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그 하얀 가면의 괴인이 등장한 순간 섬지영은 놀라서 쭈뼛 굳었다. 죽은 가주의 관을 열고 시체를 들여다본 것이 들킨다면 그녀에게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장례와 즉위식으로 가문이 혼잡스러운 가운데 그런 일이 알려지면 파혼이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과 장건의 얼굴에 씌워진 복면이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도 아직 얼굴이 드러나진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하얀 가면 아래서 쇠 긁듯 카랑카랑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늦은 시간에 죽은 자의 평온을 깨다니. 선조들의 분노가 두렵지 않은가?”
평범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특별한 수를 써 본인의 목소리를 감춘 듯했다. 어쨌든 그런 목소리 안에는 조롱기가 섞여 있었고, 섬지영은 반사적으로 거기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대답하지 마시오. 얼굴이야 감췄다지만 목소리나 말투가 드러날 수 있소.]섬지영은 자신의 귀에만 울린 장건의 목소리에 움찔 놀랐다. 그리고 입 밖으로 나오던 목소리를 꿀꺽 다시 되삼켰다.
그렇게 장건과 섬지영 모두 입을 다무니 그곳엔 잠시 불편한 침묵만 가득해졌다. 사람들은 고요한 와중에 촛불만 휘청거리며 흐린 그림자들을 찰랑찰랑 흔들어댔다.
“···정체를 감추고 싶은 모양이군. 하지만 글쎄. 오늘 비락원에 손님으로 들어온 남자가 하나 있지. 그리고 그에게 초대장을 보내준 여인도 있고. 때마침 내 앞에 있는 사람도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군. 이런 우연이 있나.”
장건과 섬지영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괴인은 이미 두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괴인의 말이 이어졌다.
“즉위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나? 돌아가신 가주님의 시체를 뒤적거리며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게다가 소가주와 약혼한 여인이 엉뚱한 남자를 집안에 들이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너뿐만 아니라 소가주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단 걸 모르나?”
“···당신은 누구죠?”
입을 다무는 게 더 의미가 없다는 걸 안 섬지영이 먼저 나서서 물었다. 괴인은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난 제가의 칼이고, 그거면 충분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너에겐 앞으로 제가의 안주인이 될 사람으로서의 교육이 필요할 듯하구나.”
하얀 가면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등 뒤의 검을 뽑았고, 그 검 끝은 곧 장건을 가리켰다. 그를 본 장건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그를 통해 섬지영에게 본보기를 보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짧은 순간 싸움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걸 느낀 장건이 앞으로 몇 걸음 나서서 하얀 가면과 마주했다. 그런 장건의 차분함을 본 하얀 가면에서도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창룡도라 했나? 젊은 나이에 큰 명성을 얻었더군. 무공이 상당하다지?”
“왜. 부럽나?”
하얀 가면은 순간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는 곧 그 침묵을 감추려는 듯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림의 명성이란 결국 근본도 모르는 무뢰배들의 입소문일 뿐이지. 근 백 년이나 될까 싶은 뿌리 없는 칼잡이들의 놀음일 뿐이야. 그리고 그런 요란한 명성은 제가의 담벼락 근처에도 닿을 수 없다.”
그는 슬쩍 섬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봐둬라, 섬지영. 가문 밖의 무림인이란 족속들이 얼마나 허풍 가득한 존재들인지.”
섬지영은 갑작스레 등장한 하얀 가면과 그가 장건을 노리는 상황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분명 어떤 추적이나 감시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누군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자가 갑자기 나타나 조사를 중단하라 협박하고 장건과 싸우려 들고 있었다.
그렇게 어두운 지하 공간에 장건과 하얀 가면이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그곳의 광원은 하얀 가면의 등 뒤 출입구에서 들어오는 약한 달빛과 섬지영이 들고 있는 절반쯤 녹은 촛불뿐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완전히 어두운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서로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밝은 것도 아니었다. 희미한 광원에 장건과 하얀 가면 두 사람 모두 흐릿한 윤곽선으로 뭉개져 보였다.
그리고 그 윤곽선 안에서 반짝이는 것은 하얀 가면과 장건의 두 눈뿐이었다.
이윽고 하얀 가면의 검이 번쩍 빛났다. 장건의 칼은 뽑히지 않았다.
