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허어.”
어딘가 비슷한 자세를 잡고 서로를 마주 보는 장건과 장연. 옆에 있던 장운은 그런 모습을 보고 이마를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무림맹의 행사로 놀랐던 부두가 사람들이 그런 둘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 한번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운이 뭐라 말리기도 전에 장연이 자세를 바로잡고 서서는 버럭 외쳤다.
“야! 너! 정말 집에 다시는 안 올 생각이었냐!”
장건도 천천히 자세를 풀고 섰다. 그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버릇은 여전하군. 너 네 남편한테도 그러냐?”
“내 부부생활은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나쁜 놈아! 진짜 집에 아주 안 돌아올 생각이었냐고!”
“돌아갈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그리 떠나지도 않았겠지.”
약간 건조하다시피 한 장건의 대꾸에 장연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살짝 떨리는 시선으로 장건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쁜 놈. 그렇다고 내 혼례식에도 안 오고···”
그 눈을 마주한 장건은 오랜만에 말문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그렇게 망설이고 있으니 장연은 휙 몸을 돌렸다. 뒤에서는 그녀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그녀가 내던진 짐까지 잔뜩 짊어지고 낑낑대며 다가오고 있었다. 장연은 그에게 다가가 짐을 뺏어 들었다.
그를 본 장운이 인력거꾼들에게 슬쩍 눈짓했다. 인력거꾼들은 얼른 그 둘에게 다가가 짐을 받아 인력거 짐칸에 실었다. 그들에게 짐을 내준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장연은 뚱한 말투로 그를 소개했다.
“내 남편이에요.”
“하하··· 안녕하십니까, 형님들. 백리강이라 합니다.”
“음. 어서 오게. 난 연이 큰 오라비 장운이고, 저쪽은 둘째 오라비 장건일세.”
장운이 나서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백리강은 연신 허리를 숙이며 어려워했다. 하지만 원체 키가 크고 훤칠하게 생겼기 때문인지 비굴하다기보다는 예의가 바른 것으로 보였다. 그를 본 장운은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장건은 뚱한 장연 때문에 뭐라 할 말이 없어 그냥 한발 물러서 고개만 끄덕였다. 백리강은 그런 두 남매의 모습을 보고는 약간 곤란한 웃음만 흘리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그들은 인력거를 타고 장가 상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백리강은 신사천의 이동 수단인 인력거를 신기하게 바라보았고, 또 그 사업의 주인이 장운이라는 것에 놀랐다. 장건에게 토라진 체를 하던 장연도 인력거는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복잡한 신사천의 거리를 가로지른 인력거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장가 상회 앞에 멈춰 섰다. 장연 부부의 짐까지 모두 내려준 인력거꾼들은 웃으며 떠났다. 이미 일당을 받았음에도 장운이 수고비를 조금 더 준 것이다. 밝은 표정으로 인력거를 끌며 떠나는 모습을 보아하니 오늘 일은 마무리하고 어디 술집이라도 갈 모양이었다.
인력거를 떠나보낸 장연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장가 상회를 바라보았다.
“지금 신사천에서 쭉쭉 사업을 키우고 있다지 않았어요? 상회가 생각보다 작네요.”
“여긴 중간 업무만 보는 곳이야. 공방이나 판매소 모두 따로 있지. 물론 물건은 안 파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다 하기엔 자리도 안 좋고 건물도 생각보다 작거든. 이 상회 건물을 확대하는 것보다 그냥 조금 떨어진 곳에 따로 자리를 차리는 게 낫겠더구나. 그리고 이렇게 사업을 키우니 신사천 전체가 상회의 앞마당인 것만 같아서 열심히 일할 맛도 나거든.”
옆에서 장운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설명하자 장연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
“아뇨. 가문 어르신들한테 지금 오라버니를 보여주고 싶어서요. 그럼 만날 하는 그 잔소리도 이젠 안 할 텐데.”
장연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장운은 멋쩍게 허허 웃기만 했다. 가문 어른들은 신대륙 사업 확장을 마냥 좋게만 보지 않았다. 특히 그들이 싫어한 것은 장운이 아이들마저 모두 데려갔다는 점이었다.
때마침 마당에 있던 아이들이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빼꼼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조카들을 본 장연은 지금까지 뚱했던 표정은 완전히 잊은 것처럼 아이들을 부르며 안으로 달려갔다.
“이 꼬물이들!”
“와! 고모다!”
“고모다!”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자 자연스럽게 식사를 준비하던 염 부인도 나와보게 되었고, 곧 저택은 안부 인사와 웃음으로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이후 이미 편지로 단상운 부부와 그 아이들에 대해 알고 있었던 장연은 녀석들을 위한 선물까지 풀어놓았다.
