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중간에 끼인 위상과 임사영은 바짝 굳어서 장건과 태학사를 흘끔거렸다.
장건이 태학사를 노인장이라 부른 이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황상 장건이 태학사의 수작을 눈치챈 것은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그게 어떻게 가능했냐는 점이다.
황군 이중음만 해도 세간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기예였는데, 조금 전 태학사가 그들에게 신분을 밝히고 명령할 때 쓰던 이중음은 뭘 어떻게 했는지 겉으로 나는 소리, 위음僞音을 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노인의 신분을 감히 의심하지 못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물러서게.”
그때 태학사가 그렇게 말했다. 잔뜩 긴장한 채 장건과 그를 번갈아 보던 위상과 임사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태학사 뒤쪽 골목으로 물러났다. 덕분에 길 한가운데 검을 꽂고 선 장건과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선 태학사는 단둘이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태학사가 먼저 다시 말했다.
“난 순우현이라 하네. 중원에서는 보잘것없으나마 벼슬길에 올라 있지.”
“장건.”
장건의 짤막한 대꾸에 순우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전부인가? 내 알기로 자네를 부르는 이름이 여럿인 걸로 아는데. 창룡도나 항제룡 같은 거.”
“내 이름은 장건이오.”
이어진 장건의 대답에 순우현은 껄껄 웃었다.
“···허명은 허명일 뿐이라. 젊은 친구가 명성에 무심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드는군. 그래도 창룡도 같은 건 멋지지 않은가? 창룡도 장건. 소개하기 딱 좋은 별호군.”
이번엔 장건의 대꾸가 없었다. 그는 곧게 박아넣은 검을 자기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서 순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게 보자면 당당히 서 있는 것이었고, 나쁘게 보자면 온몸으로 당장 싸우자 시비를 걸고 있는 듯했다.
그를 보는 순우현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래, 이중음은 어떻게 들었나? 게다가 그냥 이중음도 아니고 나름 비전이라 할 만한 기예였는데.”
장건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제야 순우현의 얼굴도 살며시 가라앉았다.
“···내가 위 교위를 시켜 자네 무위를 보고자 한 게 그렇게 기분이 나쁜가?”
“내 무위를 봐서 뭐 하려고?”
“뭐 하기는. 그냥 지금 신대륙에서 가장 떠오르는 신진 고수의 무공을 견식 하고 싶은 게지. 혹시 아나? 내가 자네 무공을 보고 중원으로 돌아가 황제 폐하께 잘 말씀드리면, 폐하께서 지금의 무림맹주처럼 검과 지위를 하사하실지?”
황제가 내리는 검과 지위. 천년 제국의 단단한 위상을 생각하면 어마어마 영광일 터였다. 중원의 가문에서 알게 되면 좋다고 잔치를 할지도 몰랐고, 당장 신대륙에 있는 장가 상회에도 큰 이익이 되는 건 물론이었다.
그러나 무심한 눈으로 순우현을 바라보던 장건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 없소.”
순우현의 표정은 이제 그냥 흥미가 아니라 마치 ‘요놈 봐라?’하는 식으로 변했다.
“필요 없다··· 무공을 익힌 무인으로서, 그리고 제국의 신민으로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저 혁련위진도 폐하의 선물을 받아 지금의 무림맹주가 되지 않았나. 폐하가 인정해 주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건가?”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눈은 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장건은 여전히 덤덤한 모습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차분하다고 말하는 게 더 옳은 듯 보였다.
그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앞에 세워진 검 손잡이에 닿았다. 순우현을 바라보던 시선도 그 손끝을 향했다.
그는 그렇게 상념에 빠진 얼굴로 말했다.
“···내가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은 황제가 아니오.”
순우현은 물론이고 뒤로 물러나 있던 위상과 임사영도 움찔했다. 장건의 짤막한 대꾸에는 황제에 대한 존경과 예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경험을 가진 순우현은 일단 가만히 그 말을 들었고, 위상과 임사영은 제일 어른이 나서서 뭐라 하질 않으니 꾹 입을 다물었다.
입가의 미소를 지운 순우현이 물었다.
“그럼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가? 무림맹주? 아, 사람들이라 했으니 무림맹일 수도 있겠군. 아니면 신대륙의 무인들? 혹시 더 넓게 봐서 바다 건너 중원의 무인들?”
거꾸로 세워진 검. 그 검을 바라보는 장건의 머릿속에 순간 많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노인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의 무인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무림맹과 신대륙 무인들, 중원의 고대 세가, 황군, 더 나아가 천하에서 가장 강한 황제에게까지.
