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어? 어어?”
가용산은 칼을 뽑아 들고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굳어서 뭐라 멍청한 소리만 냈다. 그의 상식으론 염호성에서 검룡문의 이름을 듣고도 저렇게 행동하는 자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검룡문의 새 형제? 미친놈. 우린 도룡방屠龍幇이다. 이놈 진짜 밖에서 왔나 본데.”
“됐고, 일단 잡아서 심문하자고. 혹시 검룡문주가 어디 숨었는지 알 수도 있으니까.”
칼잡이들은 자기들끼리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장건은 그 짤막한 대화 속에서 대충 상황 돌아가는 꼴을 알 것도 같았다. 힘을 잃은 문파는 자리를 지킬 수 없는 법이다.
장건은 옆에 있는 유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내가 저 친구를 데려와서 괜한 일에 얽히게 생겼군.”
“아뇨. 괜찮아요. 그리고 아직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게 된 건 아니잖아요? 생각보다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도 있죠.”
유설은 싱글싱글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고수들 수준을 생각하면 위기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당장 그녀 본인도 황족으로서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익혔을 테니까.
그때 다가오던 칼잡이들이 유설과 진하의 얼굴을 보았다.
“어? 계집도 있는데요? 남은 검룡문도 중에 계집이 있었나?”
“무슨 상관이야. 아니지, 그래도 사내놈들보단 계집이 심문하기 편하겠지. 그럼 사내놈들은 그냥 다 죽이자고.”
시퍼런 칼날이 그들의 걸음에 따라 번들거렸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도시 안에서 사람을 죽이자 말하고 있었다. 덕분에 장건은 단순히 검룡문이 다른 문파에 이권을 빼앗긴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유설도 마찬가지였다. 싱글거리던 그녀의 미소가 자연스럽게 사그라졌다.
그녀가 그 칼잡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하.”
그 부름에 한쪽으로 물러나 있던 진하가 성큼성큼 칼잡이들을 향해 마주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설은 짧게 덧붙였다.
“죽이진 마.”
“예, 아가씨.”
칼잡이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진하를 보고 어리둥절해져서 자기들끼리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피식피식 웃었다. 혼자 다가오는 진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제일 앞에서 다가가던 놈이 칼을 들어 진하를 겨눴다.
“이봐, 괜히 객기 부리지 말고 다 같이···”
그 순간 그곳에 챙-하며 칼 뽑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놈은 멍한 눈으로 자기 손과 진하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과 칼이 바닥에 툭 떨어져 있었고, 진하의 등에서 비죽 손잡이만 보이던 검은 어느새 그녀의 손안에 들려 있었다.
“뭐야···?”
그놈이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진하의 왼 주먹이 꽂혔다. 놈은 꿱-하는 괴성 한번 흘리고는 뒤로 쓰러졌다.
“이런 시발!”
“혀, 형님!”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나머지 칼잡이들이 두서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공격하는 것보다 진하가 그들 틈으로 파고들어 검을 휘두르는 게 더 빨랐다. 섬뜩한 궤적들이 칼잡이들을 스쳐 지났다.
눈 몇 번 깜짝할 사이에 손목 하나씩이 날아가며 불구가 된 칼잡이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진하는 쓰러져서 신음을 흘리는 칼잡이 다섯을 내려다보다가, 휙 검을 털어내고 검집에 집어넣었다. 일련의 동작들은 아주 깔끔했다.
“오오···”
“저게 황군 고수···”
양굉과 가용산이 그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하지만 진하는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는데, 그건 쓰러뜨린 칼잡이들의 수준이 너무 보잘것없었기 때문이었다. 무공이고 나발이고 거의 칼 든 건달들 수준이었던 것이다.
유설이 짝짝 박수를 쳤다.
“역시 우리 진하! 서류정리 할 때랑은 확실히 다르구나!”
“···제 본래 업무는 이쪽입니다, 아가씨.”
진하의 대꾸에도 유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했다. 그리고 일행이 진하의 실력에 감탄하는 동안 장건은 쓰러진 자들에게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다.
