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39)
139화
당장 원로를 찾아가겠다는 말에 양굉은 얼른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장건을 말렸다.
“자, 잠깐! 잠깐 진정하시오, 장 형! 배양오 원로가 누군지 모르시나 본데, 그는 원로원의 실세 중의 실세요. 원로원 원로들이 모여 앉으면 그 가운데 앉아 회의를 주관하고, 원로원이 어딜 간다고 하면 그 제일 앞에 앞장서는 사람이란 말이오!”
양굉은 옆에 있는 적세인에게도 정신 차리라는 듯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찾아가서 뭐라 물어보려고? 매달 제열삼을 선물로 받아먹던데 왜 그랬냐고 물어볼 작정이시오? 그럼 그 양반이 뭐라 하겠소? 그냥 선물로 주니 받았다고 하겠지!”
“그 선물을 누가 줬는지는 알 수 있겠군.”
장건의 무심한 말투에 양굉은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그, 그건 맞는데···”
“선물 받는다는 건 네가 말했지. 그럼 누가 줬는지도 아냐?”
“그것까지는··· 난 그냥 배 원로 숙소의 담당자가 매달 제열삼 탕약을 달인다는 걸 알아서···”
“그럼 가서 물어봐야겠군.”
양굉은 장건과 적세인을 번갈아 보며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툭 고개를 떨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래, 갑시다. 무림맹 원로고 나발이고 뭐가 문제겠소? 까짓거 덕분에 맹주 얼굴도 봤는데 원로도 봅시다. 제기랄.”
그런 양굉의 모습에 장건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마치 격려라도 하듯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 손길에 양굉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자, 장건은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뭐해? 앞장서.”
“엉? 내가? 무림맹 안은 적 대원이 더 잘 알지 않겠소? 굳이···”
양굉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슬쩍 적세인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차갑게 굳은 얼굴로 두 눈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혼자 무림맹을 종횡하고 돌아온 순간부터 얼렁뚱땅 넘어갈 순 없다는 걸 깨달은 양굉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가.”
그렇게 앞장서게 된 양굉을 보며 적세인이 중얼거렸다.
“무림맹 내부 건물 배치도 이미 다 털렸다는 건데··· 이건 정식으로 황군에게 항의를 넣어도 될 문제군.”
당연히 그 중얼거림을 들은 양굉은 이젠 다 모르겠다는 듯 허허로운 표정이 되었다. 방금 그녀가 말한 대로 정말 무림맹이 진지하게 암룡대 문제를 붙잡고 늘어지며 황군에게 날을 세우면 암룡대 요원들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현지 무림맹과의 협조를 긴밀히 나누어 왔던 황군은, 무림맹과의 관계를 망치기보다 암룡대 요원 몇몇을 희생양 삼아 문제를 때우려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선의 상황에도 현재 무림맹 내부 동향 파악 작전은 완전히 망쳤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런 양굉을 보며 장건이 말했다.
“좋게 생각해라. 마인들 잡으면 그 공으로 때울 수도 있잖아.”
“···진짜 무림맹 내부에 마궁의 마인들이 암약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럼 며칠 전 신사천 거리에서 암살 미수사건이 있었는데 무림맹이 이렇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게 정상적이라 생각하냐?”
양굉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보니 그럴듯하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곧 가벼운 태를 지우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적세인에게 암룡대를 노출한 이상 본인 목숨이라도 잘 건지려면 진지하게 마궁의 정보를 캐는 쪽으로 움직여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냥 접객당에서 장건과 거리를 뒀다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인데, 괜히 무슨 일인가 괜히 기웃거리다가 횡액을 당하게 생겼다. 그렇게 생각한 양굉은 찔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터덜터덜 앞장서 걸어갔다.
배양오 원로의 집무실은 의약당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장건은 그걸 주변의 시선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맹주부에 들기 전 뇌옥에서 있었던 사건이 그새 퍼진 것인지 오가며 그들을 본 맹원들에게 놀라움과 호기심, 적의 등등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을 받은 것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세인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장건과 나란히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이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소.”
