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지붕 위에 선 장건의 시선이 사공을 떠나 천천히 마당을 둘러보았다.
입가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단상운과 등판에 큰 상처가 난 진견, 그리고 겁에 질린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중 장건을 발견한 서하가 환해진 얼굴로 외쳤다.
“아저씨!”
차갑게 굳어있던 장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였다.
“···버러지들 때문에 시간을 너무 끌어버렸군.”
잠시 멍한 눈으로 장건을 올려다보던 사공은 서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동시에 쇠 긁는 듯했던 그녀의 음성이 더 음산하고, 예리해졌다. 목소리만으로 주변 공기가 차가워지는 듯했다.
장건의 눈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입가에 머물던 미소는 거짓말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그가 말했다.
“마궁이냐?”
“···함부로 마魔를 붙이지 말지니, 그 글자는 먼 옛날 도둑황제의 씨들이 우리를 매도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글자를 만든 것에 불과하다. 식견이 있는 자라면 그를 알고···”
“난 장건이다.”
사공의 입이 다물어졌다. 장건이 정말 정체를 확인하려 물어본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그녀에게 칼을 휘두르기 전에 그것을 통보하고 있었다.
꾹 입을 다문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녀와 함께 왔던 마인들은 모두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진견과 단상운 또한 상처를 입고 물러나 있었으니 똑바로 서서 상대를 마주 보는 것은 그녀와 장건뿐이었다.
홀로 장건과 마주 보고 있음을 깨달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수. 성은 잊은 지 오래다. 배를 땅에 대고 기는 자들의 주인이며 대계의 이행자요, 중원대륙의 마땅한 주인을 모시는 하인이다. 사공蛇公이라 부르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몸을 돌려 장건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창백한 두 손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런 자연스러움과는 별개로 그 안에는 극성의 내공이 담기는지 원래도 창백하던 피부의 색이 이젠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져 그 안의 핏줄이 훤히 비쳐 보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내려다보던 장건이 말했다.
“빈집털이 주제에 직함은 많군.”
그녀를 단순한 빈집 도둑 정도로 만들어버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리어 자신의 늙고 젊은 얼굴에 가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상대가 가장 약해졌을 때를 노리는 것은 병법의 기초. 구음사혈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깟 비난이 무슨 상관이랴. 게다가 저 계집 하나로 대계의 완성이 이 할은 빨라질 터. 하찮은 목숨 하나로 중원의 수탈당하고 억압받던 수많은 삶이 해방될 테니, 그 쓸데없는 삶을 가장 값지게 쓸 방법이로다.”
장건은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만났던 마인들은 대부분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정신 나간 괴물들이었지만 그 정점이라고 할 만했던 남궁천과 당사운은 조금 달랐다. 그 둘은 다른 마인들과는 다르게 마기에 돌아버리지도 않았고, 각자 나름의 생각이라는 걸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자기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았다.
장건은 그들과 오랫동안 깊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그때 그 순간의 생사를 나누며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늙고 젊은 얼굴을 가진 저 여인을 마주한 순간 장건은 그 장군들을 만났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비슷한 것은 그 무공의 수준이었고, 다른 것은 저 여자가 방금 스스로 내뱉은 말을 완전히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 괴이한 여인은 정말 자신을 해방자라 여기고 있었다.
청룡이 시퍼렇게 빛났다. 더 말을 나눠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느낀 장건이 내공을 끌어올린 것이다. 지붕 위에 선 장건과 두 손을 늘어뜨리고 선 사공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게 기세를 끌어올린 것만으로 그곳의 공기는 무거워졌다.
그런 상황을 본 단상운과 진견은 얼른 아이들을 집안으로 몰아넣으며 물러섰다. 사공은 그런 움직임을 느끼면서도 장건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녀는 주름진 반쪽 얼굴에서 가는 땀방울 하나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과연 남궁장군과 당장군이 패배한 이유가 있었구나. 어디서 이런 자가 나왔을꼬···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할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인데···”
“지랄하네.”
