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5)
15화
말을 달리는 것과 경공으로 달리는 것은 비슷한 속도를 내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몇 가지 있는 차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오래 달리면 엉덩이와 허리가 좀 아픈 승마와 달리 전신으로 질주하는 경공은 그냥 온몸이 힘들다는 것이다. 장거리 경공술이 발달 되지 않은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싶을 정도였다. 장건 본인 같아도 말을 타지 이렇게 힘들게 오래달리기를 할 것 같진 않았다.
장건은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조절하며 내력을 순환시켰다. 전신을 휘돌아 피로를 씻어낸 내공이 마지막으로 발끝에서 뿜어지며 그를 멀리 밀어내었다. 그는 마치 낮게 나는 새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그는 잠시 멈춰서 주여랑과 조조의 흔적을 찾았다. 빠르게 말발굽을 찾아 방향을 확인한 그는 다시 달려 나갔다. 태양은 어느새 하늘의 한가운데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조 이 새끼···”
보통 영악한 녀석이 아니라 걱정이 들진 않았다. 아마 다른 곳 어딜 가도 적당히 요령 부리며 잘 살아갈 놈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아직 말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조조는 아직 젊고 건장한 녀석이었고, 앞으로 타려면 10년은 넘게 더 탈 수 있었다. 그렇게 똑똑한 놈 구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녀석을 붙잡으면 어떻게 혼내줄까 고민하며 숲을 달리던 장건이 작은 바위 하나를 밟고 뛰어오른 순간, 뱀처럼 낭창거리는 하얀 빛줄기가 장건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할 법도 한데 장건은 옆 허공을 강하게 걷어차 근육과 내력의 반동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잘못 보면 허공을 딛고 방향을 회전시킨 것처럼 보일 정도의 기예였다. 그를 스쳐 지나간 빛줄기가 그 너머에 있던 소나무에 맞았다. 소나무는 몸체의 거의 절반쯤 갈라지는 깊은 상흔이 생겼다.
허공에서 빙그르르 회전한 장건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바닥에 내려섰다. 빛줄기가 날아들었던 방향을 바라보니 하얀 무복을 입은 남자가 빗나갈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길쭉한 채찍 하나를 들고 있었다.
방금 빛줄기는 채찍이었던 모양이었다. 소나무를 갈라버린 위력과 그것이 노린 위치를 생각할 때 그는 장건을 죽일 생각이었다. 장건은 등 뒤에 멘 칼 손잡이를 잡았다. 경공으로 달아오른 육체가 다시 한번 격렬히 움직일 준비를 했다.
“잠깐!”
그때 주여랑의 목소리가 흰 무복인과 장건의 움직임을 멈췄다.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한숨을 쉬며 흰 무복인과 장건을 번갈아 보다가 장건에게 시선을 맞췄다.
“···어떻게 따라왔어요? 오지 말라고 말도 데려왔는데.”
“내가 달리기가 좀 빨라서.”
주여랑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럼 그동안 말은 왜 타고 다녔어요?”
“달리기가 힘들어서.”
“···그것도 말이 되긴 하네요.”
그때 채찍을 들고 있던 흰 무복인이 입을 열었다.
“이 자가 전서구에 적었던 그 머저리인가?”
주여랑은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에 표정이 조금 굳었다.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단 그냥 그 남자 자체가 불편한 느낌이었다.
“예, 이틀 전 제운성과 충돌할 때 만났고, 그날 밤 제가의 암살자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대가로 황군무공을 주기로 했고?”
“세가나 무림맹에 속한 것으로 보이지 않아서 무공에 욕심을 내리라 판단했습니다.”
“근데 왜 아직 살아있나?”
주여랑은 그 남자의 질문에 장건을 흘끔 훔쳐보았다.
“···제운성의 추적이 생각보다 헐거웠습니다. 첫날 제가의 무사들을 통해 그의 실력을 확인한 이후 아무런 공격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무공이 만만치 않자 저와 함께 처리하기보단 둘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그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면 아직 제 공작이 완전히 발각된 것 같지는-”
“그래서 그냥 떨궈놓고 왔다? 굳이 처리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어서?”
“···예. 말을 끌고 오면 따라오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흰 무복인은 피식 웃었다. 사납게 쭉 째진 눈과 얇은 입술 때문에 그 웃음엔 섬뜩한 면이 있었다.