“왜? 이대로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그 말 그대로요. 알다시피 배 원로는 배원찬의 숙부니까··· 조금 전 조카에게 그리 창피를 주었는데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소. 어쩌면 개인적인 원한으로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소.”
그러나 장건은 어떤 흥분이나 긴장감 하나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누가 호랑이인지는 두고 봐야지.”
그런 장건의 차분함을 본 적세인은 그것이 무공에 자신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사람인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문득 지금까지 의구심만 품고 있었던 비천취응대에 관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장건이 그들 모두를 장례 치를 정도의 고수라면 지금 이 자신감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이 열리는 것보다 앞장서던 양굉의 걸음이 멈추는 게 더 빨랐다.
“자, 다 왔소. 누가 먼저 들어갈 거요? 설마 여기서도 내가 앞장서야 하오?”
멈춰선 양굉 앞에는 적당한 높이의 담벼락과 큼직한 기와로 장식된 대문이 보였다. 그 대문 옆에는 ‘무림맹 백림부’라 써진 간판도 달려 있었고, 그 문 바로 너머에 책상과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턱을 괴고 앉은 무사도 보였다.
잠시 서로를 돌아본 장건과 적세인은 성큼성큼 그 안으로 걸어갔다. 턱을 괴고 멍하니 있던 무사가 안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 반사적으로 말했다.
“아, 배 원로님이 지금 바쁘셔서 손님은···”
하지만 그 무사는 곧 적세인의 얼굴을 알아보고 꾹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얼굴을 이리저리 종횡한 흉터와 뛰어난 실력으로 맹 내에 잘 알려진 순찰대원이었다. 몰라볼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녀 일행이 불과 반나절도 전에 배원찬에게 창피를 준 사건은 벌써 맹 내부에 퍼지고 있었다.
“여, 여긴 무슨 일로···?”
“배 원로에게 질문할 것이 있소. 혹 많이 바쁜 것이오?”
무사는 잠시 멍청한 얼굴로 떠듬거리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안에, 안에 들어가서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그렇게 외치며 세 사람을 거기 세워두고 후다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양굉이 적세인 뒤에서 그런 무사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백림방 무사인가 보오? 무림맹 정식 맹원이면 저렇게 그쪽을 무서워할 리가 없는데.”
적세인은 그 말에 말없이 뚱한 눈으로 양굉을 바라보았다. 정작 날 무서워해야 하는 건 그쪽이 아니냐는 시선 같았다. 눈치 좋게 그 뜻을 알아들은 양굉은 슬쩍 그녀의 눈을 피하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
세 사람이 그렇게 문 안쪽에서 기다리길 잠시, 무사가 달려 들어갔던 안쪽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 제일 앞에는 중년을 넘어 노인을 바라보는 긴 수염의 남자가 앞장서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자신을 배원형이라 밝힌 청년이 한발 뒤에서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백림방 무사인지 무림맹 맹원인지 모를 이들이 열댓 명 보였다.
배양오 원로로 보이는 이는 정말 적세인이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확인하고는 놀랍다는 듯 눈썹을 까딱이고 있었다.
적세인이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포권을 했다.
“순찰대원 적세인입니다.”
“···반갑네. 원로 배양오일세.”
“서로 차나 마시며 담소를 나눌 사이는 아니니 곧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배 원로. 매달 제열삼이라는 약초를 선물로 받으시지요? 그 선물을 누구에게 받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대뜸 이어진 그녀의 질문에 배양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무사들의 얼굴은 대번에 울긋불긋해졌다.
“이보시오! 갑자기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게 뭐요? 지금 원로님을 심문하는 것이오?”
“그딴 태도는 순찰대에서 정식으로 요청서를 내고 만남을 요청해도 용납될 수 없소! 뭐 하자는 것이오? 설마 지금 이걸 맹주의 뜻이라고···”
무사들은 자기가 모욕을 당한 듯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그러나 그 외침은 배양오가 슬쩍 손을 들자 단번에 가라앉았다. 그 모습이 마치 훈련된 개를 보는 것 같았다.
