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 * *
섬지영을 등에 업은 장건은 제씨 장원과는 반대 방향으로 멀리 나아간 후, 크게 돌아서 장원 주변 풀숲에 도착했다. 달린 거리는 상당했지만 장건의 경공이 어찌나 빨랐는지 차 한 잔 마실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풀숲에 몸을 숨긴 장건은 장원 담벼락을 순찰하는 경비 무사들을 지켜보았다. 적당한 순간을 잡아서 안으로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곧 그 순간을 잡은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섬지영이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만요.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헤어져서 서로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해요.”
장건은 등 뒤에서 들리는 속삭임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안 돌아가고 뭐 하려고?”
“당장 들어가면 며칠 동안 우리 둘이 따로 만나기 힘들어질 거예요. 그러니 지금 상황을 좀 정리해야겠어요.”
“좋소. 듣고 있소.”
등 뒤에서 톡톡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섬지영이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듯 잠시 그러더니 곧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 방계 무사의 소속이 기억났어요. 외당外黨의 무사 중 하나예요. 그리고 그 외당은 상천 오라버니의 숙부가 담당하고 있죠. 외당 당주 비응구검飛鷹九劍 제용월. 또 아까는 당황해서 생각나지 않았는데 제가에는 그런 소문이 있어요. 가문의 그림자에서 오직 제가를 위해 움직이는 무사들이 있고, 그 정체는 가문의 어른들과 가주님밖에 모른다는 이야기. 두 정보를 취합하면?”
“···아까 그 흰 가면이 진짜 그런 그림자 무사라 쳐도, 당장 그 윗선이 꼭 외당 당주리라 생각하는 비약인 듯한데.”
섬지영이 고개를 살살 저었다.
“동기가 있어요. 제용월 당주는 돌아가신 가주님과 자주 대립각을 세우던 인물이에요. 이곳 신대륙에서의 번영을 바탕으로 중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의 수장, 말하자면 원로들의 대리인이었죠. 하지만 가주님은 항상 그쪽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요··· 또 가주님은 개인 연공실에서 돌아가셨어요. 가문 사람 대부분은 들어갈 방법도 모르는, 가주님과 상천 오라버니, 그리고 원로 몇몇만 알고 있는 가주 전용 연공실이었죠···”
장건은 굳이 그녀의 추리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방금 그 연공실 이야기는 여태 일부러 감췄었다는 걸 느꼈다. 누구도 쉽게 들어설 수 없는 가주 전용 연공실. 그럼 당연히 제상천도 용의자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주님의 시신을 발견한 건 호법 지위를 가지신 원로들이었어요. 그리고 그분들이 가주님의 죽음을 주화입마라 밝혔죠··· 그렇다면···”
“좋지 않군.”
섬지영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만약 제용월 당주를 중심으로 한 원로 세력이 가주님을 암살했다면? 그 이후 아직 경험이 부족한 상천 오라버니를 꼭두각시 가주로 삼으려는 것이라면?”
“그런데 와중에 당신이 날 불렀군. 그럼 당연히 감시의 눈을 붙일 만하지.”
그녀는 계속 추론을 이어나갔다.
“···가주님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음지에 깔린 이상, 상천 오라버니는 완전한 가주가 될 수 없어요. 항상 방계와 원로에게 휘둘리게 되겠죠. 그럼 그들은 원하던 중원으로 돌아가겠다는 계획을 진행할 수 있게 될 거예요. 하지만, 세상에··· 그렇다고 가주님을 암살했다는 건··· 아무리 가문의 숙원이라지만···”
“원로 전체가 그랬다기엔 아직 모르는 것이오.”
“예?”
장건은 품에서 천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펼쳐 보였다. 그 안에서 제궁월 가주의 시신에서 나온 가느다란 침이 흐릿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침은 달빛에 반짝이지 않았다면 밤중에는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가늘었고, 또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었다.
“시신 안에 있던 암기요. 보이는 것처럼 너무 가늘어서 아마 주화입마 당시 찢겨나가는 혈류에 휩쓸려 몸 안에 파묻혔을 것이오. 기혈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뛰어난 의원이나, 우리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시신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면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이란 말이지.”
“···무슨 뜻이에요?”
바늘을 다시 곱게 싸서 품에 집어넣은 장건은 말을 이었다.
“그 시신을 발견했다는 원로들이 이 바늘을 쓴 것이라면 굳이 남겨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오. 나중엔 찾을 수 있는 증거가 될 테니까. 지금 우리처럼. 차라리 바늘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남아있었다는 것이 더 말이 되지.”
