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4)
14화
야영지를 떠난 장건과 주여랑은 어두운 산길을 횃불 하나에 의지해 나아갔다.
평범한 양민이었다면 당장에 발을 헛디디고 발목이 부러질 짓거리였으나 무공을 익힌 두 사람은 큰 어려움 없이 해가 뜰 때까지 나아가 작은 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좋아요. 저기예요.”
“굳이 저 마을을 지나가야 할 이유가 있소? 지부장한테 붙잡힐 수도 있다며?”
주여랑은 자기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그래도 가야 해요. 우리가 간다고 전서구를 날려야 하니까요.”
“누구한테?”
“누구긴요. 우릴 도와줄 사람들이죠. 고대 세가와 부딪치는 일이라면 그들도 준비가 필요할 테니까.”
장건이 마을의 크기를 보고 중얼거렸다.
“마을이 작은데 우편국에 전서구가 있을지 모르겠군.”
“있어요. 항상 준비되어 있죠.”
주여랑은 장건의 중얼거림에 마찬가지로 중얼거리듯 대답하고 성큼성큼 마을로 나아갔다. 장건은 그런 주여랑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조조의 고삐를 끌며 따라갔다.
“마을에선 조심해야 해요. 무림맹 지부장을 매수했을 수 있다고 했지만, 어젯밤을 보니 그냥 살수를 쓸 수도 있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녀가 걸어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는 말에 장건은 고개만 끄덕였다.
맑고 서늘한 공기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작은 마을 안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 위로 떠 오른 아침 해가 벌써부터 쨍한 햇살을 내리쬐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서넛이 뭉쳐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마을로 들어서는 장건과 주여랑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주여랑은 그 아이들에게 밝게 웃으며 다가가 물었다.
“안녕? 뭐 좀 물어봐도 될까?”
아이들은 호기심에 약간의 경계심이 섞인 얼굴로 쭈뼛거렸다. 그러자 주여랑은 아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혹시 이 마을 우편국이 어디 있는지 아니?”
쭈뼛대던 아이들은 간단한 질문에 모두 한쪽을 가리켰다. 그중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녀석이 말했다.
“추 씨 할아버지가 의원이랑 우편국을 같이 하고 있어요. 의원 간판을 찾아 들어가시면 돼요.”
주여랑은 싱긋 웃으며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쥐여주었다.
“고마워. 이걸로 맛있는 거 사서 나눠 먹어.”
아이들은 동전을 받고는 와아아 하고 소리 지르며 우르르 멀어졌다. 주여랑은 멀어지는 아이들에게 눈을 떼지 못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장건도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동생들이 있었어요. 나이 차이가 꽤 났었죠. 남자애가 둘, 여자애가 둘이었는데 넷 모두 참 밝고 귀여운 아이들이었어요··· 잘 자랐다면 착한 어른이 되었을 텐데.”
그녀는 어느새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이 돌아보아도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장건은 그 얼굴에서 보이는 슬픔과 그리움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물었다.
“이 마을이 처음이오?”
“네, 처음···”
주여랑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입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장건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그건 강철이나 무정물 같은 냉정함이 아니라 고요한 호수와 같은, 그러나 힘껏 큰 돌을 던져도 조그만 파문 하나 일으키는 것이 전부일 듯한 차분함이었다.
“···어서 가죠. 지금 전서구를 날리고 이동하면 내일 아침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잠시 넋을 놓고 그 눈을 마주 보던 주여랑은 겨우 눈을 피하며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이후 자신들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며 의원 간판이 달린 가게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아침부터 외지인이 오셨구만. 무슨 볼일이시오?”
아침부터 짧은 곰방대에 연초를 태우고 있던 노인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는 손님이 조금 귀찮아 보이는 것 같았다.
주여랑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전서구를 이용하고 싶은데요.”
“···전서구?”
“네. 전서구.”
“아니 여기가 우편국이긴 한데··· 전서구?”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주여랑을 바라보다가 들어나 보자는 듯 물었다.
“어디로 보낼 건데?”
“악가산장이요.”
노인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가게 뒤편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정말 큼직한 새장 하나가 들려 있었고, 그 새장 안에는 전서구 세 마리가 들어 있었다.
“뭐라 보낼 건가?”