손짓 하나로 가볍게 다른 무사들의 입을 다물게 한 배양오는 여유롭게 뒷짐을 지며 앞으로 조금 나섰다.
“흐음. 그래, 나도 젊은 적에는 끓는 혈기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지. 때때로 더 큰 곤란에 처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파죽지세로 움직인 것이 상황을 반전시킨 경우가 더 많았네. 절차와 의례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해결보다 중요하진 않으니까.”
그의 손이 자연스레 본인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자네가 원로원의 명령을 방해한 사항은 아직 안건으로 올라오지 않았네, 징계가 나올 것은 분명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아직 자네는 무림맹의 순찰대원이지. 순찰대는 무림의 수사관들이고, 정의를 위해 움직이는 무림맹 최전선의 용사들이네. 그러니 자네가 어떤 사건의 어떤 단서를 추적하고 있다면 아무리 맹의 원로라 하여도 성실히 질문에 대답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배양오의 눈이 적세인 옆에 서 있는 장건을 향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 알기로 자네는 순찰대원도, 맹원도 아니더군. 그럼 그저 적 대원의 지원군으로 움직이는 것인가? 하지만 무림맹은 그렇게 아무나 마음대로 쏘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네. 적 대원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그건 다른 맹원의 도움을 받을 일이지, 외부인의 개입을 받을 사항이 아니란 말이네.”
그의 눈빛은 마치 권한도 없는 자가 있어선 안 될 곳에 함부로 있는 것을 꾸짖는 듯했다. 배원형을 제외한 다른 무사들도 똑같이 적대적인 눈으로 장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열댓 명이 한꺼번에 보내는 시선에 떨릴 법도 하건만, 장건은 별다른 흔들림 없이 그것들을 받아넘겼다.
장건은 말없이 품에서 맹주에게 받아온 의룡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아니 저건?”
“허··· 정말 맹주의 뜻이···”
“어찌 맹원도 아니고 외부인에게 저 물건을?”
동요하는 다른 무사들과는 다르게 반짝이는 의룡패를 본 배양오는 두 눈을 크게 떴다가, 무슨 생각인지 곧 다시 여유로운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맹주에게 깊은 뜻이 있는 모양이군. 알겠네. 그에게 나름의 생각이 있는 모양이지. 질문이 뭐였나?”
“···매달 제열삼이라는 약초를 선물 받는 것으로 압니다. 그걸 누가 선물해 주는 겁니까?”
적세인의 이어진 질문에 배양오는 다시 수염을 쓰다듬으려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제열삼은 비싼 약초고, 나와 안면을 틀고 싶어 하는 상인이나 방파들이 자주 가져오는 물건이네. 하지만 그걸 매달 선물하는 이는 한 사람뿐이지.”
그는 중요한 말을 할 때 버릇인지 눈을 감고 잠시 시간을 끌다가 말을 이었다.
“···신대륙의 약초를 가져다가 중원에서 거래하는 허씨 상인이 있네. 부두에 큰 창고 겸 거처 하나를 가지고 있지. 제열삼은 그에게 선물 받았네.”
“제대로 된 이름이 필요합니다. 허씨 누굽니까?”
적세인의 이러진 질문에 무사들은 다시 발끈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들보다 배양오의 대답이 빨랐다.
“허선풍이라는 상인이네. 약초 거래로 유명한 상인이라 부둣가에 가서 그를 찾으면 쉽게 창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네.”
“협조에 감사합니다, 배 원로··· 조금 전 배원찬 대원에 관한 일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적세인이 다시 포권을 하며 이어진 말에 배양오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축객령을 내리듯 가볍게 손짓했다.
“그만 가시게. 비록 맹주와 원로원이 날을 세우고 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더 나은 무림맹을 위한 것임만은 알아두시게.”
