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 * *
어두운 공간이 있었다.
깊은 지하인지, 아니면 그저 빛이 들어올 틈을 모조리 막아버린 것인지 그 공간은 그저 검기만 해서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수백 년 동안 단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 같기도, 혹은 그저 깊은 무저갱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그 공간이 어두웠다는 것이다.
갑작스레 빛이 생겼다.
그것은 불티였고, 다음 순간에는 횃불이었다. 기름먹인 천이 불씨를 만나 화르륵 불꽃을 피웠다. 불꽃은 제일 먼저 자신을 피워낸 자를 비췄다.
그자는 소녀의 얼굴과 노파의 얼굴이 한 얼굴에 공존하는 여인이었다. 소녀의 눈은 갈색이었다. 반대쪽 노파의 눈은 푸른색이었다. 그녀는 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수라는 소녀와 몸의 절반을 나눈 순간부터 그녀의 이름은 사공蛇公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횃불을 피워낸 그녀는 천천히 그 공간 속을 걸었다. 횃불이 비친 순간부터 그 공간은 어두운 곳이 아니라 그저 칙칙한 석실이 되었다. 그녀는 곧 큼직한 석관 앞에 이르렀다.
잠시 횃불을 들이밀어 그 석관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본 사공은 이후 챙겨온 것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주먹만 한 구슬처럼 생겼는데, 어딘가 불길한 빛이 번뜩이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유리 같은 질감과는 다르게 사공의 손에서 말캉거렸다.
석관에 이어 원영단原靈丹의 상태도 확인한 사공은 곧 그것을 석관 위로 가져가서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말캉거리는 구슬 같던 원영단이 주르륵 녹아서 석관 위에 쏟아져 내렸다.
“···깨어나라. 네 일을 준비할 시간이다···”
석관 위로 쏟아진 검붉은 액체는 그대로 석관을 타고 미끄러져 바닥으로 쏟아질 듯하다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석관의 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간단한 의식을 마친 사공은 석관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석관의 관뚜껑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래된 고목 같은 손가락이 올라왔다. 이어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무언가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언뜻 사람의 형상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그저 말라비틀어진 나무토막을 이어붙인 나무 인형 같기도 했다. 심지어 움직이는 동안 뿌드득-하는 소리가 나고 껍질이 부스러져 흘러내렸다.
사공은 그 움직이는 나무 인형의 얼굴 부근에 횃불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느릿하게 움직이던 고목의 고개가 휙 돌아 그녀를 향했다. 동시에 그 나무 피부 속에 묻혀있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고목 인형은 사람의 말인지 짐승의 울부짖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를 확인한 사공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횃불을 들지 않은 왼손 검지를 들어 본인의 입술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홀로 못 알아들을 소리를 내던 고목 인형이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진짜 나무가 된 것처럼 굳어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사공의 입술만 끊임없이 달싹거릴 뿐이었다.
활활 타던 횃불의 빛이 약해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그 횃불의 불이 흘러내려 사공의 손 위로 뚝뚝 떨어졌지만 사공은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여전히 입술만 움직였다.
“···말이, 많이, 바뀌었군···”
그때 지금까지 다물어져 있던 고목의 입술이 열렸다. 떠듬거리긴 했으나 이번엔 조금 전과 달리 사람의 말이었다. 그가 말을 하자 사공도 달싹거리던 입술을 멈추고 손을 내렸다. 그녀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세상은 말보다 더 많이 바뀌었습니다. 천년의 시간이 지났으니까요.”
고목은 뿌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젊고 늙은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내가, 깨어났다는, 것은, 대왕께서 돌아오실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이군.”
그는 말을 할수록 빠르게 익숙해지는 듯했다.
“···난 잠드는 순간까지도 이게 가능하리라, 믿지 못하였다. 천하의 영물이라는 것이 그리 흔하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요, 필시 유가와 한삼견漢三犬의 자식들이 우리 일족의 씨를 말리려 들 터인데 어찌 한가롭게 사냥이나 하고 있으라는 말인가?”
말을 하던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라비틀어진 듯한 몸뚱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으나 곧 두 발로 바로 서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나의 믿음이 부족했을 뿐이니··· 나의 전우들은 천년의 세월 속에서 비록 그 몸뚱이의 뼛조각 하나 남지 않았을 터이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 저승에서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을 것이다. 마침내···”
고목 인형은 어둑할 뿐인 석실 속에서 마치 태양을 마주하는 듯 두 팔과 가슴을 활짝 펼치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 작은 동작에도 그의 피부는 부스러져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피부를 바스러트리며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향해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고 있는 동안, 사공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고목 인형은 천 년 전 그녀의 선조들이 의식의 완성을 기대하며 미래로 보낸 전사이며, 또한 그 의식의 마지막 단계를 책임질 존재였다.
