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장건은 감았던 눈을 떠 배원찬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잘생긴 청년 고수처럼 보이던 그는 이제 도망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건은 연초를 한번 깊게 빨았다가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피곤해 보이는군.”
“···칼을 들어라, 장건. 다시 승부를 내자.”
배원찬의 그 갈라진 목소리를 듣고 장건이 피식 웃었다.
“칼이 있어야 칼을 들지, 자식아.”
그 농담이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어조에 배원찬이 살짝 당황했다. 확실히 지금 장건은 무기가 없었다. 그저 늦은 시간에 연초 한 대 피우러 잠시 집 앞에 나온 남자의 모습이었다. 전혀 싸울 준비가 된 무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배원찬은 떠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럼 들어가서 칼을 가지고 나와라. 싸울 준비가 되지 못한 자와 승부를 내고 싶진 않다.”
“이거 다 피고.”
장건은 삐딱하게 서서 연초를 빨았다. 비장하던 배원찬은 그걸 보며 뭐라 말도 못 하고 머뭇거렸다. 혀끝에 묻어나는 연초의 거스러미를 퉤 뱉으며 연기를 흘리던 장건은 그런 배원찬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살살 저었다. 검까지 뽑아들고 와서는 정말 장건이 연초를 다 피울 때까지 저러고 있을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가 주제를 바꿨다.
“네 이야기가 신사천 거리에 떠돌던 모양이군.”
“갑자기 그게 무슨··· 내 이야기? 나에 대한 소문이 돈다고?”
“그래.”
“···무슨 소문이지?”
배원찬은 머뭇거리면서도 그리 물었다.
“뭐긴. 옛 무림맹 순찰대원이었던 배신자가 지금 황군에게 쫓기고 있다는 내용이지.”
“난 배신자가 아니다!”
그는 버럭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갈라지는 목소리는 그리 크지 못했다. 갑자기 목소리를 키우려 했기 때문인지 그는 콜록거리며 기침까지 했다. 장건은 그런 배원찬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기는. 네 숙부가 마인들과 짜고 무림맹 습격까지 했는데.”
“콜록, 나, 나는, 콜록! 크허험, 크흐음···”
그는 겨우 기침을 멈추고 말했다.
“···으음. 나는,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 난 무림맹의 정의와 법도를 충실히 지지한다··· 숙부가 마궁과 손잡은 건 몰랐다··· 숙부는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어. 난 그저 숙부의 뜻과 행동이 맹주를 견제하려는 원로원의 의견이 두드러진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난 누굴 죽이지도 않았다고···”
“그걸 믿으라고? 그럼 왜 도망쳤는데?”
“···몰랐다곤 해도 황군이 그 사정을 이해해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배원찬의 입가에 씁쓰레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말했다.
“···그래. 결국 내가 멍청했기 때문이지··· 가문의 도움으로 얻은 명성과 힘을 나 혼자 이뤘다고 여기며 오만했기 때문이야. 그러니 숙부와 원로원의 명령을 이행하면서도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몰랐던 거야···”
장건은 연초 연기만 뿜으며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배원찬의 비장함은 그가 고개를 푹 수그리는 것만으로도 사그라져 그 자리엔 비참한 도망자만 남아있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어 골목길은 고요했다.
잠시 배원찬을 바라보던 장건이 입에서 연초를 때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숙부의 명령을 듣기만 한 것이라면 황군에서도 충분히 참작해줄···”
장건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덤덤하던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수그린 배원찬은 그런 장건의 눈빛도 모르고 대답했다.
“정상참작? 그 황군에서 그럴 리가 없지만, 설마 그렇게 되더라도 최소한 십 년 이상 뇌옥에 썩으며 노역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 가두자면 단전도 부수겠지··· 내 평생 쌓아온 무공을 잃는다면 내가 왜 더 살아야 하지?”
“가족이 있을 거 아니야.”
먼 곳을 바라보는 장건은 배원찬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대충 말했다. 배원찬은 번뜩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천후성의 백림방은 무너졌다. 아버지는 가주직을 내려놓고 반강제로 은퇴당하셨고. 어차피 다시 뵐 수도 없겠지. 우리 가문은 끝났어. 칼을 들어라, 장건. 내 마지막으로 너에게 당한 수모를 되돌려주고 나도 내 삶을 내 손으로 끝내겠다.”
“아, 그래.”
다시 비장해진 배원찬과 달리 장건은 들고 있던 연초를 입에 물고는 터벅터벅 그에게 다가갔다.
