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장건은 자신을 섬지영이라 소개한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 것 같긴 한데,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 걸 보니 얼굴을 맞대고 만난 적은 없는 사람인 듯했다.
섬지영이 말을 이었다.
“혹시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여긴 조금 소란스럽군요.”
장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기댄 자세 그대로 시큰둥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같은 자리에 앉은 단상운은 눈치를 보고, 용 무사라는 자는 뒤로 물러나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네 사람이 있는 공간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섬지영은 대답도 없는 장건의 시선을 마주 보며 눈을 깜빡거리다가, 곧 그가 왜 그러는지 알겠다는 듯 음-하고 소리를 냈다.
“···용 무사는 오랫동안 내 가문을 섬겨왔어요. 그래서 조금 딱딱한 구석이 있죠. 조금 전 그의 언사에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겠어요. 용 무사?”
“예?”
섬지영은 뒤에 서 있던 용 무사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말없이 눈짓했다. 그러자 용 무사는 움찔거리며 장건과 섬지영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앞으로 한 발 나서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처음 뵙는 분에게 무례한 언사를 보였습니다.”
“수하의 잘못은 주군의 잘못이기도 하죠. 미안해요.”
그 옆에서 섬지영도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직접적으로 욕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조금 과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사과였다. 장건 앞에 앉아있는 단상운은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지 약간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장건은 그런 섬지영과 용 무사라는 자의 태도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용 무사는 억지로 사과하는 듯한 얼굴과 태도였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감정이 없는 듯했고, 그건 옆에 있는 섬지영도 마찬가지였다.
“···더 시선을 끌고 싶은 게 아니라면 허리를 펴시오.”
술병을 든 장건의 말에 용 무사는 얼른 허리를 펴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뒷걸음질 치는 그의 굳은 표정은 정말 자책감과 약간의 화, 자신을 몰라주는 주군에 대한 억울함 등등이 흐리게 묻어나는 복잡한 표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잔을 채우는 장건은 픽 웃어버렸다.
잘못에 비해 과한 사죄는 그 사죄를 받는 쪽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게 놀리는 수준의 과례過禮가 아닌 이상 도리어 잘못한 쪽이 당한 쪽에게 약간의 우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받는 쪽이 그런 과한 사과를 당연하게 여긴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상대방의 인성을 알 방법이 된다.
이것이 고대 세가나 쓰는 고상한 협상법인지, 아니면 이 섬지영이라는 여인이 생각한 것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이라도 일을 맡길 가능성을 높이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장건은 섬지영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냈다. 이제는 꽤 예전이라고 해야 할 어느 날, 어떤 여인을 구해주며 들었던 이름이었다.
“제가齊家의 안주인이 나 같은 떠돌이에게 무슨 볼일인지 모르겠군.”
장건이 잔을 채우며 그렇게 말하자 섬지영이 싱긋 웃었다.
“당신이 그저 떠돌이라면 무림엔 인물이라 부를 자가 없겠군요. 그리고 아직 안주인이라 불리기엔 일러요. 상천 오라버니의 즉위식까진 시간이 남았으니까요.”
장건은 채운 잔을 들어 홀짝 마시며 얼마 전 무림맹의 제운성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예전 가주가 주화입마로 죽고 후계자였던 제상천이 가주에 오른다던가. 그때는 웬 쓸데없는 이야기인가 싶었지만, 사실 그의 가문이 제가였던 만큼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주제였다.
“그래서, 난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으면 될까요?”
섬지영은 웃는 얼굴 그대로 농담하듯 말했다. 잔을 비운 장건이 그런 그녀를 고민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자 엉뚱하게 그 옆에 있던 단상운이 슬쩍 일어섰다.
“음. 장 형, 그럼 난 먼저 들어가 보겠소. 장 형 늦는 건 행수에게 내가 잘 말해두겠소.”
장건과 섬지영 간에 일 이야기가 오갈 듯 보이자 단상운이 먼저 자리를 떠나려 한 것이다. 무슨 일이든 그가 낄 자리가 아니긴 했다. 단상운은 무림맹주의 눈을 피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같이 갑시다. 마실만큼 마신 것 같으니.”
“어? 어어··· 하지만···”
단상운은 슬그머니 섬지영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장건이 떠난다는 말에 두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의뢰가 뭔지 들어보지도 않을 생각인가요?”
장건은 품에서 술값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지금 술이 올라서 일 이야기 하긴 좀 그렇군. 내가 어디 머무는지는 알고 있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장가 상회에 머물고 있소. 정말 뭔가 일을 맡기고 싶다면 내일 중으로 찾아오시오.”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내일 다시 보자는 건 당연히 좋은 예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섬지영은 눈살을 찌푸리기는커녕 도리어 다시 싱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그럼 내일 낮 중으로 다시 찾아가겠어요. 그때 이야기하도록 하죠.”