고목 인형을 바라보던 사공은 문득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돌벽에 가로막히지 않아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을, 그 평원을 그려보았다.
그곳에서는 다섯 가문의 기병들이 달리고 있을 터였다.
* * *
장건은 조조를 멈춰 세우고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깊게 빨아들였다. 붉은 불씨가 타들어 가고, 이어서 그의 코와 입에서 뻑뻑한 질감을 가진 듯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이 저 멀리 산마루 아래 쭉 평탄하게 펼쳐진 평원과 거기 다닥다닥 모여있는 건물들의 군집을 훑었다.
신사천이나 감산성 같은 커다란 도시와 비교할 바는 아니었지만 황야 여기저기 세워진 다른 개척 마을에 비하면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 대로를 중심으로 잘 발달한 모습이 분명 도시라고 할 만했다.
그 신대륙 최동단 도시를 훑던 장건의 눈이 다른 한쪽 구석을 향했다. 그곳에는 이제 막 올라가는 건물들이 있었다. 중원식으로 지어진 듯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건물들. 마치 도시의 새로운 구역이 건설되고 있는 듯한 모습.
“저곳이 저들의 새로운 터전이 되었군요.”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유설이었다. 그녀는 장건처럼 멀리 고원성과 그 옆에 세워지고 있는 원주민들의 구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장건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싱긋 웃었다.
“먼저 출발시켰던 인원들이 저들을 잘 도와주었나 모르겠네요.”
“먼저 보냈던 이들이 있었소?”
“그럼요. 동진군이 본격적인 진군을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급할 거점인데요. 겸사겸사 그 부족 연합이라는 이들에게 보상도 하고요. 무림맹 일부에선 그들을 왜 도와야 하냐는 말도 나오긴 했는데, 어쨌든 그들을 해친 건 중원인이었으니까요. 그들을 모조리 걸인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맞죠. 시간이 흐르면 천후성처럼 될 수도 있고요.”
천후성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원주민이 유난히 많은 지역이었다. 만약 유설 말처럼 부족 연합이 고원성 사회에 잘 녹아든다면 천후성과는 다르게 중원인보다 원주민이 더 많은 도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고원성을 주도하는 건 이쪽 지방 원주민들이 될 것이다.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코만치 무림인이라··· 그거 멋지군.”
“코만치요? 그게 뭔데요?”
유설이 장건의 짧은 중얼거림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장건은 다 타고 꽁지만 남은 연초를 탁 소리가 나도록 튕겨내며 웃는 낯 그대로 대답했다.
“나중에 다 알게 될 것이오.”
이후 장건은 쓰고 있던 삿갓을 살짝 기울여 눈가를 가리고 툭툭 조조의 고삐를 당기며 쯧쯧 혓소리를 냈다. 잠시 멈춰 쉬던 조조는 장난처럼 콧김 한 번 내뿜고는 터덜터덜 행군을 따라 움직였다. 뒤에 남겨진 유설은 혼자서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장건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표정을 풀고는 말 옆구리를 차며 행군에 따라붙었다.
고원성에 도착한 동진군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도시 밖에 군영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원성에서 사람들이 동진군 수뇌부를 찾아왔다. 동시에 장건 또한 호출되었다.
“나를?”
자리를 정리한 후 본격적으로 양굉에게 삼매진화를 가르쳐 볼 생각이었던 장건은 약간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를 불러오기 위해 찾아온 제운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네가 고원성에서 마궁의 음모를 깨부수지 않았나? 그게 본격적인 마궁의 준동을 알리게 된 사건이기도 하고.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장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풀어두었던 청룡을 집어 들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찾아온 고원성 사람들 중에는 부족 연합의 대전사와 주술사가 있는 게 당연했고, 그들이 장건을 찾을 것 또한 당연했다.
“헤헤··· 잘 다녀오시오.”
어제부터 장건의 눈치만 보던 양굉이 슬그머니 웃으며 그리 말했다. 장건은 그런 양굉을 멀뚱하게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다녀와서 보자.”
“···엉? 뭘? 왜? 내가 뭐 실수했소? 갑자기 왜?”
“넌 이유가 필요 없다. 그냥 긴장하고 있어라.”
