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 * *
“정말··· 그런 관계 아니라는 게지?”
“아닙니다.”
장운은 팔짱을 끼고 미심쩍다는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날 섬지영의 방문을 받았던 장운은 그날 밤엔 아무 말 없이 넘어가더니, 정작 다음날이 되자 상회에 출근도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장건을 불러 독대했다. 그리고는 그녀와 장건이 무슨 관계냐 캐물은 것이다.
장건은 당연히 이상한 관계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저 신사천에 있는 명성 높은 무인을 초대했을 뿐이라···”
하지만 팔짱을 끼고 두 눈을 좁힌 장운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장건이 초대장을 꺼내 보여줬음에도 그랬다.
“···그래도 그게 소가주의 약혼녀가 직접 찾아올 만큼, 그것도 호위무사 한 명만 대동하고 찾아올 일인가? 물론, 건아. 요즘 신사천에서 네 이름이 들썩이고 있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단호한 대답을 들으며 장운의 얼굴에서 의심이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 뒤에 남은 건 불안감이었다.
“으음··· 그래서, 그 즉위식에 가려고?”
“네. 좋은 밥에 선물도 준다는데 가야지요.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거기 쌀을 축내는 게 나을 테니까요.”
장건은 장운에게 의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직 모르는 와중에 괜히 장운 부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며칠간 빈둥거렸던 것을 핑계 댔다.
“괜찮겠느냐? 중원에 있을 때도 그런 행사는 좋아하지 않았으면서. 내가 놀리던 것 때문이라면 그냥 계속 집에서 지내도 괜찮다. 그건 그냥 네가 상회 일을 했으면 해서 골려본 것뿐이야. 그러니 괜히 가서 사고 치지 말고 네 형수가 차려주는 밥 먹는 게 어떻겠느냐? 또 즉위식까지도 아직 많이 남았다며?”
며칠 동안 빈둥거리는 모습에 핀잔을 줬으면서, 정작 진짜 나간다는 말을 듣고선 장건을 붙잡는 장운이었다. 장건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서 밥만 며칠 얻어먹고 오겠습니다. 초대장까지 받았는데 안 가면 그쪽에서 불쾌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에서 싫어할 수도 있다는 말에 장운의 고개를 끄덕여졌다.
“확실히··· 고대 세가들은 쓸데없이 자존심이 세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서 주는 밥이나 잘 먹고 선물이나 챙겨서 오겠습니다.”
장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는 말에 장운도 어쩔 수 없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어디서 뭘 하든지 결국 그건 네 일이긴 하지. 그래도 즉위식이 끝나면 꼭 집으로 와야 한다. 중원에서처럼 제대로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면 안 돼. 알겠느냐?”
“떠나더라도 형수님 얼굴은 보고 갈 거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럼 나도 이제 상회에 나가봐야겠구나.”
장운은 장건을 따라 일어섰다. 괜한 걱정에 오전 일과가 늦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둘이 함께 방을 나설 즈음, 마당에서 상회 점원 상팔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행수님, 손님 오셨어요.”
마당으로 나와보니 점원 상팔과 함께 작지만 묵직해 보이는 상자를 들고 있는 용 무사가 보였다. 용 무사는 장건과 장운을 보며 말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장운은 거기에 화답하면서 중얼거렸다.
“···초대장에 마중까지?”
그는 새삼스럽다는 듯 동생을 바라보았다. 고대 세가의 사람에게 이 정도 대접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건은 그 눈길을 받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앞으로 나선 장건은 용 무사가 들고 있는 상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요?”
“예. 딱 절반입니다.”
“좋소. 잠깐 기다리시오.”
장건은 그 상자를 받아 방으로 돌아갔다. 사실 이 돈을 어디에 쓸지는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정보가 부족한 만큼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선금을 받은 것에 불과했다. 나머지 절반을 받지 못하더라도 이 정도 묵직한 황금이면 그럭저럭 수입은 될 것이다.
그런 가벼운 생각과는 다르게 그의 손은 상자를 탁자 한쪽에 곱게 모셨다. 재물에 크게 연연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구 내팽개칠 필요까진 없었다. 이후 그는 겉옷과 청룡, 삿갓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마당 밖으로 나오니 제가에서 온 마차가 있었다. 아무래도 조조는 아직 며칠 더 상회 마구간 신세를 져야 할 모양이었다.
장건은 마차 문을 열고 타며 따라 나온 장운에게 말했다.
“아이들한테는 잘 말해주십시오. 금방 돌아온다고.”
장운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 용 무사도 마차에 올라타자 기다리고 있던 마부가 고삐를 쳤다. 천천히 멀어지는 마차의 모습에 장운은 잠시 거기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동생이 떠나기 전 뭔가 받아든 것을 보고는 괜한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닌가 걱정을 하다가, 곧 장건의 실력이면 크게 다칠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마음을 편하게 먹은 장운은 뒷짐을 지고 상회로 걸어가며 말했다.