그녀는 그렇게 인사말을 남기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용 무사라는 자와 함께 떠났다. 장건이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단상운이 입을 열었다.
“그··· 괜히 나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지요?”
“전혀. 난 그냥 이렇게까지 해도 일을 맡기려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오.”
“그 일이라는 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지 않소?”
장건은 단상운을 돌아보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든 외부인이 필요한 일이라는 건 알지. 고대 세가의 높은 자존심도 굽혀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그게 그렇게 되나?”
단상운은 술 때문에 머리가 안 돌아간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장건은 그를 보며 옅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하면 그만이니까. 이제 돌아갑시다.”
이후 주방 쪽에서 무슨 일인가 지켜보던 요리사에게 인사를 건넨 장건은 살살 비틀거리기 시작하는 단상운을 부축해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덧 늦은 오후. 벌써부터 취해서 비틀거리는 두 사람에게 멀리서 불러온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장건은 단상운이 이렇게 비틀거릴 거면서 혼자 돌아가겠다는 말을 참 당당히도 내뱉었구나 싶었다.
해 질 무렵, 오늘따라 일이 일찍 마무리되어 집에 돌아온 장운은 그들이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돌아와 저녁도 거르고 잠들었다는 말에 이마를 감쌌다. 성실하던 단상운마저 장건에게 물드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 *
섬지영은 고개를 들어 상회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장가상회라는 이름이 크고 굳센 필체로 쓰여 있었다. 상회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또 굳건한 기세에 믿음이 가는 글씨였다.
물론 제가에서 수많은 서예가를 만나보았던 그녀는 그게 신사천 누구의 필체인지, 그리고 얼마를 주면 얻을 수 있는 물건인지 모두 알아보았다. 나쁘게 말하면 돈 몇 푼이면 구할 수 있는 물건이고, 좋게 말하면 적절한 곳에 적절한 돈을 썼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상회 입구에 서서 잠시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 뒤에 있던 용 무사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안으로 들어가며 장 무인을 데려오라고 할까요?”
섬지영은 간판을 보던 시선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굳이 더 무례하게 굴 필요 없어요. 장 무인은 이미 어제부터 그 수작을 눈치챈 것 같았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뇨, 용 무사가 죄송할 게 뭐 있겠어요. 시작부터 헛짓거리한 내 잘못이죠.”
그렇게 말한 섬지영은 크게 심호흡 한번을 하더니 성큼성큼 상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른 다가와 자신을 안내하는 점원에게 장건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장 무인이요?”
그녀의 고급스러운 의복에 큰 손님이 왔다고 생각했던 점원은 엉뚱한 소리에 반문했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어··· 누굴 말씀하시는지 알겠네요. 하지만 그분은 상회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닌데··· 일단 행수님한테 여쭤볼 테니까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섬지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점원은 얼른 안쪽 창고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등장한 장운의 모습을 보며 섬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장건의 얼굴을 찾았다. 형제답다고 해야 할지, 둘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장운은 고급스러운 하얀 무복에 삿갓을 쓴 두 사람을 보고는 일을 하느라 걷어 올렸던 팔을 풀어 내리며 물었다.
“그래, 장 무인이면 내 동생 녀석을 찾으시는 모양인데. 무슨 일이시오?”
“···어제 만날 약속을 했어요.”
섬지영의 목소리를 들은 장운은 속으로 반색했다. 이놈이 맨날 어디서 떠돌기만 한 줄 알았는데 드디어 여자를 꾄 모양이었다. 게다가 복색이나 뒤에 있는 무사의 모습으로 보아 꽤 지체 높은 집안의 여인인 듯했다. 장운은 괜히 기뻐서 말했다.
“그러시오? 허허, 이놈 이거 일어나긴 했나 모르겠군. 상팔아, 가서 건이 녀석 일어났는지 물어보아라.”
“예, 행수님. 모시고도 올까요?”
“그···”
모시고 온다는 말에 섬지영이 얼른 끼어들었다.
“아뇨, 장 무인이 어디 있는지 말해주시면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장운은 약간 다급해 보이는 그녀의 말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아마 집에 있을 터인데··· 그럼 상팔아.”
“예, 행수님.”
“넌 먼저 가서 손님 맞을 준비 해놓으라고 해라. 손님들께서는 이리 오셔서 나랑 차라도 한잔하고 계시지요.”
섬지영은 뜬금없이 차를 마시자는 장운의 말에 약간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뇨, 괜히 행수님 시간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 장 무인께 연락을···”
그렇게 손을 내젓고 움직이며 자연스럽게 삿갓 아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 얼굴을 본 장운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당신은···?”
