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 * *
다행히 오해는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오래 갈 수 있는 오해가 아니긴 했다. 장건은 진견을 소림사 승려로, 서하는 그런 소림사의 속가 제자이자 친구의 딸이라 설명했다. 장운은 그 정도만 듣고도 서하의 기구한 삶을 짐작한 듯 더 캐묻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절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으, 응? 아니, 뭐··· 크흠···”
장건이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장운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 진견은 그를 보면서 껄껄 웃었고, 서하는 조용히 그런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와 탁자에 둘러앉은 참이었다.
“어서들 와요. 도련님 친구분들이라니,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장운의 부인 염 씨가 차를 내오며 그렇게 인사했다. 그런데 소림 승려답게 불호를 외며 답례하는 진견과는 다르게 서하는 그녀가 어색한 모양인지 말도 없이 꾸벅 머리만 숙였다. 염 씨는 그런 서하를 보고도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다가 살짝 놀라서 말했다.
“어머, 너 눈이 정말 예쁘구나?”
서하는 흠칫 놀라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짙푸른 눈이 반짝거렸다. 녀석은 잠시 그 큰 눈을 깜빡거리며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염 씨의 칭찬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한 듯했다. 그건 아이답지 않은 반응이기도 했다. 염 씨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다른 어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과도 좀 챙겨올게요. 차 드시고 계세요.”
그렇게 염 씨가 밖으로 나가자 장운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차를 홀짝 마셨다.
“그래, 소림의 승려시라고요?”
“아미타불, 소승 진견이라고 하외다. 장 무사의 형님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소.”
“아, 저도 반갑습니다. 소림사는 어릴 적에 딱 한 번 가봤지요. 이른 아침 그 어슴푸레한 안개에 휩싸여 있던 고요한 대사찰이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진견이 반색했다.
“오오, 본사에 와보신 적 있으십니까?”
“음,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서···”
갑자기 장운의 입이 다물어졌다. 진견은 그런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 장운이 슬쩍 장건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음을 눈치챘다.
가정사는 어디나 복잡하기 마련이다. 당장 그도 사형제의 사연이 있었다. 그래서 진견은 얼른 말을 이었다.
“확실히 새벽 산안개에 휩싸인 본사는 그림처럼 아름답지요. 본사를 방문한 많은 손님이 그 풍경을 보려 일찍 일어나거나, 밤을 새우거나 하시니까요. 그래도 소승은 밝은 낮이 좋습니다. 화창한 햇살과 초록이 반짝이는 산등성이, 또렷이 보이는 기와와 녹청들. 한낮에만 볼 수 있는 생명의 꿈틀거림이랄까요.”
“···스님 말씀을 들으니 한낮의 사찰도 좋을 것 같군요. 허허.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장운과 진견 두 사람은 장건의 생각대로 죽이 잘 맞아 부드럽게 담소를 이어갔다. 장건은 가만히 찻잔을 들어 입을 가리며 그 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조금 전 장운이 꺼낸 이야기에서 시작된 상념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머니. 정확히는 중원 장 씨 세가의 양 부인. 그녀가 처음부터 장건에게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 한 것은 아니었다.
이전 생을 기억하는 장건은 아주 어릴 적부터 비범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본인은 최대한 아이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려 했고, 또한 마음은 몸을 따라간다 해서 아이로 살다 보니 진짜 아이처럼 행동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네다섯 살을 넘어 머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더는 그러기 힘들어져 갔다. 서너 살 많은 장운보다 형 같고, 때로는 아비나 가문의 어른들과 대등한 지성을 보이는 아이가 평범한 아이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가문의 어른들은 장건이 수백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가 아닐까 의심하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 기대가 싫었던 장건은 결국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자신이 전생을 기억한다 털어놓았다.
그런데 가문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어쩌면 그들은 장건이 정말 너무 똑똑해서 일부러 사람들의 기대를 떨어뜨리려 그렇게 행동했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몇몇 어른은 그게 그냥 장건 혼자만의 상상이라고 그를 꾸짖기도 했다.
