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장건을 마주한 마인들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싸우던 무림맹 무사들은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모두 장건만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들은 눈가에서 흐르는 마기 덕분인지 감랑대紺狼隊라는 이름처럼 검푸른 늑대들처럼 보였다.
그때 우뚝 서서 그들을 마주 보던 장건이 살짝 비틀거렸다. 장건과 제일 가깝던 마인이 그걸 보고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몸을 날렸다. 그가 들고 있던 팔뚝 길이의 쌍칼이 야수의 이빨이 되어 장건을 노렸다.
칼날의 반사광이 번쩍이고, 마인은 달려들던 힘 그대로 장건을 스쳐지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조금 전까지 광망으로 번들거리던 그의 눈가가 빛을 잃었다. 싹둑 잘린 허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장건은 청룡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있다가, 다시 한번 비틀거렸다. 감랑대 마인들은 본능적으로 공격하려 움찔거렸다. 하지만 정말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그걸 본 장건은 입가에서 검은 피를 주르륵 흘리면서도 씩 웃었다.
“뭐해? 계속해야지.”
그 비웃음 비슷한 것에 감랑대 마인들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포효를 내지르며 장건에게 달려들었다. 복잡한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던 혁련위진이 그걸 보고는 번쩍 의룡검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가자! 무림의 영웅을 도와야 한다! 혼자 싸우게 두지 마라!”
그 외침에 조용하던 무림맹 무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당사운의 암기에 여기저기 다친 이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당장 앞장서 달려가는 맹주의 뒤를 따라 함성을 지르며 달렸다.
“가자!”
“무림을 위하여!”
“장 대혀업-! 장건 대협을 위하여!”
제일 선두에서 달려가는 이들 중 검룡문 가용산이 있었다. 그는 마인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조금 전부터 흘끗흘끗 장건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고, 그래서 그가 청룡벽을 만드는 것과 이후 당사운을 처리하는 것까지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장건의 무위를 보고 가슴이 벅차 견딜 수 없다는 듯 부르짖으며 달렸다. 덕분에 거기 있던 무림맹 무사들 모두 장건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적세인은 그 옆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감랑대 마인들과 격렬히 싸우느라 장건의 무공을 제대로 보진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 장건의 무위를 경험했고, 그래서 옆에서 들리는 외침에 그대로 따라 외쳤다.
“장-건! 협객 장건-!”
맹주부 정문을 바라보는 대문 저편에 장건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서 있었고, 그를 향해 감랑대 마인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무림맹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따라붙었다.
장건은 가장 가까워진 마인의 눈과 이빨을 보며 중얼거렸다.
“끝내주는군.”
“크허헝-!”
연달아 마인 셋이 장건을 스쳐 지났다. 칼날과 칼날이 허공을 찢으며 반사광을 번쩍거렸고, 연이은 쇠와 쇠의 날카로운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장건이나 그를 스쳐 지난 마인들이나 잠시 칼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머지 마인들은 장건과 만나는 것보다 등 뒤에 무림맹 무사들을 맞이해 몸을 돌려 방어해야만 했다. 흉포한 마기와 무사의 칼날이 다시 만나 겨뤘다. 하지만 당사운이 죽는 걸 본 마인들은 사기가 뚝뚝 떨어져 있었고,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장건이 마인들의 수장을 해치웠음을 느낀 무림맹 무사들은 잔뜩 흥분해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마인들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장건을 스쳐지나 굳어 있던 마인 셋이 풀썩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장건은 청룡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입에서 다시 왈칵 피를 흘렸다. 그의 오른쪽 눈 밑 뺨에 가로로 긴 혈선이 생겨 핏방울이 흘렀다.
그는 자세를 바로잡아 서서 휙 청룡을 털었다. 이후 입 안에 남은 핏물도 옆으로 찍 뱉어내고 무림맹과 마인들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역시 맹주 혁련위진과 원로원이 나서서 날뛴 덕분이었다. 마지막 마인이 쓰러지고 잠시 서로를 돌아보며 자신들이 승리했음을 확인한 무림맹 무사들은 곧 각자의 무기를 번쩍 들어 올리며 함성을 질렀다.
“와-아-!”
“무림을 위하여! 무림맹을 위하여!”
“이겼다! 마인들을 모두 물리쳤다!”
하지만 그때 환호하는 맹원들을 향해 맹주가 대뜸 호통을 쳤다.
“지금 기뻐할 땐가! 마인들에게 다친 이들과 암기에 맞은 이들을 보살피게! 암기에 독이라도 묻어 있었다면 위험한 상황이네!”
그 호통에 화들짝 놀란 맹원들은 얼른 그가 시킨 대로 부상자와 사망자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쓰러져서 신음만 흘리고 있던 무사들을 향해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 시체는 수습되었다. 장건에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었다. 적세인이었다.
