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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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행군이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황군의 행군이었다. 행군에 따라붙은 무림맹 전투 부대는 대부분 말을 타고 있었고, 보급 마차들은 행군 제일 뒤에서 따라갔기 때문이었다. 오와 열을 맞춰 두 발로 이동하는 것은 황군들 뿐이었다.
출정식이나 장군의 연설 따위는 없었다. 신사천 주민들의 환호와 배웅도 없었다. 그저 아침 일찍 무림맹으로 황군의 전령이 찾아와 명령을 하달했고, 전날 준비를 끝내둔 무림맹의 병력은 얼른 출발해 황군의 행렬을 따라잡아야 했다. 토벌군은 아침의 맑은 공기 속에서 고요하게, 유난 떨 것 하나 없다는 식으로 움직였다. 그건 천년 동안 이어진 군단의 냉혹함이자 무덤덤함이었다.
행렬은 대략 선두에 황군이, 그 뒤로 말을 탄 무림맹 전투 부대, 마지막으로 짐마차로 이루어진 보급 부대가 이뤄졌다. 두 발로 걷는 자들이 가장 선두에서 속보로 앞서가고 있었다. 유설과 몇몇 장군, 그리고 비전투 인원만이 말과 마차를 탔다. 무관 대부분과 병사들은 모두 보도로 이동했다.
그들의 무장 상태는 놀라웠다. 가장 낮은 지위의 병사도 질 좋은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허리에는 검을, 손에는 긴 창을 들었다. 그러고도 등에는 그 병사 개인의 보급품, 장비, 무장이 군장으로 묶여 메여 있었다. 그 군장에는 황군의 비전 전투식량도 담겨있어서 병사 홀로 떨어지더라도 며칠을 버틸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걸 본 장건은 혼자 질색했다. 완전무장 한 황군을 보니 정말 입군 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군대를 두 번 갈 뻔했던 것이다. 군장을 멘 것은 정말 지위가 높은 장군 말고는 교위나 보사나 다를 것이 없었다.
정오를 지나 신사천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자 동진군은 멈춰서 휴식 및 식사 시간을 가졌다. 거기서 다시 황군과 무림맹의 차이가 드러났는데, 무림맹 무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불을 놓고 물을 끓이니 육포를 굽겠다느니 어쩌니 하는 동안 황군 병사들은 불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서는 마른 식량을 우물거렸다. 그렇게 식사 비슷한 것을 하고는 모두 쥐 죽은 듯 고요히 군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었다.
멀리서 그 꼴을 본 장건은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중원과 신대륙 최강의 군단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모습이긴 했지만, 덕분에 더더욱 황군에 들어가긴 싫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장건 혼자 과거 자신의 선택을 칭찬하며 가용산이 떠 준 죽을 몇 술 뜨고 있으니 슬그머니 다가와 말 거는 사람이 있었다.
“식사를 빨리하는 게 좋을 것이네. 곧 황군에서 출발을 명령할 테니까.”
고개를 들어보니 조그만 쇠 잔을 들고 홀짝거리는 남자가 보였다. 검은색 무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키 큰 남자. 제가의 방계이자 무림맹주의 수족. 그의 이름은 제운성이었다.
장건은 죽을 우물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무림맹은 여정에 간섭 못 하나 보군.”
그 말에 제운성은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옅게 웃었다.
“황군의 토벌에 곁가지로 따라붙는 무림맹이 뭘 왈가왈부 할 수 있겠나? 무림맹과 달리 저들은 천년을 이어온 전쟁의 전문가들 아닌가. 우리야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는 들고 있던 잔을 한번 홀짝인 후 말을 이었다.
“음. 이거 간만에 다시 만나서 하기엔 그리 좋은 대화 주제가 아니군. 그래, 나한테 일 다 떠넘기고 그동안 잘 지냈나?”
“지랄하는군. 그쪽도 좋다고 물어갔으면서.”
장건의 대꾸에 제상운은 크게 웃었다. 덕분에 주변의 시선이 쏠릴 정도였다.
“그건 그랬지! 하하하! 덕분에 일이 아주 잘 마무리되었네. 소식 들었나?”
