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제가齊家의 가주 제궁월. 제가의 전전대 가주, 그러니까 그의 할아버지가 중원에서의 알력을 이기지 못하고 신대륙으로 밀려난 후, 처음으로 제씨 가문이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성세를 이뤄낸 인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중원에서 제가를 노리고 벌어진 다른 고대 세가들의 견제를 그저 막아내기 급급했다는 평가도 함께 받았다. 또한 가문의 원로들이 옛 영광을 그리며 중원으로 돌아가길 청원해도, 중원보다는 이곳 신대륙에서의 기반을 더 다져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교수공자絞首公子 제상천의 아버지였다.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싶군. 그런 큰일은 나 같은 일개 칼잡이가 아니라 무림맹으로 가져가는 게 맞을 텐데.”
장건은 집었던 찻잔을 내려놓고 품을 뒤적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무림맹의 너저분한 개판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다른 소용돌이가 그를 끌어들이려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연초 생각이 났다.
하지만 곧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종이를 꺼내던 그의 손이 멈췄다. 그걸 본 섬지영이 눈치 좋게 말했다.
“피워도 좋아요. 용 무사?”
섬지영 뒤에 시립하고 서 있던 용 무사는 그녀의 부름에 앞으로 나서며 뭔가 꺼냈다. 그건 네모나고 납작한 은색의 상자였다. 용 무사가 달칵 소리와 함께 그걸 열자 그 안에 잘 말린 연초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용 무사는 장건에게 한 개비 가져가라는 듯 그걸 내밀었고, 장건은 약간 어색함을 느끼며 하나를 집어 입에 물었다. 이어서 용 무사가 품에서 조그만 화섭통까지 꺼내자 장건이 손을 저었다.
“불은 내가 붙이겠소.”
단상운이 새로 선물해준 화섭통이 있었다. 장건은 그렇게 연초에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훤한 창가로 흘러나가는 연기 너머에 꼿꼿하면서도 차분한 태도로 앉아있는 섬지영이 보였다.
그녀는 장건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때서야 말을 이었다.
“왜 무림맹으로 가지 않았냐고 물었나요? 최근 그들의 상황을 잘 아실 텐데요. 신사천 한복판에서, 그리고 무림맹 내부에서 마인들이 날뛰었죠. 그 와중에 하와이로 물러났던 황군이 돌아왔고요. 무림맹은 지금 본인들의 내부를 단속하는 일에도 버거워하고 있어요.”
그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는 했지만, 어떤 명확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의혹뿐이죠.”
“의혹?”
장건의 반문에 섬지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궁월 가주님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웠어요, 너무··· 그리고 주화입마라는 말 또한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죠. 제궁월 가주님은 제가 역사 근 백 년 사이에 가장 뛰어난 고수였으니까요. 설사 정말 주화입마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급사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거였죠.”
가주의 갑작스러운 죽음. 게다가 그 죽음엔 의혹이 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음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멋대로 떠들기 시작할 터였다. 장건은 제가 안에서 무슨 말이 떠돌았는지 알 것 같았다.
“소가주가 의심받았소?”
차분히 장건을 마주 보던 섬지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가주님과 원로들의 많은 기대를 받고 자랐어요. 어릴 땐 어떻게든 그 기대에 응답하려 뼈를 깎는 노력을 보였죠. 하지만 가주님과 어르신들에겐 그걸로는 모자랐나 봐요. 생전 가주님은 오라버니를 너무 다그치기만 하셨죠··· 누군가는 앞에서만 그렇게 다그칠 뿐, 정말 오라버니를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말하기도 했어요.”
그녀는 두 눈을 꾹 감으며 말했다.
“···하지만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결국 흐려지고, 지워질 뿐이에요. 말하지 않고 그저 알아주길 바라는 건 어리석어요··· 그러나 가주님은 그러지 못하셨고, 결국 두 사람 사이는 어긋나게 되었죠. 아버지는 아들을 믿지 못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하는··· 연가燕家의 첩자가 오라버니를 유혹하고 세가의 정보를 훔쳐 갔을 때 두 사람 사이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죠.”
이건 장건도 조금 아는 이야기였다. 그 첩자와 만나고, 직접 그녀의 삶을 끝내준 것이 그였으니까.
