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 * *
가용산이 복귀하지 않았지만 외랑대주 갈우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유설의 요구대로 외랑대 명단에서 그를 지웠을 뿐이다. 어차피 외랑대는 낭인들을 모아둔 부대였기 때문인지 무림맹에서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가용산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장 형.”
“왜.”
“···우리 식사 준비는 돌아가면서 하는 게 어떻소?”
양굉은 보글보글 끓는 죽을 눌어붙지 않도록 천천히 저어주고 있었다. 장건은 비스듬히 누워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양굉의 말을 듣고 천천히 눈으로 돌려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눈을 마주 본 양굉은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식사 준비는 당연히 내가 해야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소? 하하··· 그래도··· 아침저녁 두 끼 먹는데 두 끼 다 내가 하는 건 좀 아니지 않소?”
동진 토벌군은 이제 신사천 서부의 황량한 지대를 다 지나서 고원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외랑대는 토벌대의 일일 주둔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여섯 번 정찰에 나섰다. 수천 명에 이르는 군단이 한곳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만 했다.
반쯤 뛰는 듯한 황군과 말을 탄 무림맹을 한참 앞서서 나가야 했기 때문에 외랑대에서도 말을 잘 타는 이들이 선정되어 움직였다. 장건이 포함된 것은 당연했고, 덕분에 조조만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그, 뭐냐··· 아니면 우리 모닥불에 다른 친구들도 좀 어울리게 하는 건 어떻소? 보니까 장 형이랑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 많은 거 같은데···”
양굉은 장건이 대답은 안 하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자 슬쩍 다시 솥으로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요지는 왜 자기만 만날 식사를 준비하냐는 이야기였다.
사실 가용산이 식사 준비를 할 땐 장건도 자기 식기 정도는 알아서 준비하고 정리했었다. 그건 가용산이 장건의 시중을 든다기보다는 그냥 식사 담당이 되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가용산이 염호성에 남고 셋이 쓰던 모닥불을 양굉과 둘이 쓰게 되자, 장건은 본격적으로 양굉을 부려 먹었다.
그래봐야 식사 준비나 식기 세척 등을 떠넘기는 정도였지만 어쨌든 양굉 입장에서는 자기가 토벌군이 된 건지, 아니면 장건 시중꾼이 된 것인지 헷갈릴 만도 했다.
그때 한참을 바라만 보던 장건이 입을 열었다.
“그럼 계산을 제대로 해볼까?”
양굉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해졌다가, 곧 입을 꾹 다물고 국자 젓기에 열중했다. 장건의 말이 둘 사이에 은원을 제대로 계산해 보자는 말임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 제대로 터놓고 이야기하자면 양굉도 할 말이 아주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장건 쪽도 마찬가지.
그리고 그런 경우엔 힘 쎈 쪽 말이 더 옳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 끓었군. 그릇 주시오.”
장건이 본인 그릇을 넘기자 양굉은 그 안에 죽을 가득 담아주었다. 그리고 모닥불 위에 올라가 있던 그 솥을 통째로 끌어 자기 앞에 내려놓았다. 바로 앉아서 한 술 뜨려던 장건이 그걸 보고 살짝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그걸 다 먹으려고?”
“뭐요. 이젠 나 먹는 것도 뭐라 하려고? 여기 반쯤 억지로 끌려온 것도 뭣 같은데 먹는 거까지 뭐라 하진 맙시다!”
양굉은 괜히 그렇게 짜증을 내더니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가며 먹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행군으로 꼬질꼬질해진 상태에서 바닥에 솥을 놓고 박박 긁어먹는 모습을 보니 참 궁상맞기도 하고, 어딘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확실한 건 황제의 비밀 요원이라는 지위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뜨던 죽도 가만두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건이 지나가듯 말했다.
“무공, 가르쳐줄까?”
솥을 긁던 양굉의 숟가락이 우뚝 멈췄다. 그는 잠시 그렇게 굳어 있다가, 곧 다시 쩝쩝거리며 말했다.
