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장건의 도발에도 제가의 무사들은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눈이 장건과 그 뒤에 쓰러진 제유운을 번갈아 보았다.
차라리 장건이 칼을 뽑아 단숨에 제유운을 쳐 죽였다면 분노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기절한 제유운에게는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었고, 자세를 잡고 있는 장건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그때가 돼서야 그들의 머릿속에 지금 신사천을 진동시키는 장건의 명성, 창룡도니, 참마협객이니 하는 이름들이 떠올랐다. 거기에 신사천부터 북쪽 감산성, 동쪽으로는 염호성과 고원성에 이르는 그의 이야기들까지.
헛소문이라 여기자면 한없이 거품 같은 이야기지만, 만약 그 모든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아니 그중 절반만 사실이라 해도 그건 젊은 시절 무림맹주를 뛰어넘는 업적이었다. 말하자면 새로운 무림 전설의 현재진행형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과 같았다.
제가 무사들의 머릿속에서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졌을 때, 그들 중 어떤 무사 하나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다음을 찾았소? 여기 내가 있소! 외당의 제방선이오!”
“장건이오.”
장건은 자세를 풀지 않고 그저 조용히 대답하며 부드럽게 발바닥을 끌어 제방선과 방향을 맞췄다. 자신을 제방선이라 소개한 무사는 이미 기절한 제유운과는 다르게 곧바로 등 뒤의 검을 붙잡고 자세를 바짝 낮췄다. 왼손으로 바닥을 짚을 정도로 낮은 자세였다. 그 자세에선 조금 더 공격적이고, 조금 더 날 것 느낌이 났다.
다시 한번 제가 무사들의 눈이 장건과 그 상대에게로 집중되었다. 검집에 담겨 있는 제방선의 검은 그 안에 실리는 내력 때문인지 파르르륵하는 희미한 소음을 냈다. 거기에 바닥을 짚은 제방선의 손 또한 너무 힘을 줘 판석을 까드득 긁고 있었다.
두 손을 내밀고 있는 장건은 깊은 동굴 속 호수처럼 적막했고, 그 반대편에 엎드리다시피 한 제방선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폭발하기 직전의 고요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무사 중 누군가의 목에서 꿀꺽, 하는 침 삼킴 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린 순간. 제방선이 두 발과 한 손으로 땅을 박차고 장건에게 쏘아졌다. 그곳에 선 이들 중 절반 이상은 그 궤적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제방선은 털썩 소리를 내며 데구르르 구르고, 장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바뀐 것은 두 팔을 앞뒤로 펼치고 무게 중심을 앞발에 둔 자세가 되었다는 점뿐이었다. 허공을 날던 검이 바닥을 뒹굴면서 가벼운 쇳소리를 냈다.
“아···”
몇몇 제가 무사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단 두 번의 마주침으로 두 명의 제가 무사가 쓰러진 것이다.
그때 쓰러졌던 제방선이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 번 휘청거리더니, 우뚝 멈춰서 하하 웃으며 말했다.
“내 평생 빠른 것은 언제나 곧은 것인 줄만 알았는데··· 그 권법 이름이 무엇이오?”
장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태극권.”
“···음, 태극이라. 멋지군.”
제방선은 그렇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풀썩 쓰러져버렸다. 장건은 조용한 제가 무사들을 향해 또 한 번 말했다.
“다음.”
그 말이 나온 순간부터 마치 기폭제가 터진 것처럼 제가 무사들 사이에 분명한 흥분이 휘돌기 시작했다. 그건 가족이 패배함에서 나오는 분노이기도 했고, 평생 무공을 익혀온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이기도 했다. 이제 그곳에 선 제가 무사 중 섬지영과 제용월의 문제를 따져보고 싶은 자는 없었다. 그들의 눈은 장건만을 바라보았다.
“여기 그다음이 있다!”
이번엔 다른 이들보다 어깨가 반 배쯤은 넓은 무사가 튀어나왔다. 고대 세가라기보다는 산적에 가까운 외모를 지닌 그 무사는, 덩치가 너무 좋아서인지 다른 이들과 같은 모양의 검을 쓰건만 마치 얄팍한 꼬챙이를 메고 있는 것 같았다.
“율법원 소속 제광량이다! 어디 언제까지 허리의 그 칼을 안 뽑을 수 있을지 보자!”
“내가 이걸 뽑으면 여럿 죽을 거다.”
괄괄한 목소리로 외쳤던 그 무사는 장건의 덤덤한 대꾸에 도리어 으하하 큰 목소리로 웃었다. 웃음소리마저 무사보다는 산적 같았다.