섬지영은 자신을 알아본 듯한 장운의 얼굴에 조금 더 당황했다. 그녀는 장운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장건에 대해 조사하며 장운과 장가 상회, 호남 장가에 대해 대략적인 정보를 알아두었지만, 그래도 장운과 만난 기억은 없었다.
“일찍 오셨군.”
그때 상회의 입구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얼른 고개를 돌려본 섬지영과 사람들은 허리에 칼을 차고, 손에는 삿갓을 든 장건을 볼 수 있었다. 장건은 섬지영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삿갓을 쓰며 말했다.
“여기서 이야기 나누긴 좀 그렇군. 어디 찻집이라도 갑시다.”
이후 장운과 대화를 하던 섬지영은 얼른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장건과 함께 상회를 떠났다. 점원 상팔이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웃으며 행수에게 말했다.
“헤헤, 행수님. 동생분이 드디어 장가를 가시나 봅니다?”
하지만 장운의 얼굴을 돌아본 상팔은 움찔 놀랐다.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운은 그 표정 그대로 못 알아들을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임자 있는 사람을··· 그 큰 가문을··· 이놈이 어쩌려고···”
* * *
장건과 섬지영은 가까운 다원에 전망 좋은 삼층 다실을 빌렸다.
거기서 창가 쪽에 앉은 장건은 중원에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그래서 같은 무게의 금과 비슷한 값이라는 이름도 뭔지 모를 비싼 차를 홀짝였다. 뭔지는 몰라도 비싼 물건이라 그런지 향이 진한 것도 같았다. 물론 그의 돈으로 사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맛있게 먹었다.
“···일을 맡아 주시는 건가요?”
그때 같은 차를 앞에 둔 섬지영이 그렇게 물었다. 장건은 차를 홀짝 한 모금 더 마시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원에 들어와 차를 주문하고, 그 차가 나올 때까지 그녀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은 장건 탓에 약간 조급해진 듯한 얼굴이었다.
장건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맡을 수는 없소. 애초에 칼잡이인 나한테 무슨 일을 맡기겠다는 것인지도 짐작이 안 되고. 설마 누굴 죽여달라는 것이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암살의뢰냐는 말에 섬지영은 깜짝 놀라서 두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무슨 끔찍한 이야기냐는 듯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뭐요? 난 내 명성을 듣고 의뢰할 일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장건은 담담하게 물었다. 하지만 섬지영은 물론이고 그녀 뒤에 시립하고 선 용 무사도 그런 장건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 무인의 명성을 듣고 의뢰할 일이 뭐겠어요? 당연히 어떤 사건의 수사를 부탁드리려는 거예요.”
이번엔 장건의 표정이 조금 멍해졌다.
“···수사? 사건 수사?”
“당연하죠. 예전 이곳 신사천에서 황군 교위의 비리를 밝히고, 이번엔 숨어있던 마궁의 암수를 찾아내고 막았을 뿐만 아니라 저 북쪽에 감산성에서도 무림맹 지부를 대상으로 하던 마궁의 음모를 파헤치지 않았나요?”
장건은 찻잔으로 가져가던 손길을 자기도 모르게 멈췄다. 그게 그렇게 되나 싶었다.
“거기에 그 능력을 발휘해 고원성에선 원주민과 중원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염호성에선 사막으로 도망쳤던 마인을 끝까지 추적해 응징했다고 알고 있어요. 내가 알기로는 아마 무림맹 순찰대에서도 당신만큼 전력이 화려한 인물은 없을 거예요. 그나마 지금의 적세인 대원이나, 아니면 옛날 수사관들은 조금 비교해 볼 수 있겠군요.”
잠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장건은 곧 작은 헛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집었다. 전적만 들어보면 섬지영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마인과 자꾸 얽혔던 장건이기에 그들을 쉬이 알아보며 처리할 수 있었던 것뿐이고, 실제 사건을 수사해 달라고 하면 장건으로서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장건은 반쯤 농담 식으로 되물었다.
“그래, 그럼 굳이 그렇게 전적 화려한 수사관을 찾은 이유는 무엇이오? 어디 왕이나 황족이라도 암살당했나?”
하지만 옅게 웃으며 말하는 장건과는 달리 섬지영은 무섭게 굳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아주 오래전이긴 하지만, 그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면 옛 춘추전국시대의 왕들이 나올 테니까요.”
장건의 입가에서 금세 미소가 사라졌다. 섬지영은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 의뢰하고 싶은 일은 그거예요. 제가의 전대 가주님, 상천 오라버니의 아버지, 제궁월 가주님의 죽음을 조사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