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
장건은 혼자 뺀들뺀들 웃고 있는 양굉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느낀 양굉의 입에서 슬며시 미소가 가라앉을 즈음, 그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쳤다. 양굉은 컥-소리 한번 내며 변장을 위해서 입에 물고 있던 보형물을 왈칵 흘렸다. 침 범벅된 천 덩어리가 바닥에 철썩 떨어졌다.
난데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양굉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뒤통수를 부여잡고 멍하니 장건을 바라보았다.
“···왜 때리쇼?”
“띠거워서.”
양굉은 뭐라 대답도 못 하고 말문이 턱 막혀서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다가 왈칵 화가 나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정작 차분한 장건의 시선을 마주 보고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장건이 말했다.
“왜. 할 말 있냐?”
“···시발, 내가 뭐 할 말 있겠소? 이게 다 내 무공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그걸 알면 수련을 좀 해.”
양굉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번엔 뭐라 반응도 못 할 정도로 어이가 없어서였다.
무공 수련과 성장에도 어느 정도라는 게 있었다. 뛰어난 고수의 뒤에는 대부분 스승이든 가문이든 튼튼한 배경이 있고, 그 배경을 타고 난 고수 중에서 다시 재능과 노력을 가진 자가 진짜 절정의 고수가 된다. 배경 없이 자신만의 재능과 노력으로 고수가 되는 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마른 땅에 머리를 들이박는 식으로 고수가 되는 자는 정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논지에서 보자면 장건은 돌연변이이자 괴물이었다.
중원 호남의 장 씨 세가가 부자인 것은 맞았다. 그러나 단순히 돈으로 익힌 무공에서 시작되었다기에는 지금 장건의 무공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암룡대의 정보망으로 걸러낸 내용만 따져봐도 도저히 한 사람이 가졌다고 믿을 수 없는 무공의 연속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장건의 나이였다. 양굉이 만날 장건을 장형이니 뭐니 부르지만 그가 알기로 장건의 나이는 이립而立, 그러니까 아직 서른 이전이었다. 그가 신대륙으로 넘어온 몇 년간 황야를 떠돌며 아무리 많은 실전을 겪었다 해도 상식을 뛰어넘는 결과였다.
그러니 양굉 입장에서는 도저히 그 무공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처음 만났을 적에도 양굉은 장건의 적수가 아니었다. 골패 사기를 치고 괜히 냅다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허허, 그렇지. 수련, 무공 수련 좋지···”
결국 양굉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억지웃음을 지어야 했다. 장건도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사실 장건 입장에서도 양굉은 어처구니가 없는 놈이었다. 지난날 그렇게 장건에게 고통을 당하고도 오늘 또다시 이렇게 기어들어 온 것이다. 낯짝이 두껍다고 할지, 아니면 아무리 그래도 죽진 않으리라는 계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자주 보니까 반가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장건은 억지로 웃는 양굉 뒤통수를 다시 한번 가볍게 후려쳤다. 다시 멍해진 그의 얼굴을 보며 한쪽 벽에 등을 기댄 장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왜 왔냐?”
“···또 때린 건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거요?”
“한 대 더 때려줘?”
양굉이 두 눈을 가만히 감았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은은한 미소까지 떠올랐다.
“허허허. 이만하면 될 듯하오, 장 형. 별로 아프진 않은데 머리가 흔들리니 애써 한 변장이 무너지는구려.”
무슨 해탈이라도 한 듯 자애로운 미소였다. 그러나 그 입꼬리가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이 장건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장건은 고개를 살살 흔들며 다시 질문했다.
“왜 왔냐고.”
“···첫 번째로는 내 상관이 위장 직업으로 포목점을 하고 있다는 점이오. 이거 직접 가져다주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날 시켜 먹는 것인지 모르겠다니까.”
“그게 첫 번째면? 두 번째도 있나?”
양굉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가벼움을 지우고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 되어 장건과 시선을 마주했다. 자연스럽게 장건의 입가에 달려있던 옅은 미소도 지워졌다.
“무림맹과 황군의 준비가 다 끝났소, 장 형. 동진군 편성이 완료되었소.”
양굉의 손이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손이 나왔을 땐 하얀 서신이 들려 있었다.
“진동장군의 서신이요. 아마 언제까지 오라는 말이 적혀있을 것이오.”
받아보니 겉봉투에 설묘금 배상이라는 글씨가 둥글둥글하면서도 어딘가 힘 있는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유설의 글씨인 듯했다.
“이걸 왜 네가 가져오냐?”