“그럼 제용월 당주 혼자서?”
“일을 치른 건 그가 맞을 수 있지. 이후 원로들 또한 그 사실을 눈치채고도 당신이 말한 가문의 숙원을 위해 입을 다물었을 수도 있고. 최악은 제 삼의 세력이 끼어들어 그 제용월 당주라는 자를 부추겼을 경우요.”
섬지영은 입을 다물었다. 가문 원로들이 진실을 알고도 입을 다물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장건은 설사 범인이 제용월 당주가 아니라 해도, 어쨌든 원로들은 대부분 진실을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이미 무림맹에서 늙어버린 무림인들의 협잡을 겪은 탓이었다.
“이 바늘만으로는 증거가 될 수 없소. 정확히 누가 썼는지를 알아야 하지. 그리고 우리 둘을 붙잡을 명확한 증거가 없는 건 제가 원로들도 마찬가지요. 그 방계 무사는 우리를 잡지 못했고, 뒤이어 몰려온 사람들도 우릴 잡진 못했으니까. 그러니 며칠 뒤에 만나니 뭐니 하며 시간을 끄는 건 좋은 수단이 아닐 것이오. 그들에게 계략을 꾸밀 시간을 주는 거니까.”
“그럼··· 어쩌죠?”
“일단 오늘 밤에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겠지.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찾아오시오. 당당하게.”
섬지영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당당하게? 뭘 어쩌려고요?”
“그 방계 무사의 얼굴을 안다고 했잖소. 그를 찾아가야겠소.”
“예? 그런··· 그가 순순히 아는 걸 털어놓겠어요?”
“죽고 싶지 않다면 털어놓겠지.”
그 과격한 발언에 섬지영의 입이 헤 벌어졌다. 장건은 다시 몸을 일으키며 업힌 그녀를 추슬렀다.
“어쩔 수 없소. 이런 일은 느긋하게 움직여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소. 그러니 그만두고 싶다면 지금 이야기하시오. 내일 그자를 찾아간 순간부턴 정말 멈출 수 없을 것이고, 그만둔다 해도 난 잔칫집 밥이나 얻어먹고 떠나면 되니까.”
잠시 고민하던 섬지영은 무의식적으로 장건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가 움찔 놀라서 손아귀를 풀었다. 그리고 민망함을 감추려 얼른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내일 아침 곧장 찾아뵙죠.”
“좋소.”
다음 순간 섬지영은 처음 장건의 등에 업혔을 때처럼 뒤로 휙 밀려나는 머리를 앞으로 끌어당겨야 했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제가의 담벼락을 넘어 안으로 한참을 들어와 어느 전각 지붕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제 내리시오. 난 내 방으로 가겠소.]섬지영은 귓가에만 울리는 장건의 목소리를 들으며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섰다. 장건은 이후 섬지영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훌쩍 저편 지붕으로 사라졌다. 잠시 지붕 위에서 그런 장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섬지영은 무릎을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곧 본인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두 사람이 전각 지붕에서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사당으로 몰려갔던 인원들이 돌아와 제가의 정문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무작정 장건이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가던 이들은 이후 아무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소란에 드넓은 제가 장원의 고요가 깨지진 않았다. 그러기엔 지난 수백 년 새월 동안 그들이 겪어온 일이 너무 많았다.
* * *
“···죄송합니다, 당주.”
등불 하나만 켜진 방에 한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 앞 책상에는 어느 꼬장꼬장해 보이는 중년인이 이마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 중년인이 말했다.
“복면도 벗기지 못했다고?”
“···예.”
짤막한 대답에 중년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왔다.
“허, 참. 괜히 창룡도니 참마협객이니 불리는 게 아니었군. 허명이 아니었어. 고대 세가나 황군에는 연이 없는 인물로 아는데···”
그는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비비적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설마 가주의 시신에서 뭔가 나왔다는 거냐?”
“그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너를 뿌리치고 곧장 도망쳤다니. 뭘 확인할 시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이미 한 번 걸린 이상 다시 시신을 확인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 명랑한 계집의 활동 범위를 줄이긴 했군.”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무사는 그 머리를 더 깊이 숙였다.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장건과 섬지영이 몰려온 사람들을 피해 사당을 떠났을 때, 곧바로 그도 정신을 차렸다. 본래라면 그에게 제압되고 사람들에게 적발되며 금단의 사랑이든 무덤의 도굴이든 죄를 뒤집어썼어야 할 두 사람이 사라지며 계획이 틀어졌다.