“어이.”
“끄으으···!”
손목이 잘려 나간 칼잡이는 거기 쓰러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빈 손목을 부여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애처롭다면 애처로운 광경이었지만 장건 쪽 무력이 부족했다면 정 반대 풍경이 그려졌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장건도 굳이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장건은 반쯤 정신이 나간 그 칼잡이 눈앞에서 탁탁 손가락을 튕겼다. 칼잡이의 흐린 눈이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검룡문이 망했나?”
“···바, 방주님이, 방주님이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엉뚱한 말이 나오자 장건은 간단하게 대처했다. 칼잡이의 잘려 나간 환부를 꽉 쥔 것이다.
“아악! 아아악! 마, 망했다! 검룡문은 망했어! 지금 염호성은 도룡방이 지배한다!”
진하의 무공에 감탄하고 있던 가용산은 그 외침을 듣고서야 얼른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쓰러진 칼잡이의 멱살을 붙잡으며 외쳤다.
“검룡문이 망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검룡문이 왜 망해? 아니, 그보다 도룡방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거, 검룡문은 망했다··· 방주님이 검룡문주와 다른 수뇌부를 일 대 다섯으로 이긴 후부터···”
가용산의 얼굴에 황당함이 피어났다.
“무, 무슨··· 다섯이서 하나를 못 이겼다고?”
“그래··· 일주일 전에··· 방주님이 검룡문에 쳐들어가 그놈들 다섯을 꺾고 난 뒤··· 염호성은 우리 도룡방의 것이 되었다···”
도룡방에서 정면으로 쳐들어와 검룡문을 박살 내고 염호성을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무법자들이 넘쳐나는 무림에서도 흔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정말 방주라는 인물이 그렇게 강한 고수라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덕분에 가용산은 붙잡았던 멱살을 스르륵 놓쳤다. 외지로 나가 열심히 문파의 이름을 위해 일하다 문득 돌아와 보니 그 문파가 망했다는 이야기였다. 허탈함을 느낄 법도 했다. 물론 지난날 검룡문의 행태를 아는 장건에겐 별로 공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는 쓰러진 칼잡이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도룡방이 어디서 왔는지는 대답 안 했는데.”
“그, 그건···”
칼잡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차갑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건의 눈을 보고는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이미 손목이 잘려 나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우, 우리들은··· 부, 북서쪽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방주를 만나서··· 도룡방이라는 이름은 방주가 지었는데···”
“이런저런 일이라. 무슨 일을 했길래 사람 죽이자는 말을 그리 쉽게 했을까.”
말을 하던 칼잡이가 움찔 떨었다. 장건도 그 반응을 보았다.
“도적놈들이었군.”
“어, 어어··· 그러니까···”
“그 도룡방 소속이 다 그런 놈들인가?”
칼잡이는 흘끗거리며 쓰러진 다른 칼잡이들의 눈치를 보았다. 쓰러져 있는 다른 도적들은 그를 보며 대답하지 말라는 듯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두 눈을 꾹 감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다 말 타고 도적질하던 놈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방주님이 찾아와 언제까지 흙먼지 마시며 도적질이나 할 거냐며··· 흔히 말하는 명문정파가 될 기회를 주겠다고 해서···”
“이놈! 우리 검룡문이 고작 도적놈들 따위한테 몰락했다는 거냐!”
듣고 있던 가용산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시 그 칼잡이의 멱살을 잡았다.
“아, 아니, 시발! 윗대가리 몇 놈 빼고는 별로 차이도 안 나더만! 그마저도 방주가 다 처리하니까 문주라는 새끼는 도망이나 쳤고!”
“윽···!”
마주 소리치는 칼잡이의 말에 가용산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동안 옆으로 다가와 이야기를 듣던 양굉은 낄낄 웃었다.
