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52)
152화
장건은 오랜만에 마주한 그 눈동자를 보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 성큼 걸어서 이 층으로 올라온 장건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진서하와 눈높이를 맞췄다.
“오랜만이야.”
진견 등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진서하는, 장건의 인사를 듣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곧 오도카니 멈춰 서서 입술을 오물오물하며 말하기를 망설였다. 장건은 굳이 재촉하지 않고 옅게 웃으며 가만히 아이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말하기를 망설이던 진서하는 흘끗 등 뒤에 진견을 한 번 돌아보았다. 진견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자 다시 그 똘망한 눈으로 장건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작게 말했다.
“···안녕.”
장건은 그 말을 듣고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걸 본 진서하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와락 그 품에 달려들었다. 장건은 두 팔로 목을 꼭 끌어안는 아이를 마주 꾹 안아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에게선 뭔가 달곰한 향이 났다. 장건은 그 향기에서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음. 좀 컸나?”
예전의 기억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크긴 했다. 매미처럼 매달린 서하를 팔로 받쳐보니 새삼 아이들이 빨리 자란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허허, 그래도 아직 한참 커야지요. 또래 속가제자 중에선 키가 작은 편이외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진견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장건은 서하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며 말했다.
“만나니 정말 반갑소. 근데 여긴 어쩐 일이오?”
“사실 소승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소만··· 말이 길어질 듯하니 어디 앉아서 이야기하시겠소?”
진견은 그렇게 말하며 그와 서하가 열고 나왔던 문을 다시 열어 장건에게 손짓했다. 장건은 매달린 서하를 그대로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크고 깔끔한 방이었다. 침대와 탁자, 의자 등등이 있었다.
장건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서하가 떨어지려 하질 않아서, 그는 그냥 아이를 안아 든 채 자리에 앉았다. 진견은 그런 서하를 보며 그저 허허 웃기만 했다.
“장 무사를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기쁜 모양이오. 중원에 있는 동안에는 투정 한 번 부리지 않던 아이인데··· 하긴, 머리 빡빡 민 땡중들이 가득하니 그럴 만도 하지···”
장건은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서하를 가볍게 추스르며 물었다.
“그래서, 그 먼바다를 그냥 관광이나 하려고 건너진 않았을 거고. 제가에는 무슨 일로 머무는 것이오?”
“나무아미타불, 바로 본론이시구려. 짧게 말하자면 제궁월 가주의 장례와 제상천 소가주의 즉위식 때문이오.”
“장례와 즉위식?”
지금 보니 진견의 옷은 예전에 보았던 활동 편한 무복이 아니라 치렁치렁한 장삼에 붉은 가사까지 걸친 완전한 승려의 복장이었다. 진견은 오른손으로 반장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궁월 가주는 우리 소림사에 매년 많은 금액을 시주해주시던 분이오. 제가와 본 사찰 사이에는 드넓은 바다가 있건만, 그저 가문의 평안을 위해 적잖은 공을 들이시던 분이었지요. 그래서 제상천 소가주가 이번 장례를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외면할 수 없었소이다.”
“장례 주관을 위해 오셨다는 말이군.”
진견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가주는 장례보다는 조만간 있을 즉위식에 쓰일 축문 때문에 연락을 한 듯하지만··· 그래도 본 사찰에 오랫동안 시주를 해준 분이 가시는 길인데 글 몇 자 적고 외는 게 무엇이 어렵겠소? 그렇다고 수련 중인 승려들이 산사를 내려올 수는 없어서, 또 내가 오게 된 것이지요.”
“그럼 이 녀석은?”
진서하는 장건의 옷에 고개를 파묻고도 그 녀석이라는 말이 자신을 가리키는 걸 잘 아는지, 손을 꼼지락거리며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하지만 가볍게 등을 두드려주자 그 움직임은 사그라졌다.
진견은 다시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당연히 나 혼자 올 생각이었소. 바다를 건너는 배편은 아이가 견디기엔 많이 힘든 여행이니까. 그리고 이제 다른 속가 아이들과 조금 친해지는 듯 보이는데 또 몇 달을 떨어지게 되면 앞으로 산사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하진 않을까 싶었소이다. 하지만··· 뭐···”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이가 그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하길 장 무사가 바다를 건너 소림사를 찾아올 리는 없잖으냐고 하더이다. 이왕 기회가 생겼을 때 가서 만나야 하지 않겠냐고도 했지. 생각해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라 뭐라 변명도 못 하고 있으니, 방장께서 그냥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오라 하셨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저 그렇게 쉬이 사그라지는 게 아니라 하시며···”
진견은 그렇게 말하며 옅은 미소를 띠고 서하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깊게 가라앉은 눈은 조금 다른 기억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장건에게 말했다.
