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깜짝 놀랐던 적세인은 곧 당혹감을 가라앉히고 돌덩이처럼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믿기 힘들군. 지금이야 하와이도로 물러나 있다지만, 평소에는 신사천에 항상 주둔하고 있는 황군이 있었다. 맹주와 원로원이 그들을 완전히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진 않을 텐데.”
무림맹과 하와이 주둔 황군은 상호 협조적인 관계였다. 신대륙이 아주 넓기 때문이었다.
신대륙은 발견된 지 백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개간된 땅보다 그렇지 않은 땅이 훨씬 더 넓은 땅이다. 그런데 그 넓이에 비해 주둔하고 있는 황군의 숫자는 너무 적었다. 애초에 이 땅에 대한 황제의 관심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중원과는 달리 무림방파가 발전하고 그들의 연맹체가 생길 수 있었다.
만약 중원에서 무림맹 같은 조직이 생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면 그들은 반역을 꾸미는 역도로 몰려 모조리 참살당했을 것이다.
어쨌든 모자란 병력으로 신대륙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 하던 주둔군은, 그 적은 병력을 넓은 땅 여기저기 흩어놓는 것보단 해안 도시에 집중시키고 신대륙 이익집단의 꼭대기만 쥐고 흔드는 방식을 택했다.
그렇게 황군은 감산성, 신사천성, 천후성에만 주둔하게 되었고, 무림맹이 결성되었다. 그 무림맹은 황군으로부터 신대륙 질서 정립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땅의 정의를 지켜왔다.
지금의 무림맹주 혁련위진은 그 정당성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맹주 중 누구도 황제에게 검과 칭호를 하사받진 못했다. 그건 황군이나 고대 세가를 포함해도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당성을 쉽게 쥐여줄 수 있다는 것은 곧 쉽게 뺏어갈 수도 있음을 말한다. 만일 무림맹 수뇌부가 황제의 눈 밖에 날 짓을 한다면 황군은 그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황군 수천 명은 신대륙 전체를 다스릴 순 없어도 한곳에 모인 수만 명을 쓸어버리기엔 충분한 숫자였다.
수뇌부가 쓸려나간 후 나머지 무림 방파들이 들고 일어나 황군에게 대항해도 문제다. 그런 본격적인 전쟁은 중원의 관심을 끌 것이고, 그러면 황제의 군선 수십, 수백 척이 바다를 건너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결국 무림맹은 황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황군 또한 괜히 무림맹이 일을 벌여 황제의 관심을 끌지 않길 바란다. 중원과 이곳 사이의 바다는 너무 넓고 멀었으니까. 그 거리는 천년 제국에게도 부담이 될 거리였다.
맹주와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이권 다툼 와중에도 외부적으론 조금이라도 더 독립적인 자치권을 얻고자 하는 무림맹. 하와이 주둔군의 보급을 보장받고 최소한의 힘으로 신대륙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황제에게 능력을 증명하고자 하는 황군. 지금 무림의 정세에는 마궁의 준동 외에도 그런 무림맹과 황군 사이의 눈치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배원형이 말한 사실은 그 균형을 으그러뜨리는 내용이었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하와이도에서 황군이 돌아오는 대로 지금까지 서로 간만 보던 눈치 싸움은 끝날 것이다. 그 끝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어도 중간 과정이 누구에게나 파멸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는 적세인에게는 배원형의 말이 그저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자 하는 거짓말로 보였다.
“장건, 갑시다. 가서 배양오 원로를 체포하고 그의 거처와 백림부를 뒤져보면 다 나올 진실이오.”
적세인은 고개를 떨구고 있는 배원형에게서 눈을 떼고 장건에게 말했다. 확실히 더 시간 끌 것 없이 배양오 원로를 체포하면 끝날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태도에도 배원형은 천천히 머리를 들며 끅끅 힘겹게 웃었다.
“큭···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맹주와 원로원은, 마궁과 협조하는 게 아니다··· 그저 그들의 수작을, 방관할 뿐이지··· 신사천에서 황군이 물러난 지금,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판을 흔들기 위해서···”
“판을 흔든다? 그래서 맹주와 원로원이 얻는 게 뭐지? 신사천 안에 마인들이 들끓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으면 받았지, 얻는 것은 없을 텐데.”
“무림맹에겐 이미 지난 맹호 교위 사건이 있다··· 선임 교위가 황군의 힘을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제멋대로 휘두른 사건··· 그는 무림맹 뇌옥에서 죽었지. 중원으로 압송되지 못하고··· 맹주가 정말 그 암살을 못 막은 거라고 믿나?”