“괜찮소?”
“그럭저럭.”
장건은 그녀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적세인은 그를 보고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해 입을 열려 했을 땐 장건의 눈이 그녀를 떠나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다른 인물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맹주 혁련위진이었다.
“···무림맹을 위해 큰일을 해 주었네, 장 무사.”
장건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말을 꺼냈던 혁련위진도 더 말이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단번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시신과 부상자를 수습하는 맹원들 모두 흘끔거리며 이쪽을 살폈고, 적세인도 둘의 눈치를 살피고는 슬그머니 한쪽으로 물러섰다.
혁련위진이 다시 말했다.
“무림맹을 위해, 큰일을 해 주었네, 장 무사.”
하지만 장건은 맹주의 반복된 말에도 대답 없이 멀뚱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원로 중 하나가 그런 장건이 버릇없다고 여겼는지 앞으로 나서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장건을 가리키며 뭐라 말할 생각이었던 듯했다.
그러나 그 동작은 맹주가 슬쩍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가로막혔다. 그 원로는 혼자 큼큼 헛기침하며 앞으로 내디뎠던 걸음을 다시 제자리로 되돌렸다.
장건이 그걸 보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배양오는 어디 있소?”
맹주는 말로 대답하지 않고 무사들이 수습 중인 시체들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목덜미가 벌겋게 갈라진 배양오의 시체가 퀭한 회색 눈으로 누워 있었다. 장건의 눈이 다시 맹주를 향했다.
배양오가 격렬한 싸움 중에 휘말려 마인의 손에 죽었는지, 아니면 더 복잡한 일을 만들기 싫었던 맹주의 손에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에 제일 가까이 있던 것은 분명 맹주의 의룡검이었다.
장건이 말했다.
“마치 날아가는 화살이 된 듯 온몸을 내던지는 찌르기 검법. 예전에 비슷한 검법을 본 적 있는데.”
맹주의 눈썹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의 눈빛이 묘해졌다.
“···내 제자 중 하나를 만났나? 내 밑에서 수학하는 아이는 꽤 많다네. 누굴 만났나?”
“글쎄. 모르겠소. 황야에서 만나 생사를 겨뤘을 뿐이라.”
“황야에서 만나 생사를 겨루다··· 그거 참으로 무림인의 삶이군.”
묘하게 반짝이는 맹주의 눈빛이 푹 가라앉았다. 그는 아직 의룡검을 집어넣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장건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상한 분위기에 적세인이나 원로들이나 약간 당황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장건이 비천취응대의 실종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적세인은 말조심해야 할 장건이 왜 날을 세우는 것인지 의아했고, 배양오를 처리하고 숨어든 마인들까지 쓸어버리며 나름 맹주와 원로원이 각각 계획했던 것을 모두 얻었다고 여기는 원로들은 맹주가 굳이 왜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장건을 건드는지 의아했다.
맹주가 말했다.
“자네가 말한 검법은 사일검법射日劍法이네. 옛 신화에서 활로 태양을 쏘아 떨어뜨린 일화를 바탕으로 하는 검법이지. 비교적 최근 내가 창안해 가다듬고 있는 검법이네. 혹 배워보겠나?”
원로들이 움찔거렸다. 무공을 전수하겠다는 말은 결국 사승 관계를 맺자는 말이었다. 이미 강력한 맹주의 세력에 새로운 전력이 추가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겠소. 이미 배우고 익힌 것이 많아서.”
“허. 뭘 그렇게 많이 익혔기에 그런가?”
맹주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웃는 낯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장건은 느릿한 동작으로 청룡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나직이 대답했다.
“이것저것. 그중엔 시체 먹는 독수리들이 노리던 것도 있지.”
청룡이 스르릉 소리를 내며 칼집 안으로 사라지는 동안, 그에 맞춰 맹주의 표정도 스르륵 싸늘해졌다. 다음 순간 의룡검의 칼끝이 움찔 까딱이고, 완전히 칼집 안에 들어간 청룡은 달칵하는 소리를 냈다.
그때 부상자들들 수습하며 이쪽의 눈치를 보던 맹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뭐, 뭐야! 이 자식! 아직 살아있잖아!”
다 죽어 쓰러진 줄 알았던 마인의 시체 중 하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인은 진짜 짐승이라도 된 듯 두 발과 손 모두를 이용해 움직이며 순식간에 맹원들 사이를 벗어나 담장과 전각을 타고 달렸다. 얼른 무기를 뽑아 든 맹원들도 많았지만, 마인은 그런 맹원들을 상대하기는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멀리 물러났다가 싸움이 끝난 듯 보여 다가오던 다른 맹원들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서 우왕좌왕했다. 대부분 전투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물러났던 맹원들은 한쪽 담장을 네 발로 터더덩터더덩 달려가는 마인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인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걸 본 맹주가 급히 놈을 잡으라 외치려 했다. 싸움은 다 이겨놓고 한 놈이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에게도 좋지 않았다. 이왕 이겼으면 완벽한 승리라 포장해야 했다.