“상팔아, 얼른 가자. 오늘도 할 일이 많다.”
“예에, 행수님.”
* * *
마차는 덜그럭덜그럭 가볍게 흔들리며 신사천의 거리를 가로질렀다. 장건이 마차 한자리에 앉아 청룡을 끌어안고 그 흔들거림에 적응하자니, 앞에 마주 앉은 용 무사가 흘끗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장건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 있소?”
용 무사는 예고 없던 장건의 질문에 움찔 놀랐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 지난번 무례는 죄송했습니다.”
“그건 이미 사과했잖소. 괜히 어색해서 했던 사과를 또 할 필요는 없소.”
“큼, 크흠. 죄송합니다···”
장건은 옅게 웃으며 창가를 바라보던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어제 방 안에 함께 있었던 것도 그렇고, 홀로 호위를 하던 것도 그렇고. 섬 소저의 신뢰를 받는 모양이오.”
“···그건 제가 아가씨를 오래 모셨기 때문도 있습니다. 그분이 아홉 살 생일 때부터 모셨으니 벌써 십 년째 되어가는군요.”
“제씨 가문의 무사가 아닌 모양이군.”
용 무사는 마차 바닥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슬쩍 장건과 눈을 마주쳤다.
“···네. 저는 제가가 아니라 아가씨 가문의 무사입니다. 어릴 적 신사천의 뒷골목을 떠돌던 꼬마 거지를 가주님과 아가씨가 거둬 사람 노릇을 하게 만들어 주셨지요. 그 보답을 하려 열심히 노력하는 중입니다.”
지난번 객잔에서 강압적으로 굴던 모습과는 다르게 오늘의 용 무사는 겸손하고 친절해 보였다. 그리고 장건은 그때와는 다르게 말과 태도에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쪽이 그의 본모습인 듯했다.
그런 모습을 재밌다고 생각하던 장건은 불쑥 물었다.
“당신도 제궁월 가주의 죽음에 의문이 있다고 여기시오?”
“···그건 제가 함부로 이야기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장 무인을 고용한 이유는 가문의 일부가 제 가주의 죽음에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부디 그런 의문이 모두 밝혀지길 바랄 뿐입니다.”
그는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 물론 그를 마주 보고 대답을 듣는 장건 귀에는 충분히 긍정으로 들렸다. 용 무사도 그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여기는 사람 중 하나임은 분명해 보였다. 또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길 꺼리는 모습으로 보아서, 꽤 제가의 꽤 많은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제궁월은 죽었고, 차기 가주는 제상천이었으니 그 의문을 쉽게 내뱉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저도 질문이 있습니다만···”
그때 용 무사가 먼저 다시 말을 꺼냈다. 장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질문이 이어졌다.
“듣기로 무림맹의 위기를 해결하고도 특별한 지위나 대가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혹 무림맹에게 뭔가 좋지 않은 감정이 있으십니까?”
장건의 옅은 웃음이 쓴웃음으로 변했다. 확실히 유명해지기 시작하긴 한 모양이었다. 뭔가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지난번에 뒤도 안 돌아보고 무림맹을 떠난 건 좋지 않은 감정 때문이 맞긴 했다.
장건이 말했다.
“난 어디 소속되고 싶지 않소. 무림맹에 들어 지위와 명성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럼 결국 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소. 그저 지금처럼 이 땅을 여행하는 것이 좋을 뿐이오.”
“···입신양명을 위해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니시란 말입니까?”
“당신은 아까 자신을 거둬준 가주와 섬 소저에게 은혜를 갚고자 노력하고 있다 했소. 그리고 지금은 칼을 들고 그 은혜를 갚고 있지. 그렇다면 당신도 입신양명을 위해 무공을 익힌 건 아니군. 중원과 다르게 이 땅엔 그런 사람 생각보다 꽤 많소.”
용 무사는 생각이 깊어지는 듯 다시 마차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장건도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려 스쳐 지나가는 신사천 거리를 바라보았다.
사람과 마차, 인력거 등이 내달리던 거리는 어느새 한산해졌다. 복잡한 시내에서 신사천의 외곽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장건은 거리의 모습이 조금 익숙함을 떠올리고 지난날 이쪽을 와 봤다는 걸 깨달았다. 맹호교위에게 딸을 납치당했던 상인이 사는 부촌이었다.
하지만 마차는 그 부촌도 조용히 지나쳐나갔다. 한참을 더 달리던 마차는 마침내 좌우로 긴 담장을 가진 대문 앞에 도착했다. 그 주변에는 다른 조용한 곳과는 다르게 마차도 많이 오가고, 사람들도 잔뜩 드나들고 있었다. 조그만 시장을 떠올리게 하는 정문 위에는 제齊라는 글자 하나가 쓰인 오래된 간판이 있었다.
마차가 멈추자 용 무사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장건이 그 뒤를 따르니 복작거리는 정문과 그 주변이 보였다.
