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진견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신권神拳이라 이름 붙여도 모자람 없는 무공이오.”
그의 눈이 조금 전까지 사공이 날던 하늘과 장건을 번갈아 보았다. 바닥이 아니라 하늘의 거리를 가늠하자니 쉽지 않았지만, 장건의 백보신권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적어도 십 장 이상의 거리를 꿰뚫어 사공을 떨어뜨린 것으로 보였다.
달마의 일위도강一葦渡江 고사를 아는 진견으로서는 지금 이 장면이 마치 새로운 고사나 전설이 만들어지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장건은 그의 반응을 보며 소림에 백보신권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는데, 소림사에 그런 무공이 있었다면 자연스레 유명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장건은 가문에서 살 적이나 중원을 떠돌 적에도 그런 소문은 들어본 적 없었다.
백보신권은 장건이 오랫동안 생각하던 무공이었다. 하지만 당장 내력을 외부로 강력하게 투사하는 무공 자체가 흔치 않았던데다가 그의 무공 자체도 그걸 재현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았다. 생각은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했었지만 그 재현은 아주 먼 미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것이 최근 항룡장의 무리로 격공장에 성공하며 가능성을 얻었다. 그 후 그 격공장의 무리에 거기에 예전 서하의 몸을 치료하며 느꼈던 대환단의 기운을 흉내 내 엮어내자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묵직한 종소리가 울리며 강력한 권풍이 뿜어진 것이다.
장건은 여전히 멍한 표정의 진견에게 말했다.
“소림의 것을 흉내 내 만들어진 권법이니, 소림에게 돌려주겠소.”
멍하던 진견의 표정이 대번에 어리둥절해졌다. 잠깐 생각한 것이지만 그가 아는 소림의 무공 중에서 백보신권과 같은 것은 없었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장건이 그걸 알 것 같지는 않았다. 신대륙에 소림의 무승이 진견 그를 제외하고 더 있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찌··· 그럼 소승에게 그걸 가르쳐주겠다는 말이오? 하지만 소림에는 그런 권법이 없는데···”
진견의 그런 흐린 의문에도 장건은 옅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진견에게 다가와 그의 등짝에 있는 상처를 살폈다.
“크으음···!”
그제야 잊고 있던 상처와 고통을 떠올리게 된 진견은 두 눈을 찔끔 감고 신음을 흘렸다. 장건은 손가락을 세워 아직도 옅게 피가 새어 나오는 상처를 지혈해 주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단상운과 서하, 나머지 아이들은 이제야 싸움이 끝났다는 걸 느끼고는 다들 슬그머니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단상운이 집 기둥에 몸을 기대며 툴툴 웃었다.
“이거 행수님이 돌아오면 참···”
그 말에 장건과 진견의 눈이 집안과 마당을 향했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들과 난장판이 된 가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체를 본 장건은 슬그머니 아이들의 시야를 가리고 섰다. 지금이야 놀라서 괜찮아 보이지만, 어쨌든 이런 광경은 애들 정서에 좋을 것 하나 없었다.
단상운이 다시 중얼거렸다.
“···이걸 어찌 치우나?”
“우리가 치울 필요 없소.”
“예?”
뜬금없는 장건의 대답에 단상운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장건은 더 말해주진 않고 이젠 아이들을 집안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그때 단상운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뭐야?”
갑자기 절그럭절그럭 쇠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더니 활짝 열려 있던 대문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단상운과 진견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안으로 들어선 자는 셋. 그들 모두 갑옷을 차려입고 허리에 묵직한 검을 차고 있었다.
“···벌써 상황이 끝났군요.”
아이들을 안으로 몰아넣던 장건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셋 중 제일 앞에 선 여인이 아는 사람이었다.
역시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서하가 빼꼼 장건의 옆구리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서하의 얼굴이 확 밝아졌고, 그 얼굴을 본 여인도 표정이 확 펴졌다.
황군 갑옷을 차려입은 그녀의 이름은 진하. 진동장군 유설의 부관이자 호위무사였다.
* * *
감겨있던 두 눈이 천천히 열렸다. 한쪽은 갈색, 한쪽은 파란색 눈동자였다.
“···수가 죽었습니다.”