“너무 무르군, 여랑. 그냥 계속 끌고 왔어야지. 본인 손으로 처리가 안 되면 우리가 도와주면 될 일 아닌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목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그 손에 들린 길쭉한 채찍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주여랑은 다시 한번 장건을 흘끔 바라보았다. 한 손은 바닥을 짚고 다른 손은 칼을 잡은 그대로 낮은 자세를 유지하는 장건이 보였다. 그의 눈은 전처럼 차분할 뿐이었다.
“···저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공작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니 괜찮을 것으로 판단-”
채찍이 다시 꿈틀거려 바닥을 때렸다. 주여랑은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독자적 판단이 지나치군, 여랑. 아무리 현장에서의 빠른 조치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실수했어. 세가로 돌아가면 징계를 주겠네.”
“···예, 알겠습니다.”
그때 장건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바로 서자 흰 무복인이 말을 걸었다.
“아, 이름이 뭐였지? 장곤? 장군?”
“장건.”
흰 무복인은 그 낮고 짧은 대답에 피식 웃었다.
“그래, 칼을 맞대지도 않고 제운성을 쫓아냈다지? 그 친구가 원래 무공이 좀 부족한 친구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단하군. 황군이나 세가의 무공을 배우지도 않았다면서.”
장건은 느릿한 손길로 등에 묶었던 칼을 풀기 시작했다.
“내가 좀 천재라서.”
흰 무복인은 그 대답에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웃었다.
“재밌는 친구군. 이렇게 만난 게 아니라면 세가의 식객으로 초대했을 터인데. 아, 난 연양적이라고 하네. 연가燕家의 무사지. 대충 자네가 무슨 일에 휩싸인 것인지 알겠지?”
연가燕家. 제가와 같은 고대 세가. 장건이 알기로는 신대륙으로 쫓기다시피 옮겨온 제가와 달리 중원에 단단한 뿌리를 두고 있는 세가였다. 그리고 그건 장건이 신대륙과 중원을 걸친 두 세가의 음험한 암투 사이에 엉뚱하게 휘말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건은 풀어낸 칼을 다시 천천히 허리에 매며 주여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중간에 죽을 줄 알았소?”
굳은 표정이었던 주여랑은 그 말과 장건의 눈을 보곤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제운성은 밖에선 잘 모르지만 세가들 사이에서 무공보다는 정보를 모아 상황을 추리하고 답을 찾는 능력이 유명한 자예요. 물론 그 부족한 무공도 보통은 넘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무슨 절세 고수라 생각하긴 힘들었단 말이죠. 길 가다 만난 협객의 실력이 뛰어나 봐야 얼마나 뛰어나겠어요?”
주여랑은 슬쩍 연양적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둘의 대화를 막을 생각이 없는지 자기 턱을 만지작거리며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주여랑은 다시 장건에게 눈을 맞추고 말했다.
“그런데 그 제운성이 그 유명한 추리력으로 뭔가를 알아낸 것인지 처음 이후 공격 자체를 하지 않았죠.”
“당혹스러웠겠군.”
“당연하죠. 당신한테 진짜 줄 황군무공 같은 건 없었던걸요.”
장건은 허리띠를 정리하며 물었다.
“그 제씨 공자 이야기는? 그것도 거짓말?”
“···그게 내 공작이었어요. 그 애송이를 유혹해서 제가의 비밀문서를 훔치고,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함으로써 자진하게 만드는 것. 솔직히 자진은 어려우리라 생각했는데, 애가 생각보다 순진하고 아버지를 두려워해서 잘 되었죠.”
“그럼 그 섬지영이라는 약혼자 말이 맞았던 것이군.”
주여랑은 씁쓸하게 웃었다.
“비슷한 일을 몇 번 했지만, 고작 그 열일곱 살 여자애한테 들킬 줄은 몰랐어요. 감이 좋은 녀석이더군요. 아니면 내가 슬슬 그만둬야 할 때거나.”
장건은 정리한 허리끈을 꽉 묶고 왼손으로 칼집을 잡았다. 그리고 그걸 지켜만 보던 연양적이 입을 열었다.
“지금 여랑이 왜 이걸 다 말하도록 놔두는 줄 아나, 장건?”
