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 * *
장건과 서하는 앞장서는 진하의 뒤를 따라서 무림맹에 도착했다. 서하는 장건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장건은 그 조그만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무림맹의 대문을 넘어 낯익은 무림맹의 탑과 전각들 사이를 나아가는 동안 진하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중간에 마주친 몇몇 무림맹원들은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냉큼 고개를 숙여 인사만 하고 몸을 피하기 일쑤였다.
그를 본 장건이 말했다.
“그렇게 환영받지는 못하는 모양이군.”
앞뒤 다 잘라먹은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진하는 그걸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걸음도 멈추지 않고 불쑥 말했다.
“당연한 일이죠. 저들에게 난 중원에서 뜬금없이 날아온 새로운 상관이니까요. 게다가 자기들끼리 잘 굴러가던 무림맹을 동진군이라는 이름으로 재편성까지 하고 있으니···”
그녀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씁쓸한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앞에서 다들 공손한 척은 하네요.”
장건은 뭐라 더 말하지 않았다. 그가 조언해주지 않아도 진하는 자기가 할 일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애초에 장건은 외부인인데다가 낭인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함부로 떠들 문제가 아니긴 했다.
그렇게 무림맹 안을 쭉 나아간 장건과 서하는 깊숙한 전각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의 길고 짧은 복도 몇을 지나니 황군으로 보이는 무인 둘이 지키고 선 문이 나왔다. 그 둘은 진하를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에 계시나?”
“예. 기별을···”
진하의 질문에 황군이 대답하던 순간, 그들이 지키고 서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어젖힌 사람은 유설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빠르게 진하와 장건을 지나 서하를 바라보았다.
“서하야!”
이후 그녀는 장건과 진하를 안으로 들이면서도 서하를 붙잡고 약간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유난을 떨었다. 처음엔 반갑다는 표정이었던 서하도 그걸 느꼈는지 어느새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집무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두툼한 서책부터 낱장 종이까지 온갖 서류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한쪽 벽에는 큼지막한 지도도 걸쳐져 있었다. 서류를 피해 발을 디디던 장건은 그 지도를 보고 살짝 감탄했다.
그 벽에 걸린 지도에는 신대륙의 서부 해안선과 동서를 단절시키는 듯한 드높은 산맥, 염호성의 소금호수를 비롯한 여러 호수와 강들, 천후성 서쪽으로 펼쳐지는 황량한 땅 등이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은 신사천에서는 북동쪽 아주 멀리 있을 호수들이 대략적으로나마 그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저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신대륙 동부에 있을 해안선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그 바다 너머는 유럽, 지금 로마라고 불리는 땅이 있을 터였다.
그렇게 장건이 지도를 보며 흥미로워하고 있자 서하를 의자에 앉혀놓고 차와 간식을 챙겨준 유설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그거 보고 있을 땐가요?”
장건이 고개를 돌려 무슨 말이냐는 듯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니 유설은 두 손을 턱 허리에 걸치며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뭐라고 했었죠? 지금 서하가 신사천에 있는 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었지.”
“···그런데 제가의 가주 즉위식 이후 서하는 장 무인 집에 머물고 있었다면서요?”
장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제가는 불편하다기에 형님 집에 머물 방을 내주었소.”
“···서하는 중원으로 돌려보내기로 했잖아요?”
그 유설의 말에 의자에 앉아있던 서하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땐 그러기로 했었지.”
“···그런데요?”
장건은 난장판 비슷한 서류 더미에서 서하가 앉아있는 탁자 쪽으로 걸어와 자연스럽게 그 옆자리에 앉았다. 그를 본 유설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쪽에 있는 줄을 당겼다. 장건에게 내줄 찻잔을 가져오라 시녀를 부른 것이다.
원래부터 대기하고 있던 것인지 방 옆에 있는 작은 쪽문에서 찻주전자와 새 잔을 든 시녀가 얼굴을 푹 수그리고 들어왔다. 그녀는 빠른 손길로 탁자 위에 주전자와 잔을 내려놓고 물러서 시립 했다.