그, 그림자 무사, 혹은 방계, 외당 소속 무사 등등의 신분을 가진 제규상은 거기서 자신이 엿 됐음을 느꼈다. 설마 장건의 무공이 그렇게 뛰어날 줄은 그도, 그를 보낸 제용월도 몰랐던 것이다. 고대 세가의 오만함이 문제였다면 문제였다. 근본도 모르는 칼잡이가 그렇게 빠를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테니까. 원래 이 땅엔 실력에 비해 과한 명성을 날리다가 어느 뒷골목에서 칼 맞고 죽는 일은 흔했다.
제규상은 차마 되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일격에 기절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평소 자신이 제가 방계 무사라는 껍데기를 벗고 무림에 나서면 꽤 이름을 날리리라 생각했던 그였기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도 있었다.
그래서 제용월에겐 그저 그들이 자신을 뿌리치고 도망쳤다는 보고만 올린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시신에 뭔가 흔적이 남아있었을까?”
그때 제용월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규상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설사 흔적이 있다고 해도, 그게 증거가 될 순 없습니다. 애초에 다른 이들의 참관 아래 당당히 얻은 증거가 아니니까요. 뭔가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흠. 그래, 좋아. 그럼 또 머리를 굴린다고 며칠은 조용하겠지. 그 안에 그 장건이라는 자를 내쫓을 방법을 찾아야겠다.”
제규상은 다시 머리를 숙이며 대꾸했다.
“속하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제용월은 고개를 끄덕였고, 방계의 그림자 무사 제규상은 조심스레 방을 떠났다. 그가 떠난 후에도 제용월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흔들리는 호롱불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 * *
다음날 섬지영은 정말 아침 일찍 비락원으로 장건을 찾아왔다. 그녀의 뒤에는 용 무사와 그 외에도 무사 둘이 더 있었다.
“내 가문에서 날 따라온 무사들이에요. 지금은 내가 제일 믿을 수 있는 검객들이죠. 손을 거드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외투와 삿갓을 걸치고 나온 장건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 층 난간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진서하와 진견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진견은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서하는 난간 틈으로 조그만 손을 내밀어 흔들거렸다.
잠시 그 인사나눔을 지켜보던 섬지영이 말을 이었다.
“바로 움직이나요?”
“그가 어디 소속인지, 지금 어디 있을지 알고 있소?”
“네. 혹시 몰라서 하녀들에게 확인도 해봤다고요.”
장건은 허리춤의 청룡도를 가볍게 추스르며 대답했다.
“바로 갑시다.”
그렇게 아침 식사도 건너뛴 다섯 사람은 거침없이 제가의 외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간중간 하인들과 무사를 마주쳤는데, 모두 인사를 하면서도 이상한 조합이라 생각했는지 흘끔거렸다.
“···심문은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요. 용 무사가 다른 개입을 최대한 막겠지만, 결국 그 시간은 아주 짧을 수밖에 없어요. 뭔가 쓸만한 증언이 없다면 그대로 우리 다 억류될 수도 있고요.”
섬지영은 성큼성큼 걸으면서도 묘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당연했다. 앞으로 혼인해 살아갈 집안을 아주 뒤집어엎는 상황이었다. 아직 어리다고 해도 좋은 그녀에겐 세상을 뒤집어엎는 느낌일 터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오.”
장건은 그렇게만 말했다. 그 담백한 말투에 섬지영은 믿음이 가는 걸 느꼈다.
그들은 곧 외당에 도착했다. 가문의 바깥 살림을 책임지는 장소답게 이른 아침에도 많은 사람과 물건, 마차, 소와 말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첫날 정문의 연속으로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 일하던 인부들과 무사들은 갑자기 몰려온 장건과 섬지영 등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개중에는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당주를 찾아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섬지영의 손가락이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저기!”
장건의 눈도 그 손가락을 따라갔고, 거기엔 서판과 작은 붓을 들고 믿기 힘들단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제규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는 장건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그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닌데.”
“뭐?”
그는 어느새 성큼 다가와 말하는 장건의 모습에 멍하니 되물었다. 그리고 장건은 거기에 오른손 검지를 세워 보여주었다.
“···뭐냐?”
다음 순간 장건의 손이 흐릿해지며 제규상의 혈도 수십여 곳을 타격했다. 그 충격에 제규상은 뒤로 훌쩍 날아가 닫혀있던 창고 문을 부수다시피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를 믿던 섬지영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입을 벌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장건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 하나 없이 탁탁 손을 털며 덜컹거리는 창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