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 * *
장건은 지난 몇 년 동안 신대륙을 떠돌아다녔다.
그 떠도는 세월 동안 현상금이 걸린 악인과 대결하거나 마을을 노리는 도적단을 해치운 경우도 있었지만, 그저 목장이나 농장의 일꾼으로 시간을 보낸 적도 많았다. 물론 대부분 그냥 일꾼보다는 싸움꾼이나 경비로 일했다. 배운 게 무공이니 이왕이면 무공으로 벌어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돈이 모이면 다시 길을 떠나고, 또 어느 곳에 잠시 머물고를 반복한 것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더 넓은 세상과 사람을 만나 스스로의 내면을 넓히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다른 무림인들이 집착하는 명성이니 별호니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쨌든 그래서 그는 사실 최근 신사천에 울려 퍼지는 자신의 명성과 별호가 낯설었다.
“모르셨소? 지금 장 대협의 이름은 신사천을 넘어서 천후성과 감산성에도 울리고 있소. 거기에 황군이 동쪽 멀리 있는 마궁을 토벌한다는 소식이 함께 퍼지면서 많은 젊은이와 무림인들이 자신도 그런 명성과 출세를 바라며 이곳 신사천으로 몰려들고 있지.”
“···그냥 장 무사라 부르시오. 대협이란 말은 부담스럽군.”
당장 낮에 난리가 있었던 터라 장가 상회에서 저량을 맞이하진 못했다. 장건은 잠깐 나와 그를 가까운 요릿집으로 데려왔다. 그래도 천후성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식사라도 해서 보낼 생각이었다.
“하하하! 창룡도, 참마협객, 항제룡抗齊龍 등으로 불리는 사람이 대협이라는 말 하나가 부담스럽소?”
“···항제룡은 또 무슨···”
장건은 살짝 질린 표정이 되었다. 창룡도면 창룡도고 참마협객이면 참마협객이지 왜 자꾸 별호가 늘어나는 것일까?
“제씨 세가에서 있었던 장 무사의 대결이 알려지며 퍼진 이름이오. 제가의 무사 수십에 둘러싸인 와중 일 대 일 대결로 그들을 하나하나 물리치고, 마침내 제가 외당주 비응구검의 비리와 암수를 밝혀내면서 그런 이름이 붙었소. 모르셨소?”
함께 앉아있던 호위무사 훈마가 그렇게 저량의 말을 이었다. 그는 장건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는 듯 흥미진진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장건은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에 앞에 있던 술잔을 들이켰다.
저량은 얼른 그 잔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뭐, 그런 이름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소? 진정한 협객이라면 그런 명성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오. ‘무명無名이야말로 진정한 협명俠名이니, 그는 그저 자신을 무명협無名俠이라 하더라.’··· 어떻소?”
장건은 그가 채워준 잔을 들며 피식 웃었다.
“무명협이라. 그 닷 푼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오?”
“그렇소. 어떻소?”
“그 친구 겉멋이 좀 들었군.”
저량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다시 웃었다.
“하하! 그렇소? 이거 참. 겉멋, 겉멋이라. 그것도 맞는 말이구려.”
“그쪽은 요즘에 뭐 쓰고 있는 게 있소?
“하하하! 당연히 있지! 최근에 내 영감을 자극해주는 사건이 엄청 많았거든!”
잔을 비운 장건은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조금 전까지 장건의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나왔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이고 말았다.
“나오면 언제 한 번 읽어봐야겠군.”
“오, 오오··· 정말, 정말 그래 주시겠소?”
“그게 뭐 어렵겠소.”
원래도 밝았던 저량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장 무사의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이곳으로 오는 배편을 찾았소이다. 급하게 찾느라 웃돈을 많이 줬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소···!”
장건은 그런 저량의 표정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몸을 뒤로 물렸다. 그게 그렇게 기뻐할 만한 일인가 싶었다. 장건은 저량이 많은 곳을 여행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에서 소설의 영감을 얻는다고 알고 있었고, 자신의 이야기 또한 그런 영감을 주는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라 여겼다. 그러니 약간 과하다 싶은 저량의 반응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후 저량은 혼자 신이 나서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고, 그런 모습을 본 장건이 옆에 있는 저량에게 슬쩍 물었다.