장건은 그런 시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기 앞에 놓은 잔을 들어 홀짝 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하는 이제 내 제자요.”
유설과 진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유설은 잠시 그렇게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두 눈을 마구 깜빡거리며 떠듬거렸다.
“그, 제자라는 말은··· 장 무사의 무공을 가르치겠다는···”
“맞소.”
장건의 담담한 대꾸를 들은 유설은 당혹스럽다는 듯 혼자 입을 벙긋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서하를 계속 신사천에 두겠다는 말이에요? 조금 전에 그렇게 습격을 당하고도?”
“그렇소.”
복잡한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던 유설은 진하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가서 봤으니 알겠지? 상황을 좀 말해줘.”
마찬가지로 당황하고 있던 진하는 유설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장가 상회에서 종합한 사건 전개를 빠르고 단순하게 설명했다. 단순하게 말하니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그를 들은 유설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장건에게 물었다.
“서하가 성장할 때까지 계속 그 곁에 있겠다는 건가요?”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마셨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처럼 두 사람이 영원히 붙어있을 수는 없어요. 마궁은 그 틈을 노릴 테고요.”
“그럼 그들을 먼저 처리해야겠군.”
그 대꾸에 유설의 눈이 커졌다. 장건이 말한 바를 알아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얼른 표정을 가라앉혔다.
“동진군에 합류하겠다는 말이에요?”
“그게 마궁을 처리할 가장 빠른 방법이라면.”
“그럼 그렇게 떠나있는 동안에는···”
그녀가 말끝을 흐리는 동안 장건은 서하를 바라보았다. 서하는 지금 장건과 유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장건의 눈이 옆에 시립하고 있던 시녀에게 향했다.
“잠시 아이를 부탁하겠소.”
시녀는 움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가 장건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그와 눈을 마주보던 그녀는 뭐라 말은 안 하고 슬쩍 유설과 진하를 돌아보았는데, 둘은 갑작스러운 장건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그를 막진 않았다.
그러자 시녀는 서하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 쥐며 그녀를 밖으로 이끌었다. 서하는 입을 꾹 다물고 장건을 바라보았지만, 곧 시녀의 손길을 따랐다. 아이는 집무실을 나가며 시무룩해 보였다.
“아···”
그리고 서하가 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은 유설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의 습격은 마궁에서 서하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서하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장가 상회에 있던 사람들과 진견, 단상운,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위험했던 것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니, 보기보다 훨씬 눈치가 좋은 아이니 어쩌면 벌써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유설은 이마를 감싸 쥐며 두 눈을 꾹 감았다.
“···이런 멍청이···”
“아가씨···”
비슷한 순간 상황을 깨달은 진하가 조심스레 유설을 위로했다. 하지만 유설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굳은 얼굴로 눈을 뜨고는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장 무사가 동진군에 합류해 출격해 있는 동안 서하의 안전은 어떻게 하려고요? 참고로 말하자면 혹시나 황군 병력을 빼서 장가 상회를 보호해주길 바라진 말아요. 내가 진동장군 직함을 달고 있긴 하지만 황군은 모두 아바마마의 병력이자 수족이고, 난 그저 그걸 잠시 빌려왔을 뿐이니까요. 사사로운 뜻으로 그들을 다룰 순 없어요.”
장건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오늘 습격해온 자는 자신을 사공, 뱀들의 주인이라 소개하더군. 그리고 내가 알기로 뱀은 무림에서 활동하는 마궁의 끄나풀을 말함이고. 그런 머리가 날아갔으니 당분간은 신사천에 마궁의 세력이 움직이기 쉽지 않을 것이오.”
“자, 잠깐. 사공? 사공蛇公이라고요?”
“그렇소.”