장건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죽을 퍼먹었다. 하지만 제상운은 이미 입이 트였는지 슬쩍 옆자리로 다가와 앉아서는 낮은 목소리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봤는지 모르겠군. 가주 제상천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모두 이 토벌에 동원되었네. 전투 인원만 삼백이 넘어가지. 후방에 있는 마차까지 따지면 제가의 지출은 어마어마해. 본인은 이번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니 어쩌니 하지만, 그는 이번 원정이 끝나면 가문을 홀라당 말아먹은 가주로 기억될 거야.”
장건은 못 봤다. 잘 통일된 황군과는 달리 무림맹의 행렬은 굉장히 주먹구구식이었다. 무림맹에 소속된 각각의 방파를 중심으로 작은 무리 수십이 있었고, 그들을 무림맹의 수뇌부가 통솔해 황군의 뒤를 따르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다시 황군의 바로 뒤를 따르는 전투원들과 후방의 보급 부대로 나뉘게 되니 그 혼잡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나마 따라갈 선두가 있고, 그 행렬을 이루는 것이 모두 손과 눈이 밝은 무림인들이었기 때문에 어찌어찌 행군이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원성을 넘어 본격적인 이동이 시작되면 그 행렬이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아마 결국 황군과 함께 움직이는 것은 말을 탄 전투원들 뿐일 것이다.
“뭔 소리요? 그 마인들의 땅이 보통 비옥한 게 아니라던데? 소문의 절반만 되어도 그 땅 먹고 가문을 말아먹진 않겠던데?”
그때 옆에서 조용히 죽을 퍼먹던 양굉이 끼어들었다. 제운성은 순간 이 새낀 누구지, 하는 표정을 짓다가도 곧 입을 열었다.
“···땅이 있다고 바로 소득이 나오겠나? 농사를 지어도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할 거야. 또 거기서 일할 사람도 있어야 하고, 정말 그 마인들이 원주민들을 착취하며 땅을 개간해 놓았을지 어쩔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럼 또 그 땅을 개간하겠다고 사람을 써야 하네. 이미 쓴 군비에 거기 들어갈 비용까지 생각하면 아마 제상천은 이번 원정에서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에이, 그래도 고대 세가라는 이름값이 있는데. 설마 망하기야 하겠소?”
제상천은 옅게 웃었다. 그의 눈빛에서 조금 위험한 빛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될 거야. 왜 그런 줄 아나?”
“···왜 그렇소?”
“동진군의 주 구성군은 하와이 주둔군이지. 그래서 진동장군과 함께 넘어온 하와이 태수가 신사천에 남아 뒷일을 정리하기로 했네. 문제는 바로 그 하와이 태수의 이름이 연하상, 그러니까 제가와는 원수 사이인 연 씨 가문이거든.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나?”
별생각 없이 대화에 끼어들었던 양굉은 죽을 퍼먹던 것도 잊고 눈을 껌뻑거렸다.
지금 제운성의 말을 종합해보면 결국 제상천이 토벌군에 합류하게 된 배경에는 무림맹에서는 제운성과 맹주가, 황군에서는 하와이 태수 연하상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말이었고, 두 거대 세력이 제가의 힘을 꺾어버리기 위해 압박을 가했다는 이야기였다.
신사천에서 제가의 영향력을 줄이고 싶은 무림맹주와 그냥 제가가 무너지길 바라는 연가가 서로의 이해가 맞는 걸 알고는 바로 손을 잡아버린 것이다.
“···저기 그거, 함부로 떠들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양굉 옆에 앉아 있던 가용산이 불안한 눈빛으로 양굉과 장건, 제운성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다행히 그들의 솥 앞에는 더 사람이 없었다. 장건의 명성 때문에 같은 외랑대 대원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운성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네. 제상천 본인도 잘 알고 있지. 그가 하는 주장 모르나? 위기를 기회로. 오히려 그 모든 압박을 이겨내고 제가의 영광을 실현하겠다는 이야기지. 아무렴 내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 장소에서나 털어놓겠나.”
가용산과 양굉은 그런가? 하는 얼굴이 되었다. 사실 그들이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토벌군은 출발했고, 제가의 무사들은 거기 포함되었다. 이제 남은 건 정말 제상천이 그 모든 압박을 물리치고 날아오르던가 아니면 그냥 으스러져 버리는 것뿐이었다.
죽을 떠먹던 장건은 손을 멈추고 가만히 제운성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제운성 또한 장건을 마주 보게 되었다.
장건이 말했다.
“자기 가문이 망할 상황인데 꽤 즐거워 보이는군.”