“글쎄. 날 죽일 명분을 만드는 것 같군.”
연양적의 미소가 진해졌다.
“잘 아는군. 전서구에선 협객이라길래 웬 병신인가 했는데 머리가 아주 굳어버린 사람은 아닌 모양이야.”
장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칼을 풀고 묶을 때만큼이나 느릿한 동작으로 목에 걸쳐 두었던 삿갓을 머리에 썼다. 그의 얼굴 절반이 가려지며 수염 덥수룩한 턱만 보였다. 연양적은 그 자세가 일 합을 나누기 직전의 그것임을 눈치채고 끌끌거렸다.
“제운성 그 친구를 내쫓았다고 너무 오만방자한 것 아닌가? 감히 황야의 부랑자가 연가의 무사와 무공을 겨눌 생각을 하다니.”
“나에게 다른 방법이 있나.”
연양적은 크게 외쳤다.
“당연히 있지! 바로 우리 하북연가의 무공을 아주 잠시나마 견식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저항 없이 목을 내미는 것!”
“···지랄하네.”
장건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는 왼손의 칼집을 바로잡았다. 놈을 꺾고 주여랑에게 조조를 어디 두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쪽에서 흰 무복을 입은 남자가 하나 더 나타난 것이다.
그는 자기 키 정도 되는 단창을 들고 연양적과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굳이 저항해도 소용없네, 장건. 그냥 어리석은 협객 놀이의 대가다 생각하고 얌전히 가게나.”
앞뒤로 포위되었음을 깨달은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도적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대 세가 무사 둘. 앞뒤 모두 선점당한 상황. 일 합에 승부가 나기도 하는 무공의 세계에서 지금 상황은 사석에 들어선 것과 같았다. 설사 하나를 이길 수 있다 해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오는 다른 하나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위기였다.
“···그렇게 잘나서 합공을 하나?”
“아니, 아니지. 지금 우리가 하는 건 무공을 겨루는 게 아니라 처형이네. 흔적을 따라 올 제운성은 머리가 잘린 자네 시체만 발견하겠지. 그럼 그걸 두고 상황을 추리한다고 머리가 깨져라 굴릴 테니 시간도 더 끌 수 있어.”
연양적은 채찍을 튕겨 바닥을 때리곤 말했다.
“여랑을 안전하게 데려와 준 것은 물론이고 제운성의 발까지 잡아준다니. 가문을 대표해서 감사함을 전달하지. 고맙네, 장건. 수고했어.”
장건은 저 엿 같은 얼굴이 꼭 일그러지게 해주기로 하고 주여랑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는 약간 침울해 보이는 얼굴로 서 있다가 장건의 눈빛에 미안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말까지 훔쳤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안타깝네요.”
“그렇군. 안타깝게 되었소.”
그녀는 장건의 대답에 뭐라 더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그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장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뭉게구름 하나가 슬그머니 태양을 가려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선 숲은 그렇게 해가 가리자 조금 전보다 훨씬 어두워지며 어딘가 서늘한 바람이 돌았다.
잎이 넓은 나무들이었다면 그 가벼운 바람에도 차르르 흔들리며 숲의 소리를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뾰족한 침엽수들은 자신들의 가느다란 잎사귀 사이로 그 바람을 흘리며 미세하게 파들거렸을 뿐, 숨죽인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숨을 죽인 것은 그 자리에 선 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방금까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연양적과 다른 무사는 어느새 무표정이 되어 온 감각을 장건에게 기울이고 있었다. 주여랑마저 복잡한 얼굴로 장건을 바라보는 와중에 정작 장건 본인은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 그대로였다.
그가 입술을 뗐다.
“역시··· 구름으로 환생하는 게 더 좋았을 거야.”
태양을 가리던 구름은 그것을 가릴 때만큼이나 느릿한 속도로 천천히 햇빛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어둑하게 응달이 졌던 숲속에 다시 햇살이 내리쬐려는 순간.
연양적의 흰색 채찍이 처음처럼 한줄기 빛살이 되어 쭉 늘어나 장건의 머리를 노리고 날았다. 동시에 그의 등 뒤에 있던 무사도 땅을 박차고 섬광이 되어 장건의 등을 찔러 갔다. 무사의 속도가 정말 빨라서 채찍이 장건과 만날 순간 동시에 그의 등을 찌를 것 같았다.