“나도 같은 질문을 했지. 그랬더니 정식으로 황군을 보내 장 형을 초청하면 그게 황군의, 정확히는 진동장군의 정치적 움직임으로 읽히게 된다더군. 이미 동진군 안으로 편성된 무림맹 안에서 그런 장 형을 이용하러 들 수도 있다고 하고. 그 왜, 께름칙한 무림맹 양반들 있지 않소, 혁련 씨와 늙은이들. 그래서 장 형한테 뭔가 지휘 같은 걸 맡기진 않는다고 들었는데.”
장건은 양굉의 말을 들으며 서신을 꺼냈다.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언제까지 무림맹 안의 어느 부대로 오라는 말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외랑대外狼隊?”
“거기로 가라 적혀있소?”
“여기가 어딘데.”
진지해 보이던 양굉의 이마에서 갑자기 주르륵 땀 한 방울이 흘렀다.
“그, 거긴 무림맹 소속도 아닌 무림인들을 모아둔 낭인 부대인데···”
“낭인 부대 외랑대라. 부대 이름이 참 적나라하군.”
“허허··· 그렇긴 하지.”
서신을 보던 장건이 어딘가 이상한 양굉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표정을 보니 문득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암룡대로 이번 토벌에 합류하나?”
“···그렇소.”
“무림맹 소속으로 편성되진 않겠군. 비밀 무사들이었으니. 외랑대?”
“···외랑대.”
“너도 가냐?”
양굉이 고개를 떨궜다.
“···그렇소.”
장건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군 양굉의 어깨를 툭툭 쳐줬다.
“잘됐네.”
“···뭐가 말이오?”
“먼 길 가는데 따까리 하나 있으면 좋지.”
양굉의 입이 헤 벌어지며 눈빛이 흐려졌다.
동진군 토벌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전격적인 공세로 마궁을 처리할 것이지만, 당연하게도 전쟁이라는 건 처음 계획했던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어쩌면 토벌은 몇 개월에서 길게는 해를 넘길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한 부대로 묶인다면 당연히 그 시간 동안 계속 붙어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양굉은 얼른 자리를 뜨려 했다.
“···나, 난 이만, 이만 가보겠소.”
“뭐 급한 일 있냐?”
“아니 뭐, 그렇게 급한 건 아니고··· 그냥 좀··· 헤헤, 나중, 나중에 봅시다, 장형.”
장건은 몸을 돌린 양굉을 막지 않았다. 그냥 짧게 불렀을 뿐이다.
“야.”
우뚝 걸음을 멈춘 양굉이 스르륵 뒤를 돌아보았다. 장건은 그의 떨리는 눈을 보며 바닥을 턱짓했다.
“네가 흘린 거 주워가.”
“···아. 그, 그렇지. 내 입에서 나온 건데 내가 치워야지. 헤헤.”
양굉은 얼른 바닥에 흘렸던 천 뭉치를 주웠다. 아직 본인 침으로 축축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걸 주워 품에 집어넣었다. 이후 그는 얼른 다시 몸을 돌리려 했다.
“헤헤, 그럼 장 형. 난 이만 가보겠소. 나중에 봅시다.”
“그래. 꼭 보자. 외랑대에서.”
양굉의 몸이 다시 한번 굳었다. 그는 살짝 일그러진 표정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장건은 처음과 다를 것 없이 차분한 얼굴이었다.
양굉이 물었다.
“···안 보면?”
장건은 표정 변화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위협이랄 것 하나 없는 동작이었지만, 양굉의 얼굴은 스르륵 흐려졌다. 장건의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결국 그는 체념한 얼굴과 축 처진 어깨를 하고는 장건에게 머리를 까딱였다.
“그럽시다. 거기서 봅시다··· 오늘은 나 먼저 가겠소.”
그리고는 장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터덜터덜 떠나갔다. 그런 모습에 장건은 고개를 살살 흔들며 털털 웃었다. 덕분에 행군길이 지루하진 않을 듯했다.
양굉이 대문 너머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던 장건의 눈이 다시 손에 들린 서신을 향했다. 거기 적힌 시간은 이틀 후였다. 날짜를 확인한 장건의 눈이 이번엔 마당 저쪽 편에 있는 서하와 아이들, 부인들을 향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무복을 자랑하던 서하는 배달원 양굉이 떠난 걸 보고는 쪼르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장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는 사람이었어요?”
“음. 징글징글한 놈이지.”
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
장건은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헝클었다. 궁금한 표정을 짓던 서하는 장건의 손길에 얼굴을 찡긋거렸다. 금방 의문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런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장건은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봉투에 넣고 품에 집어넣었다.