“···요즘엔 글 봐주는 사람이 없었소?”
훈마는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책이야 언제나 잘 팔렸지. 중원에서도 팔리는데. 저 양반 저러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렇소.”
그렇게 대답한 훈마는 정작 그 이유가 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장건은 그런 훈마나 저량을 의아한 눈으로 보았지만, 그저 그의 개인적인 이유이려니 생각하며 넘어갔다. 그때 저량이 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거···! 이거 받으시오, 장 무사!”
잠깐 사이에 불콰하게 취한 저량은 반쯤 풀린 눈으로 그 종이봉투를 팔랑거렸다. 장건은 그런 저량의 가볍게 그 봉투를 붙잡아 꺼내와서는 안을 살폈다.
“오.”
종이봉투에는 천후성 상행조합에서 발행한 전표가 들어 있었다. 그건 신사천이나 감산성에 있는 상행조합으로 가서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장건은 웃었다.
“이미 지난번에 고맙다고 감사장과 은전을 내주지 않았소?”
“그 감사장을 돌려주러 오질 않는데 어쩌겠소? 내가 그때 했던 말 기억 안 나시오? 안 찾아오면 내가 찾아갈 수도 있다 했지!”
슬쩍 금액을 확인한 장건의 표정이 변했다. 상상 이상의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에서 받았던 의뢰금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전표 안에 적혀 있었다.
“이거···”
“꼭 받아주시오, 장 무사! 장 무사가 받아주지 않으면 안 되는 돈이오!”
장건은 약간 곤란하다는 듯 훈마를 바라보았다. 저량을 좀 말려보라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는 모르겠다는 듯 혼자 술잔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잠시 전표를 들고 생각하던 장건은 잔뜩 취해서 붉어진 저량의 표정을 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봉투를 품에 챙겼다. 말리지 않는 훈마의 모습이나 이미 전표로 준비된 상황을 보니 저량은 애초부터 이 돈을 장건에게 줄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다. 장건은 그런 사람에게 굳이 무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잘 쓰겠소.”
“···그거 원래 장 무사 돈이나 마찬가지외다. 아시오? 장 무사가 아니었으면··· 난 그때 초원에서 악령의 화살에 죽었을 것이고··· 또 좁은 골방 구석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오···”
취한 저량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혼자 중얼거리다가 곧 탁자에 엎어져 버렸다. 이제 막 저녁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객잔 안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 술이 약한 사람이었다.
물론 애초부터 술자리가 아니라 식사만 할 생각이었던 장건에겐 차라리 좋은 일이었다.
장건은 저량을 챙기는 훈마를 보고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재밌었다고 전해주시오. 이 돈도 잘 쓰겠다고 말해주고.”
“우린 이 객잔에서 며칠 더 묶을 생각이오. 언제든 찾아오시구려.”
저량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장건은 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객잔을 나왔다. 이후 집으로 돌아가던 와중에 문득 거리에 서서 저량에게 받은 종이봉투를 바라보았다. 어쩌다 보니 재산이 몇 배로 불어났다. 갑자기 생긴 돈이니 마구 쓸 수도 있었지만, 그때 장건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장운 부부의 집에 얹혀살면서 집세 정도는 낼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종이봉투를 품에 집어넣은 장건은 사람들 틈에 묻혔다.
* * *
장가 상회 옆에 있던 창고의 정리가 끝났다. 장건이 가보니 원래 있던 물건과 사람이 깔끔하게 사라지고, 벽과 천장만 있는 휑한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무공을 익혀야 할 서하에게는 충분히 좋은 공간이었다.
습격을 받았던 장가 상회는 하루 이틀 정도 정리가 끝나자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달라진 것은 본래 사무실 정도로 쓰던 상회라 두지 않았던 경비 무사가 몇몇 생겼다는 정도였다. 이후 상가 사람들은 죽은 마차 주인의 부인에게 위로금까지 전달했다. 상팔이 특히나 그 부부의 모습에 안타까워했다. 홀로 남은 병중의 부인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진견은 한동안 장가 상회에 머물기로 했다. 장건에게 백보신권을 배우기로 한 것도 있었고, 서하를 조금 더 오래 보려는 것도 있었다. 등짝의 상처 때문에 오래 배를 타긴 힘들다는 핑계도 있었다. 하지만 금세 또 신사천의 사찰을 찾아다니는 모습으로 보아 그건 확실히 핑계가 맞았다.