그들이 움직임과 동시에 장건도 움직였다. 그는 번개처럼 몸을 회전하며 창을 든 무사에게 삿갓을 벗어 던지고 연양적의 채찍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사는 찌르던 힘 그대로 날아오는 삿갓을 찢어발기려 들었다. 그러나 창끝과 그 삿갓이 만난 순간 느껴지는 어떤 강력한 힘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에 장건은 내공을 담아 칼을 뽑았다. 시퍼렇게 번쩍이는 칼날이 날아온 하얀 채찍의 끝단을 툭툭 잘라버렸다. 하지만 연양적이 손목을 비튼 순간 뱀처럼 꿈틀거린 채찍이 장건의 칼을 휘감았다. 비죽 웃은 연양적은 힘줘서 채찍을 끌어당겼다. 장건이 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티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창이 파고들 것이다.
하지만 연양적은 채찍 손잡이를 통해 파고드는 찌릿함에 깜짝 놀라 내공을 끌어올려 버티느라 순간 굳어버렸다.
동시에 이미 그와 가까워진 장건이 왼손바닥으로 그의 가슴팍을 때렸다.
“컥!”
맞은 곳은 멀쩡한데 퍽 소리가 나며 등 쪽 옷이 터져나갔다.
장건은 그렇게 한 방 때리고 곧장 몸을 빙글 돌리며 칼을 휘둘렀다. 삿갓의 경력을 치워버린 연씨 무사가 심장을 찔러오고 있었다. 장건은 그 창을 걷어낼 생각이었다.
그럴 수 없었다. 너무 빨랐다. 완전히 걷어 밀어내기 전에 파고든 창날이 그의 오른 어깨를 관통했다. 직후 장건의 왼 주먹이 무사의 턱을 후려쳤다. 목이 휙 돌아간 무사는 반 바퀴쯤 빙글 돌며 나가떨어졌다.
그 후에야 뒤늦은 햇살이 슬그머니 장건의 머리를 비췄다.
천천히 밝아지는 숲 한가운데서 장건은 어깨에 창을 꿰고 주먹을 뻗은 그대로 서서 호흡을 고르고 있었고, 목이 돌아간 무사는 움찔거리는 기색도 없었다. 가슴을 얻어맞은 연양적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가 왈칵 피를 토했다.
“···진천권? 아니, 비슷하지만 다르군. 더 거칠어. 더 강하고. 뛰어난 무공이야.”
연양적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장건은 꿰인 창을 뽑고 점혈로 피를 막았다. 그는 팔에 힘을 주려 하면 어깨부터 시작해 오른쪽 상체 전부가 아픈 것을 느끼며 작게 욕지거리를 했다. 연양적은 무릎 꿇은 그대로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마공을 익힌 것 같진 않은데. 굉장하군, 장건.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위야. 사문이 있나?”
“있지. 오직 상상으로만 무공을 만들 수 있던 수많은 선배들.”
“···특이한 사문이군. 하긴 뭐, 상관없나···”
중얼거리던 연양적은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그의 호흡이 그렇게 멈췄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장건은 몸을 돌려 주여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방금까지의 복잡함을 잊고 차분한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의 눈에 그녀가 쥔 중간길이 직도가 보였다. 그는 주여랑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 있는 것이오?”
“아니. 없어.”
주여랑은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땅을 박차고 달려들며 시퍼런 빛줄기 하나를 그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장건을 스치고 지나 칼을 뻗은 자세로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풀썩 주저앉았다.
“···고수는 다르네.”
그녀의 옆구리가 빠르게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녀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뿐이었지만 재밌었어. 아니, 첫 만남부터 하면 사흘일까?”
장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 안에 당신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고 했었지? 나도 예전에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아. 처음 임무를 수행했을 때, 유혹했던 암살 대상을 그날 밤 그대로 죽일 때. 그때 날 보던 눈이 있었어.”
그녀의 옆구리에 축축하게 번진 붉은색은 금세 앉아있는 바지를 적셨다.