적세인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녀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지금 배원형의 말은 무림맹이 교위 견우영을 내주고 황군에게 빚 하나를 받아두었고, 그걸 이번 사건의 방패로 쓰겠다는 이야기였다.
문득 그녀와 장건의 눈이 양굉을 향했다. 직접적으로 황군과 일하는 양굉이었다.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을 법했다.
하지만 양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 난 모르는 일이요. 난 그냥 말단이라고. 그 뭐냐, 내가 아는 건 그때 암룡대에서 비리를 발견하고 그걸 도려내고자 한 작전이라는 거요. 마차나 털고 다니는 내가 이런 정치를 어떻게 알겠소?”
억울하다는 듯한 양굉을 두고 적세인은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그거론 모자라. 그 정도로는 마인들과 협력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어. 신사천에서 마인들이 날뛰었는데 그걸 빚을 되돌려 받겠다는 정도로 끝날 수 있을 것 같나?”
“맹주는 이걸 기회로 원로원의 힘을 흩어버릴 생각으로, 원로원은 내 아버지를 정쟁의 선두로 세워놓을 생각으로 묵시하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도 무림맹에서 백림방만 축출되리라는 것이지··· 결국 황군이 이 땅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면 무림맹 자체는 존속되어야 하니까···”
적세인은 뭐라 반박하려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무림맹이 황군에게 한발 양보하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아니, 잘 들여다보면 양보조차 아니었다.
맹주는 황군의 손을 빌려 원로원의 힘을 줄이려는 것이고, 원로원은 배양오를 맹주와의 정쟁 선두로 써먹은 후 나중에 그의 힘이 너무 커지기 전 축출되길 바라는 것이다. 덤으로 현재 백림방이 가지고 있는 천후성의 이권 또한 그들의 먹잇감일 것이다.
무림의 정의를 세운다는 무림맹에서 그 꼭대기 수뇌부들은 그저 이권 다툼을 위해 동료를 희생양 삼고,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적세인은 눈을 꾹 감으며 이마를 감쌌다. 이런 식이면 차라리 동쪽 황야를 떠돌며 적당히 뒷돈이나 받아먹는 지부장들을 만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녀는 이 순간 신사천 거리의 화려함보다 흙먼지 섞인 바람과 황량한 벌판이 그리워지는 걸 느꼈다.
그때 지금까지 가만 연초만 태우고 있던 장건이 불쑥 말했다.
“그걸 다 아는데 왜 마궁과 손을 잡았나?”
그 질문에 적세인과 양굉의 눈도 다시 배원형에게 집중되었다. 점점 안색이 창백해지던 배원형은 장건의 물음에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그는 조금 전과 달리 한층 차분해진 태도로 말했다.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이 악마와 손을 잡는 이유가 뭐지? 그만큼 유혹적이기 때문 아닌가? 그저 백림방주를 형으로 두었기에 원로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아버지가, 지금은 무려 대협객 의룡검주와 날을 세우며 이권을 다투고 있지. 맹을 넘어 무림의 실세가 되었단 말이야··· 그리고··· 사실 들키지 않을 줄 알았어··· 그저 맹주와 다른 원로들 또한 수십 년간 머리싸움을 해왔다는 걸, 그들도 바보가 아니라는 걸 간과했을 뿐이지···”
점점 다시 밑으로 내려가는 그의 고개를 보며 장건은 후-하고 연기를 뿜었다. 그리고 적세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진짜 호랑이 등에 탄 건 이쪽이었군. 게다가 그 호랑이가 달리는 방향은 절벽이었고.”
심각하게 듣던 적세인은 배양오를 찾아가기 전 장건과 했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탄 상황이라 생각했었다. 달리는 호랑이. 그리고 그 위에 탄 사람. 내려서거나 미끄러지는 순간 호랑이는 단숨에 사람의 목덜미를 찢어버릴 것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시오. 배양오가 마궁과 손잡은 건 분명한 사실이니 그와 신사천에 숨어든 마인들을 소탕하면 그만이오. 그쪽이 무림맹원으로서 할 일이 그거 말고 뭐가 더 있소?”
장건은 그렇게 말하며 꽁지만 남은 연초를 툭 튕기고 일어섰다. 생각이 복잡하던 적세인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녀가 할 일은 그게 맞았다. 배양오와 동부에서 학살을 자행한 마인들을 모두 소탕하면 자연스럽게 맹 내부의 정쟁도 가라앉고, 부족 연합과의 일도 진행이 될 것이다.
