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8)
18화
* * *
장건은 천막 옆 나무밑동에 앉아 쨍한 정오의 햇볕을 쬐고 있었다.
저쪽에서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고 있는 비랑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놀아준다는 식이었던 그녀는 이제 본인이 더 신나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환한 햇살이 풀과 강물 사이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비췄고, 그 빛에 반짝이는 모습에선 목가적인 차분함과 힘차게 약동하는 생명력이 공존했다.
어쩐지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풍경이었다.
“참 밝은 아이야.”
그때 장건 옆으로 적풍이 다가와 말했다. 장건은 옅게 웃었다. 적풍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곤 자신도 가볍게 털털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어르신에게 이야기 들었나?”
“들었소. 무림인 상대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장건은 작게 중얼거리며 비랑과 아이들에게선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 외눈 구름의 천막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느 날 이 계곡에 중원인 몇 명이 아랫마을에 보내놓았던 부족 젊은이를 앞세워 찾아왔었네. 그들은 뜬금없이 이 땅을 팔라고 하며 많은 중원 은전을 약속했지. 하지만 이 계곡과 마을은 우리 부족이 벌써 백 년 넘게 살아온 지역이네. 계절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긴 했지만 결국 이 계곡이 우리 부족의 집인 셈이야. 그런 걸 팔 리가 있나? 팔면 우린 어디로 가라고? 아니, 그 전에 땅이라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인가?”
그러자 그 중원인은 더 많은 돈을 약속했다. 게다가 이들을 이끌고 왔던 부족 젊은이는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을 수는 없다며 부족원들을 설득하려 했다. 이번 기회에 계곡을 넘기고 중원인들의 도시로 가 살자는 말이었다.
“그 녀석을 아랫마을에 너무 오래 보내놓았어. 이상한 물이 들어서는 헛소리를 하는데 쥐어패고 싶더라니까. 어쨌든, 그 중원인은 우리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얌전히 떠났네. 아니, 얌전히 떠난 줄 알았지.”
그들을 데려왔던 부족 젊은이는 다른 부족 사람들을 시대에 뒤처진 병신들 취급하며 중원인들과 함께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떠났던 중원인들이 이번엔 스물대여섯으로 덩치를 불려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이미 돈을 주고 이 땅을 구매했다며 우리에게 여기서 꺼지라더군. 우리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따지니 웬 종이 쪼가리 하나를 내밀었네···”
그것은 부족 젊은이 재빠른 까마귀가 이 계곡의 권리를 팔고 은전 오백 닢을 받아 갔다는 증서였다. 부족 사람들을 욕하던 그 젊은이는 그렇게 부족 전체를 팔아넘기고 도망친 것이다.
장건은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원주민들이 땅에 대한 재산권 의식이 부족한 점을 노린 것이다.
이들에게 땅이란 부족원 전체가 모두 함께 공유하는 공동의 것이자 조상의 것이며, 동시에 완전히 그것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에서 빌려온 것에 불과했다. 언젠가 그들은 죽음으로서 그 자연에 돌아가 잠시 빌려왔던 것마저 모두 돌려주니, 한 점 땅을 누가 가지고 말고 하는 것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원인들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해 땅의 주인이 재빠른 까마귀라는 서류를 만들고 곧장 거래해버린 것이다. 그러면 이곳에 있던 부족원들 입장에선 어이가 없지만, 일단 서류상으로는 부족원들이 나가야 한다. 중원인들은 분명 이 땅의 주인에게 돈을 주고 권리를 샀으니까.
장건은 그 서류를 인정한, 도장을 찍어준 단체가 어디였는지 기억하느냐 물었다.
“그, 그 뭐였지? 아마 무슨 조합인가 그랬는데.”
“상행조합?”
“아! 맞아. 상행조합이었네. 무슨 상인들의 권리와 물자의 유통을 보호하는 부족이라던가?”
그들이 그렇게 서류를 내밀었지만, 부족 사람들이 그 서류를 인정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중원인들은 우르르 몰려왔던 그대로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부족 사람들은 수십 명에 가까웠고 건장한 어른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외눈 구름은 부하들을 이끌고 떠나는 대장 중원인의 눈에서 분명한 탐욕과 절대 포기하지 않을 의지를 느꼈다. 그때 그가 떠나던 것은 그저 명분을 쌓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자연히 그들이 다시 몰려오는 날이 피를 보는 날이 될 것임은 어렵지 않은 예견이었다.
외눈 구름이 장건을 내쫓지 않은 이유에는 그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무림인들 상대할 방법 정도는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상념에서 돌아온 장건이 뛰어노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런 불공정 거래는 상행조합과 무림맹, 멀리는 제국에서도 금지하고 있소. 아마 서류를 만들었다는 그 중원인과 이 지방 상행조합원 일부가 같이 짜고 당신들을 속이려는 것일 테지. 무림맹 지부에 사람을 보내시오.”