“그 눈은 하나가 아니었어. 넷. 네 쌍이었지. 밝게 반짝이는 순수한 눈들. 나의 형제자매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던 아이들··· 난 그때 내 손으로 내 안에서나마 살아있던 그 아이들을 죽인 거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쨍한 태양과 옅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당신 말대로, 그 눈들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았지. 천천히, 아직 되돌릴 수 있다는 듯 천천히 사라져갔어. 하지만 당신과 달리 난 그 눈들을 지키지 않았지.”
그녀와 뒤돌아선 그대로 숲 저편을 바라보던 장건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칼을 휙 털었다. 그리고 칼집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러지 마.”
장건의 손이 멈췄다.
“그 눈들을 마주 본지 너무 오래되었어. 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았어. 그 눈들이 사라지면서 나도 죽은 거야. 이 몸뚱이는 숨을 쉬지만, 난 죽은 지 오래였던 거야.”
주여랑은 얼굴 한가득 내리쬐는 햇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제라도 내 동생들을 만나게 해줘. 미안해, 이런 부탁을 해서. 고마워, 장건.”
장건은 눈을 감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출혈이 좀 있긴 하지만 그의 점혈법이면 그 피를 멈추고 그녀를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생각으로 장기를 피해 공격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햇살을 받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장건은 칼을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마무리를 해줘.”
장건은 그렇게 했다.
그는 짧게 번쩍인 칼을 다시 한번 털어 내고 칼집에 집어넣었다. 쇠와 나무가 만나며 사르륵 건조한 소리를 내다가 탁, 소리를 내며 마무리되었다.
그 후 장건은 잠깐 아무런 말도 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흠.”
그때 누군가 헛기침 소리를 냈다. 장건이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검은 옷을 입고 뒷짐을 진 제운성이 씁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검은 옷을 입은 복면인들이 스르륵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결판이 날 줄은 몰랐군. 본가에 목을 맸던 제상천 공자가 깨어났네. 덕분에 저 여인이 한 짓과 연가의 협잡질을 확인할 수 있었지. 자네가 그저 길 가다 휩쓸린 낭인이라는 것도.”
“그럼 뭐가 달라지나?”
제운성은 장건의 건조한 질문에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원래는··· 저 여인과 접선책을 모조리 잡아낼 생각이었지. 그래서 그저 추적만 했네. 자네가 위기에 처한 순간 도움을 주며 빚을 지울 계획이었네만··· 다 쓸데없는 짓거리가 되었군.”
그때 하늘에서 혈리응이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왔다. 녀석의 발에는 전서구 한 마리가 잡혀 있었다.
제운성은 왼팔을 들어 녀석을 받으며 말했다.
“상처가 심해 보이는군. 괜찮은 약이 있는데.”
장건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대답은 안 하고 휘익 짧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숲 저편에서 자기 고삐를 입에 문 조조가 총총거리며 나타났다.
“이 빌어먹을 자식.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농삿말로 팔아버릴 줄 알아.”
조조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푸르륵거렸다. 장건은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안장에 올라타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아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바로 서서 점검해 보니 몸 안에 독기가 돌고 있었다.
장건의 눈이 연씨 무사의 단창을 향했다.
“연가의 비선조직은 독과 암수를 쓰는데 거리낌이 없지.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네만.”
그러나 장건은 한숨 한번 내쉬더니 고개를 저으며 조조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옅게 웃으며 제운성에게 말했다.
“비파나 잘 살펴봐.”
그리고는 조조의 허리를 차 숲 저편으로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제운성에게 복면인 하나가 물었다.
“···잡을까요? 독에 당했다면 쉬울 겁니다. 아니면 기다렸다가 쓰러지면 잡는 방법도 있고요.”
제운성은 피식 웃었다.
“저 친구가 그냥 죽을 것 같진 않군. 됐고, 비파를 살펴봐라.”
바닥에 굴러다니던 비파 안에는 주여랑이 훔쳐낸 제씨 가문의 비밀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각 세력과의 협의 사항이나 가문 소속원의 비밀, 아니면 그들이 수집한 타 세력의 비밀 등등이었다. 장건은 그것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넘긴 것이다.
제운성은 나무와 나무 사이로 벌써 멀어져 보이지 않는 장건을 찾으며 중얼거렸다.
“···끝내 꺾이는가, 아니면 꺾어내는가. 앞으로 자네 이야기가 궁금해지는군.”
작은 구름들이 태양을 가리며 울긋불긋한 그림자들이 숲 위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