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9)
19화
장건이 산 타는 곰을 쓰러뜨리자 지켜보던 전사들의 눈에서 그를 향한 호감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건 입장에선 약간 부담스러운 눈이었다. 특히 비랑의 초롱초롱한 눈은 마주 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산 타는 곰을 나무 그늘에 눕힌 적풍은 약간 달랐다. 그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서 장건에게 물었다.
“자네 주 무기가 칼이지? 그럼 무기를 들고 싸웠으면 산 타는 곰은 죽었겠군···”
주먹도 잘 쓰는 장건은 굳이 아니라 말하지 않았다. 정말 칼을 들었다면 두 번, 세 번씩 합을 겨루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적풍의 이어진 말에 다른 전사들 또한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내가 마을에서 보았던 떨거지들은 무림인이 아니었어. 진짜 무림인들은 다 자네 같은가?”
장건은 굳어가는 전사들 표정에 피식 웃었다.
“그 진짜 무림인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몰라도 내가 흔한 무인은 아닐 것이오.”
“그럼 그 중원인이 몰고 올 무림인들은 자네보단 쉬울 것이란 말이지?”
“···내가 무림인들의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는 법이오. 애초에 칼 들고 목숨을 겨루는 싸움에 정확한 등급이 나뉠 수도 없고. 하지만, 뭐. 대충 그렇다고 봐도 좋겠지.”
적풍은 팔짱을 끼고 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일단 정령의 힘을 빌려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최후의 수단인 게 좋겠군.”
“아까 그게 정령의 힘이오?”
장건의 질문에 적풍은 씩 웃었다.
“중원인들만 신비한 힘을 쓰는 게 아니네.”
장건은 턱을 갸웃거렸다.
“천후성 사람들한테선 그런 거 못 봤는데.”
“모든 부족이 정령의 힘을 빌려 쓰진 못하네. 이건 쉽게 허락되는 힘이 아니야.”
적풍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꺼리는 기색이었다. 장건은 산 타는 곰에게 내력을 후려치며 느꼈던 반탄력과 발밑에서 느꼈던 흐름, 그리고 순간적으로 훑었던 기혈을 떠올렸다. 세혈들이 어떤지까진 몰라도 십이경맥에서 막힘없이 흐르던 것은 분명 내공과 비슷한 힘이었다. 그러나 또 단전을 느끼진 못했으니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그들이 숨기고 싶어 한다면 굳이 캐내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에겐 나름의 노력과 능력을 다해 이룬, 그리고 앞으로도 이루어 나갈 무공이 있었다. 알아내면 좋겠지만 굳이 그런 것 없어도 그는 앞으로 실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정작 그가 그렇게 관심을 끄는 듯 보이자 적풍이 아쉬운 듯 물었다.
“궁금한가? 알려줄까?”
장건이 그런 적풍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서 비랑이 끼어들었다.
“정령의 힘을 쓰려면 일단 정령을 만나야 해요. 그리고 그분의 도움으로 가슴이 열리면 세상 만물에 가득한 정령과 조상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이 녀석! 조용히 안 해!”
그녀는 적풍이 호통치자 입술을 삐죽였다.
“뭐 어때서요. 어차피 그분 본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만나지도 못할 텐데.”
“녀석아, 그래도 그걸 그냥 떠벌려?”
“삼촌도 알려주려고 한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 나는··· 네 말대로 만나고 싶다해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장건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둘의 대화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뭔가 이 부족만의 비밀이 있는 모양인데, 장건이 볼 때 지금 신경 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 하려던 거나 합시다.”
“···하려던 거?”
장건은 세워두었던 칼을 집었다.
“무림인 상대하는 법을 알려달라지 않았소? 그거 합시다.”
적풍과 비랑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건 실실 웃으며 둘의 말싸움을 지켜보던 다른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장건은 칼을 집어 허리에 매고는 옹기종기 모인 전사들과 거리를 벌렸다. 대략 이 장쯤 되는 거리였다.
“무림인이 제일 위험한 순간은 아무래도 제일 첫 합이오. 내공과 근력, 예민한 감각이 하나로 모여 폭발하는 순간이지. 그래서 무공을 익힌 무림인끼리 일 대 일로 마주 보고 대결을 하면 일 합에 끝나는 경우가 많소. 종이 한 장 차이 수준으로 삶과 죽음이 나뉘니까.”
거리를 벌리고 선 장건이 모여있는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일 합 대결의 거리는 대부분 지금 이 거리에서 앞뒤로 서너 걸음 정도 차이가 날 것이오. 더 먼 거리에서 시작하거나 더 가깝게 붙는 무공도 있지만 그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니 넘어가겠소.”