“지금 도움이 필요해서 가고 있다고요. 마중 나와 달라고 적어 주세요.”
“누구라고 적나?”
“주여랑이요.”
노인은 같은 내용의 쪽지 세 장을 작성해 전서구 세 마리 모두의 발목에 채웠다. 그리고는 주여랑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돈 줘야지.”
“아.”
주여랑은 품을 뒤적거리다가 이내 등에 메고 있던 비파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지난번에도 보았던 것처럼 비파의 숨겨진 공간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낸 그녀는 거기서 은전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장건과 주여랑은 노인이 가게 뒤편에서 전서구를 날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와 이번엔 마구간을 찾았다. 그리고 거기서 주여랑이 탈 말을 사고 천천히 마을을 빠져나오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 아무런 시비도 걸지 않았다. 무림맹 지부장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주여랑은 그게 오히려 더 불안한지 마을을 거의 다 빠져나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죠? 왜 아무 일 없는 거죠?”
“없으면 좋은 거지.”
“하지만··· 우릴 막을 생각이라면 이 마을을 이용하는 게 제일 좋을 텐데···”
장건은 삐뚤어진 삿갓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그 친구가 생각보다 상식이 있는 사람인 모양이오.”
“그 친구요?”
“제운성.”
주여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식 있는 사람이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납치하려 해요? 참 모를 일이군요.”
두 사람은 말을 달려 곧 마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산골을 벗어나자 빼곡하던 나무가 줄어들고 삐죽삐죽하던 지형도 완만한 둔덕을 그리며 부드러워졌다. 지형이 완만해지자 말도 속도를 내기 편해졌다. 둘은 적당히 속도를 조절하며 말이 너무 지치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다가 주여랑이 손을 들어 멀리 보이는 낮은 산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저기 내가 아는 은신처가 있어요!”
기껏 숲을 벗어났는데 다시 들어가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별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조조를 달렸다. 둘은 오후가 다 되도록 수위가 낮은 강줄기 하나를 따라 계속 달렸다.
계속 강줄기를 따르던 주여랑이 고삐를 틀었다.
“이쪽으로!”
그들은 거기서 얼마 가지 않아 우뚝 선 침엽수들 사이에서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여랑은 말에서 내려선 눈을 비비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죠. 어제 잠도 못 잤잖아요.”
“이런 동굴은 어떻게 찾았소?”
동굴은 그리 넓지 않은 입구 안에 깊숙한 목구멍을 가지고 있었는데, 새카만 어둠이 보통 깊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나만의 비밀장소라고 할까요. 지난번에 이 근처에서 비를 피하다 찾은 곳이에요. 조금 들어가면 너무 좁아져서 들어갈 수가 없지만, 입구에선 허리 정도는 펼 수 있죠.”
둘은 말의 안장도 풀고 모닥불도 피워 차를 끓여 마셨다. 그들이 동굴 안에 야영지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해가 져 주변이 어두워졌다. 주여랑이 두 손으로 쇠 잔을 감싸 쥐고 어두워진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포기했나 봐요.”
육포를 구워 먹던 장건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운성이요. 그쪽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니까 당장은 그냥 포기한 모양인데요. 아마 내가 당신과 떨어지는 기회를 노릴 생각이겠죠.”
그녀는 장건을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내 친구들이 마중 나올 테고, 그럼 거기서 끝이죠.”
“그렇군.”
주여랑은 덤덤히 육포를 뜯는 장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일이면 황군무공을 볼 수 있는데 기대되지 않아요?”
“당연히 기대되지. 황제의 무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기회지 않소.”
“그런데 별로 들떠 보이진 않는걸요?”
장건은 대답 대신 모닥불로 눈을 돌리며 육포를 씹었다. 주여랑은 대답이 없는 게 기분 나쁘지도 않은 지 한참이나 장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무림맹에 들어가지 않았나요?”
장건은 가벼운 한숨을 쉬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무슨 뜻이오?”
“그렇잖아요. 그 무공실력이면 무림맹이나 어디 산하 문파 하나에 자리 잡고 정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떠돌아다니다가 문제에 엮이는 게 아니라.”
“···난 그냥 어디 매이는 게 싫소.”
주여랑이 슬쩍 웃었다.