그 손짓을 본 적세인은 곧바로 몸을 돌렸고, 이미 반쯤 문 너머로 빠져나가고 있던 양굉도 냉큼 백림부를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나가려던 장건은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배원형과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뜻 모를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마주침은 아주 잠깐이었고, 곧 그 세 사람은 백림부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자 배양오 뒤에 서 있던 무사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배양오는 그들이 사라진 백림부의 정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약을 달이던 자가 누구였지?”
“···특별할 것 없는 하인입니다.”
“입이 가벼운 자군.”
뭘 어떻게 하라는 말도 아니었건만 그 뜻을 알아들은 무사 둘이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어딘가로 움직였다. 나머지 무사들은 배양오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듯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여전히 정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배양오를 보며 배원형이 조용히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의룡패를 가지고 있는데.”
“상관없다. 어차피 맹주도 어느 정도 예상했을 테니까. 아무래도 그 장건이라는 자의 죽음과 의룡패를 이용해 상황을 만들려는 모양인데, 그리 쉽게 넘어갈 수는 없지. 저 하룻강아지들을 처리하고 맹주보다 빠르게 움직여 단숨에 판을 뒤집어야겠다. 넌 부두로 가서 마무리를 확인해라. 숨어있는 그자에겐 내가 직접 가야겠다.”
“···예.”
배원형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고, 배양오는 그대로 노려보고 있던 정문으로 걸어 백림부를 빠져나갔다. 백림부의 무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허리를 펴고 그것을 바라보던 배원형은 곧 몸을 돌렸다. 샛길을 이용해 적세인 일행보다 먼저 부둣가 창고에 도착해야만 했다.
* * *
배양오에게 단서를 얻은 세 사람은 빠르게 무림맹을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 아직도 정문을 봉쇄하고 있던 경비대원과의 만남과 경고가 있었지만, 장건은 의룡패를 들어보이는 것으로 간단히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건 무림맹 정의가 집약된 표식이오. 부디 그 무게를 알고 있기만을 바라겠소.”
삿갓으로 표정을 감춘 채 긴 창을 든 경비대원은 그렇게만 말했다.
그렇게 무림맹을 빠져나온 셋은 곧바로 신사천 부두를 향해 움직였다. 복잡한 거리를 다닐 것이기 때문에 말을 타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불편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제기랄. 그냥 좀 천천히 갑시다. 그 허선풍이라는 놈이, 아니, 놈은 아니지. 아직 모르는 거니까. 어쨌든 그 허씨 상인이 뭘 대비나 하고 있겠소? 그냥 천천히 가도 될 것 같은데.”
사람들 틈에서 푸닥거리는 양굉과는 다르게 장건은 마치 바람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고, 적세인 또한 큰 충돌 없이 부드럽게 나아가고 있었다. 양굉은 두 사람이 가볍게 자기 말을 무시했다는 것에 절로 한숨이 나오는 걸 느끼며 열심히 뒤를 따랐다. 여기서 뭐가 나와야 그도 살 수 있었다.
얼마 후 복잡한 거리를 지난 그들은 이제 물건을 나르는 인부와 다양한 상인들을 볼 수 있었다. 부둣가에 도착한 것이다.
거기서 여기저기 둘러보던 적세인은 곧 아는 사람을 찾았는지 그에게 다가가 허선풍이란 상인과 그의 창고에 관해 물었다.
“아, 거기? 주인이 자주 바뀐 창고지. 그 허씨 상인이 지금 주인이고. 최근 뭐 물건이 나가는 건 못 봤는데.”
인부의 설명을 통해 위치를 알아낸 세 사람은 부두 북쪽의 구석진 곳에서 커다란 창고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크고 작은 창고들도 주르르 이어져 있었지만 다들 원래 물건을 오래 보관하는 창고인지 한적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본 양굉이 말했다.
“이거 좀··· 쎄하지 않소?”
“앞으로의 네 앞날이 더 쎄하지 않을까.”