“그런데 신사천 부두에 내리고 나서야 떠올랐는데, 장 무사는 이곳저곳 정처 없이 떠도는 무림인이었지 뭐요? 하마터면 제가의 일을 마무리하고도 장 무사를 찾아 한참을 이 땅에서 떠돌아다닐 뻔했소이다, 허허허. 하지만 또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니 정말 부처님의 안배가 아닐 수 없소.”
“그렇군.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소.”
장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만 진견은 장건의 형제가 신사천에 상회를 차린 걸 몰랐다. 그러니 진견과 진서하는 정말 장건을 만나겠다고 신대륙의 황야와 산맥을 헤집으며 장건을 찾아다녔을지 몰랐다.
죽은 제궁월 가주가 하필 소림사에 시주를 하던 것, 제상천이 그런 소림사에 장례와 축문을 부탁한 것, 섬지영이 장건에게 의뢰를 맡겼던 것, 그리고 장건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까지, 어느 하나 빠졌다면 이런 재회는 없었을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장 무사가 어찌 여기 있는지도 좀 들어봅시다. 혹 제가의 무사였던 것이오?”
진견의 질문에 장건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일단은 손님으로 왔소. 어쩌다 보니 최근 지금 신사천에서 이름 좀 날리게 된 터라.”
농담하듯 가벼운 말투에 진견이 다시 웃었다. 본인 입으로 제가에 초대받을 정도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눈살을 찌푸릴만한 이야기였으나 진견은 장건이 그럴만한 무인이라 생각했다. 그는 오히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진견은 곧 장건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일단은··· ‘일단은’이라. 뭔가 다른 내용이 있소?”
잠시 생각하던 장건은 서하의 등을 두드리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전음으로 말했다.
[제궁월 가주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시오?]순간 흠칫하던 진견은 곧 조용히 염불을 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주화입마라는 말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이 있소. 혹시 거기에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그걸 확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소.]진견은 웃음기를 지우고 두 눈을 꾹 감았다.
“나무아미타불··· 세상사의 고통은 참 다양하고, 사람마다 그 모양을 달리하는 것 같소. 혹 그게 사실이라면 제씨 가문의 사람들에겐 지아비를 잃은 사건에 이어 또 다른 고통이 되겠구려···”
“그래도 이들은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오. 천년을 이어오면서 비슷한 일 하나 없었겠소?”
장건의 말에 진견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도 맞는 말이오. 오랜 경험이 있으니 나름의 지혜로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겠지.”
그렇게 서로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잠시지만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대화와 대화 사이에 어째선지 잠시 조용해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때 장건의 왼 어깨와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던 진서하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 배고파요.”
작은 소리였지만 그걸 들은 진견이 반색했다.
“마침 요기 할 시간이 된 듯하군. 같이 식사하시겠소?”
장건은 파란 눈만 치켜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하를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럽시다. 이왕 왔으니 명문가의 밥을 얻어먹어 봐야지.”
* * *
다행히 밥 먹을 때가 되자 서하는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예의 그 조용한 하인들이 차려준 식사에 서하는 식탁에 앉아 오물오물 잘도 밥을 먹었다. 장건이 본인 밥그릇은 내려두고 그걸 가만 바라보고 있자니 진견이 말을 꺼냈다.
“아, 혹 설묘금 시주와 진하 시주 소식이 궁금하지는 않소?”
장건은 잠시 설묘금이 누구였나 고민했다. 하지만 곧 그게 유설 공주의 가명이었음을 떠올리고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견은 그것도 모르고 말을 이어갔다.
“제가의 초대를 받기 전 두 사람이 정말 본 사찰을 찾아왔었소. 서하가 굳이 이 여정에 끼어들려 한 것도 두 사람 탓이 조금 있지.”
“왜 그렇소?”
“그야 그 두 사람이 신대륙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했거든. 장 무사를 만나면 안부라도 전해주겠다고, 의도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서하의 심정을 북북 긁었지. 혹시 만나셨소?”
장건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옆에 앉은 서하가 밥을 오물거리며 바라보는 시선에 그냥 입을 열었다.