“아하. 진한 방랑벽이 있으시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옆에 뉘어 놓았던 비파를 집어 들다가, 무슨 생각인지 그건 내려놓고 슬그머니 장건 옆으로 다가왔다.
“뭐 좀 더 물어봐도 되나요?”
“뭘 말이오?”
주여랑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날 도와준 거, 내가 예뻐서죠?”
“그런 것도 있지.”
그녀는 장건의 즉답에 오히려 김이 빠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도 있으면, 다른 것도 있나요? 황군무공?”
장건은 육포를 질겅거리며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난 나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오.”
“···예?”
주여랑의 반문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평소에는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다른 이에게 보여 줄 수도 없지만, 내 가슴 속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하나 더 있소. 그 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소. 그저 멀뚱하니 가만 바라볼 뿐. 세상에 넘쳐나는 다른 힘들에 비하면 너무나 무력하고 덧없는 시선이오.”
주여랑은 조금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넘어진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은 있는 힘껏 나를 노려보고 있소. 마치 어서 도우라는 듯, 그게 네가 배운 도리가 아니냐는 듯 외치는 것 같지. 그러나 그건 내 마음속에 있는 무력한 눈빛일 뿐이오. 무시한다고 문제 될 것 없는. 그래서 난 가끔 정말 그 눈을 무시하지. 몇 번 더 그러면 눈빛은 힘을 잃고 흐려져 더더욱 허망한 눈이 되어갈 뿐이오. 아마 시간이 더 지나면 사춘기 지나듯 사라져 버릴 테지.”
장건이 모닥불에서 눈을 떼고 주여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끝내 그 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볼 수가 없소. 그 눈은 결국 나의 눈이니까. 사라져버리면 되찾을 수 없을 예전 나의 모습이니까.”
그의 눈은 주여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흔들림 하나 보이지 않는 차분한 눈이었다.
“그래서 당신을 돕는 것이오. 지금 그 눈은 당신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대답이 되었소?”
주여랑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본인 스스로도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듯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장건에게 입 맞췄다.
모닥불이 흔들거리고 동굴 밖에선 부엉이 우는 소리만 들리는, 그런 잠깐의 침묵 후 주여랑은 입술을 떼고 장건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진짜 이상해요. 세상에 다시 없을 이상함이랄까.”
“즐거운 이상함이지.”
주여랑은 장건의 대답에 피식 웃고는 다시 그에게 입 맞췄다. 모닥불은 침착하게 흔들거리는 모습 그대로 엉키는 두 살결을 비출 뿐이었다.
동굴 밖에 있던 조조는 열심히 입 안의 풀을 씹으며 그 흔들리는 그림자를 열심히 훔쳐보았다.
* * *
장건은 오랜만에 정말 푹 잤음을 느끼며 눈을 떴다.
밤 내내 힘을 썼으니 당연한 느낌일지도 몰랐다. 눈가를 비비며 일어난 장건은 모닥불이 꺼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여랑과 그녀의 짐이 없다는 것도.
하지만 장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식어버린 차를 마시고 옷을 걸쳤다. 그후 주여랑의 잠자리가 있던 자리에 놓인 찢어진 천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검댕으로 쓴 글자가 적혀 있었다.
[미안해요. 며칠 동안 고마웠어요. 쫓아올 생각은 하지 말아요. 위험하니까.]그걸 곱게 접어 품에 집어넣은 장건은 칼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시발. 조조, 너 이 새끼.”
조조가 없었다. 아마 주여랑이 자신의 말을 타고 가며 같이 끌고 간 것 같은데, 장건이 아는 조조는 누가 그냥 그렇게 끌고 간다고 끌려갈 녀석이 아니었다. 아마 주여랑이 웃는 낯으로 살살 꾀니 냉큼 따라나선 것일 터였다.
장건은 짝다리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허리에 매었던 칼을 등으로 돌려 메고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여랑과 조조의 말발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경공은 오랜만인데.”
혼자 중얼거린 장건은 등에 멘 칼을 다시 한번 꽉 묶어 매고는 그 자리에서 가볍게 통통 뛰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여랑의 말발굽 방향으로 빠르게 튀어 나갔다. 마치 달리는 말처럼 빠른 속도였다.
그 빠른 발에 바닥의 흙과 풀이 뭉개질 만도 하건만, 그가 지나간 곳에는 밟은 듯 만 듯한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