아이들은 여러 관절을 가져 움직이는 나무 인형을 보고는 재밌어했다. 하지만 그게 장연이 기대하던 수준의 기쁨은 아니었는데, 당연하게도 단상운이 만들어준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에겐 조각이 잘 되어있다는 것을 빼면 그리 특별해 보일 것 없는 나무 인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장연을 더 당황하게 한 것은 서하의 존재였다. 중원에서 출발하기 전 받았던 편지에는 서하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에게 하나씩 쥐어진 나무 인형이 서하에겐 없었다. 그녀는 급하게 자기가 아끼던 빗 하나를 원래 준비했던 선물이었던 것처럼 챙겨주었다. 다행히 서하는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덕분인지 장연은 나중에 진견이 등장했을 땐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웃다가 조용히 장건의 옆구리를 찌르며 저 스님은 누구냐고 물었을 뿐이다.
이후 식사가 이어지고 나서야 장연은 진견과 서하의 소개를 받을 수 있었다. 원래 있던 식구들에 그 두 사람까지 더해지자 이젠 정말 대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식사 자리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고, 오랜만에 여동생을 만난 장운은 연신 백리경에게 술을 받아 들이켰다. 나쁠 것 하나 없는 술자리였다. 하지만 장연은 부두에서 장건에게 보여준 뚱한 태도를 이어갔다. 물론 그게 토라진 체라는 건 그 자리의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혼례식에 가지 않았던 것은 옆에 앉은 장운도 마찬가지니, 결국 그녀의 모습은 오랫동안 자신을 찾지 않았던 장건을 향한 시위가 분명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을 술자리를 파하고 아이들을 재울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장연과 장건은 은근히 서로를 모른척하며 말 나누기를 피했다.
그걸 본 장운만 고개를 살살 저었다.
“어릴 적엔 그렇게 친하던 녀석들이···”
염 부인과 진견은 웃기만 했고, 단상운 부부는 초탈하기만 한 듯했던 장건의 새로운 모습에 재밌어했다. 장연의 남편인 백리강만 곤란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결국 그날 밤이 지나는 동안 장건과 장연은 화해는커녕 제대로 말도 나누지 않았다.
“두 분 사이가 원래 안 좋았어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서하의 수련을 시작했던 장건은 천천히 태극권을 펼치던 서하가 문득 꺼낸 말에 두 눈을 끔뻑거렸다.
“···누구하고?”
“음, 그러니까··· 사고師姑님하고요.”
장건은 서하가 꺼낸 사고라는 단어에 웃었다. 사부의 누이니 사고師姑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장건은 서하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나 싶어 웃음이 나왔을 뿐이다.
“왜?”
“어제저녁에 보니까 말도 잘 안 나누고··· 오늘 아침에도 서로 피하셨잖아요. 약간 불편한 것처럼.”
서하는 펼치던 태극권 동작을 중간에 우뚝 멈춘 채 장건을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멈춘 자세가 불편할 만도 하건만 녀석의 표정은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기본 동작들이긴 하지만 벌써 태극권에 숙달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대견한 모습이었다.
그를 보던 장건은 수련하다가 먼저 말을 꺼낼 정도면 정말 궁금했겠구나 싶어서 천천히 대답해주었다.
“사이가 나쁘다기보단··· 걔가 많이 토라진 거지.”
“왜요?”
“···내가 몇 년동안 아무 연락도 없어서.”
“그럼 사부님이 잘못한 거 아니에요?”
장건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건 맞았다. 사실 장건이 그동안 연락 한번 없어 미안했다고 사과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글쎄··· 너무 오랜만이라 그럴까. 그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기가 조금 힘드네.”
서하는 그렇게 대답하는 장건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꼭 상이랑 영이 같아요. 걔들도 사소한 걸로 싸우고 먼저 사과 못 해서 며칠 동안 말을 안 하거든요.”
“그러냐.”
“근데 용아랑 용중이는 안 그래요.”
“···용아랑 용중이?”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걔들은 항상 먼저 잘못한 쪽이 사과하고 서로 챙겨요. 그래서인지 가끔 보면 상이랑 영이도 그걸 부러워하는 것 같아요.”
서하의 이야기를 들은 장건은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하하하 웃어버리고 말았다.
서하는 오랜만에 만난 장건과 장연이 단씨 남매처럼 잘 지내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장건은 그런 제자의 걱정과 염려가 기뻤고, 또 그렇게 속이 깊을 수밖에 없는 아이의 과거가 안타까웠다. 어린 제자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점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좋지 않기도 했다. 당장 가서 장연에게 사과하고 어제 못 푼 회포를 마저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장건은 서하의 내공심법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문득 정할 수 있었다.