“문주가 도망을 가? 아주 개판이구만. 그래도 검룡문이면 좀 먹어주던 문파였는데. 망하려니 아주 제대로 가는구나.”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가용산이 그를 노려보며 외쳤지만 양굉은 시큰둥하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틀린 말 했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역시 옆으로 다가와 있던 유설은 씁쓸하게 웃었다.
“토벌군이 진행되면서 무림맹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노렸군요. 아마 다시 무림맹의 힘이 닿았을 땐 정말 명문 정파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겠죠. 그 방주라는 인물이 보통이 아니네요. 뛰어나다면 뛰어난 야심가예요.”
유설마저 냉정한 이야기를 풀어놓자 씩씩거리던 가용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유설은 동진군의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검룡문의 멸문을 저렇게 별거 아닌 듯 말하는 것을 보면 굳이 이 염호성의 이권 다툼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대로 그냥 돌아갈 생각일지도 몰랐다.
“조금 이상한데.”
그때 장건이 자기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어떤 점이요?”
“굳이 이런 무뢰배 놈들을 끌어모아 방파를 만들었다는 점이.”
유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진짜 무림의 일 돌아가는 건 잘 모르지만··· 지금 무림맹을 이루는 방파들도 대부분 처음 시작할 땐 다 그런 무뢰배들 아니었나요?”
“이 방주라는 인물은 그럴 필요가 없었소. 홀로 검룡문의 수뇌부를 모두 이길 자신이 있었다면 그냥 가서 자기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꺾고 검룡문을 흡수하면 될 일이니까. 아무리 그에게 불만을 품을 자들이라고는 해도 장난치듯 사람 죽이는 도적놈들보다는 낫지.”
“···그럼?”
장건은 쭈그려 앉은 채 유설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난폭한 칼잡이가 필요했다는 이야기지. 도적질에 능숙하면서도 앞뒤 가릴 줄 모르는 멍청이들이.”
유설은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가용산이나 진하도 마찬가지였다.
“아하? 이봐, 혹시 그 방주라는 양반이 무슨 무공 가르쳐준다지 않던?”
그때 양굉 혼자 뭔가 알아듣고는 뒤로 누워 덜덜 떨고 있는 칼잡이에게 그리 물었다. 피가 잔뜩 빠져 이젠 창백해진 칼잡이가 약간 멍하니 대답했다.
“그··· 곧 공적에 따라 도룡방만의 무공을 가르쳐준다고는 했는데··· 그걸 어떻게···”
“이야. 여기서 이걸 이렇게 또 한 건 하네.”
양굉은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피식거렸다. 유설은 양굉만 장건의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것에 살짝 충격을 받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굉과 장건을 번갈아 보았다.
“뭐죠? 뭔데요! 나도 알아듣게 말해줘요!”
그 질문에 혼자서 살짝 거만한 웃음을 흘린 양굉은 입을 열었다.
“보십시오, 장군. 지금 이놈 말만 들어보면 그 방주라는 자는 상당한 고수입니다. 쇠락했다지만 이 염호성의 패자였던 검룡문 수뇌부들을 홀로 상대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그런 자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도적놈들을 끌어모아 그놈들에게 무공을 가르쳐준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양굉이 설명하는 동안 장건은 앉은 자세 그대로 연초를 말았다. 저놈은 그동안 온갖 헛짓거리를 하고도 잘 살아있는 걸 보면 확실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은 맞았다.
그가 연초 끝에 불을 붙이는 동안 양굉의 말이 이어졌다.
“뭐 정말 나중에 정파 행세를 하려 그러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도적들도 잘 갱생시켜서 방도로 써먹을 수 있고. 그런데 문제는 이 염호성입니다.”
“염호성이 문제라고요?”
“예. 나중에 이곳 주변으로 신사천에서 올 동진군의 보급이 지나갈 테니까요.”
유설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녀는 양굉의 말을 더 기다리지 않았다.