“즉위식 때문에 손님은 물론이고 많은 상인과 업자가 드나들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시끌시끌하지요.”
그는 품에서 동패 하나를 꺼내 입구에서 사람들을 정리하던 무사에게 보여주었다. 무사는 동패와 용 무사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웬일로 혼자 나갔다 오십니까?”
“혼자가 아니오. 손님이 계시지.”
무사는 용 무사 뒤에 있던 장건을 확인하고는 냉큼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실례지만 초대장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장건이 섬지영에게 받았던 초대장을 내밀자 그걸 확인한 무사는 흠칫 놀라며 장건을 바라보았다.
“창룡도···”
장건은 마차에서 지었던 쓴웃음을 다시 지었다. 지난번엔 참마협객이더니 이번엔 창룡도였다. 갑자기 유명해져서 여러 이름이 떠도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문지기의 초롱초롱한 시선을 받으며 정문을 지난 장건은 용 무사의 안내에 따라 제씨 세가에 들어섰다. 사람이 복작거리는 입구와는 다르게 정문을 넘어서자 공간이 확 넓어졌다. 장건은 잠시 그곳에 서서 잘 깔린 판석과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크고 웅장하기로만 치면 무림맹의 전각과 탑들이 훨씬 크고 많았다. 하지만 제가에는 고대 세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묘한 고상함과 오래된 멋이 있었다. 분명 건물의 기둥들과 기와, 벽이 지어진 지는 백 년도 되지 않았을 텐데, 거기엔 단순히 시간만 오래 지났다고 해서 가질 수 없는 풍취와 향이 있었다. 그건 어쩌면 건물보다 오래된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머물고 가꾸면서 생긴 손때일지 몰랐다.
용 무사는 장건이 안을 둘러볼 수 있도록 잠시 기다리다가 말을 꺼냈다.
“멋지지요? 저도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습니다. 가끔은 평생 익숙해질 수 없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천년을 이어온 핏줄에게만 안락한 요람일지도 모르지요. 가시죠.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장건은 다시 앞장서는 용 무사의 뒤를 따라 천천히 제가의 장원을 거닐었다. 용 무사는 정문을 넘은 순간부터 어딘가 더 차분하고 꼿꼿한 태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제가의 가풍인 모양이었다.
용 무사의 뒤를 따라 걸으며 몇몇 사람들을 마주쳤는데, 하인이나 하녀로 보이는 이들은 모두 바닥을 보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그나마 무사로 보이는 이들은 용 무사와 같이 꼿꼿한 자세와 착 가라앉은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입구와는 딴판이군.”
“이것도 꽤 소란스러워진 겁니다. 전 때때로 장원 안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면 그곳에 저를 제외한 아무도 없는 듯한 순간에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장건은 살짝 머리가 아파지는 걸 느꼈다. 이런 장소에서 탐문이라도 이어가면 당장에 그의 움직임이 제가 전체에 퍼질 터였다. 섬지영의 장담과는 다르게 움직임에 제약이 많을 듯했다.
“여기가 세가의 중요한 손님들이 머무는 비락원悲樂院입니다. 이미 몇몇 손님이 계시니 조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용 무사가 안내해준 이 층 전각은 다른 건물과 비교해 그나마 새로운 건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덕분에 장원의 다른 건물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때문에 제씨 세가에 어울리지 못하는 손님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객실은 비어있는 방 중 아무 방이나 쓰시면 됩니다. 그럼 아까 보셨던 그 유령 같은 하인들이 알아서 정리해줄 겁니다.”
“섬 소저와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
문을 열고 안까지 안내해준 용 무사는 장건이 전각 안을 둘러보며 지나가듯 한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오늘은 조금 힘들고, 내일 중으로 제가 찾아와 안내하겠습니다. 일단 오늘은 편히 쉬십시오.”
장건은 피식 웃었다. 며칠째 쉬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이만.”
허리를 숙여 인사한 용 무사는 그렇게 비락원을 떠났다. 잠시 그가 떠난 문을 바라보던 장건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 인기척이 있었다. 용 무사가 말한 먼저온 손님들일 터였다.
“흠.”
장건은 어느 빈방을 써야 할까 생각하며 이 층으로 올라가려 했는데, 그가 계단을 거의 다 오를 때쯤 이 층의 누군가가 덜컥 문을 열고 나왔다.
“···”
서로를 마주 본 그와 장건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멍하니 바라보길 잠시. 반짝이는 대머리를 가진 그는 곧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라. 꼭 만났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오늘 이렇게, 이런 장소에서 만날 줄은 몰랐소이다, 장 무사.”
“···나도 마찬가지요, 진견 스님.”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진견이 열고 나온 방 안에서 도도도하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렸다. 걸음소리는 진견의 등 뒤로 이어졌고, 곧 그의 몸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얼굴이 있었다.
푸른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장건을 바라보는 소녀의 이름은 진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