“무림맹! 저 마인 앞을-”
그 순간 어디선가 길쭉한 창 하나가 쒝- 날아와 담장을 타고 달리던 마인을 꿰뚫었다. 창에 실린 힘은 마인을 꿰고 훌쩍 더 날아가 대로 한가운데 틀어박혔다. 상체가 옆으로 관통당한 마인은 꺽꺽대며 피를 흘리고 바닥에 박힌 창대를 더듬거리다가, 곧 축 처졌다.
우왕좌왕하던 맹원들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우르르 대로 옆으로 물러섰다. 덕분에 맹주부 정문까지 이어지는 대로가 훤히 뚫리며 저 멀리 대로 한가운데 서 있던 한 여인이 드러났다.
그녀는 검은색 바탕에 황금빛 자수가 들어간 장포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 안에 옷차림도 고급스러워 보였고, 그 고급스러움은 잘 틀어 올린 머리칼과 거기 꽂힌 비녀로 완성되었다.
동시에 그녀의 시선은 지금 이곳의 모든 무림맹원을 내려다보는 듯 묘했다. 그녀에겐 쉬이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과 군림하는 자의 오만함이 있었다.
대로 한가운데 창에 꿰여 죽은 마인, 그를 가운데 두고 무림맹 수뇌부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맹주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쳐 지났다. 본 적 없는 여인이었다. 설마 새로운 마인일까? 맹주는 다음 순간 그녀 뒤에 정렬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지만 그녀의 존재감이 워낙 커서 그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맹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그들의 침묵과 시선을 즐기듯 쭉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맹주 옆에 있는 장건을 보고는 살짝 눈이 커졌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장건과 무림맹 사람들, 그리고 난장판이 되어있는 맹주부 정문 앞마당을 확인하고는 곧 앞으로 걸어왔다.
제일 먼저 대로 창에 꿰어있는 마인의 시체를 만난 그녀는 손을 뻗어 창을 뽑았다. 지지대를 잃은 시체가 철푸덕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후 그녀가 휙 창날을 털어내고 옆으로 내미니 어느새 다가온 누군가가 그 창을 받아들었다. 깔끔한 무복을 차려입은 또 다른 여인이었다.
그렇게 방해물을 치운 여인은 큰 걸음으로 마인의 시체를 넘어 계속 수뇌부를 향해 걸어왔다. 그 뒤를 따라 정렬된 채 길을 채운 자들이 성큼성큼 움직였다. 두려운 점은 수십에 이르는 사람들이 걷고 있음에도 마치 한 사람이 걷는 듯 터벅터벅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옷이 검은 장포와 삿갓으로 모두 통일된 것 또한 섬뜩함을 더했다.
길옆으로 물러나 있던 비전투 맹원들은 뭘 어쩌지도 못하고 그들이 지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더 참지 못한 원로 중 하나가 나섰다. 이번엔 맹주도 말리지 않았다.
“멈추시오! 아무리 보아도 무림맹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누구시오? 어떻게 들어왔소?”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말없이 질문한 원로를 포함한 무림맹 수뇌부를 다시 한번 쭉 둘러보고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그것은 팔각형 황금패였다. 그 안엔 굽이치는 황룡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걸 알아본 원로원의 입이 쩍 벌어짐과 동시에, 조금 전 여인에게서 창을 건네받았던 또 다른 여인이 목소리 높여 외쳤다.
“의룡검주 혁련위진과 무림맹은 동진군東鎭軍 진동장군鎭東將軍 유설 공주께 예를 표하시오!”
그 외침을 들은 맹원들 모두 어리둥절해져 웅성거렸다.
“뭐? 공주? 한 제국의 공주라고?”
“장군이라니? 그것도 진동장군?”
“아니 이게 무슨···”
하지만 그 웅성거림은 맹주 혁련위진이 의룡검을 집어넣고 앞으로 나서며 조용해졌다. 그렇게 앞으로 나선 맹주는 허허 웃으며 엉거주춤한 사람들에게 말했다.
“뭐하나? 황군의 장군이시네. 예를 표하시게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유설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를 본 다른 맹원들도 모두 머리를 숙여 유설에게 인사를 했다. 머리를 숙이지 않은 건 장건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장건을 본 유설은 무림맹원들 중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히죽 웃으며 장건에게 손을 들어 손가락을 꼬물락거리며 인사했다.
이후 무림맹주의 머리가 올라오자 냉큼 손을 내리고는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장건은 어이가 없어서 툴툴 웃었다. 지난날 신사천에서 헤어졌던 설묘금, 그러니까 유설 공주를 뜬금없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그녀는 진동장군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직함까지 달고.