장건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적풍은 천천히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의 무림맹 지부장은 그리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인물이네. 하지만 그 중원인에게 뇌물을 먹어도 끝내는 우리 편을 들어 주겠지. 그게 자기 일이니까. 문제는 그 뇌물이 그가 움직이려는 시간 정도는 끌어 줄 것이라는 점이네. 그리고 그 시간이면 우리 부족이 모조리 죽어 나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야.”
장건은 고개를 돌려 적풍을 올려다보았다.
“···중원 말을 잘하는 것도 그렇고, 중원인에 대하여 잘 아는 것 같은데.”
“원래 재빠른 까마귀 녀석 전에는 내가 아랫마을에서 중원인들의 동향을 살피는 일을 했었네. 그 녀석, 다른 사람 눈치를 잘 살피고 똘똘하기에 일을 물려주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음을 탓해야지.”
그는 씁쓸한 얼굴이었다. 부족을 위해 타지에서 부대껴 살았다면 부족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사람일 터인데, 정작 그 부족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점이 참 안쓰러운 사람이었다. 장건은 다시 비랑과 아이들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서류를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이오. 이번 일을 어떻게 잘 넘겨도 앞으로 계속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들으며 이번엔 적풍이 장건을 바라보았다.
“···묻지 않는 건가?”
“뭘 말이오?”
“그 중원인이 이 계곡을 원하는 이유.”
“글쎄. 그놈 하는 짓을 보아하니 별것 아닐 것 같은데.”
적풍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아무래도 이 계곡 어디에 금광이 있을 수 있다는 모양이더군. 그 금광을 찾기 위해 싹 다 헤집어 엎어야 하니 우릴 쫓아내려는 것이야.”
장건은 피식 웃었다.
“황금이면 별것 정도는 되겠군.”
“자네가 주었던 그 은전을 열댓 개는 모아야 겨우 황금 동전 하나로 바꿀 수 있다던데. 그럼 자네들에겐 황금이 아주 귀중한 것 아닌가? 그럼 별것 이상일 듯한데.”
적풍의 의아한 질문에도 장건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여전히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과 비랑의 모습이 담겼다. 깔깔대며 웃던 비랑은 문득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활짝 웃었다. 장건은 그 황금빛 눈을 보며 옅게 마주 웃어주었다.
“어떤 황금은 다른 황금보다 더 가치 있지. 적어도 나에겐 그렇소.”
적풍은 그의 대답에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둘은 잠시 그렇게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적풍은 왠지 그가 말한 황금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이면 별 불편함 없이 팔을 움직일 수 있겠소. 그럼 뭐라도 할 수 있을지 봅시다.”
“···알겠네. 부족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알려두지. 고맙네. 꼭 보답하겠네.”
장건은 별 말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적풍은 그 작은 동작에서 그의 무공실력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들을 도와주려 한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둘은 다시 아이들을 바라보며 잠시 정오의 햇살을 맞았다.
* * *
다음날 장건은 적풍을 따라 마을 외곽 공터에서 이곳의 제일 건장한 전사 열을 만날 수 있었다. 제일 나이 많은 자가 적풍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 젊고 탄탄한 몸의 사람들이었다. 그중엔 비랑도 끼어 있었다.
그녀는 장건과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장건은 그녀에게 눈인사로 답하고는 늘어선 부족 전사들을 훑어보았다.
잠시 그들을 살펴보던 장건은 적풍을 돌아보며 물었다.
“싸울 수 있는 자는 이들이 전부요?”
“전사는 우리가 전부네.”
“···이런 변방에서 돈을 주고 구할 수 있는 칼잡이라 해봐야 그리 뛰어난 자들은 아닐 것이오. 하지만 그래도 열댓 명은 가볍게 넘겠지.”
적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열 명이 전부라면 각자 둘, 셋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군. 하지만 우린 자신 있네. 정말로.”
장건이 그 대답을 듣고 잠시 생각하고 있자니, 모인 열 명 중 제일 덩치가 큰 남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게 걱정되면 일단 나랑 한 판 해 보던가. 그 잘난 무공이란 거 맛 좀 봅시다.”
그는 어슬렁거리는 동작과 탄력적으로 꿈틀거리는 근육을 자랑하며 앞으로 나섰다. 장건은 남자의 삐뚜름한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맛이 좀 매울 텐데.”
“흐. 슬픈 이리가 웬 시체 하나를 업어왔나 했더니, 허세가 대단한 친구군.”
