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7)
17화
소녀는 자신을 비랑悲狼, 슬픈 이리라 불러달라 했다. 장건은 잠깐 본 와중에도 그리 밝고 활발해 보이던 그녀가 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지 궁금해졌지만, 그녀가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았기에 묻지 않았다.
지금 장건이 있는 천막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적풍의 말로는 그를 보살피기 위해 일부러 안 쓰던 천막을 세운 것이라 했다. 비랑은 물과 걸쭉한 죽 같은 것을 차려오고는 천막을 나가버렸다. 적풍은 아직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 했다.
“사례를 하고 싶은데.”
죽을 비운 장건이 아직 천막 안에 앉아있는 적풍에게 말했다. 적풍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례? 보상하고 싶다는 거지? 그럼 돈으로 주게.”
“···중원인 돈을 쓰시오?”
“우리끼린 안 썼지. 하지만 아랫마을에 가서 물건을 사려면 중원 돈이 있어야 해. 덕분에 주변 다른 부족끼리도 중원의 돈을 쓰는 편이네. 막상 또 이렇게 쓰니까 편하더라고.”
장건은 피식 웃으며 천막 구석에 놓여 있던 자기 옷을 찾았다. 그리고는 지난날 노름을 하고 남은 돈 중에서 동전 한 닢만 빼고 모두 적풍에게 내밀었다. 적풍은 주머니 안에 든 은전을 보고 활짝 웃었다.
“오! 이걸 다 주나?”
“대신 며칠만 지내겠소.”
“얼마든지 그러게! 아! 자네 칼도 돌려줘야지? 잠깐만 기다리게. 내 금방 가져다주지.”
적풍은 그렇게 말하고는 천막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건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단전에서 일어난 힘이 경맥을 거쳐 십이경락, 기경팔맥을 지나 낙맥으로 뻗으니 전신 혈도가 후끈해졌다. 장건의 어깨를 관통한 연씨 무사의 창에는 꽤 진한 독이 묻어 있었고, 그 독기는 관통상의 악화를 불렀다.
그래서 장건은 나중에 묶었던 혈도를 풀어 죽은 피와 동시에 경락을 어지럽히던 독기까지 함께 뽑아냈었다.
하지만 그때 예상과 달리 뿜어낸 피가 너무 많아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내공은 주인의 의지가 사라지자 몸의 활동을 최소화하며 상처의 회복을 돋웠지만, 그래도 비랑이 그를 발견해서 데려오지 않았다면 상처회복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장건은 어깨 쪽에 미세하게 남은 독기의 찌꺼기를 태워버렸다. 동시에 주변 경락을 자극해 치유력을 높이고 차분히 운기행공을 마쳤다. 수많은 무공 선생의 가르침과 장건 본인의 창의적 시도, 그리고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내공이 묵직하게 단전을 채웠다.
긴 숨을 내뱉으며 눈을 뜬 장건은 팔을 움직이기가 한층 더 편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 머물 기간이 그리 길 것 같지는 않았다.
몸을 일으킨 장건은 옷을 챙겨 대충 걸치며 천막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공기 속에 쨍하니 눈을 찌르는 햇빛이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굽혔던 허리를 펴자니 나무로 지은 오두막과 천막이 뒤섞여 뭉게뭉게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마을이 보였다. 장건이 나온 천막은 그 마을 제일 외곽에 있었다.
“어? 벌써 나와요? 안에서 좀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보니 비랑과 조조가 보였다. 비랑은 조조의 안장을 풀고 녀석을 빗질해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장건은 그런 비랑을 보며 옅게 웃었다.
“죽은 잘 먹었소.”
“아, 입맛에 좀 맞았나요?”
“좀 싱겁던데.”
“···보통 이럴 땐 맛이 없었어도 맛있다 해주지 않아요?”
“그래도 싱거운 건 싱거운 거지.”
비랑은 샐쭉하니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럼 다음엔 알아서 차려 드셔야겠네요. 난 소금 조절을 못 해서.”
“싱겁다 했지, 맛이 없다고 하진 않았잖소. 맛있게 먹었소.”
“···그래요?”
샐쭉대던 그녀는 금방 비시식 웃다가 얼른 조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 이름이 있나요? 똑똑한 녀석이던데. 처음엔 막 날 막으려고 하더라고요.”
“똑똑하기보단 영악한 편이지. 이름은 조조요.”
“조조?”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조조는 대번에 그녀에게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푸르릉거렸다. 그 소리가 꼭 사람이 능글맞게 웃는 것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비랑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조조의 갈기를 쓸어주었다.
“조조. 조조라. 내가 중원인들 이름 짓는 건 잘 몰라서요. 하지만 발음하는 게 재밌는 이름이긴 하네요.”