전사들 모두 팔짱으로 끼거나 눈에 힘을 주고 장건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산 타는 곰이 달려든 속도가 칼 좀 쓴다는 무림인의 일 합 속도일 것이오. 그 이후에는 확실히 느려져도 일단 첫 일격은 그 정도 빠르기지. 한 번 보여주겠소.”
장건은 그렇게 말하고 공터 바깥쪽에 있던 나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호흡 정도 숨을 가다듬더니 그대로 번쩍, 하얀 섬광을 그렸다.
“오···”
“저렇게 빠르다고?”
장건의 섬광은 사람 허리통보다 조금 가늘었던 나무를 그대로 툭 끊어버렸다. 기우뚱 쓰러지는 나무를 뒤로 한 장건은 깔끔한 동작으로 칼을 집어넣으며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속도 자체는 이 정도 나올 것이오. 칼의 위력이야 좀 달라도.”
전사들은 이제 진지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장건이 말하는 그 첫 일격을 피할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그럼 이 일격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느냐, 그건 다른 곳이었으면 곤란했겠지만 이 계곡에선 그리 어려울 것 없소. 그냥 숲으로 끌어들이시오.”
심각하던 전사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적풍이 대표해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무림인들의 일 합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굉장히 직선적이고 단순하오. 칼을 마주 본 상태에서야 미세한 각도와 작은 동작으로 무수한 무리武理가 파생되지만 떨어져 보면 직선적인 것이 사실이지. 그러니 숲으로 끌어들여 그 직선을 막으란 이야기요.”
적풍은 금방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무림인의 가장 강한 일격을 봉쇄하란 말이군. 나무를 방패로. 그럼 다음은?”
장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어중이떠중이들은 방금 내가 보았던 정령의 힘이면 충분할 것이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면?”
장건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는 적풍과 비랑, 그리고 전사들과 저쪽에서 고개를 흔들며 일어나고 있는 산 타는 곰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그땐 그저 목숨을 걸어야지. 삶의 추가 조금이라도 나에게 기울기 바라면서.”
* * *
장건의 조언을 얻은 계곡 부족은 마을로 올라오는 길에 돌아가면서 전사 둘씩이 잠복하기로 했다. 중원인들이 오면 숲을 통과해 올라오는 동안 기습을 하기로 한 것이다. 잠복한 전사 외에도 숲을 돌며 함정을 설치하는 자도 있었다. 부족 전사들은 놀랍도록 발이 가볍고 몸이 날래서 마치 숲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한편 장건은 천막 쪽으로 돌아와 어제 앉았던 나무밑동에 다시 앉아 있었다. 그는 비랑이 활과 화살을 챙기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랑은 그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전사 중에 제일 어리던데.”
그녀는 두 손을 양 허리에 척 올리며 싱긋 웃고는 말했다.
“어리다고 무시하는 거예요? 난 삼촌을 빼면 우리 부족 전사 중에 제일 빠르다고요. 그 무림인들은 숲에서 내 꽁무니나 쫓다가 화살 맞을걸요?”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장건이야 전생의 기억 때문에 경공에 관해 공부했지만 무림인 대부분은 장거리 경공보다 단 몇 걸음을 어떻게든 더 빨리 움직이려 무공을 수련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장건은 장거리 경공을 연구하며 더 높은 보법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먼 거리를 오래 달리려는 경공의 무리가 도리어 짧고 빠르게 움직이려는 보법을 상승시킨 것이다. 그가 제일 처음 자신의 무공에 나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이 그것이었다.
“그보다, 진짜 안 궁금해요?”
“뭘 말이오?”
“정령에 대해서요. 이건 다른 부족 사람들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하던데. 적어도 우리 부족은 중원인에게 비밀을 이야기해 준 적 없고요.”
장건은 비랑의 묘한 표정에 피식 웃었다.
“그럼 알려주겠소?”
“음··· 내 생각이지만···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마 정령께서 먼저 장건을 찾아올 거예요. 그리고 가슴을 열어 주시겠죠. 그럼 장건도 전사라고 불릴 수 있는 거고요.”
“가슴을 연다··· 그게 무슨 뜻이오?”
비랑은 입을 열어 설명하려다가 뭔가 턱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혼자 끙끙대며 한참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가슴을 연다는 건··· 가슴을 여는 것이겠죠···?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냥 열렸다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걸요.”
장건은 고개를 살살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봐도 괜찮겠소?”
“봐요? 어떻게요?”
“손을 주시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장건은 그 손목을 잡으며 맥을 짚었다. 놀랍도록 미세하고 가는 진기가 그 손목을 통해 비랑의 혈을 더듬었다.