“그렇게 보이나? 사실 맞네. 개인적으로는 너무 즐겁지.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거탑을 내 손으로 무너뜨리는 기분이랄까. 물론 가문에서는 내 이름을 가계도에서 지워버리고 상황이 나아지면 당장이라도 직접 날 죽일 기세이긴 하네. 뭐, 그러라지. 앞으로 그럴 여유가 있긴 할지 모르겠군.”
제운성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꽤 오래전 장건과 처음 만났던 그때와 비교하자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실 그와 깊게 대화해 본 적 없는 장건으로서는 그에게 가문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가문을 증오했기에 그 몰락을 이리 즐거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는 무대가 열렸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운성은 장건을 적은 물론 이용할 대상으로도 여기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다가와 껄껄 웃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털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분명 무림맹주와 달랐다.
그때 삐-익 하는 황군의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출발하겠다는 신호였다.
“아, 이런.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또 보자고.”
제운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용산이 피워둔 모닥불에 남은 찻물을 휙 내버리며 일어섰다. 불길이 꺼지며 끓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렇게 다시 분주해진 사람들 틈으로 멀어져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건도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조조의 안장에 올라탔다.
다시 시작된 행군은 오전보다 빠른 속도로 이어졌다. 말을 타고 쫓아가는 이들은 괜찮았으나 보급 마차들은 조금씩 뒤처져갔다. 행렬이 길게 늘어졌다. 사천여 명에 이르는 황군은 그 무거워 보이는 군장에도 불구하고 처음과 끝의 속도가 같았다. 만약 뒤에서 따라오는 무림맹이 아니었다면 더 빨리 움직일 수도 있었을 듯했다.
결국 앞장서 가던 황군은 보급 마차도 없이 먼저 적당한 자리를 찾아 군영을 세우기 시작했다. 제일 끝에 있던 마차가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정도였다.
황군 바로 뒤에 따라붙던 외랑대도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천막도 치고, 모닥불도 몇몇 피워 식사 준비를 했다. 황야의 저녁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저녁을 먹는 중 외랑대 무사 중 몇몇은 장건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끝내 다가오진 못했다. 이미 친한 척하는 두 놈만으로도 약간 피곤했던 장건은 굳이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어차피 종일 말을 달리느라 그들도 피곤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다들 잠자리에 들 즈음, 조조를 살펴본 장건은 본인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기 전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드넓은 황야에 모닥불들만 잔뜩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온 황야와 내일 그들이 나아가야 할 황야가 보였다.
황군에서 그 빠른 행군 속도를 가지고도 굳이 보급 부대와 함께 움직이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신사천 동쪽으로 곧게 가면 나오는 황야는 말 그대로 황야였다. 잘 개간된 지역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고원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경로로 움직이려는 동진군에겐 차라리 보급 부대를 운영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때 장건의 눈에 그 둥근 모닥불의 광원 사이사이의 그림자를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가만 서서 바라보자니 그 사람은 분명 장건의 모닥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의 왼팔 소매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펄럭거렸다. 그를 본 장건은 모닥불 옆에 주전자를 세워 찻물을 끓이고 잔을 두 개 준비했다. 찻물이 마시기 좋게 우러날 때쯤 그가 장건의 모닥불 앞에 도착했다.
그는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 힘들었는지 잠시 멈춰서서는 숨을 골랐다. 장건은 그의 흔들리는 호흡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찻물을 따랐다.
“사실 차에 대해 잘 몰라서 아무렇게나 끓였소. 괜찮겠소?”
“···크흐흠. 괜찮고말고. 나도, 크음. 나도 차는 잘 모르네.”
남궁천은 그렇게 대답하며 장건의 모닥불로 다가갔다. 지금까지 모닥불과 모닥불 사이의 그림자에 묻혀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아주 건장하던 체격과 탱탱하던 안색은 이제 본래 그의 나이에 맞게, 아니, 그보다 더 늙수그레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오.”
장건은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들고 자리에 앉는 남궁천의 동작은 꽤 조심스러워 보였다. 장건은 그가 그 조심스러운 동작 그대로 호로록 차를 마시는 걸 바라보다가 말했다.
“힘들어 보이시는군.”
“그럴 수밖에.”
“무공을 포기하셨소?”
조심스레 한 손으로 차를 마시던 남궁천이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와 장건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그렇게 말없이 장건을 바라보던 남궁천은 주름진 입가를 당겨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 이제 진짜 무공을 배울 준비가 된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