지금 그가 발 디디고 살아가는 땅은 이 세상이었고, 그렇기에 그 세상의 많은 사람이 장건의 무공을 인정하고 추켜세워 준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매번 대협이니 뭐니 하며 별호를 불러주는 사람들에겐 그냥 이름을 불러주라 말하며 초탈하게 굴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그런 명성이 싫지는 않았다. 그런 걸 바라고 살아오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그러나 그가 정말 받고 싶은 인정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저히 지금 삶에선 이룰 수 없기도, 또 어떻게 보면 너무나 간단히 이룰 수 있기도 했다.
그가 정말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은 그가 재현한 무공의 주인들, 정확히는 무림을 꿈꾸던 모든 사람이었다. 그건 글줄로 그 상상을 표현하는 사람이나 그저 어느 하루 책상에 앉아 공상에 빠지는 사람 모두를 말했다. 장건은 가끔 그 사람들 앞에 선 자신을 상상했다. 그 앞에서 펼치는 태극권과 제왕검형을 꿈꿨다.
그 사람들 틈에는 그의 이전 삶도, 어린 장건도, 지금의 장건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장건의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무림인들이었으며 동시에 장건 그 자신이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것은 누군가에겐 평생이 걸리는 어려운 일이기도, 또 누군가에겐 그저 환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문득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검을 쥐었다.
“···한낱 떠돌이의 무공을 보고자 참 멀리도 오셨군.”
순우현은 장건의 말을 듣고 두 눈을 끔뻑거렸다. 조금 전 했던 질문의 대답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장건이 말을 돌린다고 여긴 그는 털털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자네 명성이 그만큼 널리 퍼져 장안에도 들릴 정도니 그런 것 아니겠나? 요즘 장안에서는 신대륙의 독특한 무공 생태가 화제네. 찰나의 순간 삶과 삶이 충돌하는 모습이 마치 불꽃 같기도, 혹은 봄날 잠시 피고 지는 꽃 같기도 하다는 게지. 그리고 그중에서 최근 가장 유명해지고 있는 무인이 자네이니, 황궁의 무학자로서 어찌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나?”
검을 내려다보던 장건의 시선이 느릿하게 올라와 다시 순우현과 마주했다. 그리고 그 눈을 본 순우현은 순간 전신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장건의 눈은 마치 한낮의 햇살도 끝까지 투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깊숙한 호수 같았다.
“내 무공이 보고 싶소? 그럼 어디 한번 잘 보시오.”
그 순간 장건의 손이 거꾸로 박혀 있던 검을 뽑았다. 동시에 순우현은 마주하고 있던 장건의 눈 속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온 세상이 색을 잃었다.
환한 달과 반짝이는 별빛으로 흐리지만 나름의 색을 반사하던 골목길이 오로지 흑과 백으로만 나뉜 그림처럼 변했다. 적어도 순우현이 느끼기엔 그랬다.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검을 뽑은 장건과 순우현뿐이었다. 뒤에 있는 위상과 임사영은 물론이고 골목길의 바람조차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순우현은 지금 이것이 장건의 심상과 자신의 심상이 충돌해 나타난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다. 고수와 고수가 만나 칼 한번 뽑지 않고 무수히 많은 서로의 수를 내다보는 것. 거기서 자신이 이길 단 하나의 투로를 찾는 것.
지금 이 현상의 원인과 장건의 나이를 떠올린 순우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황제도 저 나이에 이런 성취를 이루진 못했다. 게다가 그는 그 경악을 오래 이어갈 수도 없었다. 장건이 앞으로 한 발짝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 순간 선명한 흑백으로 나뉜 세상 속에서 무수한 그림자가 생겼다. 그 모든 그림자는 그 순간 장건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의 모든 경우의 수였고, 순우현 또한 반사적으로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흑백 세상에 그렸다.
황군 무공의 정수가 펼쳐졌다.
그가 수십 년에 이르는 황궁 생활 동안 익히고 만들고 엮어낸 무수한 무공들. 갑甲급이니 을乙급이니 하며 배움의 어려움과 위력을 따져 나뉜 수많은 무공, 천년 간 더 빠르고 더 강하게 개량되어 온 살인기술들.
분명 등이 굽어 조그맣던 순우현의 몸이 그 순간 몇 배는 더 커지며 다가오는 장건의 그림자들을 모조리 쓸어내려 했다.
그렇게 장건의 첫수와 순우현의 첫수가 만난 순간, 두 그림자는 서로의 빈틈을 동시에 찌르고는 흩어져버렸다. 동귀어진의 수였다.