“좋아! 그럼 어디 죽어보자!”
그는 그렇게 외치고 곧장 등에 멘 검을 뽑았다. 그리고 한 손 검을 두 손으로 잡으며 좌하단 방위에 검을 두고 자세를 낮췄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웅크린 자세였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맞춰 장건도 앞뒤로 뻗었던 손을 회수하고 다시 무게 중심을 뒷발에 두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물론 그는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다시 공세로 돌아설 수 있었다. 염호성의 하얀 소금 평원에서 첫선을 보인 이후, 그의 태극권은 나날이 높은 경지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산적 같은 무사가 움직였다. 앞선 다른 둘보다는 한순간 더 빨랐다. 그건 그 무사가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했다. 왜냐하면 그 움직임은 이미 두 번의 격돌로 익숙해졌을 장건의 호흡을 일그러뜨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건은 이미 그 순간순간의 호흡이 아닌 싸움 전체를 보고 이끌어갈 수 있는 고수였고, 때문에 산적 무사의 움직임은 그 동작보다 빠르게 읽혀버렸다.
바닥을 박차고 달려온 산적 무사의 검이 곧게 장건의 복부를 찔러왔다. 그런데 그 칼끝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건 산적 무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찌르기의 궤적이 목이나 머리, 혹은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말했다. 그게 처음 호흡을 일그러뜨리려는 의도와 합쳐지며 장건의 회피 동작을 막았다.
피할 수 없다면 막아야 할 테고, 그러면 맨손으로 검과 부딪칠 수는 없으니 결국 칼을 뽑아야 했다. 산적 무사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머리 굴리기를 좋아하는 인물인 듯했다.
무작정 몸으로 부딪치던 먼저의 두 무사와는 확실히 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첫 동작에서부터 흐름을 읽고 있었던 장건에겐 통하지 않을 전법이었다.
장건의 손이 산적 무사의 검을 마중 나갔다. 아주 잠깐 산적 무사의 검이 멈칫했지만, 그는 곧 그대로 그 손안에 검을 밀어 넣었다. 장건의 오른손이 그대로 잘려 나갈 듯했다.
손은 잘려 나가지 않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움직여서 그 손가락 끝으로 검의 옆면을 짚었다. 그리고 그 옆면을 밀어내며 주르륵 안으로 타고 들어갔다. 희미하게 흔들리며 무수한 갈래로 나뉘던 검 끝은 그렇게 엉뚱한 방향을 강요받으며 바깥으로 밀려났다. 산적 무사는 미증유의 힘에 자신의 검이 그 손길을 따라 그대로 딸려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후 검을 밀어내는 장건의 오른손 옆으로 불쑥 왼손이 파고들어서는 산적 무사의 목과 어깨 부근을 붙잡았다.
산적 무사, 제광량은 그 손길이 닿는 와중에도 자세를 바로잡고 검을 끌어당기려 했지만, 장건의 왼손이 완전히 닿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휙 돌아버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
두 눈을 꿈뻑거리며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도 앞에 다른 두 무사처럼 어린애처럼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 저쪽에서 팅팅거리며 굴러가는 검도 보였다.
“···이런 식이었군.”
제광량은 이후 조금 전 붙잡힌 순간 몸이 한 바퀴를 휙 돌았고, 그 과정에서 너무 빠르고 급격하게 뒤흔들린 나머지 머리에 뇌진탕이 생기면서 곧 의식을 잃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장건을 바라본 제광량은 허허 웃으며 손가락으로 장건을 가리키다가 이내 푹 앞으로 엎어졌다.
장건은 뒤를 돌아본 것도 아니면서 그가 쓰러진 것을 아는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또 한 번 말했다.
“다음.”
제가의 무사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또 함부로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연이어 세 번을 내리 패배했으니 사실상 이 싸움은 제가가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제가 무사가 제가의 모든 무사도 아니었고, 원로나 당주급은 제용월을 제외하곤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진 것은 진 것이었다. 거기에 지금 장건의 모습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전혀 지치거나 힘겨워 보이지 않았다.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가문의 무공이 무시당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징벌해야 할 문제지만 지금처럼 그저 계속 패배하는 것은 도리어 그 무시가 사실임을 증명해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무사들의 눈은 이 자리 제가 무사 중 제일 어른인 제용월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시선을 받는 제용월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상황이었다.