“···뭐, 뭐냐?”
“싸우자며? 지금 해.”
“뭐? 들어가서 칼을 가져오겠다고···”
장건은 오른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
“이거면 돼.”
멍하던 배원찬의 얼굴이 그 뜻을 깨닫고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끝까지 나에게 모욕을 주는군, 장건! 좋다! 그렇다면 나도 더는 사정 봐주지 않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검을 휘리릭 돌리며 멋들어진 자세를 잡더니 흣! 하는 기합 한번 내지르며 장건에게 달려들었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에서 달빛을 반사한 칼날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쩍! 하는 소리가 한번 울리더니 배원찬은 달리던 기세 그대로 골목길에 나뒹굴었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검도 길바닥 한쪽에서 덜그렁 소리를 내며 굴러다녔다. 달려가던 힘이 남은 배원찬은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주르륵 앞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얼굴이 바닥에 쓸리든 말든 혀를 길게 빼물고 있을 뿐 반응이 없었다.
가볍게 그를 쓰러뜨린 장건은 빨아들였던 연기를 길게 한번 내뱉고는 배원찬이 흘린 장검을 툭 발로 차 허공에 띄워 붙잡았다. 그리고 골목에 우뚝 서서 담장 너머 저 멀리 있는 전각의 지붕을 바라보았다.
* * *
“···이쪽을 보고 있습니다.”
행군사마 임사영은 괜히 한번 그렇게 말해보았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이미 다들 아는 상황을 다시 입으로 말하는 걸 싫어했다. 그럴 시간에 그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게 더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엔 그녀가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도 그럴 것 같지 않아서 그렇게 했다. 명령을 기다리는 하급자가 상관을 재촉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음···”
교위 위상도 그걸 알았다. 물론 그도 겨우 교위 직급이라 임사영의 정식 상관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같이 이번 작전을 이끌어가는 관계고 그의 직급이 더 높으니 상관은 상관이라 할 수 있었다. 대답을 하자면 그가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슬그머니 옆에 있는 노인에게 향했다.
토끼몰이를 하는 듯했던 배원찬의 체포 작전은 이어지고 이어지다가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그 원인에는 역시 옆에 있는 그 노인의 의지가 굉장히 많이 반영된 탓이었는데, 이쯤 되자 배원찬 체포 작전은 거의 노인이 이끌어가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되자 어느 정도 직급이 있는 황군들은 이번 작전이 장가 상회의 장건과 무슨 관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황군들도 장건에 대해 잘 알았다. 워낙 소문이 가득하고, 또 당장 무림맹 입성 첫날에 그를 마주 본 황군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의 상관이자 현재 동진군의 최고 사령관인 진동장군 유설이 그에게 큰 관심이 있다는 것도 다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유설과 노인, 장건 사이의 무언가 때문에 이 작전이 이뤄지고 있다는 걸 깨달은 황군 장수들은 아주 수동적으로 변해버렸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정확히 신분을 밝히지도 않은 노인에게 지휘권을 반쯤 넘기다시피 하는 것은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
교위 위상은 입술을 길게 늘이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사실 성질 같아서는 이딴 식으로 답답하게 굴지 말고 그냥 직접 장건을 찾아가 볼일 보라고 외치고 싶었다. 황군을 감히 이딴 식으로 굴릴 생각도 하지 말고.
입가에 흥미롭다는 미소를 띈 채 장건이 선 골목을 바라보던 노인은 문득 그 시선을 느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시오, 위 교위? 무슨 문제 있으신가?”
“···아닙니다. 죄인이 의식을 잃은 듯하니 저 무사에게 협조를 요청해야겠군요.”
“허허. 그래야겠지요. 근데 나에게 굳이 그걸 말해주실 필요는 없소이다.”
“···그냥 어떻게 할지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시오? 허허.”
위상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끼리 갑시다. 괜히 애들로 포위 같은 거 하지 말고. 죄인은 이미 의식이 없으니까.”
“예.”
임사영이 짧게 대답하며 위상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그렇게 지붕 밑으로 내려가자 가만있던 노인도 슬그머니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런 움직임을 느낀 위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던 하와이의 생활이 그리웠다.
* * *
배원찬을 쓰러뜨린 장건은 그의 검을 늘어뜨린 채 골목길에 서서 남은 연초를 태웠다. 골목길에는 쓰러진 배원찬과 그뿐이었지만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연초가 거의 다 탈 때쯤, 저쪽 골목길 어귀에서 누군가 등장했다.