장건은 사람 죽어 나가는 걸 본 아이들이 후유증을 겪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 어린 녀석들의 회복력은 장건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자기들끼리 마인을 때려잡는 놀이를 벌인 것이다.
거기에 자기들과 놀던 서하가 장건에게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자 각자의 아비를 찾아가 자신들도 무공을 배우고 싶다 떼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운은 무공에 뜻이 없어 남에게 가르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었고, 단상운은 증기기관 연구와 아이들의 연무를 함께 진행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장건이 서하와 장상, 장영, 단용중과 단용아까지 다섯 아이에게 태극권을 가르치게 되었다. 물론 제대로 배우는 서하와는 다르게 다른 아이들은 그저 하루에 반시진 정도 운동을 시키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장건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며칠 지나지 않아 태극권을 배우는 것은 장상 정도만 남게 되었다.
장건은 다른 아이들이 다 도망가는동안 그 녀석이 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남아있는지 대충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녀석은 감춘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이제 열 살 조금 넘은 녀석의 행동이 장건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힘드냐?”
장상은 벽돌 한 장 위에 올라가서 한 발로 자세를 잡고 있었다. 녀석은 균형 감각과 힘이 모자라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입을 꾹 다물고 힘든 티를 내지 않았는데, 그건 그 옆에서 똑같이 벽돌 위에 올라가 차분한 호흡으로 완벽한 자세를 잡고 서 있는 서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운은 서하를 신경 쓰고 있었다.
“···아, 뇨···”
장상은 비틀비틀하면서도 끝끝내 대답했다. 장건은 그런 조카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대견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럼 다음으로.”
그 말에 서하와 장상은 옆에 있는 다음 벽돌로 발을 옮기고 새로운 자세를 잡았다. 녀석들의 발밑에는 둥글게 놓인 벽돌들이 있었는데, 각각의 벽돌로 발을 옮길 때마다 아이들은 장건이 가르쳐준 자세를 취해야 했다. 체력보다는 집중력을 키우고 기본자세를 외워가는 훈련이었다.
장상은 잠시 두 발로 섰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곧 다시 한 발로 서면서 파르르 떨었다. 그를 본 장건은 웃으며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그 말에 장상은 얼른 발을 내리며 헥헥거렸다. 그에 비해 서하는 차분하고 느릿한 동작으로 발을 내리고는 깊은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서하는 원래부터 소림 무공을 익히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장상은 그런 서하의 모습을 보고는 애써 허리를 펴고 헥헥대던 호흡을 감췄다.
“···그럼 전 가볼게요, 삼촌.”
“그래. 씻고 들어가라. 또 땀범벅으로 침대에 누웠다가 혼나지 말고.”
“···네, 삼촌.”
녀석은 멀쩡한 척 수련장을 나갔다. 하지만 문을 나서자마자 어깨가 슬그머니 처지는 게 보였다. 장건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시작해요?”
그때 서하가 벽돌 위에 올라가서는 물었다. 그를 본 장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서하는 둥글게 놓인 벽돌 위를 자연스럽게 밟아가며 태극권의 자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 벽돌 하나 밟고 자세 하나 취하고 하는 식이 아니라 전체 자세와 동작이 유연하게 하나로 연결된 모습이었다.
하루 반 시진 배우는 장상과는 다르게 서하는 하루 두 시진 정도를 수련하고 있었다. 거기에 본래 타고난 재능도 더해져 사실 더 이상 장상과 같은 수련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가 수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하지만 서하는 장상과 함께 배우는 시간 동안에는 같은 것을 배우길 원했다.
“···기본을 잘 다져야 한다고 들었어요.”