문득 그때 기억이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튕기던 비파소리와 함께 조조를 타고 달리던 며칠간 보았던 평원과 산, 숲과 나무, 흔들거리던 모닥불과 세상사에 초탈하여 머리 위 높은 곳을 흐르던 구름까지.
그 기억 섞인 연기는 장건의 얼굴을 부드럽게 훑어주고는 창밖으로 빠져나가 연한 하늘 너머로 흐리게 녹아들었다.
“가문 내에 그 시절을 구실 삼아 오라버니께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자들이 있어요. 그들은 가주님이 오라버니를 소가주 자리에서 쫓아내려 했고, 그걸 알게 된 오라버니가 가주님을 해친 게 아니냐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건 최근 두 사람을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섬지영은 두 눈을 감고 떨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사람은 이제야 서로의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고, 나아지고 있었어요··· 가주님은 지금까지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이야기하고, 오라버니도 자신이 받았던 부담감을 털어놓으며 훨씬 좋아지고 있었다고요··· 나는··· 나는 두 사람이 그렇게 괜찮아지는 줄만 알았는데···”
“그런데 가주가 죽어버렸다는 거군.”
장건이 말끝을 마무리하자 섬지영은 고개를 들고 눈을 떠 그를 마주 보았다. 그 눈가에는 옅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
“···난 오라버니가 가주님을 해쳤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가주님의 죽음에는 분명히 의아한 점이 있음에도, 장례식과 즉위식으로 바쁜 오라버니는 물론이고 가문의 어르신들 모두 처음 주화입마라는 사인死因이 나온 이후엔 그걸 파헤치려 하지 않고 있어요. 아마 세간의 눈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거겠죠. 그래서 내가 나선 거예요.”
말을 이어갈수록 그녀 눈가의 물기는 사라졌다. 그녀는 크고 또렷한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가주님이 주화입마로 돌아가신 건지, 만약 아니라면 도대체 거기 무슨 음모가 있었던 것인지, 왜 가주님이 돌아가셔야 했는지 파헤쳐 주세요. 그게 내가 할 의뢰에요.”
입에 연초를 물고 가만히 섬지영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던 장건은 그녀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섬지영이 그런 침묵에 초조함을 느낀 것인지 입술을 깨물 때쯤, 장건의 입이 열렸다.
“들어보니 가문의 중추에선 이 일을 굳이 파헤치길 바라지 않는 모양이고, 그러면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저항에 부딪히리란 것과 함께 결국 칼부림이 날 상황까지 올 수 있다는 말인데··· 의뢰라면 보수를 생각하셨겠지. 뭘 얼마나 줄 생각이오?”
“개인적으론 금 다섯 관, 그리고 진실이 밝혀졌을 땐 가문에서도 큰 보상이 있을 거예요. 또한 원한다면 장가 상회와 가문의 거래를 주선할 수도 있어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보수에 대해 털어놓았다. 장건은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지금 금값이 어떤지는 몰라도 금 다섯 관이면 신사천 한가운데 커다란 장원을 구매할 만한 돈이었다. 그런 돈을 개인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사기 치지 말라고 다그쳐야 하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많은 돈이군···”
하지만 장건에겐 별 의미가 없는 금액이기도 했다. 본래 떠돌이인 그에겐 황금이 몇 관이건 큰 상관이 없었다. 물론 돈이 많아서 나쁠 건 없었다. 장건도 싸구려 백주를 마시고 좁은 방에서 자는 것보다는 중원산 죽엽청을 마시며 넓은 방을 뒹구는 게 더 좋았다. 하지만 그건 굳이 고대 세가와 얽히지 않고도 충분히 부릴 수 있는 사치였다.
장건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제상천 소가주가 가주를 해쳤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고 했지. 또한 그와 가문의 어른들도 굳이 이 일을 헤집길 바라는 것 같지 않다고 했고. 그럼 왜 이러는 것이오?”
“···굳이 내가 나서서 일을 벌이는 이유가 궁금하다는 거죠? 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가문의 일부에서는 상천 오라버니를 의심하고 있어요. 곧 가주가 될 오라버니에겐 치명적일 수도 있는 추문이죠. 아마 그들도 정말 오라버니가 가주님을 해쳤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그저 오라버니에게 평소 불만을 품고 있다가 이 일을 구실로 삼았을 뿐이겠죠··· 난 그들이 가문의 표면으로 올라오는 걸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어요. 그러려면 진실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겠죠.”