“음.”
장건은 그렇게 기혈을 짚어보고서 그녀가 말하는 열린 가슴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단중혈膻中穴, 가슴 한가운데 중요 혈맥이 환히 열려 있던 것이다. 그곳은 단순히 기의 통로가 열린 것이 아니라 무슨 구멍처럼 뻥 뚫려 호흡과 함께 자연의 기를 들이쉬고 내뱉고 있었다.
장건이 그걸 더듬으며 떠올린 것은 중단전이라는 단어였다. 이곳에선 도교를 바탕으로 한 문파에도 흔적이나 겨우 남아있는 단어. 드넓은 자연의 기를 마음대로 끌어와 자신의 것처럼 쓴다는 경지.
동시에 장건은 이 뻥 뚫린 단중혈이 자신에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미 단전을 만들고 그 안에 내공을 담아둔 상태였다. 비랑처럼 혈을 열어버리면-어떻게 그런 모양이 가능한 것인지는 짐작도 안 되지만-훤히 열린 기혈 때문에 천천히 내력이 흩어질 터였다.
그렇게 내력이 흩어지면 그가 지금까지 이뤄온 무공은 모조리 헛수고가 되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깔끔하게 미련을 버렸다. 애초에 이런 걸 바라고 이들을 도운 것도 아니었다.
“···어때요? 잘 보여요?”
장건은 자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묻는 비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손목을 놓아주며 대충 말했다.
“음. 잘 안 보이는군. 그리고 앞으로는 무림인이 손목을 잡으려 하면 잡혀주지 마시오.”
“왜요?”
“아주 소수이긴 하지만 일부 고수들은 손목의 완맥을 잡아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소.”
“그럼 장건이 그런 고수라는 거네요?”
“난 조금 다르지. 그들과 달리 난 혼자 깨우친 거니까.”
비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그게 더 대단한 거 아닌가? 어쨌든 손목을 잡혀주지 말라는 거죠? 장건 빼고.”
“···난 왜 빼는 것이오?”
그녀는 장건을 보며 장난스레 헤헤 웃고는 화살집을 들고 숲으로 달려가 버렸다. 장건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뻥 뚫린 단중혈에서 아주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공격할 때 산 타는 곰의 모습과 방금 살펴본 비랑의 혈도를 통해 어떤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열린 혈도가 순간적으로 강하게 기를 끌어당기는 모양만 생각해도 당장 떠오르는 것이 많았다.
그 끝에서 무엇을 얻을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애초에 그의 무공은 언제나 작은 단서와 상상력으로 시작했다. 장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장건은 그 후에도 며칠 동안 부족 마을에 머물렀다.
적풍과 외눈 구름은 그가 단순히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 같이 싸워주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함을 표했다. 당장 적풍은 받았던 은전에 자신이 모아두었던 동전까지 모조리 장건에게 건넸다.
외눈 구름은 장건이 정령을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며 밤낮없이 자신의 천막에서 제사를 치르기까지 했다. 정작 그 정령이 답이 없자 나중에는 앞날의 행운을 위해서라며 제사를 치렀다.
그에게 한방 크게 먹었던 산 타는 곰은 나중에 찾아와 인사를 했다. 처음 인상에 비해 굉장히 털털한 친구였다. 그는 장건에게 앞으로 자신을 중원식으로 산웅이라고 부르라며 질 좋은 사슴 가죽을 선물했다. 장건은 거절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의 가죽은 중원인들 사이에서 괜찮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부족으로 올라오는 길에 무수한 함정을 설치되어가던 나흘째. 숲에서 적풍과 잠복하던 비랑이 혼자 부족으로 뛰어왔다.
“왔어요! 그 중원인이 칼 든 사람을 잔뜩 끌고 올라와요!”
“왜 혼자 왔소?”
“삼촌은 계속 그들을 감시하고 있어요. 어서 가요!”
그 외침에 마을이 분주해졌다. 이미 준비가 되어있던 부족의 전사들은 빠르게 마을을 벗어났다. 외눈 구름은 노인과 아이, 아픈 사람 등등 마을 사람을 이끌고 계곡 깊숙이 숨을 것이다.
이제 전사들이 할 일은 이 숲과 함정, 그리고 개개인의 무력을 이용해 불공정 계약서를 들이미는 중원인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적어도 다시 칼을 들고 계곡을 넘보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해 줄 셈이었다.
장건은 경공술을 발휘해 그중에서 제일 앞으로 치고 나갔다. 부족 전사들보다 먼저 그 중원인들을 만나 확인해 볼 것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