“나도 재밌을 것 같아서 그렇게 지었었지. 하지만 날이 갈수록 영악해지는 게 아무래도 잘못 지은 이름 같소.”
“왜요? 무슨 뜻인데요?”
“뜻보다는 그 이름의 원주인이 문제가 좀 있었지···”
비랑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설명해 달라는 듯 장건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장건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명할 길이 없어서였다. 없어진 역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런 장건을 구해준 것은 적풍이었다. 그가 장건의 칼을 왼손에 들고 나타난 것이다.
“오, 장건. 밖으로 나와도 괜찮겠나? 하긴 뭐. 원래 좀 움직이고 그래야 더 빨리 낫고 그러는 거지. 마침 잘 되었네.”
장건과 비랑이 무슨 뜻이냐는 듯 바라보자 적풍이 말을 이었다.
“자네 칼을 가져다주려니까 어르신이 얼굴 좀 보자는군. 이왕 일어난 거 바로 가세.”
“어르신?”
“그분은 영혼과 소통하시는 분이네. 우리 부족에서 제일 연장자이시기도 하지. 그리고 자네를 치료하는 걸 부족 사람 중 두 번째로 강하게 주장하신 분이기도 하네. 첫 번째는 말 안 해도 알지?”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을 어른이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적풍이 앞장섰다. 그때 뒤에서 얼굴을 붉히던 비랑은 얼른 따라붙으려 했다. 하지만 적풍이 그녀를 막았다.
“단둘이서 보고 싶으시다는구나.”
그녀는 아쉬운지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결국 그 자리에 멈춰서서 가만 장건을 바라보았다. 적풍을 따라가던 장건은 그 황금빛 눈을 보곤 다시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포권했다.
“구해줘서 고맙소.”
비랑은 그 말에 활짝 웃었다.
“뭘요. 삼촌 말 들어보니 그렇게 위험하시지도 않았다면서요. 나중에 중원 쪽 이야기나 들려주세요.”
* * *
장건은 적풍의 뒤를 따라 걷자니 부족 안을 오가던 사람들이 경계심 어린 눈으로, 혹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은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었는데,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멀뚱하니 그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장건 입장에선 그 반짝거리는 금빛 눈들이 부담스러웠다.
적풍은 중간중간 그들을 붙잡고 질문하려는 부족 사람들에게 어르신이 불러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길을 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걸어 부족과 숲 사이에 세워진 조그만 천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천막 앞에 선 적풍이 장건을 붙잡았다.
“자네가 우리 말을 잘하는 걸로 보아 어르신 앞에서도 예의를 잘 지키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네. 하지만 그래도 한마디 해야겠지. 중원인의 시선에서 함부로 행동하는 일 없도록 하게.”
장건은 고개를 깊게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적풍은 그 과묵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슬며시 웃으며 천막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르신, 그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들여보낼까요?”
그리고는 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없었는데 천막 입구를 걷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 보게. 칼은 그 이후에 돌려주지.”
장건은 그런 모습에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몸을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보니 부족의 최고 연장자 겸 주술사인 모양인데 이렇게 쉽게 만나도 되는 것일까?
천막 안은 알록달록한 천과 깃털, 동물의 뼈와 가죽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입구를 바라보는 천막 제일 안쪽에는 천막 안과 비슷하게 치장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깊게 팬 주름과 뜬 듯 감은 듯 보이는 눈, 얼굴에 그려진 노랗고 붉은 문양이 눈에 띄는 노인이었다.
그는 장건이 들어서자 한쪽 눈만 슬쩍 뜨며 바라보았다. 장건은 그 눈동자가 붉은색이라는 것에 신기함을 느끼며 가볍게 손을 모았다.
“장건이라고 합니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붉은 외눈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잠시 생각하던 장건은 그냥 털썩 자리에 앉았다.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난 앉으라고 안 했는데.”
“서 있기에는 천막이 좀 낮아서.”
노인은 장건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뚫어지라 바라보다가, 삐죽 웃었다.
“발음이 괜찮군. 우리 말은 어디서 배웠나?”
“여기서 남서쪽으로 멀리 가면 해안가에 천후성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황제가 이 땅에 세운 세 도시 중 제일 큰 곳이죠. 거기엔 이쪽 땅 사람들도 많이들 일하고 있고요. 그중엔 돈 받고 각 부족의 말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원인 밑에서 일한다고? 분명 바위 사람이나 황야 사람들일 거다. 그쪽 사람들은 원래 먹고살기 힘들었으니까. 그래서 남쪽 사투리 느낌이 나는 것이군.”