“···인제 와서 배워봐야 뭘 얼마나 배우겠소? 난 어릴 때도 그렇게 무공을 열심히 익히지 않아서 기초도 부실하고, 뒷골목에서 악이나 쓰던 놈이라 참을성도 부족하오. 고수 되긴 글렀지. 난 그냥 돈이나 많이 벌어서 어디 시골에 장원 하나 마련해서 은퇴하는 게 꿈이오. 그러니 지난번에도 그렇고, 자꾸 뭘 가르쳐주니 뭐니 하면서 꼬시지 말라는 말이요. 난 장 형 같은 무인이 못 되는 놈이외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솥이나 긁어가며 한 말이었으나 거기엔 양굉 나름 자기 자신에 대한 주제 파악이 담겨있었다. 그건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얻게 된 삶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장건은 더 묻지 않고 본인 손에 들린 죽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양굉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그거. 그럼 그거나 좀 가르쳐 주시오.”
“뭐.”
“그거 있잖소. 손가락으로 연초 불붙이던 거. 그거 엄청 편해 보이던데. 그거 있으면 부싯돌이고 뭐고 필요가 없겠더고만.”
“삼매진화三昧眞火?”
양굉은 손등으로 입가를 스윽 닦으며 장건을 돌아보았다.
“그게 삼매진화요? 뭔가 이름이 너무 그럴듯한데··· 어려운 거면···”
“그거야 네 손에 달렸지. 싫으면 계속 부싯돌이나 들고 다니던가.”
“···안 어렵소?”
장건은 본인 죽그릇을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어려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뭐요, 그게.”
“내일부터 시작한다.”
수저를 든 양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연초 끝에나 겨우 불붙이는 무공이 어려워 봐야 얼마나 어렵겠냐는 생각에 다시 솥으로 신경을 돌렸다. 그리고 결국 식사 준비는 앞으로도 계속 자신이 해야 함을 깨닫고는 더 빠른 속도로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양굉이 먹는 것으로 화를 푸는 그때, 장건은 머릿속으로 한동안 미뤄두었던 항룡장의 초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열여덟 초식으로 맞추고 싶었다.
* * *
다음날 새벽, 아직 해도 완전히 뜨지 않아 저 먼 지평선도 그저 푸르스름하기만 한 시간. 하늘은 어둑함을 지우고 어딘가 시린 색으로 물들었지만, 아직 지상의 사람들은 서로를 시커먼 그림자로 볼 수밖에 없는 때였다.
밤새 타던 모닥불도 다 타서 검은 숱 가운데 벌건 불씨만 반짝이는 가운데 장건은 능숙하게 외투를 걸치고 등에 청룡을 메었다. 그렇게 삿갓은 목에 걸치고 조조의 안장을 얹을 때쯤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장 무사.”
장건이 돌아보자 그들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오늘 정찰을 나가는 외랑대 무사들이었다. 장건도 그들에게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 무림맹에선 누가 나온다 그랬소?”
“글쎄. 맹주부 무사가 나온다던데. 뭐, 언젠 그놈들이 우리한테 뭘 말해주고 움직였소?”
“그건 그렇지.”
장건이 가볍게 웃자 외랑대원들도 작게 미소 지었다.
같은 외랑대였지만 그들과 장건은 취급이 많이 달랐다. 당장 장건과 양굉 둘이서 모닥불 하나를 쓰는 것도 그렇고, 지난번에 하룻밤 사라졌을 때는 황군의 장군과 따로 정찰을 하고 돌아왔다는 말이 있었다. 소문에는 그때 입군을 제안받았지만 무림인으로서의 자유가 더 중요했던 장건이 그걸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돈이나 명성을 위해 모인 외랑대 무사들에게 그런 장건이 묘하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들이었다면 절대 그런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장건을 포함한 외랑대 무사 다섯은 본인들의 말을 이끌고 천천히 군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무림맹에서 세운 경비와 황군의 경비들이 보였다. 무림맹 측에서도 황군과 무림맹의 군기가 너무 다른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욕 한 번 먹지 않고 비교되는 무사들이었다. 장건은 그들을 지나치며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대부분 마주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군영을 벗어나 약속된 장소에 가까워지자 먼저 와 있던 무림맹 측 인사와 그의 말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도 아직 이른 새벽의 그림자에 묻혀 시커멓게만 보였다.
장건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이른 새벽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수리 한 마리가 보였다. 오늘 나온 무림맹 쪽 인사가 누군지 알 것도 같았다.
“오. 외랑대인가?”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예상했던 대로 그는 제운성이었다. 그가 왼팔을 옆으로 뻗자 하늘을 날던 혈리응이 내려앉았다. 다른 외랑대 무사들은 그 혈리응을 보고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이미 아는 얼굴도 있군. 난 제운성이네. 맹주부 무사지. 오늘 잘 부탁하겠네.”