장건의 눈이 맹주를 향했다. 머리를 숙여 인사한 그는 갑작스런 유설의 등장에도 전혀 당황스럽지 않다는 듯 인사를 이어갔다. 하지만 장건에겐 그의 목덜미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는 것이 아주 잘 보였다.
이후 장건의 시선은 유설 뒤에서 창으로 바닥을 짚고 마찬가지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위무사 진하를 향했다. 그녀는 장건과 눈이 마주치자 유설처럼 손을 들어 인사하진 못하고 눈짓으로만 아는 척을 했다.
시선은 그녀 뒤에 잘 정렬해 서 있는 자들까지 넘어갔다. 검은 장포를 입고 검은 삿갓으로 눈과 표정을 감춘 무인들. 장군이라는 유설 뒤를 따라온 것으로 보아 그들은 황군이었다. 하와이로 떠났던 이들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교위가 몇이고, 장수가 몇인지는 몰라도 이리저리 갈라져 있는 무림맹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단일 세력일 것이다.
“끝났군.”
장건은 짧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정확히 어떻게 흘러갈지는 장건도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어쨌든 무림맹에서 마궁과 음모를 꾸민 자가 나왔고, 마인의 습격도 있었다. 그리고 저쪽엔 남궁천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었다. 맹주나 원로원이나 더는 뭔가 꾸밀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돌아온 황군을 상대해야 하니까.
이미 마궁의 습격을 받아본 적 있는 유설이 장군직을 달고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진동鎭東이라는 이름표, 돌아와서 곧바로-적어도 공식적으론-무림맹부터 찾아왔다는 것 등등.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유설은 아마 지지부진하던 마궁과의 싸움을 제대로 치르기 위해 황실에서 파견된 것일 터였다.
그런 유설이 최근 며칠간의 무림맹 사정을 알게 된다면 맹주와 원로원은 어찌 될지 몰랐다. 최악의 경우엔 맹주의 의룡검이 회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유설은 공주고, 황제의 딸이었기에 혁련위진에게 흠이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장건은 주절주절 떠드는 맹주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엔 불그스름해서 묘한 감상을 주는 저녁노을이 펼쳐져 있었다.
유설 덕분에 무림맹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고원성의 원주민 부족 보상도 금방 이뤄질 것이다. 신사천 내에 다른 마인은 없는지도 수색이 이뤄질 것이고, 있다면 척살될 것이다. 당사운이 죽었으니 아마 남은 이들은 크게 위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유설 덕분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장건 또한 나름대로 약속했던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무림맹 수뇌부의 죽음도 막았고, 배양오가 무리하게 된 건 결국 장건 때문이었으니까.
고개를 내리며 허리의 청룡을 한번 추스른 장건은 피가 흐른 입가를 소매로 쓱 닦아내고 움직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맹주와 유설의 대화에 집중되었기에 슬그머니 움직이는 장건을 발견한 이는 없었다. 장건은 집중된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맹주의 말에 그다지 집중하고 있지 않았던 사람, 유설이었다. 그녀의 눈이 장건을 쫓았다.
그러자 거창한 환영의 말을 꺼내던 맹주 또한 그 눈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움직이니 장내에 모든 사람의 눈 또한 장건을 향했다.
“···장 무사? 어디 가는가?”
맹주의 말에 장내를 떠나던 장건의 걸음이 멈췄다. 장건은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쭉 돌아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무사와 저 멀리 아직 맹주부 정면에 있는 남궁천, 제운성, 그의 이름을 부르짖던 검룡문 가용산, 불편해 보이는 원로들, 적세인, 맹주, 유설, 그 뒤에 진하 등등이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씩 웃었다. 양굉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맹주와 눈을 마주한 장건은 품을 뒤적거려 뭔가를 꺼내 휙 던졌다. 은빛 그것은 완만히 날아가 맹주의 손에 떨어졌다. 의룡패였다.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맹주와 사람들을 보며 장건이 말했다.
“낮에 받은 건 돌려주겠소. 내 물건이 아니니까.”
이후 맹주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장건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맹주부 앞 대로를 걸어 나갔다. 검은 옷을 차려입은 황군이 정렬한 쪽으로였다. 그들은 다가오는 장건을 보고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유설이 슬쩍 손을 들어 까딱거렸다. 그러자 정렬한 황군은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이 떠나는 장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장건은 그런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멈춤 없이 황군이 만들어준 길을 넘어 떠나갔다.
맹주와 원로원은 그냥 떠나버리는 장건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으로, 대부분의 맹원은 뭐라 말하기 힘든 묘한 감상을 느끼며, 적세인, 남궁천은 이해한다는 듯한 눈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유설만 혼자 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장건은 그렇게 난장판이 된 무림맹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