“만났지.”
서하의 눈이 두 배쯤 더 초롱초롱해졌다. 하지만 그 밑에 오물거리는 입은 멈추질 않아서 그걸 지켜보는 장건은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의 대답을 듣고 이어서 두 사람 안부를 물으려던 진견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는 장건과 진서하의 모습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꼴깍 입 안의 것을 다 삼킨 진서하가 말했다.
“어디 있어요?”
“그 두 사람?”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건은 잠시 뭐라 말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곧 그냥 말해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오히려 서하가 찾아가면 그 두 사람은 좋아할 것이다.
“무림맹에.”
“무림맹?”
“멀지 않은 곳에 쓸데없이 큰 건물들 모여있는 곳 있어. 두 사람은 아마 거기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을걸.”
서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찾아가면 싫어할까요?”
장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둘 다 좋아죽을걸.”
밥풀이 묻어있는 서하의 입가가 살살 위로 올라갔다. 유설과 진하가 가까이 있다는 말에 만나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본 진견은 작은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당장은 힘들단다. 제상천 소가주의 즉위식 동안 웬만하면 제가를 나서지 않는 게 좋아. 그들은 문제가 생기는 걸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네.”
서하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짧게 대답하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잘 보면 위로 올라가던 입꼬리가 조금 뚱해져 있었다.
“···즉위식이 끝나면 그때는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을 게야. 나중에 장 무사와 함께 만나러 가도 되겠지.”
“네. 그렇게 할게요.”
이어진 진견의 말을 듣고서야 그 뚱함이 지워졌다. 진견은 참 어렵다는 듯 조금 피곤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 표정 그대로 장건과 마주치자, 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서하가 진견에게는 장건만큼 살갑게 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나서 장건이 자기 방을 잡으러 갈 때, 진견이 말했다.
“장 무사. 혹 그 일이라는 것을 하는 동안 뭔가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해주시오.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소.”
장건은 고맙다는 의미로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진서하에게는 슬쩍 한쪽 눈을 깜빡여줬다. 녀석은 재밌게도 당황하는 것 하나 없이 메롱, 혓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하지만 진견이 그걸 돌아보자 얼른 혀를 감췄다. 물론 그렇다고 소림의 무승인 진견의 눈을 피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진견은 뭐라 타박하는 것 하나 없이 장건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반장하며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장건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하고 빈방을 찾아 들어갔다. 서하의 방처럼 넓고 깔끔한 방이었다. 이후 삿갓과 외투를 걸어두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새 이불과 드실 차를 가져왔습니다.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들어오시오.”
이곳의 하인인 듯했다. 확실히 침대는 있는데 이불이 없었다. 손님이 방을 정하면 그때서야 정리해주는 모양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하녀 복장의 여인 둘이 바닥을 바라보며 들어와서는 이불을 깔고 탁자 위에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가에 기대고 서서 팔짱을 끼고 있던 장건은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뭐 하는 것이오?”
그의 말에 두 하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차를 준비한 여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장건과 눈을 마주치고는 말했다.
“···티가 났나요?”
그녀는 섬지영이었다. 그녀가 전날 입고 있던 하얀 무복과 꼿꼿한 자세는, 깔끔하지만 별다른 장식을 찾아볼 수 없는 회색 치마와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눈을 내리깐 하인의 자세로 변해 있었다.
장건은 고개를 살살 내저으며 말했다.
“내일이나 만날 수 있다며?”
섬지영은 싱긋 웃으며 다른 쪽 하녀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 하녀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 스르륵 문을 닫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단둘이 되고서야 섬지영의 입이 열렸다.
“내일이면 너무 늦잖아요. 기왕이면 빠르게 일을 해치우는 게 낫죠. 날 왜 찾았죠?”
장건의 손이 턱을 긁적거렸다. 아무래도 섬지영이 드러내놓고 장건을 찾아오는 건 힘든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가문의 후계자와 곧 혼인할 약혼녀인데 괜히 엉뚱한 남자와 만나 추문을 나도록 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렇게 몰래 찾아오다가 걸리면 그게 위험할 듯했지만, 아마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저렇게 다니는 것일 터였다.
그래서 장건은 그냥 용건이나 털어놓기로 했다.
“왜 찾긴. 제궁월 가주를 만나야겠으니 그렇지.”
죽은 사람을 만난다는 말에 섬지영은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곧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