그가 제일 처음 배웠던 심법은 흔하디흔한 삼재공三才功이었고, 이후엔 다른 내공심법을 얻어도 참고만 할 뿐 그 삼재공을 버리진 않았다. 때문에 기초적인 토납법이었던 삼재공은 오랫동안 이어진 장건의 수많은 실험과 재현된 많은 무공으로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내공이 되어있었다.
그것은 수십 폭짜리 그림을 그려도 그 시작은 하나의 점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삼재공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없었던, 혹은 자라나지 못했던 무공을 재현하고자 하는 장건에겐 더 없이 어울리는 심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서하에게도 어울리진 않았다. 서하는 십 대 소녀이지 누구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애늙은이가 아니었다. 장건의 삼재공은 장건만이 익히고 쓸 수 있는 무공이었다. 서하가 배우자면 한참 어긋나도 엉망으로 어긋날 터였다.
다행히 장건에겐 다음 목표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 그건 단순히 짐승의 움직임이나 자연 현상을 본뜬 무공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무武로 표현하고 드러내는 사상무공思想武功이었다.
이미 태극권도 그런 사상무공의 범주에 들어가는 무공이었다. 음과 양으로 나뉘어 돌고 도는 태극. 거기엔 혼원경도 포함되었고, 제왕검형도 그랬다.
장건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며 그 모든 것이 서하와 자신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임을, 인人이라는 글자처럼 서로에게 기댄 마음임을 느꼈다. 장건은 그것을 무공으로 엮어보기로 했다.
“그래. 그럼 내가 먼저 사과해야겠다. 그동안 연락 한 번 안 했던 건 미안하니까.”
서하는 장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슬그머니 수줍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멈췄던 태극권을 다시 펼치기 시작했다. 장건은 그런 서하를 보며 생각을 정리하고는 갑자기 수련장 문으로 다가가 벌컥 열어젖혔다. 갑작스러운 장건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서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수련장 문 앞에는 장연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침 수련이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깔끔한 무복을 챙겨입은 모습으로 수련장 문틈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과한다며?”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문을 열어젖힌 장건에게 당황하기는커녕 쪼그려 앉은 그대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그 능글맞은 모습을 본 장건이 고개를 저었다.
“음. 하기 싫어졌다.”
“뭐? 왜!”
“글쎄.”
“아 뭔데! 장난하냐!”
쪼그려 앉아 있던 장연은 버럭 외치며 일어섰다. 장건은 그런 장연을 보며 말을 돌렸다.
“무복을 왜 챙겨왔어.”
“···왜긴. 수련하려고 챙겨왔지. 중간중간 섬에 정박할 때 말고는 배 안에서 제대로 수련을 못 해서 찌뿌둥했다고.”
그녀는 그리 퉁명스레 말하고는 성큼성큼 서하 옆으로 다가갔다. 서하를 마주한 그녀는 곧바로 뚱한 표정을 지우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태극권을 배우고 있다며? 뭐 얼마나 배웠는지 나랑 가볍게 대련 한번 해볼래?”
“···태극권 식으로요?”
“그래. 태극권 식으로··· 내 입군 시험을 망친 그 태극권 식.”
장연은 뒷부분을 말할 땐 슬쩍 장건을 흘겨보았다. 장건은 어깨 한 번 으쓱거릴 뿐 뭐라 말하지 않았다.
서하는 허락을 바라는 눈으로 장건을 보았고, 장건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마주 서서 태극권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두 사람의 자세는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장연은 그걸 보고 살짝 어리둥절하다가 곧 뭔가 깨닫고 다시 장건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뒤로하고 곧 두 사람은 바짝 붙어서 손바닥과 팔뚝을 이용해 상대방을 밀어내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엔 손과 팔뚝만을 이용해 부드럽게 서로를 밀고 당기던 두 사람은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격해지기 시작했다. 팔을 넘어 어깨와 몸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처음엔 움직이지 않던 발을 상대방 가까이 붙여 중심을 무너뜨리려 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 모두 제자리에 가만 붙어서 서로를 상대하지 못하고 조금씩 움직이게 되었다. 각자의 오른쪽으로 돌다 보니 결국 두 사람은 빙글빙글 두어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잔뜩 집중한 서하의 동작이 정도 이상을 넘어 격해지려는 순간, 장연이 부드럽게 뒤로 물러서며 대련은 끝났다.
“아···”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서하는 곧 장연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장건 외에 다른 사람과 태극권 대련을 해본 것이 신기한지 상기된 얼굴이었다. 장연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그 얼굴이 장건에게 돌아갔을 땐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변했다.
“···조금 달라졌네?”
“음.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럼 지금 이게 완성본이다?”
장건은 차분히 장연을 마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완성본이냐는 말을 듣고는 결국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다시 가르쳐주마.”
그제야 장연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를 본 장건은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면서도 피식피식 웃었다. 졸지에 제자 둘을 가르치게 되었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서하도 밝은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