촛불을 들고 있던 섬지영은 그 번쩍거림 이후로 이어진 팅-하는 쇳소리와 빡! 하는 둔탁한 격타음에 움찔거렸다. 분명 그녀도 나름 오랫동안 무공을 익혀온 무인이었지만, 그 순간 벌어진 충돌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은 하얀 가면과 장건 모두 무슨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불확실한 음영이 되어 서로를 향해 파고들었고, 그 그림자들은 곧 회오리치는 것처럼 서로를 휘감다가 우뚝 멈췄다는 것이다.
섬지영은 그렇게 움직임이 멈춘 것을 보고 나서야 꿀꺽 침을 삼키며 촛불을 높이 들었다. 두 사람이 부딪쳐 서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장 무인?”
홀로 선 그림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장건이 맞았다.
“촛불을 좀 가까이 가져오시오.”
장건의 얼굴을 확인한 섬지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불빛이 가까워지자 앞으로 엎어진 하얀 가면을 뒤집어 눕혔다.
그의 하얀 가면에는 뚜렷한 금이 가 있었다. 장건의 주먹에 얻어맞고 깨진 것이다. 섬지영은 그가 기절했다는 것과 그 옆에 반으로 부러진 검이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장건 쪽으로 촛불을 가져가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소.”
장건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얀 가면은 확실히 빨랐다. 평범한 무림인들을 깔볼 만한 실력이긴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여러 정령에게 받은 내공과 수많은 마인을 상대하며 쌓인 경험이 있었다. 그냥 그렇게 빠른 정도로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빨라도 갑옷에서 발사되던 당씨 마인의 암기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옷이···”
물론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다 보니 가슴 쪽 옷깃에 비스듬히 갈라진 검상이 남았다. 하지만 장건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툭툭 털었다.
“옷만 베인 것이오. 피륙은 다치지 않았소. 그보다 이 얼굴을 아는지나 좀 확인해 보시오.”
섬지영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장건의 태도에 그가 벗겨낸 하얀 가면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가면 안에는 서른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기절한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살짝 찢어진 그의 이마에서 가늘게 핏방울이 흘렀다.
“이 사람은···”
“아는 자요?”
하얀 가면의 얼굴을 확인한 섬지영의 표정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일단··· 아는 얼굴이 맞긴 해요. 가문 방계의 무사 중 한 명이거든요. 하지만··· 이 자는 특출난 게 하나 없던 사람인데···”
“특출한 것 없는 무사를 왜 알고 있소?”
“그야 이제 내 집이 될 곳인데 거기 사는 사람들 이름은 몰라도 얼굴 정도는 모두 알고 있어야죠. 난 가문 안에서 지내는 사람이라면 무사들은 물론이고 하인, 하녀들 얼굴도 모두 외우고 있어요.”
장건은 살짝 놀라서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허풍인지 진실인지는 몰라도 수백 명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는 건 나름의 자신감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보통 똑똑한 머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몇 년 뒤 제씨 가문의 주도권은 그녀 손아귀에 붙잡혀 휘둘릴지도 몰랐다.
이윽고 그 방계 무사에게로 시선을 돌린 장건은 괜히 턱을 긁적거렸다. 일단 그의 기감에 잡히기로는 마공을 익히거나 사악한 술법을 쓰는 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를 죽이지 않은 이유도 거기 있었다. 섬지영에게 본보기니 뭐니 떠들어대던 이놈의 검 끝은 정작 장건의 목줄을 노리진 않았다. 장건의 움직임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가슴팍을 베어내긴 했지만.
결국 장건은 손가락을 세웠다. 어쨌든 왜 그들을 공격했는지, 섬지영에게 교훈을 주겠다니 뭐니 떠들어댄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기절하긴 했지만 고통이 있으면 자연스레 깨어날 것이다.
하지만 섬지영이 그 손가락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때, 장건의 눈이 위를 향했다. 섬지영이 그걸 보고는 불안스레 물었다.
“···왜 그러죠?”
“사람들이 몰려오는군. 입구가 막히기 전에 빠져나가야겠소.”
장건은 빳빳하게 세웠던 검지를 접고 기절한 하얀 가면의 옷깃을 북 찢어 작은 천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조금 전까지 살피던 제궁월 가주의 시신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장 무인? 방금 빠져나가야겠다고···”
그런 장건을 보고 당황하던 섬지영은 곧 입을 다물었다. 관속에 들어갔다 나온 장건의 손에 길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보고 난 뒤였다. 장건은 조금 전 만든 천으로 그것을 감싸 품에 집어넣고 앞장서 나갔다.