“서하야.”
아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푸른빛 눈동자가 활기를 품고 반짝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같은 아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한 눈이었다. 장건은 그런 서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렇게 앉으니 서하의 눈높이가 장건보다 조금 더 높아졌다.
“나 혼자 잠시 다녀올 곳이 생겼어.”
서하의 표정이 덜컥 굳었다. 하지만 장건은 흔들림없이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적어도 저번에 헤어지고 다시 만났던 것보다는 훨씬 빠르겠지.”
“···어디 가는데요?”
그런 장건의 차분함에 서하 또한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꽤 멀리 다녀올 일이 생겼어.”
서하는 가만히 장건의 두 눈을 번갈아 보았다.
“언제 가는데요?”
“이틀 뒤에.”
“···언제 돌아오는데요?”
“글쎄. 두 달? 아니면 석 달쯤 걸리지 않을까?”
장건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서하가 뚱하게 물었다.
“길 잘 몰라요?”
장건은 하하 웃었다. 잘 모르긴 했다. 확실히 동진군은 동부 도시 고원성을 넘으면 이후에는 원주민의 길 안내를 받던가, 정찰대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맞아. 나도 처음 가는 길이야.”
서하는 장건의 웃는 모습을 보며 함께 웃진 못했다. 그냥 약간 시무룩해져서 바닥을 보며 말했다.
“···꼭 가야 해요?”
그를 본 장건은 아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래. 꼭 가야 해.”
서하를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다친 경험이 있는 아이였다. 그러니 모든 사정을 알게 되는 건 지금보다 조금 더 크고 나서가 좋았다. 아니, 어쩌면 속으론 이미 다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난 마인들의 습격과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서하였다. 요즘 들어 제 나이에 맞게 행동하지만 원래 녀석은 보통 총명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 생각이 정답이었는지, 서하는 더 보채지 않고 그저 두 팔로 꽉 장건을 끌어안았다. 장건은 그런 아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슬쩍 눈을 떠보니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과 불안한 표정의 염 부인이 보였다. 장건은 그들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 * *
장운은 떠나기 전에 숨겨두었던 독주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술병이 잔에 담기기도 전, 술 냄새를 맡은 염 부인이 도끼눈을 뜬 덕분에 아쉽게도 술자리는 물 건너갔다. 그 술은 돌아온 후에 마시기로 했다.
아직 백보신권을 완전히 배우지 못한 진견은 저택에 머물며 장건을 기다리기로 했다. 생각보다 신사천의 승려들과 많이 친해진 덕분 같기도 했다. 물론 그의 속마음은 장건이 없는 장가 상회를 지키기 위함일 터였다.
떠나지 않는 건 장연과 그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긴 하느냐 묻는 장운에게 생글생글 웃기만 하고 대답을 안 했다. 게다가 남편 백리강은 은근슬쩍 상회의 일을 배우고 있었다. 중원 본가에서 알게 되면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릴 일이었다.
장건이 떠나있는 동안 무공은 장연이 봐주기로 했다. 일단 배운 기간이 훨씬 길다 보니 그녀의 수준이 더 높은 덕이었다.
아이들은 삼촌이 어디 놀러 가는 줄 알고 칭얼거렸다. 하지만 서하와 장상의 주도로 그런 칭얼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단상운은 장건에게 집 걱정은 말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지난번 습격 이후 무림에서의 자신의 수준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된 덕분인 듯했다.
오랫동안 마구간에서 빈둥거리던 조조는 오랜만에 말굽도 정리하고, 편자도 갈았다. 녀석은 그걸 보고는 또 먼길을 떠나는 걸 짐작했는지 푹푹 한숨을 내쉬어댔다.
“인마, 나가고 싶다고 삐칠 땐 언제고?”
장건은 그런 조조를 달래며 안장에 올라탔다. 그리고 대문 밖으로 배웅을 나온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인사를 나눴기에 더 말은 없었다. 장건은 벗어두었던 삿갓을 쓰며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아이들은 조그마한 손을 흔들었고, 어른들은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장건은 곧 툭툭 조조의 고삐를 당겼다. 조조는 장건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들에게 인사하듯 고개를 까딱이고는 털털거리며 무림맹을 향해 출발했다.
햇볕이 쨍쨍한 정오. 뜨거운 햇살에 모두들 일찍 들어갈 법도 했지만, 모두 장건이 신사천 거리 저편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다림은 떠난 이가 출발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 기다림은 장건이 떠나갔던 길로 다시 돌아오는 날 끝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