어린 소녀의 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흘러나온 여인의 얼굴은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얼굴 정중앙을 기준으로 한쪽은 소녀의 얼굴이, 한쪽은 주름진 노파의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희미한 촛불만이 붉게 흔들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또 그 장건이란 자인가?”
어둠 속에는 그 기이한 여인 외에도 몇몇 그림자가 더 있었다. 그 중 묵직한 목소리가 그리 물었다.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의 마지막 상념이 그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장담했던 것과는 달리 기습이 실패한 모양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처음 질문을 던졌던 그림자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아, 이렇게 또 우리의 가족이 떠났구나. 시체가 수천 리 밖에 있으니 그마저도 챙겨주지 못하니··· 그깟 구음사혈이 뭐라고···”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다른 그림자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남궁 가주께서는 말씀을 조심하시지요. 그깟 구음사혈이라니? 그 핏줄 하나로 대계가 얼마나 앞당겨질지 모르신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 말씀은 수의 죽음마저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겁니다.”
“···옳은 말씀이오, 당 가주. 수의 죽음을 하찮게 만들 수는 없지··· 그러나··· 난 이제 이 일이 정말 이렇게 많은 목숨을 바쳐가며 이뤄야만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하지만 그런 지적을 듣고도 묵직한 목소리는 괴롭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남궁 가주는 정말 말씀을 조심하셔야겠군요. 아무리 여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지만 함부로 대계의 합당성을 의심하시다니.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당장에 무공을 폐하고 농장에 처박아버렸을 겁니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처음 날카롭게 타박하던 목소리보다 훨씬 강경하고 위험한 목소리기도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게다가 이미 남궁 씨 중에서는 남궁천이 본 궁을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남궁 가주께서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시면 궁의 다른 구성원들이 남궁 씨를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그가 정말 회유된 것이리라 함부로 단정 짓진 마시오, 공손 가주. 패배 후 살아있다 해서 그게 본 궁을 배신했다는 증거는 아니지 않소.”
남궁 가주라 불린 목소리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있자, 처음 그를 타박하던 날카로운 목소리가 도리어 그를 두둔했다. 그에 여인은 묘한 콧소리를 흘리더니 뭔가를 들고 흔드는 동작을 펼쳤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으나 좌르륵하는 소리로 그녀가 부채를 펼쳤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당 가주께서도 참 긍정적이시군요. 그 장건이라는 자의 손에 당장군, 그러니까 가주의 동생분도 명을 달리하지 않았습니까? 제 짐작이지만 장건이라는 자는 당장군께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만한 자였을 테지요. 수가 당한 것도 그러하고요. 그런데 같은 자와 싸웠던 남궁천은 죽지 않고 무림맹에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의 마지막 연락 중에서도 그가 처형당해 머리가 길거리에 내걸렸다는 말은 없었으니, 제 의심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부채가 그녀의 입가를 가렸다. 그런데 그 위에 흐릿하게 보이는 여인의 눈이 갑자기 눈웃음을 지었다.
“아니면, 그저 그 장건이라는 자의 손에서 살아남기엔 당장군의 실력이 모자랐던 것일까요?”
어두운 공간이 조용해졌다. 흔들거리던 촛불도 순간 숨을 죽이며 불빛이 약해졌다. 부채로 입가를 가린 여인과 당 가주라 불린 자의 눈이 그 어둠 속에서 마주쳤다. 여인의 눈은 희미한 푸른색으로, 당 가주의 눈은 섬뜩한 녹광綠光으로 번들거렸다.
“···으허허허! 다들 신경이 날카롭구려! 하긴, 당장군과 남궁장군은 물론이고 서부로 파견한 수와 많은 뱀, 감랑대까지 모두 당해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오! 하지만, 젠장, 따져보니 뭐 많지도 않네!”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뱀들이 죽은 것이야 뭐 앞으로 충원하면 될 일이오. 어차피 그들의 주요 업무는 정보 수집과 저열한 신공을 서부에 퍼뜨리는 것 아니었소? 그 정도야 본 궁의 하인 중 아무나 붙잡고 시켜도 할 수 있을 것이오! 감랑대가 다 죽은 건 아깝지만, 전쟁터에서 병사가 죽는 건 당연한 일이오! 마찬가지로 패장이 생기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 전쟁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으허허!”
그 걸걸한 목소리에 어두운 공간 속 긴장은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 당 가주라 불렸던 자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찾으셨소?”