장건은 그 말에서 부족 간의 깊은 골과 거리가 느껴지는 것 같아 씁쓸했다. 지역에 따른 감정이 있는 것이 사람 사는 곳은 다들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그 뒤를 따랐다. 그때 노인이 말을 이었다.
“난 외눈 구름이라고 하네. 이 마을에서 제일 오래 산 늙은이지. 아마 부족 젊은이 중에 저 노인네 왜 안 죽는 것일까 생각하는 놈도 분명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어. 이 주변 부족을 통틀어도 나만큼 오래 산 노인네는 없을걸? 그리고 그게 다 조상신들이 날 돌본 덕분인데 그걸 가지고 사악한 주술을 쓴 것이 아니냐는 놈들도 있었네. 물론 그런 놈들은 내가 가만두지 않았지···”
장건이 가만 듣자니 노인의 말이 끝없이 늘어졌다. 하지만 적풍의 말도 있고 해서 장건은 애써 그 말을 끊지 않았다.
“···아무리 다른 부족이라도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놈들이 벌건 갓난아기였을 때도 난 이 마을 주술사였어. 하여간 요즘 젊은이 중에 나이를 존중하는 건 붉은 바람 정도인 것 같단 말이야. 아, 이렇게 중원인을 만나는 건 오랜만이라 쓸데없는 말이 길어지는군. 자네 이름이 뭐라고?”
“···음. 반갑습니다, 외눈 구름. 다시 소개하지만 장건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적풍과 비랑이 말 많은 이유가 이 노인 때문인 것 같았다. 장건은 어쩌면 거기에 마을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말이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주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만 놔두면 말이 또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얼른 물었다.
“날 마을에서 치료하는 걸 강하게 주장하셨다더군요. 왜 그러셨습니까?”
“그럼 슬픈 이리가 업어 온 것을 가져다 버리라고 할까? 자네의 말이 자네를 아주 잘 따랐다더군. 말의 심장을 얻은 자가 최소한 악인은 아닐 터이니, 다치고 지친 사람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었네.”
“···그러셨군요.”
장건은 눈을 내리깔며 가볍게 웃었다. 어딘가 익숙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흥미도 생겼기 때문이었지.”
외눈 구름의 이어진 말에 장건은 약간 어리둥절했다. 강가에 쓰러져 있던 중원인이 흥미로웠단 말일까?
노인은 그 표정을 보며 천천히 반대쪽 눈을 떴다. 어둑한 천막 안에서 느릿하게 떠진 눈은 은색 고리 모양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붉은 오른눈과 은색 왼눈. 천막의 그림자 안에서 은은히 빛나는 두 눈은 어떤 아득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신비함이 있었다. 그 두 눈이 장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노인의 입이 열렸다.
“그래, 두 번째 사는 삶은 어떠신가? 즐거운가?”
장건은 잠시 대답 없이 그 두 눈을 가만 마주보기만 했다. 그는 흔히 비밀을 들킨 사람들이 그러듯 당황하지도, 혹은 어떻게 알았냐 묻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한 표정 그대로 신비한 두 눈을 마주 보다가 역시 차분히 대답했다.
“즐겁지만은 않더군요. 세상사 다 그렇듯이.”
외눈 구름은 그 평온함을 꿰뚫어 보겠다는 듯한 깊은 눈으로 한참이나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장건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노인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삿된 주술이나 못된 힘을 이용한 건 아닌 것 같군. 그래, 정말 가끔 그냥 그런 일이 있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장건은 피식 웃었다.
“흥미가 생겼다는 게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그럼 두 번째 삶을 사는 사람을 보고 흥미가 안 생기면 그게 사람인가? 슬픈 이리가 업어온 자네 얼굴을 봤을 때 얼마나 놀란 줄 아나? 처음엔 악마인 줄 알았어!”
“전 오히려 어르신 눈이 더 신기하군요. 제 영혼이 보이기라도 하는 겁니까?”
“어허! 그런 건 물어보는 게 아니네. 주술은 하나하나 해체되면 힘을 잃는 법이야. 자네들도 그 무공이라는 것의 비밀을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면서?”
“···대부분은 그냥 돈 주면 가르치기도 합니다.”
장건은 약간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무공 기초가 돈으로 세운 것 아니었던가. 하지만 외눈 구름은 그 대답을 듣고 방금까지의 진지함을 지우며 반색을 했다.
“오. 그럼 자네도 돈 받고 무공을 가르치나?”
“···제 무공은 조금 곤란할 텐데요. 워낙 잡다하게 익힌 재주라.”
하지만 노인은 껄껄 웃었다.
“괜찮네. 그럼 상대만 좀 해주면 되니까.”
“···상대요?”
장건은 방금의 떨떠름함이 좀 더 진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