양굉은 황당함에 뭐라 대꾸도 못 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입만 벙긋거렸다. 장건과 제운성은 그런 양굉을 뒤로하고 지휘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괴롭히는 건가, 아니면 우정의 표현인가?”
제운성이 흘끗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장건은 시큰둥했다.
“왜? 그쪽도 같은 취급 해줬으면 하나?”
“큼, 크흠···아니, 그건 아니고. 음. 혹시 최근에 제상천 쪽에서 만나길 원하진 않던가?”
제운성은 자기도 모르게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를 흘리며 얼른 말을 돌렸다. 장건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아니. 날 죽이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그가 날 찾을 이유가 없을 텐데.”
“···하하.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렇긴 하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 원정에 억지로 참여할 필요가 없었으니··· 하지만 자네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당장은 그 원한은 접어두고 회유를 시도할 법하네. 그도 일단 이번 원정에서 공적을 쌓고 살아남아야 하니까.”
“내 위치?”
장건이 되묻자 제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나? 자네는 지금 이 토벌대에서 아주 특이한 인물이야. 그 무림의 신성이라 할 만한 명성을 가지고도 특별한 지위 없이 그저 낭인으로 토벌에 참여한 것만 해도 그렇고, 황군의 지휘관인 공주와 친분이 있는 듯한 모습 또한 그렇네. 게다가 사람들은 자네가 맹주님에게 의룡패를 받은 적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무림맹에도 자네의 영향력이 있다고 여기지. 당장 토벌대의 중역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은 자가 일개 낭인 부대의 무사로 움직이고 있으니 모두 자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네.”
제운성의 긴 이야기에 장건은 피식 웃었다.
“거참 할 일 없는 사람들이군.”
“···누군가는 자네가 무림맹과 황군을 아우르는 맹주盟主가 되기 위해 웅크리고 있다고 속삭이기도 하네. 무림맹주인 혁련위진은 동진군이 결성되고 움직이는 동안 본인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고, 유설 공주는 자신의 황군을 이끌 뿐 토벌군 전체를 모두 아우르려고 하진 않지. 그 때문에 사람들은 진정 앞에서 자신들을 이끌어줄 사람을 원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외랑대에 엎드려 때를 기다리고 있다?”
“아닌가?”
제운성의 표정은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눈 안에 은근한 기색이 담겨있는 것이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히 말해보라는 듯했다. 물론 장건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제운성이 당황할 정도로 초탈한 웃음이었다.
“···그게 그렇게 웃을 일인가?”
“그럼. 웃을 일이지.”
장건은 별 시답잖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군영 한가운데 세워진 천막으로 다가갔다. 유설이 집무실 겸 회의실로 쓰는 천막이었다. 장건은 아직 조조의 안장에서 짐도 다 내리지 않았는데 그 천막은 벌써 완성되어 있었다.
황군의 기강과 능력에 감탄할 수도 있었지만, 장건은 그저 그 천막을 세우겠다고 뻘뻘거렸을 병사들이 불쌍했다. 저번에도 했지만 입군하지 않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건이 다가오자 천막 옆에서 지키고 서 있던 황군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더니 천막을 들춰 길을 열었다. 장건은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위상 교위?”
“어서 들어가 보시오. 안에서 모두 기다리고 있소.”
장건은 그에게 마주 눈인사를 건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천막 안으로 들어오자 저쪽 의자에 앉아있는 유설과 그 안을 복작복작하게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부족 연합의 대전사 미쳐 날뛰는 말과 주술사 흐르는 뼈였다. 그런데 그 옆에 두건을 뒤집어쓴 두 사람도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장건이 그들을 보며 뭐라 말하려는 순간, 두건을 쓴 두 사람 중 키 작은 쪽이 와락 그에게 안겨들었다.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런 갑작스러운 행동에 살짝 놀랐는데, 의자에 앉아서 턱을 괴고 있던 유설의 경우에는 전날 무림맹주를 쏘아붙일 때나 황군에게 위엄을 보일 때보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이어서 그 자의 정체가 드러난 순간에는 마치 석상처럼 굳어버리기까지 했다.
장건에게 달려드는 거친 움직임에 여인의 머리를 덮던 두건이 풀리고 긴 머리칼이 흩날리며 장건의 코를 간질였다. 장건은 지금 자기 품에 안겨든 여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오랜만이군.”
장건의 가슴팍에 얼굴을 문지르던 여인은 빼꼼 고개를 들어 장건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황금빛 눈이 반짝거렸다.
“네. 또 오랜만이에요, 장건.”
슬픈 이리는 환히 웃었다.