헛소리에 대한 짤막한 대답 후, 그는 지붕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청룡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로 터벅터벅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가 지붕 아래로 내려선 순간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던 사공은 그렇게 다가오는 장건을 보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어떤 위기감을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끌어올린 내력을 모조리 쏟아냈다.
그녀의 두 손이 무수한 잔영을 만들며 늘어났다. 조금 전 진견과 싸울 때는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는지 이번엔 손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여러 잔상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마치 손과 팔 수십 개와 젊은 얼굴, 늙은 얼굴을 여럿 가진 괴이한 여신 같았다.
그 모든 잔상은 아주 잠시지만 전부 실체이자 허상이었다. 그것은 무공, 정확히는 마공과 중원의 술법, 그리고 이 땅 원주민의 주술이 합쳐져 만들어진 기이하고 혼란스러운 수법이었다. 마공을 포함해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들이 하나로 뭉쳤기에 소림의 항마降魔 무공을 익힌 진견도 눈으로 보고도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장면을 본 진견은 아차 했다. 장건에게 조심하라는 경고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상대의 힘에 조금이라도 대비하는 것과 아주 모르는 것은 목숨을 건 싸움에선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너무 늦었고, 장건과 사공이 격돌했다.
아니, 격돌했다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었다. 장건은 처음처럼 뚜벅뚜벅 사공을 향해 걸었을 뿐이다. 대신 사공의 수많은 손이 그렇게 다가오는 장건을 향해 쏟아졌다. 그 무수한 선 중 장건이 막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선만 현실이 될 터였다.
“허···”
“오···”
그런데 장건은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그저 그녀에게 걸어갈 뿐인데, 그렇게 쏟아지던 무수한 잔영은 햇빛이 닿은 그림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그를 지켜보던 진견과 단상운이 각각 다른 의미의 탄성을 흘렸다.
진견은 자신이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었던 무공이 허무하게 깨져나가는 모습에, 단상운은 그 순간 장건의 몸에서 시작될 수 있는 무한한 검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공의 잔영이 그려낸 모든 선은 장건을 시작점으로 하는 단 하나의 휘두름을 막지 못했다.
마침내 장건의 걸음이 멈춘 순간 그 앞에 남은 것은 그저 괴이한 얼굴을 가진 여인 하나뿐이었다.
사공은 살짝 넋이 나가서 물었다.
“···내 소수무한공素手無限功이···”
“술법으로 경우의 수를 눈에 보이게 만든 건가? 뭔가 신기하긴 한데, 별로 쓸모는 없군.”
다음 순간 장건의 칼이 번쩍 사공의 목을 노렸다. 그때 그녀가 반사적으로나마 손을 들어 그 칼날을 막으려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수준이 다른 마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걸 말해주었다.
“크윽···”
사공은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 물러나는 경로에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져 바닥에 붉은 꽃을 피웠다. 그 꽃이 시작된 곳에는 창백한 손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공의 손이었다.
“···참으로 안타깝군. 시작이 어긋나지 않았더라면 훌륭한 궁의 인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장건은 손목이 잘려 나가는 와중에도 헛소리를 하는 사공의 모습에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혹여나 마궁과 그의 첫 만남이 나쁘지 않았더라도, 원주민을 학살하는 그들에게 협조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처음 마궁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계곡 부족에서의 음모를 깨부수던 때였다.
휙휙 청룡을 털어내며 잡념을 정리한 장건이 마무리를 위해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녀의 손이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던 탓에 목을 베지 못했다. 이번엔 그걸 감안하고 칼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다음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우뚝 멈췄다. 손목을 부여잡은 사공에게서 뭔가 기이한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과연 본궁의 두 장군을 쓰러뜨릴 만한 무력이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공 말고도 수많은 힘이 있으니, 과연 이것마저도 내 손목처럼 단칼에 썰어버릴 수 있을까?”