“촛불을 끄시오. 이제 은밀히 움직여야 하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섬지영은 꾹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장건의 말을 듣고서야 얼른 촛불을 껐다. 시체에서 뭔가 나왔다는 것은 결국 의혹이 사실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가주가 정말 암살되었다는 생각에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후 빠르게 계단을 올라 사당에 이른 장건과 섬지영은 벽에 등을 붙이고 문턱으로 살짝 고개만 내밀어 밖을 확인했다. 두 사람이 뛰어넘었던 쇠창살 너머에 횃불을 든 사람들이 한가득 몰려와 있었다. 그 앞에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관리인이 열쇠로 대문의 잠금을 풀고 있었다.
사당과 쇠창살 담벼락 사이에는 낮은 풀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금 밖으로 나가면 저들에게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곧 안으로 들어온 저들에게 발각될 터였다.
그들을 보며 잠시 생각하던 섬지영은 꽉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복면을 벗고 나가겠어요. 그 틈에 장 무인은 빠져나가도록 하세요.”
그녀처럼 몰려온 사람들을 바라보던 장건은 그 말을 듣고 흘낏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들키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었소?”
“물론 큰일이죠. 어쩌면··· 오라버니와의 파혼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고요. 그래도 그게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저··· 그저 내가 조금 힘들어질 뿐이죠.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가문의 어른들은 가묘에 함부로 들어선 것은 물론이고 가주님의 시체를 뒤적거렸다는 이유로 당신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릴 수도 있어요. 어쩌면 목숨을 요구할 수도 있고요.”
섬지영은 미안하다는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제궁월 가주님이 살아계셨다면 그렇게까진 가지 않았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분은 돌아가셨고, 그 죽음을 감추려는 자들과 증거가 나온 이상 더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요. 장 무인은 이대로 무림맹으로 가셔서···”
장건이 손을 들었다. 섬지영은 그 손짓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말은 고맙소.”
장건은 무림맹으로 갈 생각이 없었다. 현재 무림맹의 주도권은 황녀 유설이 가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제가처럼 고대 세가의 문제라면 상황이 커질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무림맹주가 거기에 끼어들려 할 것이 분명했다. 장건은 또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는 더 알아봐야겠지만, 마궁이나 마인이 이 일에 얽힌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림맹 등의 외부 세력이 끼어들게 만드는 것보다는 앞으로 제가의 중요한 사람이 될 섬지영이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 나았다.
“복면을 단단히 묶으시오. 혹시라도 풀리지 않게.”
“···예?”
장건은 그렇게 말하며 소매와 발목이 펄럭이지 않게 잘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본인의 복면마저 단단히 정비한 그는 섬지영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히시오. 은밀히는 힘들어졌으니 차라리 빠르게 빠져나갈 거니까.”
“···예?”
섬지영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 어벙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슬쩍 돌아보는 장건의 시선은 진지했고, 결국 덜컹 쇠창살 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섬지영은 두 눈을 꾹 감고 등에 업혔다.
그녀를 등에 업은 장건은 그 자리에서 툭툭 뛰어보더니 말했다.
“꽉 잡으시오. 잘못하면 떨어질 수 있으니까.”
“아니, 뭘 어쩌려고-”
다음 순간 섬지영은 누군가 휙 끌어당긴 듯 뒤로 젖혀지는 머리에 깜짝 놀라 장건을 붙잡은 손을 와락 끌어당겼다. 그렇게 그녀는 장건의 목을 붙잡고 등판에 얼굴을 들이박았다.
동시에 그녀의 귓가에 들리는 외침이 있었다.
“자, 잡아라-! 도굴꾼이다-!”
“도망친다! 잡아라!”
하지만 그 소리는 빠르게 멀어졌다. 그 대신 귓가를 울리는 것은 후두두둑하며 격한 바람이 옷깃을 때리는 소리였다. 섬지영은 손에 힘을 푸는 순간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에 와락 장건의 목을 잡아당겼다.
“너무 꽉 잡지 마시오. 숨이 막히니까.”
“아, 미안해요···”
바람 소리 틈에서도 분명히 들린 장건의 목소리에 섬지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장건은 나뭇가지 하나를 밟아 다시 한번 높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
달과 별의 바다가 그녀 눈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