그들은 서른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와 여인, 그리고 하얀 수염을 기른 키 작은 노인이었다. 그들 모두 무장하고 있었고, 남자와 여자는 손목 보호대나 정강이 보호대처럼 간단하게나마 갑옷까지 입고 있었다. 그들은 성큼성큼 다가와 길 한쪽을 막고 섰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안녕하시오?”
장건은 길게 연기를 뿜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 시선을 보며 마주 지금 상황이 참 피곤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거기 그자는 마인들과 결탁하여 죄를 지은 죄인이오. 일단 그를 잡아준 것은 정말 고맙고, 조만간 포상금도 나올 것이오. 이제 그를 압송하고자 하니 좀 비켜주시겠소?”
“그쪽은 누군데?”
장건은 짧게 물었다. 남자는 잠시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어리둥절하다가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난 동진군 교위 위상이오. 유설 장군님 휘하에 있지. 만나서 반갑소, 장 무사.”
“나를 아시오?”
“하하··· 모를 수 있겠소? 지금 이 신사천에 쟁쟁한 명성의 주인공인데. 게다가 예전엔 이쪽에서 일하던 견우영의 비리를 밝히지 않았소? 그 친구 참··· 옛날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을 하다가 엉뚱한 감상에 빠지던 위상은 고개를 살살 흔들며 상념을 흩어버리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죄인을 잡아준 것은 고맙소. 이제 비켜주시겠소?”
장건은 묘한 눈으로 위상과 나머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골목길 담장 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저 친구는 마인들과 결탁한 것 같지 않던데. ”
“저자가 그렇게 말했소? 하지만 저자는 숙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던데.”
“숙부가 시킨 일만 했다더군.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잘 몰랐다 했소.”
“그럼 그냥 멍청해서 이용이나 당했다? 허 참··· 뭐 어차피 심문하다 보면 뭐든 다 말하게 되어 있고, 만약 그게 정말이면 그냥 노역형이나 몇 년 살다가···”
위상은 그렇게 대답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두 눈을 꾹 감았다. 그가 그렇게 갑자기 입을 다물고 눈을 감자 골목길에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런 갑작스러운 침묵에 옆에 있던 여인도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꾹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다시 뜨였을 때, 그 눈엔 처음의 부드러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음. 황군의 행사에 감히 입을 놀리지 마라. 너 따위가 함부로 그렇게 입을 놀리면 당장에 이 자리에서 체포할 수 있다.”
뒤에서 지켜보던 여인, 행군사마 임사영은 입을 쩍 벌리고 위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위압적으로 변해서 장건에게 시비를 거는 위상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그런 시선을 뒤로하고 위상은 계속 말을 이었다. 조금 전과 같은 어조였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집안으로 돌아가라. 저기 장가 상회에 네놈 형과 동생이 있는 것도 다 알고 있다. 말썽을 부리면 그들 또한 함께 체포할 것이다. 아니면 여기서 네놈의 그 경박한 혓바닥부터 잘라줄까?”
“그, 저기, 위 교위님? 갑자기 왜···”
임사영은 일단 위상을 말리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그녀도 조금 전 위상이 그랬던 것처럼 움찔거리더니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녀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위상은 앞으로 조금 나서며 장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은 장건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담장 쪽으로 물러서던 장건은 고개를 흔들며 다시 골목길 한가운데로 나섰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거꾸로 박아 세웠다. 이후 이제 거의 다 탄 연초를 마지막으로 쭉 빨아 다 태우고는 꽁지만 남은 것을 옆으로 툭 튕겼다. 뻘건 불티가 살짝 튀었다.
장건은 마지막 연초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이보시오, 노인장.”
뒤쪽에서 옅은 미소를 띤 채 상황을 지켜보던 노인은 움찔하더니 장건을 바라보았다. 움찔 놀란 것은 위상과 임사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보거나 말거나 장건은 노인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내 실력이 보고 싶으면 직접 나서시오. 지랄하지 말고.]비전 이중음으로 소리 없이 신분을 밝히고 위상과 임사영에게 명령을 내리던 노인, 태학사 순우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장건을 바라보았다. 지금 귓가에 울린 목소리가 위상과 임사영에게 들리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그 내용 또한 조금 전 자신의 이중음을 들었다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에서 그런 놀라움은 지워지고 진한 흥미와 호기심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본 장건은 옆으로 퉤, 침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