그렇게 제운성을 포함한 정찰대 여섯은 토벌군이 오늘 행군할 지역을 먼저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 정찰대에 무림맹의 인사가 하나 끼게 된 이유에는 외랑대가 결국 외부인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라는 것 때문이었다. 사실 무림맹이나 황군이나 정찰을 할 병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 긴 행군을 해나가야 할 상황에서 아무리 병력 일부라지만 밖으로 빼내 힘든 정찰을 시키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결국 황군은 아니고, 그렇다고 진짜 무림맹도 아닌 외랑대가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음. 오늘부터 낮은 구릉지대를 지나게 되는군. 그래도 지도대로라면 나무나 숲은 없으니 높은 곳을 찾아 둘러보기만 하면 될 듯한데.”
조금 앞서가던 제운성이 그렇게 의견을 제시하자 다른 외랑대 무사들 모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고원성을 넘어 본격적인 마궁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순찰대에게 중요한 것은 적보다 오늘 숙영할 장소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자면 제운성 말대로 높은 곳을 찾아 주변 지형을 확인하는 게 좋았다.
현재 군영을 뒤로하고 나아가니 조금씩 세상이 밝아졌다. 이제 태양이 뜨기 시작한 것이다. 날이 밝아온 만큼 정찰대도 속도를 높였다. 사람을 태운 여섯 말들이 강하게 땅을 박차며 내달렸다.
그렇게 말을 달리니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에 문득문득 초록빛이 보였다. 앞서 달리던 제운성이 갑작스레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정찰대를 멈춘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지도를 들었다.
“···숲이 있다는 이야긴 없는데. 이거 생각보다 지도가 엉망이군.”
“아무래도 여러 사람의 정보가 모인 지도이니까요. 조금씩 어긋나는 부분이 있겠죠.”
“그런가? 음. 자네가 보기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다른 외랑대원의 말을 듣던 제운성은 옆에 있던 장건에게 그리 물었다. 특별히 할 말이 없던 장건은 그냥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들은 정찰대였고, 때문에 어차피 가야만 했다.
역시 그 뜻을 알아들은 제운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대가 운영되는 이유에는 이런 지도의 불확실성 때문도 있었다.
“좋아. 그럼 이동하지.”
정찰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렴풋이 보이던 숲이 점점 더 커졌다. 지금까지 낮은 풀이 가득 깔리고 문득문득 조그만 나무만 있던 들판에서 무슨 선을 그은 것처럼 갑작스레 나무들이 꼿꼿이 선 숲이 등장한 것이다.
그 숲 뒤로는 크고 작은 구릉들이 보였다. 돌과 마른 풀만 가득해 구불텅거리던 세계가 나무와 숲, 초록 풀과 습기 등 반짝이는 땅으로 변해가는 그 중간지점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제운성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 지금까지 왼팔에 걸치고 있던 혈리응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장건이 그걸 보자니 지난날 장보도 사건 때 뒤를 쫓아오던 제가 무사들이 떠올랐다. 마침 제운성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장건을 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항상 신세를 지는 친구지.”
“친구인가?”
“그럼. 저렇게 묵묵한 친구 어디서 또 못 사귀네.”
잠시 잡담을 나누던 정찰대는 쭉 날아가는 혈리응을 바라보다가 곧 그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드넓기만 하던 황야가 끝났으니 정찰대의 임무가 중요해지는 시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숲에는 적이 숨을 수 있었다. 또 시야가 좁아진 만큼 물을 찾는데도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조조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마르고 단단한 땅이 아닌 축축하고 푹신푹신한 땅에 기분이 좋은지 연신 내달리려 했다. 장건은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려 녀석의 고삐를 자꾸 붙잡아야만 했다.
그렇게 뾰족한 침엽수의 숲에서 움직이길 한참. 먼저 날아갔던 혈리응이 그들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는데, 그걸 본 제운성의 표정이 굳었다.
“이런.”
그 소리를 들은 외랑대원 하나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 숲에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사람들?”
혈리응을 올려다보던 제운성이 고개를 내려 장건을 보았다.
“어쩌면 칼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장건은 그 시선을 평온하게 마주 볼 뿐이었지만, 그의 등에 매달린 청룡은 피를 예견하듯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