물론 그건 결국 황군이 할 일을 그녀와 장건이 대신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상황을 만든 맹주와 원로들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적세인은 다시 한번 황야가 그리워지는 기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장건은 고개가 축 늘어진 배원형이 힉힉 소리를 내며 마지막으로 호흡하는 걸 들었다. 숨소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신의 힘이 풀린 시체가 추욱 늘어졌다.
이후 고개를 돌려 창고 안을 쭉 둘러본 장건은 다른 두 사람에게 시선을 멈추고는 말했다.
“배양오도 뭔가 꾸미고 있을 것이오. 돌아갑시다.”
적세인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미 목숨줄 정도는 보장받을 정보를 얻었다고 여겼던 양굉은 울상을 지었다. 장건의 눈이 그가 빠지는 걸 허락할 것 같지는 않았다.
세 사람은 그렇게 창고를 떠나 다시 무림맹으로 움직였다. 뒤처리는 맹으로 돌아가 따로 인원을 보내기로 했다. 지금은 빠르게 움직여 배양오 원로를 붙잡아야 했다.
어느덧 늦은 오후로 접어든 신사천의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거리에는 하루 일을 마친 인부들이 술집을 찾아 몰려다녔고, 종일 물건을 팔았던 가게들은 남은 재고를 처리하려 큰 목소리로 마지막 호객을 했다. 기루들도 화려한 등을 켜 처마와 장대에 걸어놔 벌써부터 본격적인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림맹주와 원로원의 이권 다툼, 동쪽 원주민들의 학살, 신대륙을 뒤집어엎으려는 마궁의 수작질 등등이 모두 거짓말인 듯한 풍경이었다. 적세인은 그 풍경을 보며 입가가 더 씁쓸해지는 것 같았다.
신사천의 일상적인 저녁 거리를 지난 세 사람은 또다시 무림맹 정문에서 경비대원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눈빛으로 증명패를 요구했고, 장건은 의룡패를 꺼내 보였다. 그를 확인한 경비대원은 문 안으로 들어가는 세 사람을 막지 않았다. 그저 장건이 지나가는 순간 짧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피 냄새가 나는군.”
장건은 그를 등지고 멈춰서 말했다.
“곧 안에서도 같은 냄새가 날 거요.”
“···내원 경비대가 고생하겠군.”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를 등지고 섰던 장건은 혼잣말 같은 대답에 옅게 웃으며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고, 문을 지키는 경비대원 셋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경비대원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장건 일행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의룡패에 대해서였다. 흔히 맹주를 의룡검주라 부르는 이는 있으나 의룡패주라 부르는 이는 없었다. 그건 저 작은 패보다 검의 상징성이 더 뛰어나서이기도 했고, 맹주가 의룡검은 뽑아도 의룡패를 내미는 일은 별로 없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쉬이 외부인의 손에 맡길 정도로 가벼운 의미를 가진 물건은 아니었다. 의룡패는 맹주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상징이 될 수 있었다. 경비대원은 맹주가 무슨 생각으로 장건이라는 무인에게 그 패를 맡겼는지는 몰라도 그게 그의 계획대로만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경비대원은 두 눈을 꾹 한번 감았다 뜨는 것으로 상념을 정리했다. 그런 건 그가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 그의 일은 무림맹 정문의 봉쇄였다.
그때 문득 그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비단 무복을 입고 어깨에는 검은색 바탕에 황금빛 자수가 들어간 화려한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허리에 매인 검에도 금색 수실이 달려있었고, 멋들어지게 틀어 올린 머리칼의 비녀 또한 보통 고급품이 아니었다.
사람이 잔뜩 지나는 길 한복판에 홀로 서 있음에도 그 고급스러운 옷차림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몸에서 전체적으로 흘러나오는 분위기 때문인지 그녀는 마치 저잣거리 한가운데 떨어진 귀족처럼 눈에 띄었다.
다음 순간 경비대원은 그녀 옆에 한 여인이 더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화려하진 않으나 잘 단련된 검처럼 보였다.
그렇게 두 여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경비대원은 창을 쥔 오른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저 수많은 양민이 지나다닌다 생각했던 거리에는, 어느 순간부터 같은 기도를 가진 자 수십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급스러운 복장의 여인을 중심으로 두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왔다. 경비대원은 그녀 뒤에서 보내오는 기세 수십을 맞이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는 다가오는 여인을 보며 왼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멈추시오. 현재 무림맹은 봉쇄되었소.”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자신을 막는 경비대원이 재밌다는 듯 미소 짓다가, 손바닥을 내민 그를 따라 하듯 품에서 손바닥만 한 무언가 꺼내 보여주었다. 그걸 본 경비대원은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한번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녀가 내민 것은 황룡이 그려진 황금패였다.
그건 황제의 상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