유설은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그럼 이제 장 무사 혼자 해치운 장군급 인사만 셋···”
하지만 장건은 그런 멍한 표정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그 동진군의 편성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난 모르지만, 그 군대가 출격했다 했을 때 마궁은 더 이상 다른 쪽으로 힘을 쏟을 수 없을 것이오. 적어도 다시 오늘 같은 수준의 습격은 어렵다는 말이지. 그리고 오늘 같은 수준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장가 상회에서 감당할 수 있소.”
유설은 그 말의 마지막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장건이 없어도 충분히 서하를 지켜줄 힘이 있으니, 장가 상회에서 서하를 뺏어갈 생각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곧 장건이 도착하기 전까지 마인들을 막아섰다는 무인 둘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진견이야 그녀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단상운이라는 자는 그동안 신사천의 고위 계층 사이에서 은은히 장가 상회의 장인이라고만 이름이 돌던 자였다. 그 무공에 대해서는 정체불명이었다.
그러나 장건이 믿는 자라면, 유설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겠어요. 더 뭐라 하지 않을게요. 장 무사도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일 테니까요.”
유설은 그렇게 말하며 장건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장건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엔 그쪽이 피곤해 보이는군.”
“···그런가요?”
그녀는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히 돌아가진 않네요. 기존 무림 세력이 순순히 협조하진 않으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짐작만 하던 것과 실제로 마주한 건 많이 다르더라고요.”
“동진군이 출진하는 건 언제가 되겠소?”
“그렇게 멀지 않아요. 지금 고원성 원주민들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면 그땐 그 너머 신대륙에 대한 길 안내를 받을 수 있게 되겠죠. 그리고 그렇게 되면 황군은 곧바로 출진할 수 있어요. 이미 고원성에 보급 기지를 건설하고 있고, 거기서 행군을 시작하면 이 주가 지나기 전 마궁의 거점으로 짐작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어요.”
“무림맹의 병력이 그 행군을 따라갈 수 있겠소?”
유설은 고개를 저었다.
“발로는 못 따라오겠죠. 그러니 싸울 수 있는 주요 병력은 말을 타고 따라오게 될 거예요. 나머지는 행군이 지나간 뒤에 보급로를 만드는 데 주력하게 되겠죠.”
“나도 말 타고 따라가야겠군.”
장건은 마시던 차를 단번에 훌쩍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설은 앉은 채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그런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괜히 불렀나 봐요. 이미 습격으로 힘들 텐데.”
서하를 말하는 것이었다. 장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쪽 얼굴을 봐서 서하도 기뻤을 것이오.”
“하지만··· 방금 나갈 때 나하고 눈도 안 마주치려 하던걸요? 미움을 사버렸나 봐요.”
장건은 피식 웃었다.
“그럼 나중에 서하 화 풀릴 때쯤 사과하러 오시오. 선물이라도 사 들고.”
선선한 장건의 태도에 유설의 표정도 조금 풀렸다.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난 계속 장가 상회에 머물고 있소. 내 도움이 필요하거나 출진이 가까워지면 거기서 날 찾으시오.”
장건은 그렇게 말하고 시녀와 서하를 찾아 그곳을 떠났다. 유설은 약간 시무룩한 와중에도 묘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그런 장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집무실을 나온 장건은 입구에 서 있던 황군에게 그 전각 안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안내받았다. 조금 높은 담벼락 안에는 풀과 작은 나무가 깔려 있었다. 알록달록한 꽃도 많이 보였다.
그 한가운데에 서하와 시녀가 앉아서 뭔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장건이 다가가니 시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서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고, 곧 장건을 발견했다. 아이는 얼른 일어나 장건에게 다가와 풀썩 품에 안겼다. 옷깃을 꽉 쥐는 게 이미 그 새 장건과 유설의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장건은 부드럽게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야기는 집으로 돌아가서 해줄 생각이었다.
대신 고개를 들어 시녀와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나는군.”
그 말에 시녀, 암룡삼호는 살며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