장건은 굳이 그런 서하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고, 조카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서하의 모습이 기특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장상이 물러가면 서하는 반 시진 동안 천천히 펼쳤던 태극권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르륵 펼쳤다. 그게 끝나면 장건과 가벼운 대련을 하고 이후 새로운 동작을 배운다. 배운 것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대련을 하고, 이후에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태극권을 펼치며 하루 수련이 끝나는 것이다.
장건은 아직 그 정도면 괜찮다고 보았다. 지금 하는 수련에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체력 훈련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장건은 서하에게 딱 맞을 내공심법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냥 그가 익힌 것을 가르치기엔 너무 포괄적이기도 했고, 서하에게 맞지도 않았다. 그의 내공은 켜켜이 쌓이고 쌓인 것이라 배우자면 너무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장건은 처음으로 상상 속 무공의 재현이 아니라 남에게 가르칠 것을 만들고 있었다. 아마 마궁의 토벌을 마치고 돌아와서 가르치게 될 것 같았다. 가르친 후 떠날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만약의 경우에 장건이 손쓸 방법이 없었다.
당장 장건 본인도 지금까지 무공을 익혀오며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그야 어른의 이성이 있으니 잘 해결해 왔지만 서하에게까지 그런 고생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차분히 이어지는 서하의 원과 원, 곡선과 곡선의 연결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장건은 문득 고개를 돌려 수련장의 문을 바라보았다. 한창 태극권을 펼치던 서하도 그런 장건의 모습에 동작을 멈췄다.
입구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고 있었다. 그게 잘못 느낀 것이 아닌지 곧 문이 열리며 장운이 얼굴을 내밀었다.
“수련 중이었냐?”
“왜 그러십니까?”
그는 서하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더니 장건에게 고개를 돌려서 짧게 말했다.
“배가 왔다.”
“배요? 무슨 배요?”
장운은 나이답지 않게 히죽 웃었다.
“무슨 배겠냐? 그 말괄량이가 탄 배지. 이제 막 만에 들어섰다고 하니까 지금 마중하러 가자. 서하도 같이.”
말괄량이. 장운이 여동생 장연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 * *
진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서류를 확인하던 유설이 그 얼굴 그대로 고개를 들어 진하를 바라보았다.
“왔어? 갔던 일은?”
“네. 잘 처리되었습니다. 상행조합에는 더 끈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럼 신사천은 이제 다 정리된 건가?”
“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쭉 기지개를 폈다.
“끄으으-! 겨우 고비 하나 넘겼네! 앞으로도 넘어갈 산이 태산이지만!”
“···예, 그래도 천 리의 시작도 한 걸음부터니 이제부터 계속해나가면 될 일입니다. 그래서···”
“아! 우리 진하! 그래, 정말 수고 많았어! 너 없었으면 나 어쩔 뻔했니?”
진하의 얼굴이 뚱해졌다.
“···저기, 아가씨.”
“응? 왜?”
“장 무사가 합류하게 돼서 기쁜 건 알겠습니다. 그래도 제 말 좀 끝까지 들으세요.”
싱글벙글하던 유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아, 그래. 미안. 듣고 있어.”
작은 한숨을 푹 내쉰 진하는 말을 이었다.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어디서?”
“중원에서요.”
유설의 얼굴이 굳었다.
“···어? 중원? 누가? 왜?”
그때 진하가 열고 들어왔던 문에서 슬그머니 들어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유설을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하얗게 질렸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었다.
“어, 어어··· 할아범? 할아범이 왜···”
“잘 지내셨소, 공주, 아니지. 이젠 장군이구만.”
허락도 없이 유설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자는 하얀 수염을 기른 키 작은 노인이었는데, 특이하게도 증에 비파 하나를 매고 있는 데다가 옷차림도 그리 깔끔하지 않아서 마치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악공 같았다.
하지만 유설을 보며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두 눈 안에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신비로운 정기가 번뜩거렸다.
“···할아범이 여긴 왜 왔어요?”
“왜 오기는? 내가 어디 못 올 곳이라도 왔소, 유설 장군?”
유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럼 태학사太學師가 여길 왜 와요?”
“왜 오긴요. 재밌는 친구가 있다 해서 폐하께 청을 드려 왔지요.”
점점 굳어가는 유설의 표정을 보며 노인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