진짜 그 전생이라는 말을 믿어준 것은 그와 매일 얼굴을 마주 보고 사는 아버지와 형 장운, 막내 장연, 그리고 양 부인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지금 있는 그대로의 그만 바라봐준 형제나 가문의 이름을 알릴 수 있다면 그 속이 무엇이라도 상관없다고 여긴 아버지와는 다르게, 양 부인은 소림사에 큰돈을 시주하거나 도사를 초청해 장건의 영혼을 정화하려 했다. 그건 장건이 열 살이 되기 전까지, 처음 그녀의 배에서 나왔을 때부터 장건이 장건이었음을 인정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이놈, 장건아. 듣고 있냐?”
찻잔을 들고 탁자를 바라보며 과거의 상념에 빠져 있던 장건은 장운이 부르는 소리에 스윽 시선을 들었다. 장운과 진견, 서하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 게냐?”
“···형수님은 차를 잘 끓이시는군요.”
딱 봐도 그게 아니었지만, 장운은 더 묻지 않고 털털 웃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안 듣고 있었다니 다시 말하마. 넌 한동안 어디 갈 생각 말고 여기 계속 머물 거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집안에 계속 있으라고요?”
장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신사천에 있으라고. 또 예전처럼 그냥 어디론가 사라지지 말고. 지금 열심히 바다를 가로질러 오는 녀석이 있으니까 말이다.”
장건은 잠시 장운이 무슨 말을 한 것이지 알아듣지 못하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 말뜻을 알아듣고 자기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연이가 옵니까?”
“그래, 이놈아. 고 녀석이 기어코 널 봐야겠다고 자기 남편까지 끌고 온댄다.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은 게 벌써 몇 달 전이니 지금쯤 거의 다 왔을 거다.”
“가문에서 그걸 허락한 겁니까?”
장운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랬겠냐? 하지만 그 말괄량이 녀석은 이제 가문 어른들도 못 막아··· 입군에 그렇게 실패했으면 간이 작아져야 하는데, 이 녀석은 어째 점점 더 기고만장해져··· 어쨌든, 그렇게 오래 있으려는 것은 아니고 잠깐 우리 얼굴이나 보고 관광이나 좀 하다가 돌아갈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그 녀석한테 붙잡혀 살 불쌍한 매부 얼굴을 봐야지.”
장건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 옅게 웃었다. 예전 신대륙으로 떠나는 배에 올라설 적엔 다시 가족을 만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족의 연이라는 게 그리 쉬이 끊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때 장건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슬쩍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얇은 문틈으로 안을 훔쳐보는 네 쌍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들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소리도 죽이고 조심스러워하고 있었지만, 말썽꾸러기들이 늘 그렇듯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말썽꾸러기들의 시선은 얌전히 앉아서 차를 홀짝거리는 서하를 향하고 있었다.
“큼큼···”
“허흠···”
장운과 진견도 아이들의 꼼지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서하만 혼자 상황을 모르고 두 눈을 내리깐 채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장건은 드르륵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거침없이 문으로 다가가 덜컹 문을 당겨 열었다.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이 집의 꼬마 넷이 우르르 넘어져 바닥에 쏟아졌다.
장 씨 남매와 단 씨 남매가 동글동글한 눈으로 깜빡깜빡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장건은 그걸 보고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이 녀석들. 누가 남의 이야기를 훔쳐 들으래?”
“···헤헤. 이쁜 누나가 있다고 해서···”
“뭐?”
장건은 상상을 뛰어넘는 꼬마 장상의 대답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장운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대답을 들은 장운은 자기도 모르게 눈가를 감쌌고, 진견은 그냥 허허 웃으며 염주를 굴렸다.
어른들이 당황하는 동안 바닥에 엎어졌던 아이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 장상의 동생 장영이 슬쩍 서하에게 다가갔다.
“언니. 우리랑 같이 놀아요. 어른들 얘기는 재미없잖아요.”
야무진 장영의 말에 서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른들 눈치를 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흔들리던 아이의 눈은 끝내 장건을 바라보았다.
장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서하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이 살짝 의자에서 내려오자 장영이 얼른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았다. 서하가 함께 어울릴 것처럼 보이자 다른 세 아이의 표정도 밝아졌다.
녀석들은 곧 누가 말릴 것도 없이 꺄르르 웃으며 우르르 방을 뛰쳐나갔다. 서하는 붙잡힌 손길에 그대로 이끌려 아이들을 따라 나갔다.