“설마 이게 마궁의 교란 계획이라는 건가요? 도적들에게 마공을 가르쳐 토벌대의 보급로 약탈 및 교란? 그건 조금 억측인 듯한데요. 이미 우리 보급은 충분해요. 고원성에서 정비도 할 거고요. 그리고 토벌은 그 보급을 다 소모하기 전에 끝날 거예요. 보급 부대가 이 주변을 지날 일은 없어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털어놓던 양굉이 그대로 굳었다. 유설의 태도는 정말 당연하게 그리되리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새 보급을 받을 필요도 없이 몇 주 안에 황군이 마궁의 세력을 싹 쓸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양굉은 그제야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이 여인이 천년 제국의 공주이자 황군의 장군임을 실감했다.
“···어, 그. 제 생각이 아니라, 저··· 장 형이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는···”
“마궁 입장에선 그런 황군의 계획을 알 수 없소. 그러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움직이는 거겠지. 또 걸려봐야 아까울 것도 없고.”
그때 연초를 문 장건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를 본 유설은 찌푸리던 표정을 폈다.
“어차피 약탈하다 죽는 건 도적들 뿐이다?”
“이미 그런 사례를 몇 번 봤거든.”
잠시 장건을 바라보던 유설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군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확인하기엔 충분한 이유네요.”
진조의 무덤만 보고 돌아가는 듯했던 일행의 일정에 새로운 목록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유설은 전혀 귀찮다는 기색 하나 없이 도리어 양 허리에 손을 턱 짚고는 재밌겠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 방주라는 인물은 어떻게 확인할 거예요?”
장건은 연초를 입에서 떼며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풀을 뜯던 조조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장건은 다시 연초를 물고 진조의 묘비를 돌아보았다. 문득 직접 보지도 못했던 장면이 그려졌다. 진조가 검룡문에 쳐들어가는 장면이었다.
“이미 그가 보여준 방식이 있지.”
“···무슨 방식이요?”
장건은 몸을 돌려 다가온 조조의 안장에 올라탔다. 그리고 옛 검룡문이 있던 곳으로 말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무림인의 방식.”
* * *
도룡방 무사 진상량은 나뭇가지로 이를 쑤시며 방만하게 걸었다. 점심으로 고기를 거하게 구워 먹어 배가 불렀다. 눈이 살살 감기는 게 이대로 어디 볕 좋은 구석으로 들어가 한숨 자고 싶었다. 경험상 지금 눈을 붙이면 한두 시진 정도 단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진상량은 느릿하게나마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몇 번 그렇게 요령을 피우다가 방주에게 들킨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더 그러면 다리를 잘라버리겠다던 방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염병.”
그는 정문 경비 교대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자리를 교대해줘야 지금 경비를 서고 있을 무사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진상량은 이런 빡빡한 경비가 불만이었다.
“여길 쳐들어올 새끼들이 누가 있다고···”
이미 검룡문은 와해하였다. 문주라는 자가 도망치긴 했지만 이미 그 사업체와 소금가마들은 모두 도룡방의 차지가 되었다. 염호성의 상행 조합은 칼 앞에 순순히 도장을 찍어주었다. 염호성 안에 다른 무림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력을 일군 건 아니니 사실상 도룡방의 천하였다.
“꺼-억.”
진상량은 거하게 트림을 하며 슬렁슬렁 걸었다. 그렇게 느릿느릿 움직였는데 벌써 저 앞에 도룡방의 정문이 보였다. 저 밖으로 나가 앞으로 몇 시진을 멀뚱멀뚱 서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치밀었다. 이럴 땐 황야에서 말 타고 도적질이나 하던 때가 더 나은 듯했다.
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뭐라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와 교대할 고석의 목소리였다.
“이 새낀 할 일이 없어서 노래를 부르고 앉았냐··· 새끼, 잘 부르기라도 하면 몰라.”
고석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생각한 진상량은 피식피식 웃으며 대문으로 다가갔다. 고석도 어지간히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그 순간 꽝-하는 굉음과 함께 대문이 박살 나며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엉?”
진상량은 멍하니 굳어서 종잇장처럼 으그러져 나뒹구는 대문 두 짝과 거기 나자빠져 있는 고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휑해진 대문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삿갓을 쓴 남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