그 다음 순간 바닥에 뿌려진 붉은 핏방울에서 붉은 연기가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순식간에 그들이 선 마당을 가득 채우고 사방을 뒤덮어버렸다. 진하기는 또 얼마나 진한지 한 치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붉은 연기가 들어간 것은 상황을 지켜보던 집안 쪽도 마찬가지였다. 진견과 단상운도 그 갑작스러운 파도에 깜짝 놀라 당황했고, 조금 전까지 바로 곁에 있었던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게 되자 아이들은 다시 겁에 질려 울먹거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붉은 안개뿐이고, 타인의 존재는 소리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장건은 처음 걸음을 멈춘 순간 그대로 서 있었다. 그의 귀에도 당황한 진견과 울먹이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런 장건의 귓가에 사공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 이제 어쩔 것이냐? 이제 내가 구음사혈을 붙잡아 도망쳐도 넌 날 막을 수 없다. 그렇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속에서 네 스스로의 무력감을-]가만 서 있던 장건이 휙 청룡을 집어 던졌다. 은빛 원반이 되어 붉은 안개 속으로 날아간 청룡은 곧 뭔가를 만나 싹뚝 베어내는 소리를 냈다.
“어?”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스르륵 붉은 안개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당황한 채 얼른 몸을 긴장시키던 단상운과 진견은 바로 옆에 있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붉은 안개는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저기 봐요!”
애초에 장건을 믿고 당황하지 않고 있었던 서하가 제일 먼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왼쪽 어깨부터 팔이 잘려 나간 사공이 줄줄 피를 흘리며 비척거리고 있었다. 그녀 뒤 집안의 기둥엔 청룡이 틀어박혀 있었다.
오른 손목과 왼팔을 잃어 완전한 불구가 된 사공이 파르르 떨며 장건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보았느냐?”
“보지 않았다.”
“그럼?”
장건은 다시 사공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
“느꼈지.”
다가오는 장건을 본 사공은 이를 악물었다가, 곧 짐승처럼 캬아-하고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잘려 나간 왼팔과 오른 손목에서 조금 전 마당을 뒤덮었던 붉은 안개가 뭉글뭉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장건은 연기가 쏟아지든 말든 성큼성큼 그녀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모습에는 장건도 살짝 당황해야 했는데, 그건 붉은 연기로 온몸을 감싼 그녀가 갑자기 자신이 폭죽이라도 된 것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우와···”
그걸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장건과는 다르게 서하는 신기하다는 식으로 감탄을 흘렸다. 그리고 그건 아이 옆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진견, 단상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멍한 눈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는 사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은 그런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조금 전까지 겁에 질려서 울먹대던 아이들이나, 죽음 각오한 무인의 모습을 보여주던 두 어른 모두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걸 보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의 눈도 다시 하늘을 향했다. 붉은 연기에 휩싸인 채 하늘로 치솟던 사공은 어느 정도 높이에 이르자 허공에 우뚝 멈춰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건은 두 눈에 내력을 집중한 덕분에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마치 지금 이 집과 장소, 그리고 오늘 이 순간을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하겠다는 원한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장건은 다시 고개를 내려 진견을 바라보았다. 진견도 그 문득 시선을 느끼고 눈을 내려 장건을 마주 보았다.
장건이 말했다.
“혹시 지금 소림사에 이 무공이 있는지 모르겠소.”
“···무슨 무공?”
진견은 멍하니 되물었다. 하지만 장건은 대답 대신에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릎을 살짝 낮추며 가볍게 말아쥔 두 주먹을 양 허리에 붙였다. 이후 그 상태로 고개를 들어 하늘 위 사공을 올려다보던 장건은 바닥을 스치듯 왼발을 앞으로 반 발짝 내디디며 오른 주먹으로 허공을 올려 쳤다.
그 주먹이 그렇게 허공을 때린 순간, 그 타점에서 퉁-하는 깊은 종소리가 울렸다.
이후 종소리보다 빠르게 뻗어나간 권력拳力이 하늘 위 사공의 가슴을 관통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사공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을 감싸던 붉은 연기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멍한 눈으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진견은 그 시선 그대로 다시 장건을 바라보았다.
장건은 깊은 호흡을 내뱉으며 다시 처음의 자세로 돌아와서는, 곧 그마저도 풀어버리고 툭툭 손을 털며 말했다.
“백보신권百步神拳이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저택의 지붕 위로 사공의 시체가 툭 떨어져 기와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