“어머!”
다과를 가져오던 염 씨가 다리 쪽으로 우르르 달려가는 아이들을 피해 쟁반을 높이 들어 보이며 등장했다. 그녀는 복도로 멀어지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방 안의 어른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이 벌써 친해졌네요? 같이 먹으라고 군것질거리도 좀 챙겨왔는데.”
“그건 우리가 먹겠습니다.”
그녀의 쟁반은 장건이 받아들었다. 염 씨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야기들 나눠요. 저녁 준비되면 알려줄게요.”
염 씨는 그렇게 다시 방을 나갔다. 잠깐 소동이 지나간 후 서로를 돌아본 세 남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하하 웃었다. 뭔가 가볍게 씹을 것이 생기자 장운은 냉큼 숨겨두었던 술을 꺼내왔고, 그 자리는 그대로 술자리가 되었다.
잠시 후 집으로 돌아온 단상운도 자연스럽게 술잔 하나를 들고 자리에 끼어들었다. 술자리는 식사 후 저녁 바람 시원한 앞마당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염 씨나 단상운의 부인인 채윤도 가볍게 술잔을 들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방에서 꼼지락거리며 자기들끼리의 놀이에 열중했다. 아이들은 서하를 오늘 처음 만난 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부모님이 어디 있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냥 그 순간 함께 어울리는 놀이에 집중할 뿐이었다.
장건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턱을 괴고 앉아있다가 방에서 꺄르르 들리는 서하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도 웃음이 나왔다. 아이를 장운의 집으로 데려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진견은 가만히 염주를 굴리며 그런 장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귀에도 서하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 자리는 정말 북적북적했다. 아이만 다섯이나 되는 자리였다. 다들 먹는 것에만 집중해도 소란스러울 숫자였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식사 후에는 장운과 단상운은 상회로, 아이들은 글 선생을 맞이할 준비를, 진견은 이야기했던 대로 신사천의 사찰을 찾아서, 그리고 장건은 서하와 함께 상회의 마구간을 찾았다.
“조조는 기억하지?”
“네. 귀여웠어요.”
그 음흉한 놈이 귀여웠다는 말에 장건은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녀석과 오랫동안 함께했던 장건 입장에선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장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구간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상회의 말들이 몇몇 보였다. 서하가 얼른 안으로 들어와 조조를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저놈 왜 저기 저러고 있어?”
조조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기 마구간 구석에서 장건에게 엉덩이를 보이고 서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임마, 왜 그러고 있어?”
하지만 조조는 대답이 없었다. 꼬리가 펄럭거리는 걸 보아선 분명 자신을 부른 것이 장건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구간 구석에 처박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서하는 장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저러는 거예요?”
“···아무래도 삐쳤나 본데.”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저 녀석을 타고 달려본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무림맹이니 제가니 하는 일들은 신사천 안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조조를 타고 달릴 일이 없었다. 녀석은 지금 답답해 죽겠다고 시위하는 것이었다.
“임마, 너 보겠다고 서하도 찾아왔는데 뭐해. 오랜만에 얼굴도 안 볼 거야?”
조조는 장건의 말에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서하를 발견하고는 반색하더니 얼른 몸을 돌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녀석은 얼른 마구간 울타리 너머로 머리를 내밀어 서하를 반겼다. 서하는 손을 뻗어 녀석의 콧잔등을 만지작거렸다.
“난 안 보이냐?”
울타리에 어깨를 걸치고 선 장건이 시큰둥하니 물었지만 조조는 아는 척도 하질 않았다. 아무래도 제대로 삐친 모양이었다. 녀석은 혓바닥으로 서하에게 장난을 치며 푸르륵거렸다. 서하는 그게 재밌는지 맑게 웃었다.
옅게 웃으며 그런 둘을 바라보던 장건은 문득 마구간 앞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밝은 바깥을 등지고 등장한 남자는 집 안 사람도, 상회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장건과 아는 사람이었다.
장건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규상?”
제가의 그림자 무사였던 남자는 간편한 짐가방 하나를 메고 마구간 문 앞에 서서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잘 지냈나? 떠나기 전에 인사나 하러 들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