순우현의 주먹이 갑급 무공 폭렬권爆裂拳을 펼쳤다. 그에 맞서는 장건의 검은 벼락을 그렸다. 천지를 가르는 벼락과 뭐든 부숴버리는 주먹이 맞부딪쳤다. 주먹이 갈라졌다. 그러나 벼락도 힘을 잃었다.
순우현의 손바닥에서 무지막지한 폭풍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허공을 격하고 장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려 들었다. 그때 장건의 손에선 이글거리는 화룡이 솟아 나왔다. 폭풍은 화룡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흩어져버렸다.
순우현은 굳게 말아쥔 주먹을 뻗었다. 단순한 정권처럼 보였으나 그 안에선 하늘을 울릴 거력이 담겨 있었다. 진천권振天拳이었다.
그에 맞서는 장건은 부드럽게 손바닥을 펼쳤다. 그 손바닥은 매끄럽게 순우현의 주먹과 팔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진천의 거력을 흩어버리고 가슴에 닿았다. 그 동작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그 안에는 태산을 무너뜨리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림자는 흩어졌다.
순우현의 공격은 같은 것이 없었다. 그림자 하나하나가 다른 무공을 그렸다. 그림자들은 어느새 검이나 도, 창, 채찍이나 도끼 같은 당장 손에 없는 무기로 펼치는 무공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그에게선 도저히 더 빠르고 강한 것만 추구하는 황군의 무공이라 볼 수 없는 기이한 무공들도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결국 장건과 순우현의 그림자들은 비슷한 동수를 이루거나, 밀리거나, 이겼다.
어느 순간이 지나자 그림자들의 동작이 점점 뭉개지기 시작했다. 무수한 경우의 수와 가능성이 하나의 궤적으로 수렴되어 가고 있었다.
순우현은 평생 익혀온 모든 무공을 쏟아내었다. 이제 그의 머릿속엔 장건의 무공을 견식하겠다거나 평가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 순간 이기고자 하는 마음만 남았다. 결국엔 그가 펼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가장 강한 하나의 궤적이 남았다. 이보다 빠르고 이보다 강할 순 없을 듯했다.
그동안 장건은 점점 흔들리는 듯 보였다. 강하고 빠름의 극極에 이른 순우현과는 달리 장건은 괜히 갑자기 느리기도 하고, 엉뚱한 궤적을 그리기도 했다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림자를 만들기도 했다.
마치 끝도 없이 쏟아지는 순우현의 공세에 뭔가 돌파구를 찾아보려 버둥거리다가 결국은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황군 무공의 정수만 남은 순우현 앞에서 그런 장건은 바람에 휘청거리는 종잇조각 같았다.
이겼다. 순우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장건의 놀라운 성취에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결국 그가 이긴 것이다. 그래서 순우현은 이 놀라운 청년 고수를 이제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너무 뛰어난 성취였기에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 죽이는 것이 맞았다. 지금 죽이지 않는다면 이 두려운 재능이 더 나아가 무슨 성취를 이룰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또 그렇기에 그를 황군으로 포섭할 수 있다면 황궁의 무공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단초를 얻을 수도 있었다. 당장 공주 유설이 그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듣기로는 장건 또한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니 둘을 연결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면 장건의 무공은 자연스럽게 황군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미래가 유망한 청년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큰 명성에 비해 덤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은근히 마음에 든 것도 있었다. 게다가 순우현은 소설 무명협의 주인공이 장건임도 알았다. 그도 늙었으나 무인이었고, 그 무로 협을 행하는 장건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기분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를 살리고 싶었다.
그런 고민과는 별개로 그의 마지막 궤적은 이제 장건을 향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가장 강한 일격. 그를 마주한 장건은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하얗고 검기만 했던 심상 속에서 한 줄기 섬광이 빛났다.
“엇?”
다음 순간 순우현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꿈뻑거리다가, 곧 자신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음을 깨달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위상과 임사영은 갑자기 풀썩 무릎을 꿇는 순우현의 모습에 경악했다. 심상 세계를 엿보지 못한 두 사람에겐 장건이 검을 뽑자 순우현이 대뜸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순우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자신이 본 섬광, 그 빛줄기를 떠올렸다. 그것은 마지 밤하늘의 별을 보듯 아득한 빛이었다. 그러나 그 아득함은 동시에 파멸적이었다. 현실이 아닌 심상 속이었음에도 세상천지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듯한 별빛.
아주 오래된, 한 제국이 건국되기도 전 쓰여진 고문서에 그와 같은 별빛을 표현하는 말이 있다. 순우현은 물론이고 황궁의 무학자들이 그저 옛날 사람들의 허풍 정도로 결론 내렸던 경지. 검으로 별을 이루는 것.
“···검기성강劍氣成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