양굉은 장건의 농에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장건은 그런 양굉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창고로 나아갔다. 물건이 들어가는 큰 문은 잠겨 있었는데, 그 옆에 작은 쪽문은 특별한 잠금이 없었다.
옆으로 다가온 적세인도 그걸 보았다.
“이상한 창고이긴 하군. 비싼 약초를 보관하면서 이렇게 허술하다니···”
“내 말이 그거요! 이거 존나 이상하잖소?”
하지만 장건은 별다른 반응 없이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적세인은 잠시 그런 장건의 모습에 눈을 깜빡거리다가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창고 안은 어둑했는데, 켜져 있는 횃불이나 촛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짜 물건만 쌓아두는 창고인 것처럼 보였다. 적세인과 양굉은 그 어둑함과 서늘함에 조심스러웠지만, 장건은 뚜벅뚜벅 거침없이 그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이 그런 장건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얼른 그 뒤를 따라 창고 가운데에 서는 순간, 창고 벽을 타고 만들어진 이 층 난간 겸 통로에서 화르륵 횃불들이 피어올랐다.
“뭐, 뭐야 시발?”
깜짝 놀란 양굉과 적세인은 재빨리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횃불을 들고 이 층 난간을 빙 둘러싼 자들은 이미 활과 화살로 아래 있는 세 사람을 겨누고 있었다.
“이거 참.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소. 적 대원, 장 무사. 안타깝군.”
창고 안에 크게 울린 목소리의 주인은 배원형이었다. 그는 이 층에서 이렇게 여유로울 수는 없다는 태도로 장건과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본 적세인이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원로원 명령 전에 날 억류하겠다는 것이오?”
“아, 그런 것 아니요, 적 대원. 오늘 중 원로원 회의는 없소이다. 아마 명령이 나오려면 내일이나 모레쯤 되어야겠지. 난 그냥, 적 대원을 여기서 처리할 생각이요. 덤으로 장 무사 그쪽도. 미안하지만 왜 이러는 건지 주절주절 떠들 시간은 없으니 빠르게 갑시다.”
배원형은 그렇게 말하며 스윽 왼손을 들었다. 그러자 세 사람을 겨눈 활시위들이 팽팽해졌다. 검은 옷으로 통일된 사수들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위로 드러나는 두 눈이 더없이 차가운 살인자의 눈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런 시발··· 괜히 끌려와서 이게 뭔 지랄이야···”
짤막한 중검 한 자루를 뽑아 든 양굉은 그 사수들을 빙 둘러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사수들이 들고 있는 큼직한 활과 화살이 담겼다.
배원형은 곧바로 신호를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무림맹에서 그랬던 것처럼 장건과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쳐 자기도 모르게 멈칫 굳어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장건이 말했다.
“숨이 거칠군. 설마 뛰어오셨나?”
“···뭐라고?”
장건은 자신을 겨눈 화살들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웠다.
“생각해보니 웃겨서. 우리가 나가고 우리보다 먼저 여기 도착하려 신사천 뒷골목을 열심히 달렸을 그쪽 모습이.”
배원형은 그 말에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멍하니 장건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무슨 헛소리를···”
“숨어있다는 그자가 누구지? 첫날 나타났던 암살자가 그인가?”
잠시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던 배원형은 곧 장건이 백림부에서의 배양오와 자신의 대화를 들은 것처럼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어서 그게 말도 안 된다 생각했지만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장건의 표정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대번에 헤쓱해진 그는 얼른 손을 내리며 외쳤다.
“어서 쏘-”
그 순간 일 층에 있던 장건이 오른손을 들어 허공을 때렸다. 이 층에 있던 배원형은 마치 그 손바닥에 타격당했다는 것처럼 뒤로 덜컥 날아가 꽝 소리를 내며 벽과 충돌했다. 배원형이 나무 벽을 타고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는 동시에 창고 안에선 우우-하는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딘 자세에 허공을 때리듯 치켜든 장건의 오른팔 위를 붉은 화룡이 스르륵 타고 흘렀다.
장건은 그 자세 그대로 이 층 사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