“진실이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들어보니 가문 어른들의 힘이 강한 모양인데, 내가 수사를 시작하면 당신은 그들 눈 밖에 날 수도 있소. 설사 이후 소가주의 결백이 밝혀져도 이미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오. 결국 가문의 신뢰는 신뢰대로 잃고, 나한테 재산도 뜯기고, 소가주는 별로 고마워하지 않을 수도 있소.”
조금은 냉소적인 장건의 말에 섬지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초조함이나 슬픔, 불안 등을 모두 잊은 단단한 눈빛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상관없어요. 상천 오라버니를 사랑하니까요.”
연초를 붙잡던 장건의 손이 멈칫했다.
“만에 하나라도 가문의 여론이 상천 오라버니를 의심하는 쪽으로 바뀌면, 최악의 경우 오라버니는 가문 내부에 유폐되거나 가장 깊숙한 뇌옥 밑에 갇힐 수 있어요. 진실과는 상관 없이요.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할 수 있는데 내가 가진 재산이나 평판이 무슨 문제죠?”
장건은 그제야 섬지영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보게 되었다. 어제의 만남과 꼿꼿한 태도 때문에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제 갓 스물은 되었을까 싶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표면에 씌워진 고대 세가의 차분함과 절제 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의 심장도 불태울 수 있는 청춘이 있었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던 장건은 연초를 깊게 빨아들였다. 거의 다 탄 연초가 얼마 남지 않은 몸통을 태우며 벌건빛이 반짝였다.
장건은 입에 연초를 문 채 말했다.
“황금 다섯 관이라 했소?”
“예? 아, 예. 더 필요하다면 상행 조합의 전표를 준비해서···”
“절반은 선금으로 받겠소.”
섬지영은 잠시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좋아요. 그럼 내일 중으로 선금을 보내겠어요.”
“그리고 내가 제가 내부에 걸림 없이 오갈 수 있도록 해주시오.”
“그건 어렵지 않아요. 지금 제가에는 즉위식을 준비하며 수많은 손님이 들어와 있거든요. 어제는 축문을 부탁하려 중원에서 모신 승려분도 도착했죠. 그 외에도 신대륙이나 중원에서 제가와 연이 있는 손님이 많아요. 내가 초대장을 보내면 장 무인도 그중 하나가 되어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그 초대장은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소?”
섬지영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장건 앞에 내려놓았다.
“이미 준비되어 있죠.”
장건은 픽 웃으며 서찰을 집어 들었다. 제씨 가문에 어울리는 고급 용지에 멋들어진 글씨로 장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열어보지 않아도 그 안에 온갖 미사여구와 그를 가문으로 초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일 용 무사가 선금을 전달하는 동시에 장 무인을 안내할 거예요. 그래도 되겠죠?”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생각났는데, 상회를 나서며 보았던 장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새삼 섬지영의 얼굴을 살펴보며 그가 무슨 오해를 했을지 짐작이 갔다. 엉뚱한 오해는 얼른 풀어야 했다. 괜히 염 부인 귀에 들어가면 장건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내일 다시 봅시다.”
장건은 그렇게 말하며 다실 문을 잡았다. 그때 섬지영이 장건을 불렀다.
“장 무인.”
그가 돌아보자 섬지영이 말했다.
“일을 맡아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난 막막했거든요.”
“···고맙다는 말은 일이 다 끝난 후에 하시오. 아직 사건의 전모는 모르는 거니까.”
장건은 그렇게 말하며 다실을 나섰다.
이것이 또 다른 도시의 소용돌이인지, 아니면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소녀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장건은 다원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어쩐지 기우보다는 소용돌이 쪽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예감을 느꼈다.
계단을 내려와 다원의 환한 문을 나선 장건은 다 피운 연초를 툭 떨어뜨리고 발로 비벼껐다. 그리고 장운 부부에게 뭐라 설명해야 걱정을 안 들을까 생각하며 뚜벅뚜벅 상회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금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틈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