시간은 시간대로 끌리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아마 벌써 가문 안에 이 정문의 소란이 퍼지고 있을 터였다. 거기에 장건은 이제 언제 패배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이미 제가 무사 셋을 연달아 싸워 이겼고, 아마 제용월 본인이 나서지 않는 이상 얼마나 더 싸워 이길지 모를 상황이었다. 장건이 제가를 나서면 신사천에는 다시 한번 그의 명성이 쩌렁쩌렁 울리게 될 터였다. 고대 세가를 정면으로 싸워 이긴 무림인으로.
그리고 제용월은 그 이야기에 악역이 되어 잘근잘근 씹히게 될 것이 뻔했다. 거기에 만약 그가 나섰음에도 장건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땐 굳이 섬지영의 문제까지 나아갈 것도 없이 그는 끝이었다.
제용월은 그런 위기감을 최대한 감추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어쨌든 이제 그가 나설 순간이긴 했다.
“···실력이 대단하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특별한 사문도 없었다고 알고 있는데. 어디서 절세의 영약이라도 주워 먹었나?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공이야.”
앞으로 나선 제용월은 일단 장건의 무공 배경에 대해 의구심을 깔았다. 장건의 무공 실력을 알게 된다면 당연히 한 번 나올 소리였지만,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언급됨으로써 새로운 소문을 만들게 될 터였다.
어쨌든 이야기라는 건 퍼지고 퍼지며 생겨나는 것이니 사람의 입과 입을 넘으며 많은 왜곡이 일어나게 된다. 방금 제용월의 대사는 그 왜곡의 씨앗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실력만큼이나 오만해. 자네는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건가? 여긴 우리 천년 제가의 담벼락 안이야. 거기 들어서서 우리 무공이 나약하니 어쩌니 헛소리를 하고도 멀쩡히 살아나가길 바란단 말인가? 남의 집안에 들어와 모욕을 준다니? 세상천지 어디에 그딴 예법이 있는지 모르겠군.”
다음으로는 다른 제가 무사들이 장건의 무공에 경도되기 전에 분노를 일으키고자 했다. 어쨌든 지금 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그들 제가의 가족이었고, 그들이 합심해서 입을 다물거나 말을 바꾸면 장건의 소문도 퍼지지 않을 수 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장건을 바라보면 제가 무사들 몇몇이 그 말에 그런가? 하는 표정이었다. 이미 장건이 일으킨 흥분으로 쉽게 선동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당장 닥쳐온 문제는 자네의 그 개인적인 호승심이 아니라, 제가의 예비 안주인이 가문의 법도를 어지럽히고 있는 상황이네. 아, 거기에 자네가 해한 저 세 사람의 문제도 있겠지? 보상금을 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뭐 노역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몰라도 자네는 이 문제에 대해-”
“내 이름은 장건이오.”
제용월의 말이 장건의 짧은 통성명에 뚝 끊어졌다. 그리 크지도 않은 목소리였건만 장건의 목소리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무사의 귀에 분명하게 들렸다. 제용월은 자기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는 것에 순간 당황하다가, 얼른 다시 말을 이으려 했다. 대화의 주도권을 이렇게 쉬이 잃을 순 없었다.
“한 수, 잘 부탁하겠소.”
하지만 그보다 장건이 빨랐다. 제용월은 한순간 먼저 이어진 장건의 말에 입이 꽉 다물어지는 것을 느꼈고, 또 다른 무사들의 눈에 다시 흥분이 일어나는 걸 볼 수 있었다. 애초에 무사들의 귀엔 그가 주절주절 떠들던 것이 잘 들어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차갑기만 하던 제용월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는 더 이상 분노를 감추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래, 결국 칼부림이나 하자는 게지? 좋네. 뭐 더 떠들 게 있나. 무림인이란 끝내 칼로 대화하는 삶이니.”
그의 두 손이 등 뒤에 메인 검 두 자루를 덜컥 붙잡았다. 그에 장건은 세 번째 무사를 날려 보냈던 자세에서 다시 제일 처음의 동작으로 되돌아왔다. 포위망을 만들고 있던 무사들은 조금 더 거리를 벌리고 서서, 이젠 그게 포위망인지, 아니면 구경을 위한 인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장건과 제용월, 떠돌이 무인과 고대 세가의 당주가 맞부딪치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멈춰라!”
그건 어느 청년의 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제가의 무사라면 모두 알아야 하는 목소리기도 했다. 무사들은 얼른 길을 텄고, 장건을 노려보던 제용월도 낭패감 가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하얀 상복을 차려입은 제상천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하지만 장건의 눈에는 그 옆에 서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진견이 더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