“승패병가지상사? 내가 만든 말인데? 으허허허!”
“···제갈 가주의 공부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듯하군요.”
제갈 가주라 불린 걸걸한 목소리는 좋다고 또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긴장이 해소된 듯 보이자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던 마지막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구음사혈을 손에 넣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어쨌든 그동안의 수확으로 대계에 필요한 원영단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게 얻었소. 사공께서는 그것으로 의식을 벌일 길일을 잡으시오. 가능하다면 이곳까지 황군이 몰려오기 전이었으면 좋겠군.”
“···길일이라는 게 그리 쉬이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와 함께 준비해도 몇 개월은 걸리는 일인데···”
“수는 죽었소. 이제 양, 당신 혼자 해야 할 것이오.”
젊고 늙은 얼굴을 함께 가진 여인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여인의 입을 다물게 만든 목소리는 이어서 다른 가주들을 보며 말했다.
“가주들은 각자의 씨족을 불러보아 전쟁을 준비하시오. 구음사혈이 있었다면 대계의 완성을 우선으로 하겠으나, 이젠 그보다 대륙을 가로질러 몰려올 황군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할 것이오··· 그나마 황제 본인이 달려오는 건 아니니 다행이군.”
“으허허! 그거 다행은 맞군! 아니지? 그렇게 달려온 황제 모가지를 따버리면 그대로 제국은 무너지는 것 아닌가? 옛 진 제국이 그러했듯 말이오! 아, 이거 아쉽구먼!”
마지막 목소리는 대뜸 끼어드는 걸걸한 목소리에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마무리했다.
“이제 돌아가시오. 과연 그 유설이라는 계집이 정말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까지 황군을 몰고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럼 우리는 거기에 합당한 환영을 보여줄 것이오. 어쩌면 중원의 황제에게 보내는 선전포고로 제 딸의 머리를 보내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림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물러서 사라져갔다. 그곳에 그대로 앉아있는 것은 양이라 불린 젊고 늙은 여인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그림자들이 완전히 멀어진 순간, 제일 천천히 물러나던 한 사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리지도 않고 양에게 물었다.
“···그자, 당장군과 수를 쓰러뜨린 자가 장건이 맞소?”
“예, 장건이 맞습니다. 그와 같은 무공을 쓰는 자가 둘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군.”
마지막 그림자, 모용 가주라 불리는 목소리는 잠시 그렇게 더 말도 없이 가만 서 있다가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양은 느릿하게 손을 들어 앞에 놓여 있던 물그릇을 훑었다. 희미한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사람의 얼굴 같기도, 그림자의 비명 같기도 한 모습으로 꾸무럭거렸다.
어두운 공간을 흐리게나마 비추던 촛불은 그 물안개에 훅, 꺼져버렸다.
* * *
“괜찮니?”
진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서하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리 물었다. 서하는 말없이 고개만 한번 끄덕였다. 그를 본 진하는 와락 서하를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서하는 그런 진하의 얼굴을 마주 끌어안아 주었다. 그 모습은 나이 차이가 많은 자매가 서로를 보듬는 것처럼 보였다.
기둥 하나에 옆으로 기대서서 그를 바라보던 장건은 고개를 돌려 마당의 난장판을 정리하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한쪽에 무기를 내려놓은 그들은 말단이긴 해도 분명 황군이었다.
장가 상회에서 난장판이 벌어지는 와중에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얼른 무림맹에 신고했고, 상황을 알게 된 진하가 하던 일 모두 내팽개치고 달려온 것이다.
“아야, 좀 살살 발라주시죠.”
“큼, 크흠··· 나, 나도 좀 살살···”
진견과 단상운은 진하와 함께 온 의원에게 상처를 보이고 있었다. 의원은 손바닥 좀 찢어진 것 가지고 엄살을 부리는 단상운에겐 엄살 부리지 말라는 말을, 등판이 쩍 갈라진 진견에게도 그저 살갗이 좀 다쳤을 뿐이라며 가루약을 마구 뿌려댔다. 물론 둘은 따갑다며 온몸을 비틀어댔다.
“장 무사.”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고 있으니 서하의 손을 붙잡은 진하가 다가와 그를 불렀다. 장건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고, 진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맹으로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