공터로 찾아온 장건과 적풍을 보고도 약간 산만하던 전사들은 장건이 빼는 것 같지 않자 금세 우르르 거리를 벌리고 바닥에 앉았다. 단숨에 둥그런 싸움판 하나가 만들어진 것이다. 적풍마저도 그중에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장건의 실력을 알아보려 했던 것 같았다.
그걸 보며 다시 가볍게 웃은 장건은 허리에 매고 있던 칼을 칼집째 뽑아 공터 한쪽에 있던 나무에 세워두었다. 그리고 오른 어깨를 가볍게 움직여보며 상대 전사에게 몸을 돌렸다. 오른팔을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난 산 타는 곰이다. 우리 계곡 부족에서 붉은 바람을 제외하곤 내가 제일 강하지. 이름이 뭐냐, 무림인?”
“장건.”
“좋아, 장건. 그 잘난 무공 좀 보여줘 봐.”
산 타는 곰은 대충 걸치고 있던 상의를 벗어 던지고 무릎을 낮추며 몸을 굽혔다. 번뜩이는 눈과 슬며시 올라오는 손을 보아하니 기회가 보이면 그대로 치고 나와 달라붙을 모양이었다. 본인의 무게와 힘을 잘 이용하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그의 전투적인 자세에 비해 장건은 비스듬히 서서 왼손을 가슴께까지 들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본 산 타는 곰은 그가 자신을 얕본다고 생각하는지 킁-하고 크게 콧김을 뱉고는 성난 황소처럼 튀어 나갔다. 빠르게 들어 올린 두 팔로 머리를 가린 것이 반격으로부터 급소를 보호하는 것으로 보였다. 산 타는 곰과 장건의 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벼락같은 장건의 뒤돌려차기가 산 타는 곰을 스쳤다.
머리를 막고 있던 팔은 별 의미가 없었다. 장건의 발은 마치 채찍이 된 것처럼 낭창한 선을 그리며 좌우로 막힌 그의 두 팔을 피해 아래쪽으로 파고들어 턱을 후려쳤다. 산 타는 곰은 옆으로 나가떨어지며 생각했다. 저놈 발에 쇠뭉치라도 달렸나?
분명 발끝에 맞았는데 망치로 후려 맞은 것처럼 삐-하는 소리가 머리를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곰이라는 이름을 괜히 얻은 것은 아닌지 그는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두 손으로 바닥을 밀며 얼른 일어섰다.
그리고 머리가 띵한 와중에도 다시 장건에게 달렸다. 큰 동작을 했으니 빈틈이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장건은 달려온 덩치를 부드럽게 받아내며 그의 허리춤을 붙잡아 뒤로 넘겨버렸다. 장건의 몸을 붙잡으려던 산 타는 곰의 손길은 묘하게 살짝 흔들리는 그의 몸 때문에 타점을 잃었다. 결국 산 타는 곰은 허공에서 앞으로 구르며 다시 나가떨어졌다.
다시 한번 바닥을 구른 산 타는 곰은 흙먼지 가득해진 몸에 벌게진 얼굴로 씩씩댔다. 그의 눈에 처음 자세 그대로 침착한 모습인 장건이 보였다. 산 타는 곰은 비릿한 맛이 나는 침을 옆으로 퉤 뱉었다.
그리고는 장건 쪽을 바라보며 마치 육상선수가 출발할 때처럼 착 낮은 자세를 잡더니 두 주먹으로 땅을 때렸다.
장건은 그 순간 발바닥을 타고 흐르는 묘한 찌르르함을 느꼈다. 마치 이 바닥이 저기 산 타는 곰의 두 주먹으로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산 타는 곰!”
지켜보던 적풍이 그렇게 소리친 순간, 방금보다 세 배는 빨라진 산 타는 곰이 장건의 허리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장건은 반사적으로 내공을 담아 무릎으로 그의 명치를 올려 쳐버렸다.
북 터지는 소리가 퉁-하고 울리며 타격당한 산 타는 곰을 중심으로 흐릿한 먼지바람이 동심원을 그렸다. 잠시 공터가 고요해졌다.
“···장건?”
적풍이 놀란 표정으로 장건을 부르자 의식을 잃은 산 타는 곰이 풀썩 쓰러졌다. 장건은 옷을 툭툭 털고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재밌는 기술이오. 뭔지 설명 좀 해주시겠소?”
“···산 타는 곰은?”
“직접 보시오. 방금 그 힘이 몸을 지켜준 것 같은데.”
적풍은 얼른 다가와 산 타는 곰을 살폈다. 그의 말대로 기절한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적풍은 그를 살피고는 감탄한 얼굴로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자네 좀 하는군.”
장건은 말없이 씩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